1985년 4월 4일, 데멘체프는 보드카 생산 축소가 1986년 40억 루블, 1990년에는 150억에서 160억 루블의 예산 손실을 낳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빅토르 데멘체프는 지방 재정기관에서 출발해 소련 재무 행정의 고위 관료로 성장한 경제 관리자였다. 그는 알코올 판매 수입에 기대던 국가재정의 구조적 긴장을 드러내며, 1985년 반알코올 캠페인의 급격한 생산 축소에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의 경고는 재정 수입 감소뿐 아니라 밀주와 설탕 부족이라는 정책 부작용을 함께 계산한 것이었다.
「고르바초프도, 나도, 우리 모두 이중사고자였다. 머릿속에서 진실과 선전을 끊임없이 저울질해야 했다. 반체제냐 굴종이냐, 그게 선택지였다」
바쿠 출신 아르메니아계 정치학자·법학박사. 소련 정치학회를 창립해 17년간 이끌며 사회주의 민주주의 이론을 개척했고, 소비에트 사회 내 이익집단의 다원성을 인정한 초기 이론가 중 한 명이었다. 고르바초프 보좌관으로서 당 독점 폐지·경선 도입·대통령제 전환의 헌법개혁을 설계했으며, 퇴임 후 회고록 『자유의 대가』를 집필하고 SF 작가 '게오르기 샤흐'로도 활동했다.
「소비에트 경제학자로서 국가로부터 높은 봉급을 받는 11명의 학자 중 한 사람으로서, 나는 경제와 사회의 상태에 대해 인민 앞에 개인적으로 책임을 진다고 생각한다」 — 1983년
물리학도에서 경제학으로 전향한 키이우 출신 학자.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농촌사회를 연구하며 소비에트 경제사회학을 개척했고, 1983년 계획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진단한 내부 보고서를 작성했다. KGB가 압수했으나 서방으로 유출되어 『노보시비르스크 선언』으로 불리며 페레스트로이카의 지적 토양이 되었다. 소비에트 사회학 협회 회장, VTsIOM 초대 소장, 인민대의원으로 사하로프·옐친과 활동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43–1950모스크바대 물리학과 3년 수료 후 경제학부 우등 졸업
1950–1963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농업 부문 연구, 1956년 кандидат 학위
1963–1987노보시비르스크 IEiOPP, 1967년 사회문제 부서장, 경제사회학 학파 창립
「우리가 금융 전선에서 승리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승리할 것이다」 — 아발킨이 자주 인용한 레닌의 말
모스크바 출신 정치경제학자. 1986년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장이 되어 페레스트로이카의 학문적 토대를 마련했고, 1989년 경제개혁 국가위원장 겸 부총리로 기용되었다. 핵심 구상인 '규제된 시장경제'는 국가 통제 아래 단계적 시장화를 주장했으며, 샤탈린의 500일 계획이 제안한 충격요법과 대비되었다. 이 구상은 1990년 5월 최고회의에서 반려되었고, 고르바초프가 샤탈린의 급진안을 택한 뒤 리시코프 내각이 무너지면서 1991년 초 부총리직을 떠났다. 해체 후 『경제의 제문제』 편집장으로 러시아 사회경제 사상을 정립하고 옐친식 급진 자유화에 맞서 중국식 모델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TV 토론에 서류 가방을 들고 나와 상대가 반박할 때마다 해당 문서를 꺼내 사실을 입증하곤 했다.
에스토니아의 물리화학자이자 정치인. 탈린공과대학에서 유혈암 기술을 전공한 뒤 소련권 최초로 NMR 분광계를 자체 제작하며 고체 고분해능 핵자기공명 분야의 선구자가 되었다. 에스토니아 과학아카데미 회원 시절 1987년 인산염 광산 계획의 환경·인구적 위험을 보고서로 폭로해 '인산염 전쟁'의 지적 토대를 마련했고, 소련 인민대의원으로서 독소불가침조약 비밀의정서를 발굴·공개해 발트 병합의 법적 근거를 무너뜨렸으며, 독립 회복 후 두 차례 장관을 지냈다.
「우리 대의원들은 에스토니아가 소련 내에서 주권적이고 평등한 구성원으로 남기를 바라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1988년 11월 주권 선언 직후
에스토니아 히우마섬 출신으로 1950년대부터 콤소몰과 당 기구에서 경력을 쌓아 1970년대에는 에스토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까지 올랐다. 에스토니아 민족주의에 동정적이라는 이유로 1980년 모스크바에 의해 외교직으로 밀려나 베네수엘라와 니카라과 대사를 지냈다. 1988년 6월 16일 강경파 카를 바이노의 후임으로 소환되어 에스토니아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고, 인민전선과 협력하며 그해 11월 에스토니아의 주권 선언을 이끌었다. 1991년 8월 에스토니아 독립 회복 선언에 찬성표를 던졌고, 독립 후에는 에스토니아 민주노동당 의장을 지냈다.
상세 이력 보기
1949–1955콤소몰 각급 기관 근무; 타르투국립대학교 졸업(1955)
1955–1961에스토니아 레닌주의청년공산주의자동맹(ELKNÜ) 중앙위원회 제1서기
1961–1971에스토니아공산당 탈린시위원회 제1서기
1963–1967에스토니아 SSR 제6기 최고회의 의장
1971–1980에스토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1980–1988소련 대사, 베네수엘라(1980–1986) 및 니카라과(1986–1988)
페레스트로이카는 소비에트 사회 전체의 혁명적 쇄신이다. 성장의 가속은 민주화와 글라스노스트에서 분리될 수 없다. (1988)
트빌리시 태생의 아르메니아계 수리경제학자. 노보시비르스크 IEiOPP 소장(1966–1984)으로 시베리아 개발과 BAM의 경제 토대를 설계하고 『EKO』를 창간했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수석 경제 고문이 되어 기업 자율성 확대, 시장 요소 도입, 대외경제 개방이라는 개혁 청사진을 제시했다. 과학아카데미 경제분과 서기(1986–1989)로 활동하며 소비에트 계획경제 안에서 최대한의 변화를 모색했고, 소련 해체 후 국민경제아카데미 총장(1989–2002)을 지냈다.
1990년 1월 고르바초프가 빌뉴스까지 날아와 당의 분리를 되돌리라고 압박했을 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정은 당대회가 내렸고, 그것을 되돌릴 권한은 자신에게도 없다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리투아니아의 경제 관리자 출신으로 1988년 사유디스의 지지 속에 리투아니아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89년 12월 당을 소련공산당에서 분리하는 결정을 이끌었다. 연방 공화국의 집권당이 모스크바와 결별한 첫 사례였다. 독립 후인 1993년 첫 직선 대통령에 당선되어 옛 공산당원이 선거로 집권할 수 있음을 보였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관리하면서 NATO·유럽연합 가입의 길을 열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는 총리를 지냈다.
아르놀트 보일루코프는 소련 국립은행의 고위 은행가로, 말년 소비에트 금융 운영의 내부를 경험했다. 그는 1991년 1월 화폐개혁을 집행한 기관의 책임자였을 뿐 아니라, 훗날 그 구상이 재무부나 발렌틴 파블로프가 아니라 국가보안위원회와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에게서 나왔다고 회고한 증언자로 중요하다. 그의 회고는 개혁을 둘러싼 제도 간 긴장과, 비밀리에 추진된 조치가 대중의 신뢰를 훼손한 과정을 보여 준다.
지금 문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어떤 -이즘을 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 나라와 국민을 구하는 것입니다 — 1990년 당 중앙위원회 플레넘에서
레닌그라드 근교 출생. 칸토로비치의 제자로 투입산출모형과 최적계획 이론을 발전시켰고, 1987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89년 경제분과 아카데미크-서기가 되었다. 1990년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합의로 작업반을 이끌어 500일 내 시장경제 전환을 구상한 '500일 계획'을 작성, 아발킨의 점진적 노선과 정면 대립했다. 연방 차원에서 채택되지 못했으나 러시아 공화국에서 부분 시행되었고, 제자 가이다르의 1992년 충격요법의 지적 토대가 되었다. 해체 후 '개혁' 재단을 이끌고 통합민주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명예회장을 지냈다.
1989년 5월 27일, 제1차 인민대표회의 연단에서 보수파 의원들을 향해: "여기 계신 분들은 공격적으로 복종하는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탈린-브레즈네프식 최고회의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1989년 제1차 소련 인민대표회의에서 보수파를 '공격적으로 복종하는 다수'라고 규정한 역사가. 프랑스 아날학파 연구자로 출발해 모스크바 역사·기록연구소 학장(1986-1991)을 거치며 소련 역사학의 탈스탈린화를 주도했고, 사하로프·옐친과 함께 지역간 의원 그룹 공동의장으로 민주개혁을 이끌었다. 1991년에는 러시아국립인문대학(RSUH)을 설립해 당 고등학교 건물에 독립적 인문학 공간을 열었고, 이후 옐친과 푸틴의 권위주의를 공개 비판하며 마지막까지 체제와 거리를 두었다.
1991년 6월 20일 포포프는 미국 대사 잭 매틀록에게 쿠데타 준비를 알리는 쪽지를 건네 파블로프·크류치코프·야조프·루키야노프의 이름을 적었고, 이 경고는 워싱턴을 거쳐 고르바초프에게 전달되었으나 매틀록은 회고록에서 허위 경보였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아조프 그리스인 부모 사이에서 1936년 10월 31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경제학자로, 모스크바국립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1963년 경제학 후보, 1970년 박사, 1971년 교수가 되었다. 모스크바국립대에서 관리학 연구실장과 주임교수, 학장을 지냈으며(학장 시작은 1977년설과 1978년설이 있다), 1988~1990년 『경제문제』 편집장으로 '명령-행정 체제' 개념을 확산시켰다. 1989년 소련 인민대표회의 의원으로 당선되어 사하로프·옐친 등과 함께 지역간 의원 그룹 공동의장을 맡았고, 1991년 6월 12일 65.3% 득표로 모스크바 최초의 민선 시장에 올랐다.
아나톨리 솝차크는 법학자이자 민주개혁가로서, 제헌회의 의장으로 1993년 러시아 연방 헌법 제정을 공동 주도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초대 민선 시장(1991–1996)을 지냈다. 레닌그라드 국립대 법학 교수 시절 블라디미르 푸틴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를 가르친 그는, 1989년 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안드레이 사하로프·보리스 옐친과 함께 지역간의원그룹 공동의장을 맡았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레닌그라드에서 군 지휘관을 설득해 병력 투입을 막고 궁전광장에 20만 시민을 결집시키며 저항을 조직했다. 부패 혐의로 1997년 파리로 망명했으나, 총리가 된 푸틴의 도움으로 1999년 귀국했다.
1992년 11월 앙카라를 방문해 아느트카비르에서 아타튀르크의 묘를 참배하고 방명록에 그를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병사로 적었다.
1938년 6월 24일 나흐치반 칼라키에서 태어나 2000년 8월 22일 앙카라에서 사망한 아제르바이잔의 정치인. 바쿠 국립대학교에서 아랍어문헌학을 전공했고 1969년 역사학 후보 학위를 받았다. 1970년대부터 투르크주의자·반공산주의자로 알려졌고 1975년 1월 국가보안위원회에 체포되어 1976년 7월까지 카라다흐 채석장에서 노동했다. 1989년 인민전선의 창립자이자 의장으로 1990년 1월 국방위원회를 조직했고, 바쿠의 반아르메니아 포그롬과 '검은 1월'로 이어진 위기의 중심 인물이었다. 1992년 6월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1993년 6월 카라바흐 전선의 패배와 후세이노프의 반란 속에 축출되었고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승계했다. 1997년 바쿠로 돌아와 야당을 이끌었다.
“나는 평생 반대파였고 정부와 싸워 왔다. 이제 내가 정부다.” 1990년 새로 선출된 최고회의 의장이 된 뒤 가진 인터뷰에서.
그루지야의 문학자이자 반체제 운동가로, 유명 작가 콘스탄틴 감사후르디아의 아들이며 1977년 메라브 코스타바와 함께 그루지야 헬싱키 그룹을 결성해 소련의 인권 탄압을 국제사회에 고발했고 수차례 투옥되었다. 1989년 4월 독립위원회 공동 지도자로서 트빌리시에서 수만 명의 평화 시위와 단식 투쟁을 조직했고, 소련군의 유혈 진압은 그루지야 독립 여론을 결정적으로 급진화시켰다. 1990년 원탁-자유그루지야 연합을 이끌어 최초의 다당제 선거에서 압승했고 1991년 5월 87% 득표로 그루지야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취임 7개월 만에 무장 쿠데타로 축출되어 체첸으로 망명했으며 1993년 12월 서부 그루지야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오랜 망설임 끝에 나는 '사회주의가 무엇으로 되는지' 보기로 결심했다. 몇 년 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리투아니아의 철학자이자 정치가로, 빌뉴스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문화잡지 『쿨투로스 바라이』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1973년 리투아니아 공산당에 입당했으나 페레스트로이카를 계기로 1988년 사유디스 창립에 참여했고, 독립운동의 이론가로서 200만 명 서명 운동을 주도해 주둔 소련군 철수를 요구했다. 에스토니아·라트비아 대중운동과 함께 '발트의 길'을 기획한 3국 조정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독립 후 부총리(1990~1991)로 란츠베르기스-프룬스키에네 내각의 실무를 떠받쳤다. 이후 중도연합을 창당해 세이마스 의원(1992~2000)을 지냈고, 유럽연합 가입을 주권 제약으로 간주해 끝까지 반대했다.
1988년 10월 라흐바린네 창립대회에서 사회학자 라우리스틴은 사비사르와 함께 연단에 서서 독립운동의 지적 초석을 놓았다.
마리우 라우리스틴은 에스토니아 공산당 고위 간부의 딸로 탈린에서 태어나 타르투 대학에서 언론학과 사회학을 전공했다. 1980년 「40인 서한」에 서명하여 에스토니아의 언어와 문화를 질식시키는 러시아화 정책에 공개 저항했고, 이 경험은 지식인으로서의 정치적 진로를 결정지었다. 1988년 에드가 사비사르와 함께 라흐바린네를 공동 창립하고 그 창립대회를 조직했으며, 라흐바린네의 지적 리더십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독립 회복 후에는 초대 사회부 장관을 지냈고, 타르투 대학 교수로서 탈사회주의 전환의 사회학을 연구했다.
훗날 카잔니크는 그 결정을 이렇게 돌아봤다: "모스크바에서 옐친에게 투표한 사람은 550만 명, 나에게는 170만 명이었다. 옐친이 최고회의 첫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카자흐스탄의 건설 노동자와 소련 공병대 복무를 거쳐 이르쿠츠크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법학자로, 1975년부터 옴스크대학에서 환경법과 국가법을 가르쳤다. 1989년 소련 인민대의원으로 당선되었고, 5월 29일 제1차 대회에서 옐친이 최고회의 의원 선출에 실패하자 자신의 당선 자리를 옐친에게 양보해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다. 1993년 옐친에 의해 러시아 검찰총장에 임명되었으나, 1994년 2월 국가두마의 사면 결의를 헌법에 따라 집행했다는 이유로 대통령 측의 압력을 받고 사임하며 원칙을 지켰다. 이후 옴스크주 부지사(1996–2003)를 지내고 모교로 돌아가 후학 양성에 힘쓰다 2019년 사망했다.
그녀는 각료들 앞에서 울며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 같다. 우리는 끝장이다."
리투아니아의 첫 독립 후 총리(1990~1991)로, 소련 붕괴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10개월을 이끌었다. 사유디스 창립 멤버로 리투아니아 SSR 부총리를 거쳐 총리에 올랐으며, 부시·대처·콜 등 서방 정상을 만나 '호박색 숙녀'라는 별명을 얻고 신생국의 외교적 존재감을 세웠다. 의장 란츠베르기스의 강경 노선과 달리 실용주의자였으나, 1991년 1월 8일 고르바초프에게 군사행동 불가 보장을 요청했다 거부당하고 다음 날 사퇴했다. 닷새 뒤 소련군이 빌뉴스에서 민간인 14명을 살해했고, 그녀는 2004년 대선 결선에서 아담쿠스에게 근소하게 패한 뒤 농업장관을 지냈다.
벨라베자 숲에서 샤슈케비치와 크랍추크를 향해: "소련이 국제법의 주체로서 소멸된다는 문장 하나에 동의하시겠습니까?"
옐친의 최측근이자 소련 해체의 지적 설계자. 우랄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가르치던 교수 출신으로, 1991년 9월 가이다르 그룹이 쓴 '부르불리스 메모란덤'을 옐친에게 전해 러시아의 경제적 독립 노선을 결정지었다. 그해 12월 벨라베자에서 샤슈케비치와 크랍추크에게 "소련이 국제법 주체로서 소멸된다는 문장 하나에 동의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고, 그 문장으로 시작된 합의문에 옐친과 함께 서명했다. 1992년 개혁에 쏟아진 비난의 번개 막대가 되어 물러난 뒤 의원과 상원의원으로 조용히 살았다.
1993년 10월 4일 백악관 포격 중 라디오 생방송에서: "비행사들이여, 전투기를 띄워라! 이 갱단은 크렘린에 자리 잡고 있다.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구하라!"
소련의 마지막 영웅 중 한 명이자 러시아의 유일한 부통령. 아프가니스탄에서 Su-25 공격기로 485회 출격하고 두 차례 격추·포로가 된 전투 조종사였으며, 1988년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1년 옐친의 러닝메이트로 RSFSR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8월 쿠데타 당일 루키야노프에게 고르바초프 건강검진을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하고 백악관 방어를 조직했으며, 총대주교 알렉시 2세를 설득해 교회의 옐친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후 옐친의 경제개혁과 권력 집중에 반대하며 의회파에 섰고, 1993년 10월 헌정위기에서 의회에 의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선포되었다가 탱크 포격 끝에 체포되었다.
500일 계획의 설계자: 계획경제에서 시장으로의 급진적 이행을 설계한 페레스트로이카 경제학자
1970년대 탄광 연구 중 갱도 붕괴로 동료 넷과 함께 얼음물에 열 시간 갇혔다. 구조되었으나 셋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야블린스키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가 구출되었지만, 다섯 중 셋이 병원에서 죽었다」
리보프 출신 소련 경제학자이자 정치인. 플레하노프 국민경제대학을 졸업하고 탄광 노동 연구를 거쳐 1989년 레오니트 아발킨의 부름으로 소련 각료회의 통합경제국장이 되었다. 1990년 미하일 자도르노프, 알렉세이 미하일로프와 함께 500일 계획을 작성하여 2년 내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로드맵을 제시했고, RSFSR 부총리 겸 경제개혁 국가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고르바초프가 니콜라이 리시코프의 대안 계획과 절충하며 500일 계획이 무산되자 1990년 10월 사임했고, 이후 독자 싱크탱크 EPICenter를 설립했으며 1993년 야블로코를 창당해 러시아 자유주의 야당의 한 축을 형성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76–1980전소 석탄공업관리연구소(VNIUUgol) 연구원
1980–1989노동·사회문제 국가위원회 중공업 부문장 → 종합부문 부장 → 사회발전·인구국장
「다우가바를 지키는 것은 독립 라트비아를 지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다우가프발스 HES 반대 투쟁이 우리 혁명의 시작이었다.」
라트비아의 언론인·정치인. 1986년 동료 아르투르스 스닙스와 함께 『문학과 예술』지에 실은 기사로 다우가프바 수력발전소 건설 반대 여론을 촉발했고, 3만 명의 서명을 모은 캠페인은 1987년 소련 각료회의가 공사를 중단시키는 성과로 이어졌다. 1988년 10월 라트비아 인민전선 창립대회에서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어, 환경운동에서 시작된 대중 동원을 독립 회복이라는 정치적 목표로 전환시켰다. 1990년 최고회의 부의장을 지내고 1992년 사임한 뒤 언론으로 돌아갔으며, 이후 사회민주노동당 당수를 거쳐 리가 시의원을 지냈다.
상세 이력 보기
1979언론 활동 시작, 연극·문학 비평
1986「다우가바의 운명을 생각하며」 발표, 다우가프발스 HES 반대 캠페인 촉발. 올해의 언론인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