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전쟁의 실제 전사자 53,522명을 최초로 공개하며 소련 공식 기록을 깨뜨린 군사사학자
1989년 『오고뇨크』 22호에 「네즈나메니타야 보이나(빛나지 않은 전쟁)」를 발표하며, 1940년 몰로토프가 공식 발표한 소련군 전사자 48,475명이라는 숫자가 허구임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밝혔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전후 소련군정청에서 복무한 군사사학자로, 평생을 소련의 전쟁사 연구에 바쳤다. 1989년 잡지 『오고뇨크』에 겨울전쟁의 실제 소련군 전사자가 53,522명임을 공개하며 50년간 유지된 공식 통계를 처음으로 깨뜨렸고, 이후 비밀의정서와 카틴 학살 문서를 최초로 출판하는 등 폐쇄된 기록의 문을 열었다. 만년에는 나치 점령지 협력 문제를 다룬 방대한 연구로 소련사의 마지막 금기를 파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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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붉은군대 징집
1941–1945대조국전쟁 참전 (돈·스탈린그라드·제3우크라이나·제1벨로루시 전선)
1945–1950독일 주둔 소련군정청 근무
1953역사학 후보 박사 (루자티아인 연구)
1962역사학 박사
1967소련 국방부 군사사연구소 연구원, 『제2차 세계대전사』 9권 책임편집, 국가상 수상
미국 역사학자 로버트 번스는 그를 '20세기 미국사에 관한 가장 유능한 소련 전문가 중 한 명'이라 평했다.
전후 세대 최초로 소련에서 미국사 연구의 학문적 기초를 세운 역사가. 레닌그라드대학에서 국제관계사를 전공하고 레닌그라드 역사연구소에서 평생 연구하며 석유정치, 미국 혁명, 미소 관계를 아우르는 300여 편의 저작을 남겼다. 티머시 나프탈리와 함께 소련 공산당·크렘린 문서고를 처음 열어 쿠바 미사일 위기의 내막을 밝힌 『One Hell of a Gamble』(1997)은 냉전사 연구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어진 『Khrushchev's Cold War』(2006)로 영국 왕립연합군사연구소의 올해의 군사사 서적상을 받았다.
「한 기업에 동시에 두 개의 이질적 규제자가 있을 수 없다. 하나의 자동차에 두 명의 운전자와 두 개의 핸들이 동시에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회고로 본 계획체제』(2000)에서 코시긴 개혁의 실패를 요약하며.
소련 및 러시아의 경제학자로, 모스크바국립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우랄공대에서 정치경제학을 가르쳤다. 1965년부터 사망까지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에서 근무하며 해외 경제이론 비판적 연구 분과를 이끌었고, 후기에는 경제체제 전환 이론과 러시아 경제사상사 연구에 집중했다. 2000년 폴 그레고리와 공저한 『회고로 본 계획체제』에서 1965년 코시긴 개혁의 핵심 모순을 지령적 계획과 준시장이라는 두 이질적 규제자의 한 기업 내 양립 불가능성으로 분석하여, 개혁 연구의 '두 규제자' 학파를 열었다.
2002년 「군사역사잡지」에 실은 글에서 그는 역사가의 의무를 이렇게 적었다: "역사가는 자기 민족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해야 한다."
그리고리 크리보셰예프는 소련군에서 출발해 총참모부 부총참모장까지 오른 군인이자 군사역사가였다. 그는 1988년부터 군사역사 연구단을 이끌어 비밀 해제 자료를 바탕으로 소련과 러시아 군대의 전쟁 손실을 통계화했고, 그 결과는 1993년 저서로 출간됐다. 이 연구는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의 회복 불가능한 손실을 12만 6,875명으로 제시해 널리 인용됐지만, 후속 연구자들은 누락과 중복 가능성을 지적하며 더 높은 수치를 제시했다.
명예교수로 임명됐을 때 그를 소개하며 인용된 말, '진정 좋은 사람이라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누구나 아나키스트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오데사 출신 유대인 이민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퀸스 칼리지에서 평생 러시아와 미국의 아나키즘 운동사를 가르친 개척적 역사가였다. 『크론시타트 1921』(1970)으로 볼셰비키가 그 봉기를 반혁명 음모로 규정한 신화를 실증적으로 깨뜨렸으며, 훗날 게츨러의 명부 연구가 더 정밀한 수치를 내놓자 그 우위를 인정했다. 아나키스트를 '부도덕하고 폭력적'으로 보는 편견에 맞서 그들을 '사회정의의 선구자'로 복원하려 했고, 평생 모은 2만 점의 자료를 미국 의회도서관에 기증했다.
1989년, 『CPSU사 문제』에 실린 그의 논문 「이른바 '레닌그라드 사건'」은 이 사건을 '즈다노프 그룹 대 말렌코프-베리야 그룹'의 파벌 투쟁으로 정식화했다. 이후 30년 넘게 이 틀이 논쟁의 출발점이 되었다.
소련의 역사학자. 레닌그라드대학 사학부를 우등 졸업하고 토르조크에서 교사와 당 일꾼으로 일한 뒤, 1966년부터 레닌그라드 당역사연구소에서 25년간 봉쇄·전후복구·당 간부들의 정치 전기를 연구했다. 1989년 『CPSU사 문제』에 발표한 「이른바 '레닌그라드 사건'」에서 이 사건을 즈다노프 그룹과 말렌코프-베리야 그룹 사이의 파벌 투쟁으로 해석하는 틀을 처음 제시했고, 이듬해 빅토르 데미도프와 함께 편찬한 동명의 책은 20만 부 발행으로 대중적 폭발을 일으켰다. 이 작업으로 '레닌그라드 사건' 연구의 포스트소비에트 역사학 전체를 열었으며, 1991년부터 사망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교수로 후속 세대를 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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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칼리닌주 토르조크 출생, 노동자 가정
1952–1957레닌그라드대학 사학부 우등 졸업
1957–1962르제프 중등학교 교사, 이후 토르조크 시당위 선전선동부 지도원·부장
1965후보학위 취득, 「제1차 5개년계획기 레닌그라드 CCC-RKI 활동」
1966–1991레닌그라드 당역사연구소(후일 역사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1987–1989『대화』에 '레닌그라드 사건' 첫 논문 게재, 『CPSU사 문제』에 획기적 논문 발표, 박사학위 취득, KGB상 수상
1990V. I. 데미도프와 『레닌그라드 사건』 편찬, 20만 부 발행
1991–2016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역사학부 러시아현대사 교수, 150편 이상 논문·저서 발표
그가 편집한 체르노빌 연구서는 6,000여 개 자료를 검토해 장기 피해를 추산하며 공식 사망자 수 중심의 서술에 이의를 제기했다.
알렉세이 야블로코프는 동물학과 생태학을 연구한 소련·러시아 생물학자이자 환경정책가였다. 그는 체르노빌의 장기적 건강·환경 피해를 강조하며 공공 논쟁에 참여했고, 공동 저술서의 높은 사망 추정치는 재난 피해 규모를 둘러싼 논쟁의 한 극단을 이루었다. 과학 연구와 환경운동, 의회·대통령 자문 활동을 오가며 생태 문제를 국가 의제로 끌어올렸다.
그동안 절대 접근할 수 없었던 사료가 마침내 열리자, 그는 역사가로서 '완전히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다고 회고하며, 다만 그것이 오십 대 중반에야 왔음을 아쉬워했다.
소련 역사학자로 유고슬라비아 현대사와 냉전기 동유럽 국제관계를 전공했다. 1966년부터 인슬라브 연구소에서 근무하며, 1980년대 말 아카이브 개방 이후 스탈린과 유고·불가리아 공산당 지도자들의 회담 기록을 발굴해 스탈린-티토 결별의 기원에 대한 탈냉전기 재평가의 토대를 놓았다. 노먼 네이마크와 공동 편집한 『동유럽 공산정권의 수립』(1997)을 비롯한 수백 편의 저작과 코민포름 회의록 출판으로 국제적 권위를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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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역사학부 졸업 (남·서슬라브사 전공)
1962–1966소련 과학아카데미 슬라브학 연구소 아스피란투라
1966–2022슬라브학 연구소 연구원, 선임연구원, 국제관계사 부문장(1990–1993), 수석연구원
1989년 라진스키는 황제 가족 처형자인 야코프 유롭스키의 수기와 참여자들의 증언을 소련에서 처음으로 공개해, 사형 집행자들 스스로가 그 밤을 초 단위로 이야기하게 했다.
에드바르트 라진스키는 러시아의 역사와 비극적 인물을 대중에게 전달한 역사가이자 극작가, 방송인이다. 모스크바 역사기록보관소에서 훈련받은 그는 연극으로 경력을 시작한 뒤 니콜라이 2세, 라스푸틴, 스탈린 등의 전기를 썼다. 1997년 스탈린 전기에서 새로 공개된 기록과 증언을 바탕으로 베리야가 스탈린을 독살했을 가능성을 제기했으며, 이 주장은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사망 원인을 둘러싼 논쟁의 한 해석으로 남아 있다. 그의 서사적이고 심리적인 역사 서술은 널리 읽혔지만, 사료의 출처와 해석을 둘러싸고 전문 역사가들의 비판도 받았다.
「형성된 경제 메커니즘은 명령경제와 시장경제의 모든 최악의 측면을 결합했다」: 1965년 개혁에 대한 평결.
그는 1970년대부터 소련 공식 통계를 독자적 방법으로 재계산하여, 1928~1985년 국민소득 증가가 공식 84.4배가 아닌 6.6배에 불과하다는 충격적 결과를 도출한 경제학자다. 1987년 바실리 셀류닌과 함께 『노비 미르』에 발표한 「기만적 숫자」는 소련 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이후 『러시아 현대 경제사』 전집을 집필하며 소련 계획경제의 성취와 실패를 냉철히 분석했고, 1965년 코시긴 개혁에 대해서는 '명령경제와 시장경제의 모든 최악의 측면을 결합한 개혁'이라는 평결을 내렸다.
유리 주코프는 소련과 러시아의 역사가로, 러시아 역사연구소에서 스탈린 시대와 소비에트 정치사를 연구했다. 그는 기록보관소 자료를 바탕으로 니키타 흐루쇼프를 대숙청의 집행자이자 책임 있는 정치가로 재평가하는 논의를 제기했다. 동시에 스탈린의 대중 탄압 책임을 축소하는 ‘다른 스탈린’ 해석으로 학계의 강한 비판을 받았으며, 그의 작업은 탈스탈린화 이후의 역사 기억이 지닌 정치성을 드러냈다.
발레리 티시코프는 민족성·민족주의·민족분쟁을 연구한 러시아 민족학자이자 사회인류학자다. 그는 민족을 자연적으로 주어진 실체라기보다 정치적 행위자와 엘리트가 동원하고 재구성하는 범주로 분석했으며, 이 관점은 저서 『Ethnicity, Nationalism and Conflict in and after the Soviet Union: The Mind Aflame』에 집약됐다. 1992년 민족문제 담당 장관을 지내며 학술적 민족성 논의를 국가의 다민족 현실과 분쟁 예방의 문제에 연결했다. 그의 구성주의적 해석은 민족주의의 자율성과 대중적 경험을 과소평가한다는 비판과 함께 후기 소련 및 러시아 민족정치 논쟁의 한 축을 이룬다.
개혁은 좌초되었고, 국가는 정체기에 접어들었으며, 이 정체가 궁극적으로 소련 사회주의 경제의 종말을 예고했다.
유리 골란드는 소련 신경제정책(NEP)과 화폐개혁 연구로 출발한 러시아 경제학자다. 모스크바국립대 물리학부를 졸업한 후 오랫동안 물리학 연구소에서 일하다 1990년대 경제학으로 전환, 네프와 관련한 논쟁사를 복원하는 작업에 집중했다. 2010년 알렉산드르 네키펠로프와 함께 발표한 논문 「코시긴 개혁: 놓친 기회인가 신기루인가」는 이 개혁을 둘러싼 탈소비에트 역사학 논쟁의 핵심 질문을 공식화했다.
수년에 걸쳐 나는 「레닌그라드 사건」이 1917년 이래 소비에트 러시아의 '러시아 문제' 전체 역사와 떼어놓고는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확신을 굳혔다.
블라디미르 드미트리예비치 쿠즈네쳅스키는 소련과 러시아의 정치사를 연구한 러시아 역사학자이자 역사학 박사이다. 그는 스탈린 시대의 권력과 국가 민족정책을 다룬 저술을 발표했으며, 특히 레닌그라드 사건을 러시아공화국의 지위와 러시아계 지도층을 둘러싼 갈등으로 해석했다. 그의 해석은 사건을 단순한 권력투쟁이 아니라 소련 체제의 ‘러시아 문제’와 연결해 보려는 논쟁적 역사서술로 자리 잡았다.
1987년 남성 기대수명이 3.2년 늘어 65세에 이르렀다는 계산은 정책 논쟁을 사망률의 언어로 바꾸었다.
예브게니 안드레예프는 수학적 엄밀성과 통계 실무를 결합해 러시아와 소련의 사망률을 연구한 인구학자다. 그의 기대수명 분해 방법은 연령과 사망 원인이 수명 변화에 미친 영향을 추적하는 표준 도구가 되었고, 1980년대 후반 남성 기대수명 반등을 3.2년, 65세까지로 산출한 작업은 금주 정책의 건강 효과를 평가하는 핵심 근거가 되었다. 그는 알코올 관련 사망률을 장기 자료와 방법론의 문제로 다루며, 정책 효과를 단순한 서사로 환원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리고 러시아인들이 언제나 가져온 것은 상실이었다."
1945년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1975년부터 웰즐리 칼리지에서 소비에트 역사와 기억 정치를 가르쳐 온 미국의 러시아사 학자다. 『레닌은 살아 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레닌 숭배』(1983)로 윌슨상을 수상했고, 결정적 저작 『산 자와 죽은 자: 러시아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 숭배의 흥망』(1994)에서 스탈린이 전쟁 기억을 억압하고 브레즈네프가 숭배로 격상시켰으며 1985년 이후 그 숭배가 흔들렸음을 실증했다. 1985년 제네바 정상회담을 앞두고 레이건을 브리핑한 6인의 소비에트 전문가 중 한 명이었으며, 클린턴은 1995년 모스크바 승전 기념일 방문에 앞서 그녀의 책을 읽고 '위대한 책'이라 평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주둔 작전집단의 최측근 보좌관으로서의 내부 시점에서, 비공개 문서고 자료와 참전자 증언에 기초해 아프간 전쟁을 다룬 『아프간의 비극과 용맹』(1995)을 썼다.
알렉산드르 랴홉스키는 러시아 군인이자 군사 저술가로, 1946년 2월 5일 트빌리시에서 태어나 2009년 2월 3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1968년 바쿠 고등제병지휘학교를 금메달로 졸업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사태에 참가했으며, 1977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를 우등으로 졸업한 뒤 총참모부 작전총국에서 8년간 아프리카 군사협력 업무를 맡았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 국방부 작전집단에서 바렌니코프의 최측근 보좌관으로 철군까지 복무했고, 1990년 지상군 총참모부 작전국 제1부국장을 지냈다. 2002년 예비역으로 전역했으며 장군 소령 계급을 받았다.
복무 중 '바실리 티모페예프'라는 필명으로 첩보소설을 쓰던 그는, 기밀 해제 전 예조프의 신문 조서 원문을 발굴해 평전에 그대로 실었다.
소련 국가보안 기관(KGB) 출신의 러시아 작가다. 기밀 해제 이전의 수사 기록에 접근해 예조프 평전 『예조프: 「철의」 스탈린 인민위원 이야기』(2001, 「특별 문서고」 총서)를 썼다. 이 책은 예조프 신문 조서와 재판 기록을 대량으로 수록한 초기 공간물이지만, 조서 인용 사이사이에 신문실 정경 같은 소설적 재구성을 끼워 넣어 사료와 창작의 경계가 흐리다는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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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모스크바 폴리그라프 연구소 졸업
1971KGB 학교 졸업
1970년대–국가보안기관 정보장교로 복무(대령), 태국·인도에서 타스 통신 특파원으로 근무
1977년 그가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심사받았을 때, 심사 기관인 CPSU 중앙위 산하 사회과학아카데미는 "이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라는 요지의 평가서를 제출했다.
모스크바 태생 타타르계 제도경제학자로, MSU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가르치며 '아시아적 생산양식'에 관한 논쟁적 박사논문으로 주목받았다. 1993년 쿠즈미노프와 함께 고등경제대학(ВШЭ) 설립에 참여해 초대 경제학과장과 초대 부총장을 지냈고, 러시아 제도경제학파의 핵심 구축자로 자리잡았다. 2017년 출간된 집단 논문집 『놓친 기회인가, 마지막 안전판인가?』의 책임편집자로서, 코시긴 개혁을 둘러싼 역사학계의 양극화된 평가를 표제 하나로 응축했다.
스탈린의 유대인 추방은 로흐네스의 괴물과 같은 것이 되었다: 많은 이가 봤다고 하나 단 하나의 확실한 증거도 제시된 적 없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스탈린 시대 연구자로, 소련 국가 반유대주의의 기록을 발굴해 학계의 표준을 세웠다. 그의 저서 『붉은 파라오의 포로』(1994)와 『스탈린의 비밀 정책: 권력과 반유대주의』(2001)는 의사들의 음모와 반세계주의 캠페인을 포함한 스탈린 말기 유대인 탄압의 전모를 기록으로 실증한 기념비적 작업이다. 2003년 '데포르타치야: 미스티피카치야' 논문에서 스탈린이 유대인 대량 추방을 계획했다는 통설에 대해 '로흐네스의 괴물과 같다'고 비판하며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이 입장은 브렌트·나우모프의 『스탈린의 마지막 범죄』와 대비되는 대표적 학설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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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항공산업 인민위원회에 관한 후보자 학위논문 심사 통과
1994『붉은 파라오의 포로』 출간
2001『스탈린의 비밀 정책: 권력과 반유대주의』 출간 (2003년 개정판)
2003러시아 유대인공동체연맹 '올해의 인물 5762' 선정
2008박사학위 논문 심사 통과: 소련 정치 지도부와 유대계 인텔리겐치야(1936–1953)
그는 소련 붕괴의 원인을 이렇게 압축했다: '완벽한 폭풍과 무능한 선장.' 소련은 피할 수 없는 몰락이 아니라 고르바초프의 실기로 무너졌다는 것이다.
모스크바 출신의 냉전사학자로, 모스크바국립대학 역사학부와 소련 과학아카데미 미국·캐나다연구소에서 수학했으며, 1985년 동 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4년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워싱턴대학 국가안보아카이브 연구원을 거쳐 템플대학 교수를 지냈고, 2013년부터 런던정경대학(LSE) 국제사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1년 출간한 《Collapse: The Fall of the Soviet Union》에서 소련 붕괴는 필연이 아니었으며 고르바초프의 개혁 실패가 '완벽한 폭풍과 무능한 선장'의 결과였다고 주장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이 책으로 2022년 컨딜 역사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야로프의 연구는 봉쇄를 견딘 사람들을 영웅과 가해자의 이분법이 아니라 선택과 생존의 기록으로 읽게 했다.
세르게이 야로프는 러시아 20세기 사회사와 노동자 정치의식을 연구한 역사가로, 봉쇄 레닌그라드의 일상과 도덕적 선택을 핵심 주제로 삼았다. 그는 영웅적 저항이나 행정적 동원만으로 봉쇄사회를 설명하지 않고, 굶주림 속 연대와 순응, 생존 전략이 얽힌 경험을 사료로 복원했다. 『봉쇄 윤리』와 『봉쇄 레닌그라드의 일상생활』은 재난 속 인간 행위의 모순을 공적 기억의 중심으로 끌어냈다.
『스탈린: 한 지도자의 생애』 결론에서 흘레브뉴크는 "러시아 사회의 상당 부분이 스탈린식 과거에서 현재의 처방을 찾는다"고 진단했다.
올레크 흘레브뉴크는 소련 스탈린 시대의 정치사와 굴라크를 연구한 러시아 역사학자이자 기록문서 편집자다. 국가기록원 자료와 당·정부 문서를 바탕으로 대숙청을 지역의 자발적 폭발이 아니라 중앙의 결정과 집행 체계가 작동한 사건으로 해명했다. 그의 연구는 스탈린의 지시와 통제가 테러의 방향과 규모를 결정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문서가 남기지 않는 동기와 과정을 신중하게 구분한다. 그는 학술서와 사료집을 통해 러시아 사회의 스탈린 신화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왔다.
그는 스탈린의 최선의 행동은 '1941년 10월 모스크바를 떠나지 않은 것' 하나뿐이라 말한다.
모스크바에서 역사 교사와 학교 운영자로 일하며 대숙청기 국가보안기관을 연구해 온 역사가다. NKVD 지도부 내부 투쟁을 다룬 첫 연구(2006)에 이어 『「피의 난쟁이」 대 인민의 수령: 예조프의 음모』(2009)와 『스탈린과 NKVD』(2013)를 펴냈고, 대테러의 집행을 지역별 통계 편차와 예브도키모프의 '북캅카스파' 같은 체키스트 집단의 인맥 분석으로 재구성한다. 이 서가에 실린 두 연구서의 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