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1938년 아제르바이잔 내무인민위원이자 특별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에 참여했다. 1953년 베리야 사건으로 체포되어 구금 중 사망했다.
쿠타이시현 카파나의 농가에서 아르메니아인 아버지와 그루지야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토푸리제는 어머니의 성). 1905~1910년 멘셰비키였고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20년부터 아제르바이잔 체카에서 일했고, 1934년부터 아제르바이잔 GPU·NKVD를 이끌며 1937~1938년 내무인민위원으로 특별 트로이카에 들었다. 1938년 4월부터 NKVD 행정경리국장을 지냈고 1947~1953년 아제르바이잔 각료회의 부의장이었다. 1953년 7월 베리야 사건으로 체포되어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고, 수사가 끝나기 전인 1960년 8월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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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10멘셰비키로 활동하며 농촌 혁명조직을 만들고 농민에게 전단을 배포했다.
1918–1920붉은군대에서 복무한 뒤 1920년 아제르바이잔 체카에 들어갔다.
1934–1938아제르바이잔 GPU 위원장과 NKVD 국장을 거쳐 1937~1938년 내무인민위원을 지냈고, 특별 트로이카에 참여해 대숙청을 집행했다.
1938–1953NKVD 행정·경리국을 이끌고, 1947~1953년 아제르바이잔 각료회의 부의장을 지냈다. 1953년 베리야 사건으로 체포되어 수사 중 사망했다.
스탈린이 이사코프를 평했다: "진짜 함대 제독, 이사코프 동지. 똑똑하군, 다리는 없지만 머리는 있지."
아르메니아계 소련 해군 지휘관으로, 1955년 소련 해군 최고 계급인 아드미랄 플로타 소비에츠코고 소유자에 오른 단 세 명 중 한 명이다. 해군 제1부인민위원과 주참모부장을 지내며 소련 해군의 작전 교리를 정립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발트·흑해함대와 육군 간 협동작전을 조정하고 레닌그라드 '생명의 길'을 구축했다. 1942년 투압세에서 독일 공습으로 중상을 입어 왼쪽 다리를 절단했으나 종전까지 복무했다. 전후 3권의 『해양 지도책』(스탈린상 1급)을 비롯해 해양학·해군사에 걸친 150여 편의 저작을 남겼고,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과 작가동맹 회원이 되었다.
1938년 우랄마시 공장장 시절, 군사기술 2급 기술자 계급을 받았다. 전시 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으로서 KV·IS 중전차와 SU 자주포의 동력계통을 책임졌고, 1945년 5월에는 쿠투조프 1급 훈장 — 대규모 부대 작전을 성공시킨 군사령관에게 주어지는 훈장을 산업 지휘관으로서 받았다.
아르메니아계 소비에트 산업 관료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으로서 전차·자주포·트랙터 생산을 지휘했고, 전후에는 자동차·트랙터 공업을 연이어 관장했다. 우랄마시 공장장을 거쳐 중기계·중형기계 인민위원부에서 말리셰프, 반니코프 등과 함께 스탈린 시대 군수-산업 행정을 떠받친 실무형 관리자였다. 1955년 흐루쇼프에게 공개 비판받고 물러났으나, 이미 3개의 레닌 훈장과 쿠투조프 1급 훈장을 받은 전쟁영웅급 산업 지휘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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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22그루지야 콤소몰 조직비서, 트빌리시 시위원회 책임비서
1922–1931바우만 모스크바 기계기계공학대학에서 수학하며 당 조직 업무 병행
1931–1937포돌스크 크레킹·전기기관차 공장 기술이사, 후에 공장장
1937–1939우랄마시 공장장, 군사기술 2급 계급 수여
1939–1941중기계공업 부인민위원, 제1부인민위원; 중형기계공업 제1부인민위원
1941–1946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 — 전차·자주포·트랙터 동력계통 생산 총괄
1946–1950자동차공업 장관, 자동차·트랙터공업 장관
1950–1955농업기계제조 차관·제1차관, 기계제조 장관, 자동차·트랙터·농업기계 장관; 1955년 퇴임
바쿠 탈출선이 격침되자 수영을 못하던 아르메나크를 건져낸 전우 세르게이 후댜코프. 그가 백위대 습격에 전사하자, 아르메나크는 그의 무기와 외투를 걸치고 부대를 포위망 밖으로 이끌었다 — 그리고 평생 그 이름으로 살았다.
아르메니아 카라바흐 출신으로 15세에 바쿠 유전에서 노동하며 볼셰비키에 합류, 내전에서 기병 지휘관으로 활약하다 익사 직전 구해준 전우 세르게이 후댜코프의 이름을 이어받았다.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를 우등 졸업한 뒤 공군 참모·군수 요직을 거쳐, 대조국전쟁기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서부전선 공군을 지휘하고 항공군 편제 개혁을 주도했다. 쿠르스크·드네프르 전투에서 항공작전을 조율하고 1944년 항공원수에 올랐으며, 테헤란·얄타 회담에 스탈린의 항공 군사고문으로 배석했다. 1945년 만주 전략공세작전에서 제12항공군을 지휘해 푸이 체포와 만주 금괴 확보를 성공시켰으나, 그해 12월 체포되어 1950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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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22바쿠 적위대 조직, 차리친 방어, 자캅카스 전선 기병대대장
1928–1936기병연대 참모장,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우등 졸업
1937–1941공군 작전과장·군수국장, 서부특별군관구 공군 참모장 → 서부전선 공군 사령관 (모스크바 방어전)
1942–1943붉은군대 공군 참모장 → 제1항공군 사령관, 항공군 편제 개혁 주도
1943–1944공군 부사령관 겸 참모장, 쿠르스크·드네프르 항공작전 조율, 항공원수 (1944.8)
1943–1945테헤란·얄타 회담 항공 군사고문
1945제12항공군 사령관, 만주 작전 — 푸이 체포·금괴 확보
1945–19541945년 12월 체포, 1950년 4월 18일 처형, 1954년 8월 18일 복권, 1965년 계급·훈장 회복
메르쿨로프는 회고했다 — "베리야는 밤늦은 업무를 마친 뒤 언제나 코불로프만 데리고 집이나 다차로 향했다." 루뱐카의 그 누구보다 코불로프는 베리야의 사적인 영역에 속한 인물이었다.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인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1925년 1월 당에 들어갔고, 1922년 그루지야 체카에서 보안 기관 경력을 시작했다. 1931년 베리야의 눈에 들어 그루지야 GPU 비밀정치부로 옮겨간 뒤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차석(1937–1938)과 NKVD 수사부장(1938–1939)을 지냈다. 1940년 폴란드군 장교·경찰 등을 사형에 처한 카틴 학살 3인조의 일원이었고, NKVD·NKGB 차석으로 체첸·인구시와 크림 타타르 등 민족 강제이주를 지휘했다. 1946년부터 해외 소련 재산 총국(GUSIMZ) 부국장, 1951년 10월부터 제1부국장이었고 1953년 3월 내무부 제1차관이 되었으나 6월 27일 베리야와 함께 체포되어 12월 23일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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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1931그루지야 체카·GPU에서 하급 보안 요원으로 근무
1931–1937베리야에게 발탁되어 그루지야 GPU 비밀정치부에서 활동, NKVD로 승계
1937–1938그루지야 NKVD 차석, 대숙청기 현장 숙청 책임
1938–1939NKVD 수사국장 — 예조프 사건과 주요 정치사건 수사 총괄
1939–1941NKVD 경제총국장, 카틴 학살 사형 판결 3인조(1940) 참여
1941–1945NKVD·NKGB 부인민위원(차석) — 체첸·인구시·크림 타타르 등 민족 강제이주 작전 지휘
1956년 흐루쇼프가 ITEP 해직자들의 체포를 막기로 한 후, 알리하노프는 당 회의에서 발언했던 네 사람에게 말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았다면 너희는 영웅이다. 몰랐다면 바보다.'
소련 핵물리학의 창시자 중 한 명. 양전자 분광학 연구(1933~1940)와 코조다예프와 개발한 자기분광계는 소련 핵전자공학의 기초가 되었다. 원자폭탄 계획에서 특별위원회 과학기술위원회 과학서기로 중수로 개발을 맡았다. 1945년 제3실험실(후일 ITEP)을 설립해 23년간 소장으로 재임하며, 소련 최초의 중수 연구용 원자로(1949)와 산업용 중수로(1951)를 직접 지휘했다. ITEP의 7 GeV 싱크로트론(1961)은 세계 최대의 70 GeV 세르푸호프 가속기(1967) 원형이 되었다. 평생 무당파였으며, 반세계주의 캠페인에서 연구원을 보호하고 '300인의 편지'에 서명했으며, 1966년 스탈린 복권 반대 서한에 카피차·사하로프와 함께 참여했다.
스탈린이 물었다: "어떤 바보가 우리에게 비밀을 팔겠는가?" 그 바보는 영국 노동당 정부였다. 미코얀은 1946년 제트 엔진을 사러 런던으로 날아갔고, 롤스로이스 닌의 역설계가 곧 MiG-15의 심장이 되었다.
아르메니아 산골 마을 출신 선반공에서 소련 최대 전투기 설계국의 창립자로 거듭난 인물. 1939년 미하일 구레비치와 OKB-155(MiG)를 창설, MiG-15로 한국전쟁의 제공권을 장악하고 MiG-21이라는 사상 최다 생산 초음속 전투기를 내놓았다. 정치국원 아나스타스 미코얀의 동생이지만,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과 여섯 차례 스탈린상, 레닌상을 받으며 스스로 기술관료의 정점에 올랐다. 그의 설계국 항공기들은 55개 세계 기록을 수립했다.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에 기폭장치를 손수 꽂은 핵물리학자, 제2핵무기연구소의 초대 과학책임자
1949년 8월 29일, 셸킨은 조립동에서 RDS-1을 수령하는 서류에 서명하고, 플루토늄 구체에 기폭장치를 삽입한 뒤 탑의 출입문을 봉인했다. 그가 '기폭' 버튼을 누른 마지막 사람이었다.
키릴 셸킨은 연소·폭발 물리학자로서 스핀 폭굉 이론을 정립했고, 소련 원자폭탄 계획에서 결정적 실무를 맡은 인물이다. 1949년 8월 29일 세미팔라틴스크 실험장에서 그가 직접 플루토늄 구체에 기폭장치를 삽입하고 탑의 출입문을 봉인한 뒤 기폭 버튼을 눌렀다. 이후 1955년 우랄 지역에 두 번째 핵무기 설계국인 첼랴빈스크-70(현 브니이테에프)의 초대 과학책임자 겸 수석설계자로 부임하여 소련 최초로 실전배치된 열핵무기를 개발했다. 쿠르차토프, 하리톤과 함께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으나 1959년 연속된 심장발작으로 1960년 은퇴했다.
1953년 8월, 중앙위원회 간부 데도프는 흐루쇼프에게 보낸 진정서에서 그리고랸의 동료들이 그와 베리야의 '가까운 관계'를 지적했다고 보고했다.
아제르바이잔의 아르메니아인 마을에서 태어난 그리고랸은 군대 신문 편집자에서 시작해 모스크바 당 기관의 출판·선전 책임자로 올라섰다. 1949년 미하일 수슬로프의 후임으로 대외정책위원회(국제부) 위원장에 임명되어 1953년까지 소련 공산당과 전 세계 공산당 간 관계를 총괄했다. 그의 재임기는 코민포름 창설 이후 유고슬라비아와의 결별이 심화되고 중국 혁명이 승리했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한 시기와 겹친다. 1952년 제19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953년 베리야 숙청 이후 측근으로 지목되어 중앙위원회에서 제외되고 외교부로 전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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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1924아제르바이잔 당 중앙위원회 출판부장, 군대 신문 편집
1924–1927모스크바 하모브니키 구당위 출판부장, 모스크바 시당위 출판부장
1927–1933트빌리시에서 「라보차야 프라우다」, 「프롤레타르」, 「나 루베제 보스토카」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