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경찰 제복을 입은 그들은 거리에서 쿠테포프를 멈춰 세우고 심문을 구실로 차에 태웠다. 쿠테포프는 저항했고, 몸싸움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세레브랸스키가 내게 말했다. — 파벨 수도플라토프, 『특수임무』
민스크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23년 OGPU에 영입되어 팔레스타인에 첫 소련 스파이망을 구축했고, 유럽 전역에서 200명 이상을 포섭했다. 1930년 파리에서 프랑스 경찰로 위장해 백군 지도자 쿠테포프 장군을 납치·살해했으며, 트로츠키 아들의 기록보관소 탈취와 스페인 공화파 군용기 밀반입을 지휘했다. NKVD 특수임무반(SGO) 책임자로 활약했으나 1938년 베리야에게 체포되어 아바쿠모프의 고문으로 거짓 자백하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1941년 수도플라토프의 요청으로 사면되어 전시 정보전에 복귀했고, 1953년 베리야 사건에 연루되어 재체포된 후 부티르카 감옥에서 심문 중 사망했다. 1971년 복권.
1921년 타간체프 사건으로 페트로그라드 지식인들을 대거 처형한 뒤, 어찌 그리 가혹하냐는 물음에 아그라노프는 답했다. "페트로그라드 지식인의 70퍼센트는 한쪽 다리를 적의 진영에 담그고 있었소. 우리는 그 다리를 불태워야 했소."
1893년 10월 12일 모길료프 현 체체르스크에서 상인 집안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2년 사회혁명당에 들어갔다가 1915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같은 해 체포돼 예니세이 현으로 유배됐다. 1918년 인민위원회 서기로 레닌과 제르진스키의 지시를 직접 받았고, 1919년 체카에 들어가 크론슈타트 봉기와 안토노프 농민 봉기, 타간체프 사건을 수사했다. OGPU 비밀부장과 부의장을 거쳐 1934년 내무인민위원 제1부관 겸 국가보안총국 실질 책임자가 되어 키로프 살해 수사를 지휘했다. 1937년 사라토프로 좌천됐다가 체포돼 1938년 8월 1일 총살됐고, 사후 복권되지 않았다.
상세 이력 보기
1919–1931체카와 OGPU의 정치수사 요원 겸 특별전권위원
1931–1933OGPU 비밀정치부장, OGPU 위원회 위원
1933–1934OGPU 부의장
1934–1936내무인민위원 제1부관, 국가보안총국 업무 실질 지휘
1936–1937NKVD 국가보안총국장
1937–1938사라토프 NKVD 책임자, 1937년 7월 20일 체포돼 1938년 8월 1일 총살
10년간 벨라루스 공업화를 진두지휘한 정부수반, 아카데미 숙청에 서명하고 같은 심판대에 서다
1937년 6월 21일 민스크 NKVD 5층 심문실에서 '폴란드 간첩' 혐의를 받던 골로데트는 심문 도중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 공식 발표는 자살, 비공식 증언은 구타 살해 후 위장.
일곱 살부터 목동으로 일한 농민 혁명가로, 1927년부터 벨라루스 공화국 정부수반을 10년간 맡아 공업화와 집단화를 주도하며 공화국을 농업 국가에서 공업 국가로 바꾸어 놓고 1935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과학아카데미 학자 추방 결의에 직접 서명한 그 자신도 1937년 '폴란드 간첩'으로 체포되어 민스크 NKVD 심문 중 투신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11–1915크리보이로크 광산에서 선로 수리공, 자물쇠공, 전기기사로 노동
1917남서부전선 병사위원회에서 볼셰비키 혁명 선전 활동
1918–1921RCP(b) 입당, 적위대 조직 및 독일군·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과 교전; 노보집코프현 소비에트 활동
1921–1924고르키현 집행위원회 의장, 도적 진압 트로이카 의장
1925–1927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
1927–1937벨라루스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 공업화·집단화 주도
1930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벨라루스 과학아카데미 학자 6인 추방 결의 서명
1938년 11월, 예조프가 NKVD를 잃은 지 며칠 만에 비서실장 샤피로가 체포되었다 — 대숙청의 모든 수치를 관리하던 사람이 이번에는 자기 상관을 겨눈 조서의 진술자가 되었다.
재무인민위원부와 소비에트통제위원회, 당 중앙위 기구를 거친 경제 관료 출신으로, 1937년 1월 예조프를 따라 NKVD에 들어가 비서실 부실장·실장과 제9특별부장을 지냈고, 1938년부터는 작전 기록·등록·통계를 총괄하는 제1특별부장을 맡았다. 대숙청의 문서와 수치가 그의 손을 거쳐 예조프의 책상에 올랐고, 그 공로로 적성훈장과 명예 체키스트 휘장을 받았다. 예조프 몰락 직후인 1938년 11월 13일 체포되어 옛 상관에게 불리한 진술을 남기고 1940년 2월 군사법정에서 총살형을 선고받아 처형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스페인 공화국의 금을 모스크바로 실어 보내고 POUM을 부순 NKVD 총고문, 그리고 스탈린에게서 달아난 망명자
1938년 7월, 안트베르펜에 정박한 소련 선박으로 오라는 전보를 받은 오를로프는 아내와 딸을 데리고 캐나다행 배에 올랐다. 그리고 예조프와 스탈린 앞으로 편지를 남겼다. 자신과 모스크바에 있는 노모를 건드리지 않는 한, 자신이 아는 것은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15년 동안 침묵했다.
본명 레이바 라자레비치 펠트빈. 내전기 적군과 국경경비대를 거쳐 1926년부터 대외정보부(INO)에서 파리·베를린·빈·런던의 비합법 거점을 맡았고, 1936년 9월 스페인 공화국 내무부 파견 연락관으로 마드리드에 도착해 이듬해 스페인 NKVD 총책임자가 되었다. 카르타헤나에서 공화국 금 준비 510톤을 소련으로 실어 보낸 작전과, POUM을 반역 조직으로 몰아 서기장 안드레우 닌을 납치·살해한 작전이 그의 이름에 남았다. 1938년 7월 소환 명령이 곧 처형을 뜻한다고 판단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달아났고, 스탈린이 죽은 뒤인 1953년 『스탈린 범죄의 비사』를 펴내 대숙청에 대한 내부자의 증언을 남겼다. 다만 자신을 장성급으로 소개하고 케임브리지 조직 포섭을 자기 공으로 돌린 진술들은 문서고가 열린 뒤 상당 부분 과장으로 평가되며, 그의 실제 계급은 국가보안소령이었다.
상세 이력 보기
1895보브루이스크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레이바 라자레비치 펠트빈으로 출생
1916–1921모스크바 대학 법학 중퇴 후 제정 육군 징집, 이어 적군과 내전기 정보·유격 임무
1921–1924법학 복귀, 크릴렌코 아래 최고혁명재판소 근무
1924.05국가정치보안부(OGPU) 입직
1926–1930대외정보부(INO) 파리·베를린 파견, 통상대표부 위장 근무
1933–1935빈·코펜하겐·런던 비합법 거점 지휘 (영국에서는 윌리엄 골딘 명의)
1936.09스페인 공화국 내무부 파견 NKVD 연락관으로 마드리드 부임
1936.10카르타헤나에서 공화국 금 준비의 소련 이송 작전 수행, 레닌 훈장 수훈
1937스페인 NKVD 총책임자: POUM 탄압과 안드레우 닌 납치·살해 지휘, 유격전 훈련학교 운영
김나지움 시절 고멜 상공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를 보고 소년 파벨은 숨이 멎는 듯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락방으로 올라가 모형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새가 아니라 사람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벨라루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투폴레프의 제자로 항공에 입문한 소련의 항공기 설계자. 1939년 수호이 설계국(OKB-51)을 창립해 Su-2 경폭격기를 전력화했고, 스탈린의 총애를 잃어 1949년 설계국이 해체되는 시련을 겪었다. 스탈린 사후인 1953년 재건된 OKB에서 Su-7 전폭기(1960년대 소련 전술항공의 주력), Su-9·Su-15 요격기, 가변익 Su-17·Su-24 등 냉전기 소련 공군의 중추 기종들을 연이어 배출했다. 기술적 예측력으로 동시대 설계자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가 마지막으로 착수한 Su-27은 세계 최상급 전투기로 완성되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스탈린상을 수상했고 1958년부터 1974년까지 소련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상세 이력 보기
1915–1920모스크바 공과대학 입학, 징집으로 중단 → 포병 장교, 제대
1921–1925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MVTU) 복학, 투폴레프 지도하에 졸업
1925–1938TsAGI·투폴레프 설계국 — I-4, ANT-25, ANT-37bis 설계 참여
1939–1949수호이 설계국(OKB) 창립 — Su-2, Su-6(스탈린상), Su-9 제트기
1929년 12월, 야코블레프는 전체 농지의 '최소 3분의 1'을 1930년 봄까지 집단화하자고 제안했다. 스탈린은 지나치게 신중하다며 기각했고, 야코블레프는 그대로 물러서 상향된 강행 일정을 충실히 집행했다.
본명 예프스타인. 1913년 볼셰비키 입당, 혁명 후 우크라이나에서 당 활동을 이끌었다. 1923년부터 『농민신문』 편집장을 맡아 농촌 문제 전문가로 부상했고, 1929년 초대 소련 농업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정치국 집단화 위원회를 주도했다. 1930년 1월 5일 포고령을 기초해 주요 곡창지대의 강제 집단화 일정과 '부농 계급 청산' 정책을 설계했으며, 트로핌 리센코를 발탁해 소련 생물학의 반과학적 전환에도 관여했다. 대숙청 중 체포되어 1938년 처형되었다.
체포된 블라시크는 "나를 체포했다면, 곧 스탈린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한 달 반 뒤 스탈린은 죽었다.
벨라루스 농민 출신으로, 1931년부터 1952년까지 25년간 스탈린의 개인 경호를 책임지며 소련 지도자의 신변 안전과 모든 별장·관저를 총괄했다.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사후 스탈린의 자녀들을 사실상 양육했고, 경호 업무를 넘어 스탈린 가문의 집사 구실까지 했다. 중장까지 진급하고 레닌 훈장 3개와 쿠투조프 1급 훈장을 받았으나, 1952년 말 의사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실각했다. 1955년 유죄 판결로 계급과 훈장을 박탈당했으며, 사후 2000년이 되어서야 러시아 대법원에 의해 무죄가 확정되었다.
문서로 확인되는 소콜롭스키의 대표 행보는 1946~49년 소련군정청 최고책임자로서 서베를린 봉쇄를 개시·지휘한 것이며, 스탈린은 이 조치를 높이 평가해 그에게 레닌 훈장을 수여했다.
1897년 그로드노 현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교회부설 학교와 네벨 사범학교를 마치고 1918년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독소전쟁에서 서부방면군 참모장(1941~43)과 사령관(1943~44)을 지냈고, 오르샤·비텝스크 공세 실패로 1944년 4월 해임된 뒤 제1우크라이나 방면군 참모장으로 베를린 공세 준비에 참여했다. 1945년 5월 독일 무조건 항복 조인식의 소련 측 참여자였고,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소련군정청 최고책임자 겸 점령군 총사령관으로 서베를린 봉쇄를 지휘했다. 1952~60년 참모총장 겸 국방장관 제1차관을 지낸 뒤 196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국방부 총감찰로 재직했고, 1962년 『군사전략』을 주편해 서방에 널리 알려졌다.
상세 이력 보기
1918–1921붉은 군대 자원입대(1918), 군사아카데미를 최우수 3인 중 하나로 졸업
1940년 8월 20일 코요아칸에서 메르카데르가 트로츠키를 공격한 동안 에이팅곤과 카리다드 메르카데르는 각각 다른 차에서 대기했고, 메르카데르가 붙잡리자 달아났다.
벨라루스 슈클로프 출신 유대인으로, 어린 시절 포그롬을 겪었고 1917년 사회혁명당에 가담했다가 내전 중 볼셰비키로 전향해 고멜 체카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OGPU 외국부 요원으로 중국·터키·서유럽에서 암약했고, 에스파냐 내전기 오를로프의 부관으로 공화국 금 보유분을 소련으로 반출했다. 1940년 수도플라토프와 함께 트로츠키 암살 작전을 설계했으며, 독소전쟁 중에는 제4국 부책임자로서 적 후방의 전략적 기만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종전 후 원자력 첩보 부서를 총괄했으나 1951년 '시온주의 음모'로 체포되어 12년간 복역했고, 1964년 석방되어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다 1981년 모스크바에서 자연사했으며 1992년 사후 복권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1917–1919사회혁명당 입당; 모길료프 노동자·협동조합 활동; 1919년 RKP(b) 입당
1920–1924고멜 체카 — 비밀작전부장 대리, 사빈코프 토벌 중 부상; 군사아카데미 동양부 졸업
1925–1930OGPU 외국부 — 중국·터키 암약; 하얼빈 소련 총영사관 부영사
1930–1936OGPU 특수작전국 — 세레브랸스키 보좌; INO 불법작전부 책임자
1936–1939에스파냐 내전 — NKVD 부주재관 (Kotov 장군); 공화국 금 보유분 소련 반출
1936년 가을, 고레프는 마드리드 방어에서 공화파 민병대를 규율 있는 군대로 재편하는 소련 고문단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블라디미르 고레프는 러시아 내전과 중국 혁명전쟁을 거친 소련 군인이자 군사고문이었다. 1936년 스페인에 파견되어 ‘산초’라는 암호명으로 공화파 군대의 조직과 마드리드 방어를 지원했고, 이후 북부 전선에서도 활동했다. 귀국 뒤 대숙청의 피고가 되어 처형되었으나 1956년 복권되었다.
1938년 11월, 요양원에 있는 그에게 남편이 루미날을 보냈다. 며칠 뒤 그는 과다 복용으로 숨졌다.
고멜의 상인 가정에서 예브게니야 파이겐베르크로 태어나, 하유틴·외교관 글라둔과의 결혼을 거쳐 1931년 예조프와 결혼했다. 1930년대에는 화보지 《건설 중의 소련》의 부편집인으로 사실상 편집을 이끌었고, 바벨과 숄로호프, 예이젠시테인 같은 문화계 인사들이 드나드는 모스크바 살롱을 열었다. 1933년 딸 나탈리야를 입양했다. 1938년 남편의 몰락이 다가오자 가까운 친구들이 잇따라 체포되었고 그 자신의 과거를 고발하는 진정서도 접수되었다. 심한 우울 상태로 요양원에 들어갔고, 남편이 보내 준 수면제 루미날의 과다 복용으로 1938년 11월 21일 사망했다. 돈스코이 묘지에 묻혔다.
북조선 소련군정의 실질적 수장, 김일성의 무력통일 구상을 스탈린에게 전달해 개전을 이끌어낸 중개자
안드레이 란코프는 시티코프가 '일본 식민정치인들을 제외한 어떤 외국인보다도 한반도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1945~50년 북조선 국가의 실질적 설계자'라고 평가했다.
벨라루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레닌그라드 콤소몰에서 경력을 쌓고 레닌그라드 주당 제2서기(1938~1945)로 부상한 소련의 군사정치 지도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여러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복무하고 1944년 상장 계급을 받았으며, 1945년 극동전선군 정치위원으로 북조선에 진입했다. 1945~1948년 북조선 소련군정의 실질적 수장으로서 김일성을 집권시키고 토지개혁을 설계했으며, 1948~1950년 초대 주조선 대사로 김일성의 남침 구상을 스탈린에게 전달해 개전 승인을 이끌어냈다. 전황 역전 후 정보 실패로 1950년 해임·강등되었고, 흐루쇼프 시기 노브고로드·프리모리예 당서기와 주헝가리 대사를 지내고 1964년 사망했다.
“그는 내 얼굴과 머리를 때리고, 내가 쓰러지자 배를 발로 찼다… 나는 의사가 주사기를 든 것을 보았다. 겁이 나서 바로 두 통의 조서에 서명했다.”
벨라루스계 출신으로 레닌그라드 공장과 당 기구를 거쳐 야로슬라블 주당위 제1서기(1946–1949)까지 오른 당 간부로, 전후 알렉세이 쿠즈네초프가 러시아 공화국 각지에 배치한 지역 간부 중 한 명이었다. 1950년 9월 29~30일 레닌그라드 사건 재판에서 중앙 피고인 6인과 함께 기소되어 사형 대신 1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MGB 수사관들에게 구타당해 허위 자백에 서명했고, 1954년 석방·복권된 후 조용히 살다 1994년 사망했다.
1949년 8월 29일, 첫 소련 원자폭탄 실험 후 젤도비치가 떠올린 장면: "놀란 것은 풀이었다. 놀라운 정적이 흐르다가 갑자기 풀이 눕는 것이 보였다 — 충격파가 도착한 것이다. 정적과 쓰러진 풀, 그것이 핵폭발의 가장 강렬한 인상이었다."
민스크 유대인 가정 출신의 독학형 물리학자. 1939–1941년 하리톤과 우라늄 연쇄반응을 세계 최초로 계산했고, 아르자마스-16 이론부장으로 첫 소련 핵실험과 수소폭탄 계산을 주도했다. 1963년 핵무기 연구를 떠나 천체물리학으로 전환, 효과, 우주 대규모 구조, 블랙홀 증발의 기초를 개척했다. 1955년 '300인의 편지'에 서명, 영국 왕립학회·미국 국립과학원 외국회원.
아우슈비츠 해방 직후, 보론초프가 촬영한 생존자와 수용소의 영상은 현장을 국제적 증거로 바꾸었다.
알렉산드르 보론초프는 소련의 다큐멘터리 영화 촬영기사이자 감독으로, 전쟁의 현장을 기록 영상으로 남긴 인물이다. 1945년 1월 말 제1우크라이나 전선 촬영팀과 함께 해방 직후의 아우슈비츠를 촬영했고, 그 영상은 영화 《아우슈비츠》와 뉘른베르크 재판에 제출된 소련 측 증거에 포함되었다. 전쟁 뒤에는 중앙 다큐멘터리 영화 스튜디오에서 촬영과 연출을 이어 가며 전선 기록을 평시의 국가 영화 제작으로 연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