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기능·활동
국가·세력
정치적 입장(선택됨)
국적
출신 배경
시대(선택됨)

사아드 자글룰

سعد زغلول
독립 활동 민족해방·반식민 운동 이집트 이집트 1857–1927 ○ 자연사

1919년 몰타 추방이 이집트 혁명을 불러온 와프드당 창립 지도자

나일강 삼각주의 농촌에서 태어나 알아즈하르와 카이로의 법률학교에서 공부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영국 점령 아래 판사, 교육장관(1906~1908), 법무장관(1910~1912)을 지냈고 1913년 입법의회 부의장이 되었다. 1918년 11월 보호령 폐지와 강화회의 대표권을 요구하며 와프드를 이끌었다. 영국이 1919년 3월 그를 몰타로 추방하자 1919년 이집트 혁명이 일어났다. 뒤에 세이셸로 다시 추방되었다가 1923년 돌아왔다. 1924년 선거에서 와프드당이 압승해 첫 와프드 정부의 총리가 되었으나, 그해 11월 수단 총독 리 스택이 암살되고 영국이 요구를 들이밀자 사임했다. 1927년 카이로에서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6–1908교육장관
  • 1910–1912법무장관
  • 1913입법의회 부의장
  • 1918와프드 창립 지도자
  • 1919.03몰타로 추방, 1919년 이집트 혁명
  • 1924이집트 총리

이동휘

이동휘
민족해방·반식민 운동 대한제국 조선 1873–1935 ○ 병사

일제에 맞서 볼셰비키 혁명과 민족해방을 접목시킨 조선 공산주의의 선구자

임종 직전 "나는 조선의 혁명이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소. 동무들은 반드시 고려소비에트공화국을 성립하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대한제국 장교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전향하여 조선 민족해방운동에 마르크스주의를 최초로 접목시킨 공산주의 선구자. 1918년 한인사회당을 창당하고,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무장독립노선을 추진했으며, 이승만과 결별 후 고려공산당(상하이파)을 이끌며 민족해방과 계급혁명의 결합을 추구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5–1902한성무관학교 졸업, 육군 참령·강화도 진위대장
  • 1906–1911신민회 조직, 보창학교 설립, 105인 사건 투옥
  • 1913–1917연해주·북간도 망명, 대전무관학교 설립 및 독립군 양성
  • 1918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 창당, 위원장
  • 1919–1921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 1921고려공산당(상하이파) 창당
  • 1922–1935코민테른 연락, MOPR 원동지역 한인 책임자

미르자 쿠착 칸

میرزا كوچک خان
민족해방·반식민 운동 이란 이란 1880–1921 ✕ 도피 중 동사

길란의 정글리 운동을 이끌고 1920년 길란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한 이란의 혁명가

1880년 라슈트에서 길란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이란 입헌혁명에 가담했고, 1909년 테헤란을 점령한 입헌파 부대의 하급 지휘관이었다. 1914~1915년 길란의 숲에서 정글리 운동을 일으켜 지방 자치, 중앙정부의 부패 척결, 외세 간섭 중단과 토지 개혁을 요구했다. 1920년 소비에트 함대가 엔젤리에 들어오자 내정 불간섭을 조건으로 손잡고 6월 5일 길란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해 그 수반이 되었으나, 토지 재분배를 거부해 공산주의자들과 갈라섰다. 1921년 5월 정부 수반으로 돌아왔지만 소련이 지원을 끊은 뒤 레자 칸의 정부군에 패했고, 탈레시 산지로 달아나다 동상으로 숨졌다. 잘린 머리는 라슈트에 내걸렸다.

상세 이력 보기
  • 1909입헌파 부대 하급 지휘관으로 테헤란 점령에 참가
  • 1914–1921길란 정글리 운동 지도자
  • 1920길란 소비에트 공화국 임시정부 수반
  • 1921길란 공화국 임시정부 수반 복귀

마나벤드라 나트 로이

মানবেন্দ্র নাথ রায়
코민테른 공산주의 인도 인도 1887–1954 ○ 심장마비

레닌과 식민지 혁명을 논쟁한 인도 마르크스주의자

“당신은 정말 젊군요! 나는 동방에서 온 백발의 현자를 기대했는데.” — 1920년 크렘린에서 로이를 처음 만난 레닌이 27세의 인도 혁명가에게 건넨 첫마디.

벵골 출신 마르크스주의자. 1920년 코민테른에서 식민지 문제로 레닌과 논쟁했고, 멕시코 공산당과 인도 공산당 창립을 주도했다. 제명 후 영국에서 6년간 투옥, 말년에 급진적 인본주의로 전회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7멕시코 사회당 창립 참여 (이후 멕시코 공산당으로 전환)
  • 1919멕시코 공산당 창당 — 러시아 밖 최초의 공산당
  • 1920제2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식민지 문제 보충 테제 제출, 레닌과 논쟁
  • 1920타슈켄트에서 인도 공산당 창립 주도
  • 1922–1929코민테른 집행위원·상임간부회 위원, 중국 문제 담당
  • 1929부하린 우익반대파 가담으로 코민테른에서 제명
  • 1931–1936영국 식민당국에 체포되어 반역죄로 6년간 투옥
  • 1940–1948급진민주당 창당, 반파시스트 노선 견지
  • 1947『신인본주의』 선언 발표 — 급진적 인본주의 철학 정립

아구스틴 파라분도 마르티

Agustín Farabundo Martí
민족해방·반식민 운동 엘살바도르 엘살바도르 1893–1932 ✕ 처형

중미 공산주의의 아버지, 산디노의 대령, 라 마탄사의 순교자

미군기가 산디노 진영을 폭격하는 가운데, 마르티는 타자기를 밀치며 말했다. "역사가 펜으로 쓰이지 못할 때는 총으로 쓰여야 한다." 그리고 소총을 들고 미군기를 향해 사격했다.

엘살바도르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가로, 중미 공산주의 운동의 선구자이다. 1930년 엘살바도르 공산당(PCS)을 공동 창건하고 1932년 대공황으로 몰락한 농민·원주민의 무장봉기를 이끌었으나 마르티네스 군부의 라 마탄사 학살로 진압·총살당했으며, 사후 그 이름은 FMLN에 계승되어 중미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0멜렌데스 독재 반대 학생시위 주도, 체포 후 과테말라로 망명
  • 1925중미공산당 공동 창립 (과테말라시티)
  • 1925–1928국제적색원조(SRI) 엘살바도르 대표, 지역노동연합(FRTS) 조직
  • 1928–1929산디노의 비서 겸 EDSN 대령, 니카라과 주둔 미군에 맞서 게릴라전
  • 1930엘살바도르 공산당(PCS) 공동 창립
  • 1931–1932PCS 임시 총비서; 마르티네스 쿠데타 후 농민·원주민 무장봉기 지도

아우구스토 세사르 산디노

Augusto César Sandino
민족해방·반식민 운동 니카라과 니카라과 1895–1934 ✕ 암살

미 제국주의에 맞서 니카라과 게릴라전을 이끈 범라틴 반제 영웅

“조국의 배신자가 침략자들의 손에 내 유해를 넘기지 않게 하라.” — 산디노 선언(1927)

니카라과의 혁명가이자 게릴라 지도자. 1927년부터 1933년까지 미군 점령에 맞서 '국가주권 수호군(EDSN)'을 이끌며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반제국주의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1934년 소모사가 이끄는 국가경비대에 암살되었고, 그의 유산은 1961년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으로 이어져 1979년 소모사 독재를 전복시켰다.

상세 이력 보기
  • 1912미군 개입과 셀레돈 장군 전사 목격 — 반제의식 형성
  • 1921–1926멕시코 망명 — 스탠더드오일 정유공장 노동, 멕시코 혁명 사상 접촉
  • 1926–1927니카라과 귀국 — 금광 노동자 중심 의용군 조직, 입헌전쟁 참전
  • 1927.07에스피노네그로 협정 거부 — 산 알비노 선언으로 대미 게릴라전 개시
  • 1927–1933국가주권 수호군(EDSN) 총사령관 — 미 해병대 상대 6년 게릴라전 지휘
  • 1929–1930멕시코 망명 — EMECU 정신주의 공동체 참여, 범중미 반제연대 모색
  • 1933미군 철수 후 사카사 정부와 평화협정 — 무장 해제 합의
  • 1934.02.21대통령궁 회담 후 국가경비대에 체포·처형 — 시신 행방불명

탄 말라카

Tan Malaka
인도네시아 공산당 공산주의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1897–1949 ✕ 처형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아버지, 마르크스주의와 이슬람을 접목한 혁명 이론가

“모스크바에 앉아 인도네시아 혁명을 지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들은 식민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다.” — 1926년 봉기 승인을 구하러 마닐라로 온 알리민에게

인도네시아 공산당 초기 의장이자 『공화국을 향하여』의 저자. 마르크스주의와 이슬람의 연대를 주장해 코민테른과 결별했고, 해방 후 완전 독립 노선으로 신생 공화국의 방향을 흔들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3포트 더 콕 사범학교 졸업, 다툭(datuk) 족장 칭호 수여
  • 1913–1919네덜란드 유학, 러시아혁명에 감화되어 마르크스주의로 전향
  • 1919–1920델리 차 농장 노동자 자녀 교사 — 『가난한 자들의 땅』 집필
  • 1921.06사레카트 이슬람 학교(세콜라 탄 말라카) 설립, 세마랑과 반둥으로 확산
  • 1921.12인도네시아 공산당(PKI) 의장 취임 — 세마운 후임
  • 1922네덜란드 당국에 체포되어 네덜란드로 추방 — CPN 하원 후보 출마
  • 1922–1923코민테른 제4차 대회 참석 — 범이슬람주의와 공산주의 연대 주장
  • 1923–1925코민테른 동방부 대리인 — 광저우에서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향하여』 집필
  • 1925–1927마닐라 체류, 1926년 PKI 봉기를 반대했으나 저지 실패
  • 1927방콕에서 인도네시아 공화당(PARI) 결성 — 코민테른과 결별
  • 1927–1942중국·싱가포르·필리핀 등지에서 가명으로 지하활동 — 『마딜록』 집필
  • 1945–1946인도네시아 귀환, 투쟁연맹 결성 — 스자르르 내각 퇴진 견인
  • 1946–1948체포·구금 — 수감 중 자서전 『감옥에서 감옥으로』 집필
  • 1949.02.21동자바 블림빙에서 공화국군에 체포되어 총살

김원봉

김원봉
북조선로동당 아나키스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족 1898–1958 ↓ 사망

의열단 창설자로서 조선의용대·광복군을 거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에 이른 무장투쟁가

베이징에서 김익상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얻어지는 것이오. … 우리가 먼저 피를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김익상은 그 자리에서 의열단에 가입했고, 수주 뒤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졌다.

의열단을 조직해 6년간 일본 식민통치 기관에 대한 폭탄 투척과 요인 암살을 지휘한 무정부주의적 독립운동가. 이후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해 연합전선을 모색했으며,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광복군 부사령관 겸 군무부장으로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해방 후 좌우합작에 힘쓰다 여운형 암살로 남한 내 입지가 무너지자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잔류해 국가검열상과 노동상을 역임했으며, 1958년 숙청당했다. 의열투쟁에서 통일전선 정치로, 다시 분단 후 조선 내각까지, 조선 혁명 진영 전체를 가로지른 유일한 인물이다.

상세 이력 보기
  • 1919의열단 창설, 단장(의백) 취임
  • 1926황푸군관학교 제4기 입학
  • 1935조선민족혁명당 창당
  • 1938조선의용대 편성, 대장 취임
  • 1944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부사령관
  • 1948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검열상
  • 1952내각 노동상
  • 1957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김책

김책
중국공산당 혁명군(1949년 이전) 중국 공산주의 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03–1951 ✕ 전시 과로사

만주 항일유격대에서 김일성과 함께 싸운 조선의 혁명군사 지도자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쓰던 금고 안에는 오직 한 장의 사진만이 보관되어 있었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이 금고를 열자, 그 안에는 김책과 함께 찍은 낡은 사진 한 장만이 남아 있었다.

1920년대 만주에서 조선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을 거치며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했고, 1930년대 동북항일연군에서 김일성·최용건과 함께 '만주파 3인방'으로 불리며 유격전을 지휘했다. 1945년 귀국 후 김일성의 최측근으로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설과 김일성 추대 운동을 주도했고,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초대 부수상 겸 산업상으로 취임해 전후 산업 기반 복구를 진두지휘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전선사령관으로 인민군을 지휘했으며, 1951년 1월 전시 중 과로로 사망했다. 사후 그의 이름은 김책시·김책공업종합대학·김책제철소에 붙여졌다.

상세 이력 보기
  • 1927조선공산당 입당, 간도공산당 사건으로 체포·투옥
  • 1930중국공산당 입당, 동경성구위 서기
  • 1933–1940동북항일연군 제3군 제4사 정치부 주임, 북만임시성위 서기
  • 1942–1945소련 극동 제88국제여단 제3영 정치위원
  • 1945–1946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설 주도, 평양학원 초대 원장
  • 1946–1948북조선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북조선로동당 정치위원
  • 1948–1951내각 부수상 겸 산업상, 민족보위성 부상 겸직
  • 1950–1951한국전쟁 조선인민군 전선사령관

김무정

金武亭
중국공산당 혁명군(1949년 이전) 중국 공산주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04–1952 ↓ 병사

대장정을 완주한 유일한 조선인, 팔로군 포병사령관에서 조선의용군 총사령을 지낸 연안파 군사지도자

30여 명의 조선인이 대장정에 나섰으나 오직 무정만이 살아남아 옌안에 도착했다.

중국공산당에 1925년 입당하여 대장정에 참가한 유일한 조선인으로, 팔로군 포병사령관까지 올랐다. 화북에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조직해 총사령을 맡으며 연안파의 핵심 군사지도자가 되었다. 해방 후 북조선으로 돌아와 조선인민군 포병사령관 겸 제2군단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으나, 김일성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 1950년 12월 패전 책임과 살인 혐의로 숙청되었다. 그의 몰락은 연안파 제거의 신호탄이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5중국공산당 입당
  • 1934–1935중국 홍군 대장정 참가
  • 1937–1940팔로군 포병사령관
  • 1942조선의용군 총사령
  • 1946북조선로동당 제2비서
  • 1948민족보위성 부상 겸 제2지휘소 사령관
  • 1950조선인민군 제2군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