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기능·활동(선택됨)
국가·세력
정치적 입장
국적
출신 배경(선택됨)
시대

비사리온 그리고리예비치 벨린스키

Виссарион Григорьевич Белинский
러시아 혁명적 민주주의자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11–1848 ○ 폐결핵

러시아 급진 인텔리겐치아의 아버지로 불린 문학 비평가

러시아가 구원을 찾을 곳은 신비주의도 금욕주의도 아니다. 계몽, 인도주의, 그리고 인간 존엄의 각성이다. — 고골에게 보낸 편지, 1847년

비사리온 벨린스키는 러시아 문학 비평의 창시자이자 혁명적 민주주의 사상의 선구자로, '급진 인텔리겐치아의 아버지'로 불린다. 모스크바대학에서 퇴학당한 후 『텔레스코프』, 『조국의 수기』, 『동시대인』 등 주요 문예지를 무대로 활동하며 푸시킨·고골·레르몬토프·도스토옙스키의 재능을 세상에 알렸다. 헤겔 철학을 거쳐 사회주의로 나아간 그의 사상은 '문학은 사회를 위해 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집약되며, 이는 체르니솁스키와 도브롤류보프를 거쳐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먼 선구가 되었다. 1847년 고골에게 보낸 서한에서 농노제와 전제정치를 정면으로 비판했으며, 이 편지는 차르 검열하에서 필사본으로 유통되며 페트라솁스키 서클과 후대 혁명가들에게 지하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29–1832모스크바대학 문학부 수학, 반농노제 희곡으로 퇴학
  • 1834『텔레스코프』지에 『문학적 환상』 발표로 비평가 데뷔
  • 1838–1839『모스크바 관찰자』 비공식 편집자
  • 1839–1846『조국의 수기』 수석 비평가, 러시아 최고의 비평가로 부상
  • 1841헤겔주의 '현실과의 화해' 단계를 극복하고 스스로 사회주의자로 선언
  • 1846–1848네크라소프의 『동시대인』에서 비평 활동, 『1847년 러시아 문학 개관』 집필
  • 1847고골의 『친구와의 왕복서한선』을 규탄하는 공개서한 작성, 필사본으로 전국 유포

미하일 니키포로비치 카트코프

Михаил Никифорович Катк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18–1887 ○ 자연사

『러시아 통보』와 『모스크바 소식』으로 여론과 조정을 움직인 '러시아의 천둥소리'

스스로를 방어할 수도 통치할 수도 없는 약한 국가는 불쌍히 여겨지지 않고 경멸당하고 끝장난다.

미하일 카트코프는 제정 러시아 후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보수 언론인으로, 문예지 『루스키 베스트니크』와 일간지 『모스콥스키예 베도모스티』를 편집했다. 『루스키 베스트니크』에는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의 주요 장편들이 연재되어 러시아 소설 황금기의 산실이 되었다. 1863년 폴란드 봉기 이후 친영 자유주의에서 급진적 러시아 민족주의로 선회하여 정부를 우파에서 압박했다. 포베도노스체프와 함께 알렉산드르 3세 반동적 반개혁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포베도노스체프의 말처럼 '카트코프의 참여 없이 중요한 조치가 취해지는 부처는 없을'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38모스크바 대학 철학부 졸업
  • 1840–1841베를린 대학 수학, 셸링 철학 강의 수강
  • 1845–1850모스크바 대학 철학과 조교수
  • 1851–1855『모스콥스키예 베도모스티』 초대 편집자
  • 1856–1887『루스키 베스트니크』 편집자 겸 발행인
  • 1863–1887『모스콥스키예 베도모스티』 편집자 겸 임차인
  • 1868차레비치 니콜라이 기념 리체움 공동 설립
  • 1882추밀원 의원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네크라소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Некрасов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21–1878 ○ 장암

농민의 고통을 노래하고 《동시대인》을 혁명적 문학의 중심으로 만든 시인·출판인

"그대는 시인이 아닐지 몰라도, 시민이어야만 한다." — 네크라소프가 시 「시인과 시민」에서 선언한, 러시아 문학의 사회적 사명을 규정한 한 구절.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중심을 이룬 시인이자 출판인으로, 푸시킨이 창간한 《동시대인》을 인수해 벨린스키·체르니솁스키·도브롤류보프의 비평과 톨스토이·도스토옙스키·투르게네프의 소설이 교차하는 당대 최고의 문예지로 키웠다. 농노제 아래 신음하는 농민을 그들의 언어로 노래한 그의 시는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의 정경이 되었고, 대표작 『누가 러시아에서 행복하게 사는가』는 러시아 농촌의 모순을 전면적으로 파헤친 서사시로 남았다. 1878년 장례식에 4천 명이 운집해 정치 집회로 변모했으며, 도스토옙스키가 '푸시킨 이후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 추도하자 젊은 혁명가들은 '아니, 더 위대하다!'고 외쳤다.

상세 이력 보기
  • 1839–1841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철학부 청강생
  • 1840첫 시집 『꿈과 소리』 출간
  • 1840–1846《조국의 수기》 및 여러 잡지에 기고, 희곡·보드빌 집필
  • 1845–1846알마나크 『페테르부르크 생리학』·『페테르부르크 선집』 편집·출판 — 도스토옙스키 데뷔작 수록
  • 1847–1866《동시대인》(Sovremennik) 발행인 겸 편집자
  • 1856대표 시집 『N. 네크라소프 시선』 출간 — 즉시 매진, 전국적 명성
  • 1868–1878《조국의 수기》(Otechestvennye Zapiski) 발행인 겸 편집자
  • 1873–1876대표작 『누가 러시아에서 행복하게 사는가』 집필

미하일 예브그라포비치 살티코프-셰드린

Михаил Евграфович Салтыков-Щедрин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26–1889 ○ 뇌졸중

전제정치와 농노제를 신랄하게 풍자한 19세기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풍자작가

1885~1886년 병든 셰드린을 찾아온 학생 대표단 중에는 레닌의 형 알렉산드르와 누이 안나가 있었으며, 안나 울리야노바-옐리자로바는 그를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라고 불렀다.

19세기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풍자작가인 미하일 살티코프-셰드린은 『한 도시의 역사』(1870)와 『골로블료프 가문』(1880)을 통해 전제정치·관료제·농노제의 부패를 신랄하게 파헤쳤다. 귀족 출신이었으나 프랑스 유토피아 사회주의에 공감해 페트라솁스키 서클에 가담, 1848년 유배된 후 7년간 지방 관료로 일하며 러시아의 모순을 목격했고, 네크라소프 사후 《조국의 수기》 편집장으로 급진 저널리즘을 이끌었다. 레닌은 그를 '혁명적 청년들이 가장 사랑한 작가'라 불렀고, 지노비예프는 '그의 작품은 당시 어떤 혁명가 조직보다도 진정으로 차르 체제의 기초를 훼손했다'고 평가했으며, 마르크스도 그의 작품을 정치적 관심으로 정독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44–1848군부성 문서국 관리
  • 1848–1855뱟카 유배, 지방 관료
  • 1858–1860랴잔 부지사
  • 1860–1862트베리 부지사
  • 1863–1864《동시대인》 기고
  • 1864–1868펜자·툴라·랴잔 재무국장
  • 1868–1884《조국의 수기》 편집장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아나키스트 러시아 러시아 1828–1910 ○ 폐렴

『전쟁과 평화』의 작가이자 기독교 아나키즘으로 국가와 교회에 맞선 백작

“그런데 농민들은…… 농민들은 어떻게 죽지?” — 아스타포보 역에서 숨을 거두며, 1910년 11월 20일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급진적 도덕 사상가.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로 세계 리얼리즘 문학의 정점을 찍었고, 1870년대 말 영적 위기 끝에 기독교 아나키즘으로 전회하여 국가·교회·사유재산·조직적 폭력을 전면 거부했다. 『내 안의 하느님 나라』(1894)에 정리된 비폭력 저항 사상은 마하트마 간디와 이후 시민권 운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1901년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당했으며, 1910년 재산과 귀족적 삶을 버리고 비밀리에 가출했다가 아스타포보 간이역에서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44–1847카잔대학에서 동양어·법학 수학, 학위 없이 중퇴
  • 1852–1856『유년시절』로 데뷔, 크림전쟁 포병장교로 참전하여 『세바스토폴 이야기』 발표
  • 1862–1869소피야 안드레예브나와 결혼,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전쟁과 평화』 집필 완성
  • 1873–1878『안나 카레니나』 발표
  • 1879–1882영적 위기와 회심 — 『참회』 집필, 정교회 교리·국가·사유재산에 대한 근본적 비판 시작
  • 1884–1899『내 안의 하느님 나라』『부활』 등 발표, 기독교 아나키스트·평화주의자로 국제적 명성
  • 1901–1910정교회 파문, 간디와 서신 교환, 1910년 10월 야스나야 폴랴나를 떠나 아스타포보에서 사망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피사레프

Дмитрий Иванович Писарев
러시아 혁명적 민주주의자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40–1868 ✕ 익사

부숴야 할 것은 부숴야 한다고 선언한 러시아 허무주의의 기수

「우리 진영의 최후통첩은 이것이다: 부술 수 있는 것은 부숴야 한다. 타격을 견디는 것은 살아남을 자격이 있고, 산산조각 나는 것은 쓰레기다. 어쨌든 좌우로 내리쳐라, 거기서 해는 나오지 않는다.」 — 『19세기 스콜라철학』(1861)

러시아 허무주의(nihilism)의 중심 이론가이자 1860년대 혁명적 민주주의 문학비평의 가장 날카로운 목소리. 체르니솁스키·도브롤류보프와 함께 60년대 급진 지식인을 대표했으며, 『러시아어』(Русское слово)의 주필로서 미학과 관념론 철학을 공격하고 자연과학에 기초한 '현실주의'를 주창했다. 1862년 반정부 선언문 필화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수감되어 4년 반 동안 주요 저작 대부분을 감옥에서 집필했고, 석방 2년 뒤 27세에 발트해에서 익사했다. '합리적 이기주의'와 '사고하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개념으로 나로드니키 세대를 예비했으며, 도스토옙스키의 라스콜니코프, 파블로프의 과학관, 레닌의 지적 형성에 결정적 흔적을 남겼다.

상세 이력 보기
  • 1858–1861여성잡지 『라스베트』(Рассвет) 서평 기고
  • 1860–1862『러시아어』(Русское слово) 비평가·사실상의 주필
  • 1862–1866반정부 선언문 필화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옥중 집필
  • 1866–1868『델로』(Дело)·『조국의 수기』(Отечественные записки) 기고

블라디미르 갈락티오노비치 코롤렌코

Владимир Галактионович Короленко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53–1921 ○ 폐렴

제정도 볼셰비키도 거부한 러시아 문학의 양심

“인간은 행복을 위해 창조되었다, 새가 비상을 위해 창조되었듯이 — 다만 행복이 언제나 인간을 위해 만들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 『역설』

우크라이나계 아버지와 폴란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러시아 문학을 자신의 '진정한 조국'으로 삼은 작가이자 인권운동가. 나로드니키 활동으로 여러 차례 시베리아 유배를 겪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 『마카르의 꿈』『맹인 음악가』로 1880년대 러시아 문단의 정상에 올랐다. 제정 시절부터 무르탄 사건의 우드무르트 농민, 베일리스 사건의 유대인을 변호했고, 혁명 후에는 루나차르스키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볼셰비키의 적색테러와 사형제를 공개 비판했다. 1902년 알렉세이 고리키의 아카데미 제명에 항의해 자신도 명예 아카데미션을 반납했으며, 죽는 날까지 기근 구호와 고아원 설립에 힘썼다.

상세 이력 보기
  • 1879–1885첫 단편 발표, 나로드니키 활동으로 반복 체포·시베리아 유배
  • 1885–1896니주니 노브고로드에서 『마카르의 꿈』『맹인 음악가』 발표, 문학적 명성
  • 1896–1904『루스코예 보가츠트보』 편집, 고리키 제명 항의로 명예 아카데미션 사퇴(1902)
  • 1904–1917『루스코예 보가츠트보』 편집장, 무르탄·베일리스 사건 변호, 사형제 반대 운동
  • 1917–1921볼셰비키 테러 비판 — 루나차르스키 서한, 기근 구호 활동 중 사망

콘스탄틴 세르게예비치 스타니슬랍스키

Константин Сергеевич Станиславский
소련 러시아 1863–1938 ○ 자연사

모스크바 예술극장 창립자이자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의 창시자

1928년 모스크바 예술극장 30주년 기념 공연 도중 심장마비가 찾아왔다. 그는 막이 내릴 때까지 무대를 떠나지 않았고, 이후 다시는 배우로 서지 못했다.

러시아·소비에트 연극 연출가이자 배우. 1898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공동 창립해 근대 연극을 혁신했다. 배우의 심리적 진실을 체계화한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은 세계 연기 교육의 근간이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8모스크바 예술문학협회 공동 창립
  • 1898네미로비치-단첸코와 모스크바 예술극장(MAT) 공동 창립
  • 1906'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 연기 방법론 개발 착수
  • 1912MAT 제1스튜디오 설립, 배우 훈련 실험실로 운영
  • 1918볼쇼이 극장 오페라 스튜디오(현 스타니슬랍스키 음악극장) 창설
  • 1922–1924MAT 유럽·미국 순회공연 지휘, 세계적 명성 확립
  • 1936소련 최초의 인민예술가 칭호 수여
  • 1938『배우의 작업』 출간; 모스크바에서 사망

알렉산드르 세라피모비치

Александр Серафимович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63–1949 ○ 자연사

『철류』로 혁명의 서사시를 쓴 돈 카자크의 아들

“우리는 쓰라린 고통 속에서, 온몸의 피를 쥐어짜며 승리를 배웠다.” — 『철류』

돈 카자크 출신 소비에트 작가. 1918년 볼셰비키 입당, 타만 군대의 내전 행군을 그린 『철류』(1924)로 소비에트 산문의 기념비를 세웠다. 『옥탸브리』 주필로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을 발굴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9유배지에서 첫 단편 「얼음 위에서」 발표, 필명 '세라피모비치'
  • 1902–1917모스크바에서 고리키의 '스레다' 그룹 활동 — 『모래』에 톨스토이 찬사
  • 1918볼셰비키 입당, 『이즈베스티야』 문예부장
  • 1924『철류』 발표 — 타만 군대 행군을 그린 내전 서사시
  • 1926–1929『옥탸브리』 주필, 숄로호프 『고요한 돈강』 발굴·출판
  • 1934소비에트 작가동맹 상임위원회 창립 위원
  • 1943스탈린상 1급, 상금 국방기금 헌납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고리키

Алексей Максимович Горький

폭풍을 부르다 새장에 갇힌 바다제비

"인간 — 바로 이것이 진리다!" - 『밑바닥에서』(1902)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목수 막심 페시코프의 아들로 태어난 알렉세이 페시코프는 부두 노동자와 방랑자로 러시아의 밑바닥을 떠돌다 1892년 단편 「마카르 추드라」로 막심 고리키가 되었다. 혁명 전에는 볼셰비키의 최대 후원자였으나 1917~1918년 자신의 신문 『노바야 지즌』에 「때 이른 생각들」을 연재하며 레닌의 폭력을 비판했고, 그 논쟁은 최종 결별이 아니었다. 1921년 결핵 때문에 이탈리아로 떠나 소렌토에 머물렀고, 널리 퍼진 서술은 1932년 10월 귀국으로 보지만 바신스키는 1933년으로 본다. 귀국 뒤 스탈린을 미화하고 집단화와 노동수용소 체계를 옹호했고, 1936년 6월 18일 고르키에서 지병으로 사망했으며 독살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892–1917부랑 노동자 출신 작가로 세계적 명성, 볼셰비키 자금 지원
  • 1917–1921『노바야 지즌』에 「제때없는 생각들」 — 혁명의 폭력을 공개 비판
  • 1921–1933요양 명목의 국외 체류(소렌토)
  • 1932–1936귀국, 작가동맹 초대 의장 — 사회주의 리얼리즘 정식화

마리야 표도로브나 안드레예바

Мария Фёдоровна Андреева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868–1953 ○ 자연사

레닌이 '동지 페노멘'이라 부른 배우 출신 볼셰비키 재정 요원

1903년, 고위 철도 관리의 아내 신분으로 1등석 열차 칸에 경찰이 쫓는 지하운동가를 숨기고 고리키에게 5월제 선전물을 실은 여행가방을 배달했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대표 여배우로 스타니슬랍스키의 무대 파트너였던 마리야 안드레예바는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후 당의 핵심 재정 요원으로 활약했다. 사바 모로조프의 유산 등 자본가들의 거액 헌금을 레닌의 금고로 연결하는 탁월한 자금 조달 능력으로 '동지 페노멘'이라는 당내 별칭을 얻었으며, 18년간 막심 고리키의 동반자로서 그의 문학 활동과 해외 선전 여행을 물질적·실무적으로 뒷받침했다. 10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극장·공연 인민위원으로서 볼쇼이 드라마 극장을 공동 창립했고, 이후 모스크바 과학자회관 관장으로 18년간 봉직하며 혁명기 문화 제도 건설에 헌신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4–1898러시아 예술문학협회 배우
  • 1898–1905모스크바 예술극장 주요 여배우
  • 1904–1917RSDRP(볼셰비키) 재정 요원 — '동지 페노멘'
  • 1918–1921페트로그라드 극장·공연 인민위원
  • 1919볼쇼이 드라마 극장 공동 창립
  • 1922–1928베를린 소비에트 무역대표부 예술·영화 담당
  • 1931–1948모스크바 과학자회관 관장

에마 골드만

Эмма Гольдман
아나키스트 미국 러시아 1869–1940 ○ 사망

아나키즘을 국제적 정치운동으로 만든 망명 혁명가

크론시타트 봉기 진압을 목격한 뒤 골드만은 이렇게 썼다. '크론시타트는 나를 볼셰비키에 묶어둔 마지막 실을 끊어놓았다' — 그녀는 1921년 12월 소비에트 러시아를 떠났다.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한 아나키스트 혁명가, 작가, 연설가. 헤이마켓 사건을 계기로 정치에 눈떠 북미와 유럽에서 아나키즘 정치철학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피임·자유연애·반군국주의를 주제로 수천 명을 끌어모은 연설로 '붉은 에마'라 불렸으며, 1919년 소비에트 러시아로 추방되었다. 크론시타트 반란 진압 이후 볼셰비키의 권위주의를 비판하는 전향적인 목소리를 냈고, 《러시아에서의 환멸》(1923)에 그 경험을 기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9뉴욕으로 이주, 요한 모스트의 지도 아래 아나키스트 활동 시작
  • 1892버크먼의 프릭 암살 미수 사건 연루, 체포·심문
  • 1893첫 수감 — 유니언스퀘어 연설로 폭동선동죄 1년형
  • 1906아나키스트 잡지 『마더 어스』 창간
  • 1917징병 반대 조직으로 2년 수감
  • 1919소비에트 러시아로 강제 추방 — '소비에트 방주' 편
  • 1923《러시아에서의 환멸》 출간, 볼셰비키 비판
  • 1936스페인 내전에서 아나키스트 혁명 지지 활동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바자로프

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азар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4–1939 ○ 폐렴

유전-목적론적 계획 종합을 제안한 고스플란의 마흐주의 철학자-경제학자

1930년 OGPU 심문에서 "정치·경제의 모든 문제에 대한 이론적 논의는 그 어떤 정치적 경력을 가진 소비에트 시민에게도 금지될 수 없다"고 답하며 유죄를 부인했다.

철학자·경제학자·번역가. 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와 마르크스 『자본론』을 러시아어로 처음 완역(1907–1909)했고, 마흐주의 경험비판론의 대표 논객으로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 정면 반박했다. 1921년부터 고스플란에서 그로만과 함께 보그다노프 텍톨로지에 기초한 유전적-목적론적 계획 방법론을 제창했으며, 소련 최초 15개년 종합계획을 제안했다. 1930년 체포·5년형 선고, 1935년 모스크바로 돌아와 번역에 전념하다 1939년 폐렴으로 사망. 1990년 복권.

상세 이력 보기
  • 1896–1904사회민주당 입당, 모스크바대학 물리수학부 중퇴 후 베를린대학 철학부 수학, 두 차례 체포·유배
  • 1904–1907볼셰비키 당원, 제4차 당대회 대의원, 중앙기관지 『당 소식』 편집위원
  • 1907–1909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와 마르크스 『자본론』 전3권 러시아어 최초 완역 출간
  • 1908–1911마흐주의 철학 논쟁 주도, 『현실주의 세계관 에세이』 등 출간; 레닌 비판에 공개 반박
  • 1917『노바야 지즌』 편집자·주필, RSDLP(국제주의파) 공동 창립 이념가, 여름에 RSDLP 탈당
  • 1921–1927고스플란 경제통계분과 부의장(1924), 노동문화분과 의장 겸 상임간부회 위원(1927)
  • 1926–1929그로만과 유전-목적론적 계획 종합 제창, 산업성장 미분방정식 정식화, 최초 15개년 종합계획 제안
  • 1930–1935스탈린 공개 비판 후 '멘셰비키 중앙국' 사건 체포·5년형; 1932년 조기 석방, 사라토프·캅카스 유형
  • 1935–1939모스크바 귀환, 에커만·몽테뉴 번역; 1939년 폐렴 사망, 1990년 복권

프세볼로트 에밀리예비치 메이예르홀트

Всеволод Эмильевич Мейерхольд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4–1940 ✕ 처형

생체역학의 창시자, 무대 위에서 혁명을 실현한 연극의 건축가

1930년 베를린 순회공연 중 망명한 배우 미하일 체호프(안톤 체호프의 조카)가 메이예르홀트에게 소련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메이예르홀트는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 김나지움 시절부터 혁명을 내 영혼 속에 지니고 살아왔고, 언제나 그 가장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형태로 품어왔소. 당신 말이 옳고 내 최후가 당신이 말한 대로 될 것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소련으로 돌아갈 것이오." 체호프가 '왜?'라고 묻자 메이예르홀트는 이렇게 답했다: "정직함 때문이오."

러시아와 소련의 연극을 근본적으로 재편한 연출가·배우·교육자. 구성주의 무대와 생체역학이라는 독자적 연기 체계를 확립했으며,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연극의 10월'을 선언했다. 고스찜에서 마야콥스키·고골·크로밍크의 작품을 혁신적으로 무대화했고, 예이젠시테인·쇼스타코비치와 협업하며 유럽 연극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38년 극장 폐쇄 후 1939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당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8–1902모스크바 예술극장(MXAT) 배우 — 〈갈매기〉 트레플레프, 〈세 자매〉 투젠바흐 역 초연
  • 1906–1907코미사르젭스카야 극장 수석 연출가 — 블로크의 〈발라간칙〉으로 '조건극' 시대 개막
  • 1908–1917알렉산드린스키·마린스키 극장 연출가 — 레르몬토프 〈가장 무도회〉, 몰리에르 〈돈 후안〉, 글루크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 1918볼셰비키 입당 및 마야콥스키 〈미스테리야 부프〉 초연 (페트로그라드)
  • 1920–1938국립 메이예르홀트 극장(고스찜) 예술감독 — 생체역학 체계와 구성주의 무대 전성기
  • 1920–1921나르콤프로스 연극부(TEO) 책임자 — 루나차르스키 하에서 소비에트 연극 정책 주도
  • 1923공화국 인민예술가 칭호 수여
  • 1922–1924혁명 극장 예술감독 겸임 — 파이코 〈류리 호수〉 초연
  • 1926–1930고골 〈검찰관〉, 마야콥스키 〈빈대〉·〈목욕탕〉 — 쇼스타코비치·로드첸코 협업의 걸작들
  • 1938–1939고스찜 폐쇄 후 스타니슬랍스키 오페라 극장 수석 연출가로 〈리골레토〉 작업

아나톨리 바실리예비치 루나차르스키

Анатолий Васильевич Луначар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5–1933 ○ 자연사

러시아 혁명가·초대 계몽인민위원·문예비평가

1917년 11월 15일(구력 2일), 취임 8일 만에 루나차르스키는 크렘린 공격 중 성 바실리 대성당이 포격으로 파괴된다는 소문에 사임을 발표했다. 다음 날 인민위원회가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자 철회하고 1929년까지 재임했다.

1875년 폴타바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당시 혼인한 바실리 루나차르스키는 폴란드계 귀족 출신으로, 성과 부칭이 여기서 왔다는 기록이 전하나 그를 폴란드 민족으로 단정할 근거는 없다. 1895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들어가 1903년 볼셰비키에 합류했고, 1909년 전진파 결성으로 분파에서 제명되어 카프리·볼로냐의 당 학교를 운영했다. 1917년 메즈라욘치를 거쳐 10월 혁명 뒤 초대 계몽인민위원이 되어 1929년까지 재임했다. 1930년 소련과학원 회원이 되었고, 스페인 대사 부임을 준비하던 1933년 프랑스 망통에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0년대–19041895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취리히에서 아베나리우스에게 사사, 문예비평가로 성장
  • 1905–1914볼셰비키 합류와 전진파(Vpered) 논쟁, 혁명문화와 예술정책 구상
  • 1908–1911전2권 《종교와 사회주의》 출간
  • 1914–19171차대전 반대 국제주의 입장, 망명 중 반전 활동
  • 1917.0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후 7~8월 볼셰비키와 통합
  • 1917.0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에 합류
  • 1917–1929계몽인민위원, 학교·박물관·극장·출판 행정 총괄
  • 1918–1921전위예술 후원과 문화유산 보존 사이에서 초기 소비에트 문화정책 조정
  • 1923인물평 모음 《혁명적 실루엣》 출간
  • 1929–19331929년 가을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학술위원회 의장으로 이동, 이듬해 학술원 회원, 1933년 스페인 대사 임명 뒤 사망
  • 1930소련과학원 회원 선출(2월 1일)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블로크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лок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80–1921 ○ 병사

10월 혁명을 받아들인 러시아 상징주의의 대표 시인

『열둘』을 완성한 뒤 일기에 '오늘 나는 천재다'라고 적었다.

러시아 은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상징주의를 이끈 알렉산드르 블로크는 10월 혁명이 낳은 최대의 문학 작품 『열둘』(1918)을 써서 열두 적위대의 눈보라 행진 앞에 그리스도를 세웠다. 볼셰비키 집권 후 루나차르스키의 소집에 응한 단 다섯 명의 기성 문인 중 한 명으로, 임시정부의 차르 대신 조사위원회에서 일했고 소비에트 문화 기관에서 활동했다. 혁명에의 헌신은 상징주의 독자들을, 신비주의는 볼셰비키 비평가들을 멀어지게 했고, 1921년 '모든 소리가 멈췄다'며 창작의 침묵에 빠졌다. 치료 목적의 출국 비자가 거부된 채 마흔으로 사망했고, 고리키는 루나차르스키에게 정권이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4첫 시집 『아름다운 여인에 관한 시』 출간
  • 1906희곡 『꼭두각시극』 발표
  • 1917임시정부 차르 대신 특별조사위원회 편집자
  • 1918『열둘』과 『스키타이인』 발표, 사회주의 아카데미 참여
  • 1921푸시킨 추모 연설 「시인의 소명에 관하여」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젠지노프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Зензинов

망명과 기록으로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킨 사회혁명가

유배지 루스코예 우스티예에 도착한 젠지노프는 일기에 썼다: '이곳은 물론 러시아지만, 17세기, 어쩌면 16세기의 러시아다.'

블라디미르 젠지노프는 러시아 사회혁명당의 중앙위원이자, 세 차례의 시베리아 유배를 북극 시베리아의 민족지·조류학 연구로 바꿔낸 언론인이었다. 1918년 사마라 제헌의회 위원회와 우파 디렉토리에서 볼셰비키와 콜차크 사이의 민주적 대안을 지지하다가 옴스크 쿠데타로 추방당했고, 이후 파리와 뉴욕에서 혁명과 내전의 경험을 기록하는 망명 언론인으로 살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03사회혁명당 입당
  • 1905–1906사회혁명당 중앙위원회 활동, 모스크바 봉기 참여
  • 1917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
  • 1917–1918제헌의회 의원, 사마라 제헌의회 의원위원회 위원
  • 1918우파 디렉토리 위원
  • 1918–1919옴스크 쿠데타 뒤 체포·중국 추방
  • 1919–1939유럽 사회주의 망명 언론 활동
  • 1940–1953뉴욕에서 망명 언론인·회고록 작가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러시아 러시아 1883–1945 ○ 폐암

망명에서 돌아와 스탈린 문학의 기둥이 된 붉은 백작

“소비에트 정부 외에 러시아의 진정한 친구는 세상에 없다.” — 전시 연설, 1941

톨스토이 가문의 백작으로 혁명 후 백군 편에 섰다가 1919년 망명했다. 파리와 베를린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1923년 귀환, '붉은 백작'으로 불리며 체제의 총애를 받았다. 3부작 『고난의 길』과 미완의 『표트르 1세』로 스탈린상을 세 차례 수상했고, SF 고전 『아엘리타』『가린 씨의 쌍곡면』을 남겼다. 전시에는 60여 편의 애국 선전문을 썼으며 1941년 스탈린의 붉은광장 연설문을 기초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7–1917시집 『서정』으로 데뷔, 『절름발이 지주』 등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문단 진입
  • 1918–1923오데사→콘스탄티노플→파리→베를린 망명; 『아엘리타』『니키타의 유년』 집필
  • 1923소련 영구 귀환 — '귀환 망명자'의 상징으로 체제의 환대를 받음
  • 1930–1941『표트르 1세』 집필, 3부작 『고난의 길』 완성; 1936–38년 고리키 사후 작가동맹 임시 수장
  • 1939소련 과학원 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 1941–1943스탈린상 2회 수상; 상금 10만 루블로 전차 건조 기부
  • 1941–1945종군기자로 60여 편의 전선 에세이, 「러시아인의 성격」 발표
  • 1945『이반 뇌제』 희곡으로 사후 스탈린상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알렉산드로프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Александров
소련 러시아 1883–1946 ○ 급사

성가대 소년에서 소련 국가 작곡가로, 붉은 군대 합창단 창시자

1941년 6월 26일, 「신성한 전쟁」을 벨로루스키 역에서 처음 연주하자 병사들은 침묵했다가 다섯 번이나 앙코르를 요청했다.

랴잔 농민 가정 출신으로 카잔 대성당 소년 성가대에서 음악 인생을 시작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글라주노프와 바실렌코에게 배웠고, 혁명 후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서 소비에트 합창 교육의 기초를 닦았다. 1928년 붉은 군대 노래와 춤 앙상블(알렉산드로프 앙상블)을 창설, 남성 합창과 민속·교향 혼성 오케스트라, 발레를 결합한 군사 문화 기관을 수립했다. 1941년 독소전 발발 사흘 만에 「신성한 전쟁」을 작곡, 붉은 군대의 비공식 진군가가 되었다. 1943년 「볼셰비키 당 찬가」 선율을 소련 국가로 발전시켰으며, 이 멜로디는 2000년 러시아 연방 국가로 재도입되었다. 교회 전례음악에서 소비에트 국가의 장엄한 음악적 표상으로 나아간 독특한 궤적을 남겼다.

상세 이력 보기
  • 1900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정 합창대 지휘자 과정 졸업, 지휘자(레겐트) 자격 취득
  • 1913모스크바 음악원 작곡과 졸업(대은메달)
  • 1918–1922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합창 지휘자
  • 1922모스크바 음악원 교수
  • 1928–1946붉은 군대 노래와 춤 앙상블(알렉산드로프 앙상블) 창설·음악 감독·예술 총감독·수석 지휘자
  • 1940모스크바 음악원 지휘·합창 학부장, 예술학 박사
  • 1943소장(генерал-майор) 계급 수여
  • 1944소련 국가 음악 공식 채택

표도르 바실리예비치 글라드코프

Фёдор Васильевич Гладко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883–1958 ○ 식도암

시멘트 공장의 재건을 통해 소비에트 산업소설의 길을 연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고전 작가

이것이 노동자의 러시아다. 이것이 우리다. 인류가 수 세기 동안 꿈꿔온 신세계다. — 『시멘트』에서

구교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교사와 지하 혁명가로 청년기를 보낸 글라드코프는, 내전기 노보로시스크 시멘트 공장 재건에 직접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1925년 『시멘트』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파괴된 공장의 복구를 통해 혁명 이후 소비에트 사회의 계급·젠더·관료적 갈등을 형상화한 최초의 소비에트 산업소설로,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전이자 생산소설의 원형이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4사회혁명당 선전활동 시작
  • 1906RSDLP 가입, 이르쿠츠크주 만주르카로 4년 유형
  • 1910쿠반주 파블롭스카야 초등학교장
  • 1918–1920붉은 군대 복무, 노보로시스크 교육 책임자
  • 1920–1921『크라스노예 체르노모리예』 편집자
  • 1921–1925『노비 미르』 서기, 문학그룹 '쿠즈니차' 활동
  • 1925『시멘트』 발표 —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기념비적 작품
  • 1932–1938『에네르기야』 집필 — 드네프르 수력발전소 건설 형상화
  • 1941–1943『프라우다』·『이즈베스티야』 특파원 (우랄)
  • 1945–1947고리키 문학대학 학장
  • 1949–1954자전적 3부작 발표, 스탈린상 2회 수상
  • 1958모스크바에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알렉산드르 콘스탄티노비치 보론스키

Александр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Воронский

《크라스나야 노비》 편집장, 바벨·파스테르나크를 발굴한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1921년 크렘린의 레닌 자택. 《크라스나야 노비》 창간 회의에서 고리키가 인도 설화집을 보이자 레닌은 "이걸 황금 외화로 사고 있다. 올해는 기근이 든다"고 잘랐다. 보론스키는 이렇게 회고했다: "두 진리가 충돌했다 —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와 '그러나 빵이 없다면'."

《크라스나야 노비》를 창간해 바벨·파스테르나크를 발굴한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예술을 삶의 인식으로 보는 미학으로 RAPP에 맞서 페레발을 이끌었다. 좌익반대파 가담 후 1937년 처형.

상세 이력 보기
  • 1904탐보프에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 1906–1910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1년 독방, 야렌스크 2년 유형
  • 1912프라하 당대회 대의원; 서기로 회의록 작성, 대중노동자신문 창간 주장
  • 1917–1920오데사 소비에트 집행위원,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당위원장,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 크론시타트 봉기 진압 참여
  • 1921–1927《크라스나야 노비》 창간·편집장; 《프로제크토르》 편집; 출판사 '크루크' 설립; 문학그룹 '페레발' 결성·주도
  • 1923'46인 성명' 서명, 좌익반대파에 가담
  • 1927–1930트로츠키주의 혐의로 출당, 리페츠크 유배; 1929년 반대파 활동 철회 선언, 1930년 복당
  • 1930–1935국립문학출판사 고전문학부 편집자; 자전적 소설 집필
  • 1937대숙청 중 체포(2월 1일), 스탈린 서명 사형명단 등재, 8월 13일 15분 재판 후 총살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틴

Евгений Иванович Замятин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4–1937 → 사망

금지된 미래의 설계자

1931년 6월, 자먀틴은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작가인 나에게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은 사형 선고와 같습니다.」 이 한 문장으로 그는 소련을 떠날 허가를 받아냈다.

볼셰비키였던 해군기술자·작가는 통제와 순응의 미래를 『우리들』에 그렸다. 이 소설은 소비에트 검열이 금지한 첫 작품이 되었고, 그는 작가로서의 삶이 불가능해진 뒤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써 출국 허가를 받았다. 파리 망명 중에도 소련 여권을 지키며 1935년 반파시스트 작가대회에 소련 대표로 참석했으나, 결국 조국 밖에서 숨을 거두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5–1917볼셰비키 지하활동·기술자 생활
  • 1921『우리들』 완성과 금지
  • 1920년대풍자소설·문학비평 활동
  • 1931출국 허가
  • 1932–1937파리 망명 생활

블라디미르 예브그라포비치 타틀린

Владимир Евграфович Татлин
소비에트 러시아 1885–1953 ○ 사망

건설되지 않았지만 혁명적 유토피아의 가장 지속적인 상징이 된 탑의 창조자

1920년 베를린 다다 전시회에서 게오르크 그로스와 욘 하트필드는 '예술은 죽었다 — 타틀린의 새 기계 예술 만세!'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섰다.

러시아 및 소비에트 화가, 건축가, 무대 디자이너로, 카지미르 말레비치와 함께 1920년대 소비에트 아방가르드의 양대 거장이었다. 1919-1920년에 설계한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타틀린의 탑)는 에펠탑보다 높은 400미터의 나선형 철골 구조물로, 코민테른의 본부로 구상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한 채 혁명적 건축의 상징으로 남았다. 1914년부터 선보인 '반(反)부조'는 목재와 금속 등 산업 재료로 제작된 3차원 구성물로, 구축주의의 선구적 작업이었다. 1930년대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득세하며 공식 후원을 잃었으나, 1960년대에 재평가되어 그의 탑은 혁명적 예술의 가장 널리 알려진 이미지로 남아 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1모스크바에서 성상 화가로 경력 시작
  • 1913파리에서 피카소의 작업실 방문, 구호부조 제작 시작
  • 1915마지막 미래파 전시 '0.10'에서 반(反)부조 전시
  • 1919–1920제3인터내셔널 기념비(타틀린의 탑) 설계 및 모형 전시
  • 1925–1927키예프 예술대학 교수
  • 1927–1930모스크바 브후테마스 교수
  • 1930–1932개인 비행 장치 '레타틀린' 제작
  • 1948반공산주의적이라는 비판으로 해고, 그러나 숙청되지 않음

니콜라이 스테파노비치 구밀료프

Николай Степанович Гумилёв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86–1921 ✕ 처형

아크메이즘을 창시하고 체카의 총에 쓰러진 실버 에이지의 시인

어느 시 낭독회에서 청중이 정치적 신념을 묻자 답했다 — '나는 확고한 군주주의자입니다.'

러시아 실버 에이지의 중심 시인으로, 세르게이 고로데츠키와 함께 아크메이즘을 창시하여 상징주의의 모호한 신비주의를 거부하고 시의 구체성과 장인정신을 강조했다. 아프리카 탐험과 세계대전에 자원 입대한 모험적 삶은 그의 시에 이국적 정취와 영웅적 기풍을 불어넣었으며, 후기작 『불기둥』(1921)에서는 철학적 깊이를 더해 러시아 시의 정점에 이르렀다. 안나 아흐마토바의 첫 남편이자 역사학자 레프 구밀료프의 아버지였으며, 반볼셰비키 신념을 숨기지 않았다. 1921년 타간체프 사건에 연루되어 체카에 체포·처형되었고, 소련에서 1986년까지 금지되었다가 1991년 사후 복권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5첫 시집 『정복자들의 길』 출간
  • 1908『낭만의 꽃』 출간; 파리서 잡지 『시리우스』 발행
  • 1909–1910잡지 『아폴론』 공동 창간; 첫 아프리카 탐험
  • 1911–1912고로데츠키와 『시인들의 길드』 결성, 아크메이즘 선언; 『진주』와 『낯선 하늘』 출간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에 기병으로 자원 입대, 성 게오르기 훈장 2회 수훈
  • 1918–1920『모닥불』·『천막』 출간; 고리키의 『세계문학』 출판사 근무; 전러시아 시인연합 의장
  • 1921『불기둥』 출간; 8월 3일 체포, 8월 26일 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