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국의 러시아 내전 개입
Allied intervention in the Russian Civil War
1918년부터 1922년까지 영국·프랑스·미국·일본 등 협상국과 그 동맹국이 러시아 북부·남부·시베리아·극동·캅카스·중앙아시아·발트해에 군대를 보낸 일련의 군사 개입. 처음에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뒤 러시아 항구의 군수물자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지킨다는 명분이었으나, 1918년 11월 독일이 항복한 뒤에는 백군을 돕는 것이 주된 목적이 되었다. 서방 연합국은 1920년까지 물러났고, 일본은 1922년 10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925년 북사할린에서 철수했다.
상세
1918년 3월 4일 무르만스크 소비에트의 요청으로 영국군 170명이 독일군을 막는다며 상륙한 것이 시작이었다. 8월 2일 아르한겔스크에서 차플린 대위가 지역 소비에트를 무너뜨리자 영국·프랑스군 1,500명이 도시를 점령했고, 니콜라이 차이콥스키의 북부 지역 정부가 섰다. 미국은 북러시아 원정군 5천 명을 아르한겔스크로, 8천 명을 블라디보스토크로 보냈고, 일본은 7만 명 넘게 시베리아와 연해주에 들였다(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1918년 12월 18일에는 프랑스군이 오데사와 세바스토폴에 상륙했으나 흐리호리우 부대의 압박과 프랑스 흑해 전대 수병들의 반란 속에 1919년 4월 물러났다. 영국은 던스터포스로 바쿠를, 맬러슨 부대로 자카스피를 지켰고, 영국 발트해 전대는 크론시타트를 습격해 에스토니아와 유데니치를 지원했다. 영어 출처가 꼽는 병력은 북러시아의 영국군 14,378명, 캅카스의 영국군 4만 명, 남러시아의 프랑스군 1만 5천 명과 그리스군 23,351명 등이다.
연합국은 목표가 갈리고 전쟁 피로가 컸으며, 노동조합의 「러시아에서 손을 떼라」 운동과 자국 군대의 반란·명령 거부도 겪었다. 1919년 9월 27일 마지막 연합군이 아르한겔스크를, 10월 12일 무르만스크를 떠났고, 시베리아에서는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철수와 함께 서방 연합국이 물러났다. 트로츠키는 『나의 생애』에서 “1918년 내내 협상국은 빌헬름에게 이긴다는 구실로 우리에게 내전을 떠안겼다. 그러나 이제는 1919년이었고 독일은 오래전에 패했다. 그런데도 협상국은 혁명의 나라에 죽음과 굶주림과 전염병을 뿌리는 데 수억을 계속 쏟아부었다”고 썼다. 영어 출처는 서방이 실제로는 개입에 소극적이었고 외국군의 존재가 백군을 「꼭두각시」로 보이게 해 볼셰비키 선전에 도움을 주었다고 평가한다. 소련 역사학은 「14개국의 간섭」을 말했지만, 러시아어 출처는 이 숫자가 핀란드·폴란드와 영국 자치령까지 셈한 관례적 수치라고 지적한다. 1924년 세워진 간섭 피해자 지원 협회는 1927년까지 간섭군 책임으로 11만 1,730명이 죽었다는 신고를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