экономизм · 1899–1903

경제주의

Economism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내부에서 노동자의 임금·노동시간 등 경제투쟁을 모든 사회민주주의 활동의 기초로 삼고, 전제정에 맞선 정치투쟁은 먼 장래의 일로 자유주의 반대파 활동에 맡기려 한 조류. 『라보차야 미슬』과 『라보체예 델로』를 중심으로 나타났고, 『이스크라』와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가 이를 비판하며 전국적 정치조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상세

개념

경제주의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안에서 프롤레타리아의 경제투쟁, 곧 임금과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을 모든 사회민주주의 활동의 기초로 삼고, 전제정에 맞선 정치투쟁은 먼 장래의 과제로 돌리며 자유주의 반대파의 활동에 맡기려 한 조류다. 경제주의자들의 강령 문서인 「크레도」(1899, 쿠스코바 작성)는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에게는 오직 하나의 길이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경제투쟁에 참가하고, 즉 그것을 돕고, 자유주의 반대파 활동에 참가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으며, “독자적인 노동자 정치당에 관한 이야기는 낯선 목적과 낯선 성과를 우리 토양에 이식한 데서 생겨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레닌은 그 정치적 본질을 “경제투쟁은 노동자에게, 정치투쟁은 자유주의자에게”라는 구호로 요약했다.

경제주의는 정치선동이 경제선동에 뒤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곧 경제투쟁이 대중을 정치투쟁으로 끌어들이는 ‘가장 널리 적용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레닌은 전제정의 폭정이 농민에 대한 채찍질, 경찰의 횡포, 종교적 박해, 군인과 학생에 대한 처우 등 경제 외의 여러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널리 작용한다며 이를 반박했다. 이른바 노동조합주의적 정치 이해가 경제주의의 핵심이다.

역사

경제주의의 실천적 표현은 노동자 모임에서 나왔다. 경제주의 조류의 기관지 『라보차야 미슬』(노동자의 사상)은 1897년 10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창간되어 16호까지 발행되었고, 이후 베를린(1898년~1901년 4월), 바르샤바, 마지막으로 제네바(1902년 12월)에서 나왔다. 창간에는 콜피노 노동자 모임이 참여했고 가장 영향력 있는 편집자는 콘스탄틴 타흐타레프였으며, 아폴리나리야 야쿠보바 등이 기고했다. 이들의 선전은 정치 주제를 의도적으로 피했는데, 정치투쟁을 이해하지 못하고 노동조합주의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며, ‘합법 마르크스주의’(스트루베, 투간바라놉스키)의 영향을 받아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로 기울었다.

『라보체예 델로』(노동자의 사업)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 해외연합의 기관지로 1899년 4월부터 1902년 2월까지 발행되었고(인쇄는 제네바, 편집부는 파리), 편집자는 보리스 크리쳅스키, 파벨 테플로프, 블라디미르 이반신, 1900년부터는 A. S. 마르티노프였으며 그 편집부가 경제주의자들의 중심이었다. 경제주의의 지도자로는 크리쳅스키, 쿠스코바, 마르티노프, 프로코포비치, 타흐타레프가 꼽힌다.

레닌의 비판은 1899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항의」에서 시작되어, 1901년 12월 『이스크라』 제12호에 실린 「경제주의 옹호자들과의 대화」를 거쳐, 1901년 가을부터 1902년 2월에 걸쳐 집필되어 1902년 3월 초 슈투트가르트에서 출간된 『무엇을 할 것인가?』로 이어졌다. 이 책은 경제주의의 ‘원시성’과 ‘수공업적’ 방법에 맞서 전국적 정치조직과 전러시아 정치신문을 세울 것을 주장했다.

관계

경제주의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내부의 여러 조류 및 이를 반대한 『이스크라』 그룹(레닌, 플레하노프)과 연결된다. 베른슈타니즘·수정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레닌은 이를 숨은 베른슈타니즘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멘셰비즘의 전구(前驅)로 평가된다. 청산주의 경향의 연원으로도 지목되며, ‘소소한 요구를 위한 투쟁’과 결부된 즈바토프주의와 대비되기도 한다.

레닌의 비판 구도에서 『이스크라』 그룹은 플레하노프의 ‘노동해방’ 그룹과 함께 경제주의와 싸웠고, 『이스크라』의 대리인망과 신문 자체가 경제주의적 ‘원시성’에 대한 실천적 대답이었다. 제2차 대회에서 『라보체예 델로』는 극우파를 대표했으며, 그 뒤 당은 볼셰비키(레닌)와 멘셰비키(마르토프)로 분열했다.

사례

1899년 쿠스코바가 작성한 경제주의자들의 「크레도」는 창립 문서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서구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지배적 실천, 즉 경제투쟁에 우세한 정치투쟁의 이론적 표현”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러시아에서는 저항이 가장 적은 길이 “결코 정치활동으로 향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고,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경제투쟁을 돕고 자유주의 반대파 활동에 참가할 것을 제안했다.

1901년 9월 『이스크라』 제12호에 실린 경제주의자의 편지와 이에 대한 레닌의 답변 「경제주의 옹호자들과의 대화」는 논쟁의 양상을 보여준다. 편지 작성자들은 『라보차야 미슬』을 옹호하고 『이스크라』가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과장한다고 공격했으며, 레닌은 ‘이데올로기’가 자발적 운동에 앞서야 한다고 답하고 오데사 위원회 일부가 경제주의적 ‘크레도’를 숨긴 점을 비판했다. 한편 『라보체예 델로』는 “어떤 사회민주주의 조직도 경제주의라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선언했다.

『라보차야 미슬』의 기사들도 이 조류를 보여준다. 제7호(1899년 7월)는 노동시간 단축 투쟁 자체를 ‘정치투쟁’으로 다루었고, 제11호(1901년 4월)는 “파업, 결사와 집회의 자유,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무엇보다 먼저” 요구할 것을 주장했다. 제4호(1898년 10월)는 파업, 노동조합과 상호부조, 소비조합, 교육센터 등을 투쟁 수단으로 열거했으나 정치당은 들지 않았다.

구별

레닌은 정치 문제에서 경제주의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를 구별한다. 경제주의자들은 ‘정치’를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사회민주주의적 정치 이해에서 노동조합주의적 정치 이해로 끊임없이 흘러갔다.” 혁명적 사회민주주의는 개혁투쟁을 포함하되 이를 자유와 사회주의를 위한 혁명투쟁에 종속시키는 반면, ‘경제투쟁 자체에 정치적 성격을 부여하자’는 경제주의의 테제는 사회민주주의 정치를 노동조합 정치, 곧 영국 노동조합이 오래 추구해 온 입법적·행정적 경제개혁 투쟁으로 축소한다.

경제주의를 일반적인 경제결정론이나 환원주의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조류인 경제주의는 모든 사회·정치·문화적 현실을 경제적 토대로 환원하는 넓은 사회학적 ‘경제주의’와 구별되며, 후자는 경제주의의 한 측면으로 다루어진다.

출처

  1.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Lenin's contemporary critique of Economism and argument for political organization
  2.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draft declaration on Iskra and the Economists
  3.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4.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5. 위키백과 (러시아어)
  6. 위키백과 (영문)
  7. 위키백과 (영문)
  8.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9. 위키백과 (영문)
  10.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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