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관념론
German Idealism
1781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1831년 헤겔의 죽음까지 독일에서 이어진 철학의 흐름으로, 칸트·피히테·셸링·헤겔이 대표한다. 우리가 아는 세계는 정신의 활동이 짜 낸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해 인식과 자유와 역사를 하나의 체계로 설명하려 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이 흐름을 ‘독일 고전철학’이라 부르며, 레닌은 그 가장 중요한 성과인 헤겔의 변증법을 마르크스주의가 물려받은 첫째 원천으로 꼽았다.
상세
왜 마르크스주의 사전에 관념론 철학이 나오나?
‘관념론’이라는 말은 현실을 모르는 공상이라는 뜻으로 들리기 쉽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철학을 내다 버린 적이 없다. 레닌은 1913년 마르크스 서거 30주년에 쓴 「마르크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과 세 가지 구성 부분」에서 마르크스의 학설이 “독일 철학, 영국 정치경제학, 프랑스 사회주의라는 모습으로 인류가 19세기에 만들어 낸 가장 좋은 것의 정당한 계승자”라고 썼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독일 고전철학, 특히 헤겔의 체계에서 얻은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변증법, 곧 “가장 완전하고 깊으며 일면성에서 벗어난 형태의 발전에 관한 학설”이라고 정리했다.
Главное из этих приобретений — диалектика, т. е. учение о развитии в его наиболее полном, глубоком и свободном от односторонности виде
엥겔스는 더 짧게 말했다. 1886년 잡지에 싣고 1888년 단행본으로 낸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은 “독일 노동운동은 독일 고전철학의 상속자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이 사전이 독일 관념론을 다루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은 이 철학과 씨름하면서 자랐고, 그 흔적은 『자본론』의 문장에까지 남아 있다.
Die deutsche Arbeiterbewegung ist die Erbin der deutschen klassischen Philosophie.
칸트는 무엇을 뒤집었나?
이마누엘 칸트 이전의 철학은 대체로 우리의 앎이 바깥의 대상을 그대로 베낀다고 생각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제2판(1787) 머리말에서 이 생각을 거꾸로 세워 보자고 제안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인식이 대상에 따라야 한다고 가정했다. … 그러니 이번에는 대상이 우리의 인식에 따라야 한다고 가정하면 형이상학의 과제에서 더 잘 나아가지 않을지 한번 시험해 보자.” 그는 이 시도를, 별들이 관찰자 둘레를 돈다는 설명이 막히자 관찰자가 돈다고 가정해 본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에 견주었다. 철학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부르는 대목이다.
Bisher nahm man an, alle unsere Erkenntnis müsse sich nach den Gegenständen richten; … Man versuche es daher einmal, ob wir nicht in den Aufgaben der Metaphysik damit besser fortkommen, daß wir annehmen, die Gegenstände müssen sich nach unserem Erkenntnis richten
쉽게 말하면 시간과 공간, 원인과 결과 같은 틀은 세계에 원래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정신이 경험을 짜 맞추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정신은 감각을 받아 적기만 하는 그릇이 아니라 경험을 능동적으로 구성한다. 그 대신 칸트는 대가를 치렀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세계, 곧 현상뿐이고, 그 자체로 있는 사물인 ‘물자체’는 알 수 없다고 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앎과 실재 사이에 남은 이 틈을 어떻게 메울지가 그 뒤 반세기 동안 독일 철학의 숙제가 되었다.
피히테·셸링·헤겔은 칸트를 어떻게 넘어서려 했나?
칸트의 후계자들은 물자체를 정말 알 수 없다면 그것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지 않느냐고 따졌다.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는 물자체를 “한낱 지어낸 것이며 아무런 실재성도 없다”고 내치고, 모든 경험의 바탕에 스스로를 세우는 ‘나’를 놓았다. 1794년부터 1813년까지 여러 차례 고쳐 쓴 그의 『지식학』은 ‘나’가 자기에 맞서는 ‘나 아닌 것’을 세우고 그 대립을 넘어서는 과정으로 앎과 행동을 설명했다. 피히테는 이 철학을 교회에 맞서는 쪽으로 풀어 공개 강의를 하다가 1798~1799년 ‘무신론 논쟁’에 휘말려 예나 대학에서 물러나야 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은 처음에는 피히테를 따랐지만 곧 그 철학이 주체 한쪽만 본다고 비판했다. 그는 정신에서 자연을 설명하는 피히테의 길에 더해, 거꾸로 자연에서 정신을 설명하는 ‘자연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고, 자연과 정신이 하나의 절대자에서 나온다는 ‘동일철학’을 세웠다. 1790년대의 대학 도시 예나는 이 철학자들이 괴테·실러, 그리고 갓 태어난 낭만주의의 문인들과 어울린 사상의 실험장이었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하나의 원리를 출발점에 놓고 모든 것을 끌어내는 방식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1807년 『정신현상학』 머리말에 “참된 것은 전체다. 그러나 전체란 자기 발전을 거쳐 스스로를 완성하는 본질일 뿐이다”라고 썼다. 절대자는 처음부터 완성되어 주어진 원리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결과”이며, 끝에 가서야 참모습이 된다는 것이다. 진리를 고정된 명제가 아니라 펼쳐져 가는 과정으로 본 이 생각이 뒤에 마르크스가 이어받은 변증법의 뿌리다. 헤겔은 1818년부터 1831년 죽을 때까지 베를린 대학에서 가르쳤다.
Das Wahre ist das Ganze. Das Ganze aber ist nur das durch seine Entwicklung sich vollendende Wesen. Es ist von dem Absoluten zu sagen, daß es wesentlich Resultat, daß es erst am Ende das ist, was es in Wahrheit ist
‘관념론’은 여기서 무슨 뜻인가?
이 철학자들은 스스로를 ‘독일 관념론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 이름은 1840년대에 그들의 유물론적 반대자들이 붙인 것이고, 중립적인 뜻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860년대부터다. 독일에서는 같은 시대를 ‘고전 독일 철학’이라고도 부른다. 다만 엥겔스와 레닌이 말하는 독일 고전철학은 칸트에서 헤겔을 지나 헤겔을 유물론 쪽으로 뒤집은 루트비히 포이어바흐까지 아우르므로 조금 더 넓다.
엥겔스는 같은 책에서 관념론과 유물론을 아주 단순한 기준으로 갈랐다. 모든 철학, 특히 근대 철학의 “큰 근본 문제는 사유와 존재의 관계에 관한 물음”이고, 이는 곧 정신과 자연 가운데 무엇이 먼저냐는 물음이다. 정신이 먼저라고 주장해 결국 어떤 식으로든 세계 창조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관념론의 진영을 이루었고”, 자연을 근원으로 본 사람들은 유물론의 여러 학파에 속한다. 엥겔스는 헤겔의 세계 창조가 “기독교에서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불가능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니 마르크스주의 문헌에서 ‘관념론’은 공상이라는 비난이 아니라 정신을 세계의 근원에 놓는 철학이라는 분류의 이름이다.
Die große Grundfrage aller, speziell neueren Philosophie ist die nach dem Verhältnis von Denken und Sein.
칸트의 유산을 물려받은 쪽이 헤겔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현상과 물자체 구분을 받아들이면서도 물자체를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이고 끝없는 ‘의지’라고 보았고, 헤겔의 낙관적 이성주의를 물리쳤다. 독일 관념론은 하나의 학설이 아니라 서로 다투는 여러 체계의 묶음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무엇을 물려받고 무엇을 버렸나?
엥겔스는 이 철학의 역설을 이렇게 그렸다. 18세기 프랑스 계몽사상가들은 교회와 국가에 맞서 책을 외국에서 찍고 감옥을 각오했지만, 독일의 철학자들은 국가가 임명한 교수였고, 그 흐름을 마무리한 헤겔의 체계는 “어느 정도 왕립 프로이센 국가 철학의 지위로까지 올라섰다”. 그런데도 그 딱딱하고 어두운 문장 뒤에 혁명이 숨어 있다는 것을 정부도 자유주의자도 보지 못했고, “1833년에 이미 적어도 한 사람, 하인리히 하이네”만이 알아보았다고 엥겔스는 썼다.
혁명적인 것은 체계가 아니라 방법이었다. 헤겔은 모든 것을 생겨나고 사라지는 과정으로 보는 변증법을 세웠지만, 그 과정을 절대이념이 자기를 펼치는 이야기로 만들고 하나의 완결된 체계로 닫으려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변증법을 관념의 운동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운동을 비추는 것으로 고쳐 이어받았다. 엥겔스의 표현으로는 헤겔의 변증법을 “머리로 서 있던 데서 다시 발로 서게” 한 것이다. 체계는 버렸다. 그 사이를 이은 다리가 헤겔이 죽은 뒤 갈라진 헤겔학파, 특히 청년헤겔파와 포이어바흐였다.
damit wurde die Hegelsche Dialektik auf den Kopf, oder vielmehr vom Kopf, auf dem sie stand, wieder auf die Füße gestell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