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학파
Hegelian School
1831년 헤겔이 죽은 뒤 그의 철학을 이어 가려 한 제자와 추종자들. 처음에는 헤겔의 체계를 완성된 진리로 받들었으나 1835년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를 둘러싼 논쟁에서 종교와 정치를 보는 눈이 갈렸고, 슈트라우스가 1837년 이들을 우파·중앙파·좌파로 나눈 뒤 ‘헤겔 우파’와 ‘헤겔 좌파’(청년헤겔파)라는 구분이 굳어졌다. 엥겔스는 이 분열을 헤겔의 보수적 체계와 혁명적 방법 가운데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느냐의 차이로 설명했다.
상세
헤겔이 죽은 뒤 제자들은 무엇을 했나?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이 1818년부터 베를린 대학에서 가르치는 동안 그 둘레에는 신학과 철학의 제자들이 모였다. 1831년 헤겔이 콜레라로 갑자기 죽자 이들은 ‘고인의 친우회’를 만들어 스승의 전집을 펴내는 일을 첫째 과제로 삼았다. 이 전집에는 헤겔이 생전에 책으로 내지 않은 역사철학·종교철학·미학·철학사 강의가 실려, 더 넓은 독자가 헤겔을 읽을 길이 열렸다.
엥겔스의 회고에 따르면 헤겔 철학의 승리는 스승이 죽은 뒤에 더 커졌다. “1830년부터 1840년까지야말로 ‘헤겔주의’가 가장 배타적으로 지배했고”, 헤겔의 생각은 온갖 학문과 대중 문학, 신문에까지 스며들었다. 그러나 엥겔스는 이 전면적 승리가 “내부 투쟁의 서곡”이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grade von 1830 bis 1840 herrschte die “Hegelei” am ausschließlichsten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라는 말은 어떻게 읽혔나?
헤겔은 1820년 『법철학 강요』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 엥겔스는 어떤 철학 명제도 이 문장만큼 “편협한 정부들의 감사와 그만큼 편협한 자유주의자들의 분노”를 함께 산 것이 없다고 했다. 겉으로 보면 이 문장은 “현존하는 모든 것을 성스럽다고 선언하는 것”, 곧 전제정치와 경찰국가와 검열을 철학으로 축복하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Was vernünftig ist, das ist wirklich;
und was wirklich ist, das ist vernünftig.
그러나 엥겔스는 헤겔에게 ‘현실적’이란 그냥 지금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필연적이라는 뜻이라고 읽었다. 1789년의 프랑스 왕정은 필연성을 잃고 비이성적이 되었기에 혁명으로 무너져야 했고, 그때는 왕정이 아니라 혁명이 현실적이었다. 그렇게 보면 헤겔의 명제는 그의 변증법에 따라 스스로 뒤집혀 “존재하는 모든 것은 멸망할 만하다”는 명제로 풀린다. 같은 문장에서 한쪽은 현존 질서의 정당화를, 다른 쪽은 그 몰락의 필연성을 읽어 낸 것이다. 헤겔학파가 갈라진 지점이 바로 여기였다.
Alles was besteht, ist wert, daß es zugrunde geht.
왜 갈라졌나?
엥겔스는 분열의 원인을 헤겔 철학 자체에서 찾았다. 헤겔의 학설에는 서로 다른 실천적 입장이 들어설 넉넉한 자리가 있었고, 당시 독일에서 실천적인 문제란 무엇보다 종교와 정치였다. “헤겔의 체계에 무게를 둔 사람은 두 분야에서 꽤 보수적일 수 있었고, 변증법적 방법을 핵심으로 본 사람은 종교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가장 극단적인 반대파에 설 수 있었다. 헤겔 자신은 혁명적인 분노를 자주 터뜨리면서도 대체로 보수 쪽에 기울었는데, 엥겔스는 그 까닭을 그에게는 체계가 방법보다 훨씬 더 많은 “고된 사유의 노동”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Wer das Hauptgewicht auf das System Hegels legte, konnte auf beiden Gebieten ziemlich konservativ sein; wer in der dialektischen Methode die Hauptsache sah, konnte religiös wie politisch zur äußersten Opposition gehören.
불씨는 종교에서 튀었다. 1835년 다비트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가 『예수의 생애』에서 복음서의 기적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만들어 낸 신화로 풀이하고, 이것이 헤겔의 생각에 맞는다고 주장한 것이다. 필리프 마르하이네케, 카를 프리드리히 괴셸, 게오르크 안드레아스 가블러 같은 보수적인 헤겔주의자들은 이를 반박했고, 카를 로젠크란츠 같은 이들은 중재하려 했다.
우파·중앙파·좌파라는 구분은 어디서 왔나?
슈트라우스는 1837년 자신을 변호하는 『논쟁문집』에서 헤겔주의자들을 『예수의 생애』에 대한 반응에 따라 나누었다. 그는 프랑스 의회의 좌석 배치에서 이름을 빌려, 복음서의 이야기가 헤겔 철학과 온전히 들어맞는다고 본 사람들을 우파, 일부만 맞는다고 본 사람들을 중앙파, 헤겔 철학과 기독교 교리가 근본적으로 화해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린 사람들을 좌파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거의 순전히 신학적인 구분이었지만, 이 이름은 곧 헤겔학파가 보수적 날개와 혁명적 날개로 갈라진 것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말이 되었다.
이 구분에는 조심할 점이 있다. 그 시대의 어떤 헤겔주의자도 스스로를 ‘헤겔 우파’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 말은 스스로 좌파를 자처한 슈트라우스가 만든 낮춤말이었다. ‘노헤겔파’라고도 불린 우파는 베를린 대학과 깊이 얽혀 그곳의 철학·신학 교수 자리를 여럿 차지했고, 프로이센 국가를 역사 발전의 정점처럼 여겼다. 그들의 이름은 오늘날 거의 잊혔고 좌파, 곧 청년헤겔파의 명성에 가려졌지만, 신학에서는 흔적을 남겼다. 최근 연구는 좌우 구분이라는 틀 자체를 다시 묻기도 한다.
학파는 어떻게 끝났나?
엥겔스에 따르면 1830년대 말로 갈수록 학파의 분열은 점점 더 드러났다. 좌파는 1840년 경건주의 정통파와 봉건 반동을 등에 업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즉위하자 공공연히 편을 가를 수밖에 없었다. 국가는 헤겔 철학을 더는 보호하지 않았다. 1841년 2월 늙은 셸링이 “헤겔주의의 용의 씨앗을 뿌리 뽑으라”는 임무를 받고 베를린에 불려 왔다. 좌파의 이야기는 청년헤겔파 항목에서 이어진다.
1848년 혁명 이후 1840년 무렵까지 독일 철학계를 지배하던 헤겔주의는 물러났고, 1860년 무렵에는 칸트로 돌아가자는 신칸트주의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마르크스는 1873년 『자본론』 제2판 후기에서, 당시 독일의 교양층이 헤겔을 레싱 시대의 모제스 멘델스존이 스피노자를 다루듯 “죽은 개”로 취급하는 것에 맞서 자신은 “그 위대한 사상가의 제자”임을 공공연히 밝힌다고 썼다.
Hegel zu behandeln, wie der brave Moses Mendelssohn zu Lessings Zeit den Spinoza behandelt hat, nämlich als “toten Hund”.
헤겔학파는 독일 밖에서 더 오래 살아남았다. 북유럽과 이탈리아, 영국과 미국에 저마다 다른 헤겔 학파가 생겼고, 러시아에서는 1840년대에 비사리온 벨린스키, 알렉산드르 게르첸, 미하일 바쿠닌,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 같은 이들이 헤겔을 통해 사상의 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