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주의사무국
International Socialist Bureau
제2인터내셔널의 상설 집행·연락 기구. 1900년 파리 대회의 결정으로 브뤼셀에 세워졌고, 대회와 대회 사이에 각국 당 대표가 모여 회의를 열었다. 의장은 에밀 반데르벨데, 서기는 카미유 하위스만스였고, 레닌도 1905년부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대표로 참여했다. 1914년 7월 29~30일 마지막 전체 회의 뒤 전쟁으로 기능을 잃었고, 치머발트 운동에 적대했으며, 전후 1919년 베른 회의를 거쳐 1923년 노동사회주의 인터내셔널로 이어졌다.
상세
대회에서 상설 기구로
제2인터내셔널은 1889년 창립 뒤 한동안 정기 대회의 연속일 뿐 상설 조직이 없었고, 다음 대회를 맡은 나라의 당이 대회를 준비했다. 1900년 파리 대회는 대회와 대회 사이에 정기적으로 모이는 상설 사무국을 두고 브뤼셀에 상설 서기국을 세우기로 했다. 각 나라 당은 대표 두 명(회의에 따라 한두 명에서 세 명)을 보냈고, 회의 사이에는 벨기에 노동당 집행위원회가 사무국을 이끌었다. 에밀 반데르벨데가 의장, 카미유 하위스만스가 서기였다.
사무국은 1901년 12월 브뤼셀의 첫 회의부터 1914년 7월 29~30일 브뤼셀의 마지막 회의까지 모두 16차례 전체 회의를 열었다. 레닌은 1905년부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대표로 사무국에 참여했고, 1914년 6월부터는 그의 제안으로 막심 리트비노프가 중앙위원회를 대표했다.
1914년의 붕괴와 치머발트
1914년 7월 말 마지막 회의는 전쟁을 막지 못했다. 독일군이 벨기에 대부분을 점령하자 집행위원회는 본부를 헤이그로 옮기고 네덜란드의 피터르 옐레스 트룰스트라, 헨리 판콜 등을 위원으로 더했다. 집행위원회는 대표성 없는 회의가 인터내셔널의 해체로 이어질까 두려워 전체 회의 소집을 미루었고, 교전국 당들과 따로따로 만나는 데 그쳤다.
레닌은 사무국이 전쟁 중 사회배외주의자들의 손에 놀아나는 도구가 되었다고 보았다. 1915년 치머발트 선언도 사회주의 정당들과 국제사회주의사무국이 슈투트가르트·코펜하겐·바젤 대회의 결의에서 나오는 의무를 저버렸다고 지적했고, 레닌은 치머발트 회의가 세운 국제사회주의위원회를 옛 사무국의 뜻을 거슬러 세운 「사실상 새로운 국제사회주의사무국」이라 불렀다. 사무국은 치머발트 운동에 적대했다. 하위스만스는 치머발트 참가자들을 대표성 없는 「아마추어」라 조롱했고, 1916년 킨탈 회의에 영국과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이 가지 않도록 설득했다고 전해진다.
스톡홀름 시도와 그 뒤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 뒤 사무국의 네덜란드 위원들과 하위스만스는 스톡홀름으로 가서 스칸디나비아 사회주의자들과 네덜란드-스칸디나비아 위원회를 꾸리고 전체 사회주의 회의를 열려 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1918년 11월 하위스만스는 협상국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옛 교전국 사회주의 정당들의 회의를 준비했고, 이것이 1919년 베른 회의가 되었다. 베른 회의에서 되살아난 제2인터내셔널은 1923년 함부르크에서 빈 국제연합(2½ 인터내셔널)과 합쳐 노동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