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왕조파 (프랑스)
Legitimists (France)
1830년 7월 혁명으로 쫓겨난 부르봉 왕가 본가의 왕위 계승권만 정당하다고 본 프랑스 왕당파. 오를레앙가 루이 필리프의 7월 왕정을 찬탈로 여겼다. 제2공화국에서는 오를레앙파와 함께 질서당을 이루었고, 마르크스는 『브뤼메르 18일』에서 이들을 대토지 소유의 정치적 대표로 분석했다. 1883년 샹보르 백작이 자식 없이 죽으면서 정치 세력으로서는 사실상 사라졌다.
상세
뿌리는 왕정복고기(1814~1830)의 울트라 왕당파다. 「국왕보다 더 왕당적」이라는 말을 듣던 이들은 루이 18세와 샤를 10세 아래서 의회 다수를 차지하고 구체제를 되살리려 했다. 1830년 7월 혁명으로 부르봉 본가가 쫓겨나고 분가인 오를레앙가의 루이 필리프가 왕이 되자, 이들은 부르봉 본가의 복위를 목표로 삼았고 이때부터 정통왕조파라 불렸다. 이들이 왕으로 받든 사람은 샤를 10세의 손자 샹보르 백작 앙리, 곧 「앙리 5세」였다.
7월 왕정 18년 동안 정통왕조파는 정치에서 밀려나 많은 이가 시골 성으로 물러났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루이 필리프가 쓰러지자 오히려 다시 무대에 올랐다. 이들은 오를레앙파와 손잡고 질서당을 만들어 1849년 5월 선거부터 1851년 12월 쿠데타까지 의회를 지배했고, 1848년 12월부터 1849년 11월까지 오딜롱 바로 내각에서 큰 몫을 맡았으며, 1850년 교회가 중등교육에 돌아오게 한 팔루 법을 통과시켰다.
두 왕당파를 하나로 묶자는 「융합」 논의가 오래 이어졌지만 이루어지지 않았고, 1850년 뒤 두 당파는 다시 갈라졌다. 오를레앙파가 루이 필리프의 셋째 아들 주앵빌 공을 대통령 후보로 밀 때 정통왕조파는 대체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재선을 허용하자는 쪽이었다. 그러나 1851년 말 보나파르트가 보통선거를 되살리려 하자 반대했고, 12월 2일 쿠데타 때 그 지도자들도 오를레앙파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제2제정 동안 정통왕조파는 다시 정치에서 밀려났다.
1871년 2월 선거로 왕당파가 국민의회 다수를 차지하자 정통왕조파는 마지막으로 되살아났다. 오를레앙파와 융합에 합의해 샹보르 백작을 왕으로, 그가 자식 없이 죽으면 오를레앙가의 파리 백작을 후계자로 삼기로 했다. 그러나 샹보르 백작이 삼색기를 거부하고 구체제의 백합꽃 깃발을 고집해 왕정복고는 무산되었다. 1883년 그가 죽자 정통왕조파는 정치 세력으로서 사실상 흩어졌고, 그 뒤 남은 소수는 에스파냐 부르봉가 사람들을 왕위 요구자로 받들었다.
마르크스는 『브뤼메르 18일』 3장에서 두 왕당파를 가른 것이 깃발이나 왕가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고 보았다. 「정통 왕권은 땅의 주인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지배를 정치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었고, 7월 왕정은 부르주아 벼락부자가 찬탈한 지배를 정치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니 이 분파들을 갈라놓은 것은 이른바 원칙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의 물질적 존재 조건,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소유였다.」 그는 또 지방의 정통왕조파가 의회 지도자 베리에와 팔루를 앙리 5세를 배신했다고 비난한 일도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