Лысенковщина · 1933–1965

리센코주의

Lysenkoism

농학자 트로핌 리센코의 학설을 국가가 떠받들고, 그에 반대하는 유전학자들을 ‘관념론’과 ‘형이상학’의 이름으로 몰아낸 1933~1965년 소련의 과학 정책과 그 학설. 리센코는 유전자를 부정하고 환경이 바꾼 형질이 유전된다고 주장했으며, 1948년 8월 레닌 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 회의에서 그의 ‘미추린 생물학’이 당의 승인을 받아 유일하게 올바른 이론으로 선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실험 대신 과학 논쟁의 승패를 가르는 심판으로 동원되었고, 3천 명 넘는 생물학자가 해고되거나 투옥되었다. 1964년 흐루쇼프가 물러난 뒤에야 끝났다.

상세

리센코주의는 왜 지금도 경고의 이름으로 쓰이나?

과학의 역사에는 틀린 학설이 많다. 리센코주의가 특별한 것은 학설이 틀렸다는 사실보다, 틀린 학설이 국가 권력과 공식 철학의 보호를 받아 옳은 학설을 30년 가까이 짓눌렀다는 데 있다. 러시아어 ‘리센콥시나’(лысенковщина)는 1933~1965년 소련에서 자연과학의 학문적 반대자를 이념 투쟁의 방식으로 제압한 관행을 가리키고, 오늘날 러시아어에서는 과학자를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견해 때문에 행정적으로 박해하는 일 전반을 비유적으로 부르는 말로도 쓰인다. 영어권에서도 ‘리센코주의’는 정치나 이념이 과학의 결론을 정하는 모든 경우를 가리키는 경고어가 되었다.

이 사전이 리센코주의를 철학 항목으로 다루는 까닭은 그 무기가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리센코와 그 지지자들은 실험 결과로 유전학자들을 이긴 것이 아니라, 자기 학설은 ‘유물변증법적’이고 상대의 학설은 ‘형이상학적-관념론적’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이겼다. 1920년대 기계론자와 변증법론자의 논쟁 이후 철학이 과학 위에 서는 구조가 만들어졌고, 리센코주의는 그 구조가 낳은 가장 큰 피해였다.

리센코는 무엇을 주장했나?

우크라이나 농민 출신 농학자 트로핌 리센코는 1928년 무렵 겨울밀 종자를 차고 축축하게 처리해 봄에 뿌려도 이삭이 패게 하는 기술, 곧 춘화처리를 내세워 이름을 얻었다. 이 기술 자체는 니콜라이 바빌로프를 비롯한 소련과 외국의 과학자들도 쓸모를 인정했다. 신문은 농민의 아들 리센코를 민중 속에서 나온 천재로 띄웠고, 집단화 뒤의 농업 위기와 1932~33년 기근 속에서 빠른 성과를 약속하는 그에게 정부의 지원이 몰렸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리센코는 1933~34년부터 뒷날 그의 수석 이론가가 되는 이사크 프레젠트와 함께 유전학 공격에 나섰다. 그는 생물이 살아가는 조건이 바뀌면 그 형질이 바뀌고, 그렇게 얻은 형질이 다음 세대로 유전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후천 획득 형질의 유전’이다. 반대로 그레고어 멘델, 아우구스트 바이스만, 토머스 헌트 모건으로 이어지는 유전학은 생식세포 속의 유전자가 형질을 전하며 환경이 유전자를 직접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지는 못한다고 본다. 리센코는 유전자 개념을 “부르주아의 발명”이라고 불렀고, 1947년에는 스탈린에게 가지 밀을 길러 1헥타르당 1만 5천 킬로그램을 거두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가장 좋은 조건에서 가장 생산적인 품종도 그 7분의 1 정도밖에 거두지 못했다.

철학은 이 논쟁에 어떻게 동원되었나?

1948년 7월 31일 리센코가 레닌 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 회의에서 읽은 보고 「생물학의 상황에 대하여」는 이 논쟁을 철학의 언어로 번역했다. 보고의 제3절 제목은 “두 세계, 두 이데올로기, 생물학에서”였다. 리센코는 생물의 성질이 생활 조건에 따라 바뀌고 그것이 유전되느냐는 물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본질상 유물론적-변증법적인 미추린 학설은 이 의존을 사실로 입증한다. 본질상 형이상학적-관념론적인 멘델-모건 학설은 증거 없이 그 가능성을 부정한다.”

Мичуринское учение, по своей сущности материалистическо-диалектическое, фактами утверждает такую зависимость.
Менделевско-моргановское учение, по своей сущности метафизическо-идеалистическое, бездоказательно такую возможность отвергает.

이 말이 어디서 왔는지는 분명하다. 1938년 『단기강좌』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에 대하여」는 변증법이 형이상학과 달리 자연을 “언제나 무언가가 생겨나 발전하고 무언가가 무너져 수명을 다하는” 끊임없는 운동과 변화의 상태로 본다고 가르쳤다. 리센코 진영의 생물학자 올가 레페신스카야는 거의 같은 문장으로 “자연 속의 상호 의존과 상호 제약, 끊임없는 운동과 변화에 관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학설이 미추린과 리센코를 사상적으로 무장시켰다”고 썼다. 유전자가 세대를 거쳐 비교적 안정되게 전해진다는 유전학의 주장은 이 교과서 문장에 비추면 ‘불변’을 말하는 형이상학으로 보였다. 멘델 유전의 확률적 성격도 표적이 되었다. 리센코는 회의를 마무리하며 “과학은 우연의 적이라는 것을 단단히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где всегда что-то возникает и развивается, что-то разрушается и отживает свой век.
Нам необходимо твердо запомнить, что наука -- враг случайностей.

철학자도 직접 나섰다. 1930~31년 데보린파 단죄를 이끌어 소련 철학의 지도자가 된 마르크 미틴은 이 회의에서 “미추린 노선은 그 방법론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원리에 기초한다”고 발언했다. 철학 지도부가 생물학 논쟁의 한쪽 편을 공식 철학의 이름으로 지지한 것이다.

Мичуринское направление основывается в своей методологии на принципах диалектического материализма

흥미로운 것은 스탈린 자신이 손본 대목이다. 리센코가 7월 23일 스탈린에게 보낸 초안은 ‘부르주아 유전학’, ‘부르주아 과학’, ‘반마르크스주의 생물학’ 같은 말을 썼고 “모든 과학은 계급적이다”라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계급 과학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아 「부르주아 생물학의 기초는 거짓이다」라는 절을 통째로 지웠고, ‘부르주아 과학 대 변증법적 유물론적 과학’이라는 대립을 ‘반동적(관념론적) 과학 대 진보적(유물론적, 소비에트) 과학’으로 바꿨다. 계급의 낙인을 철학의 낙인으로 바꾼 셈인데, 그 결과는 더 넓은 정당성이었다. 이제 유전학은 외국 것이어서가 아니라 철학적으로 틀렸기 때문에 배척되었다.

Оппозиция «буржуазная наука» — «диалектико-материалистическая наука» была заменена противопоставлением: «реакционная (идеалистическая) и прогрессивная (материалистическая, советская) наука».

1948년 8월 회의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1948년 봄까지만 해도 리센코의 처지는 흔들리고 있었다. 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 과학부장 유리 즈다노프가 그를 비판했기 때문이다. 리센코는 4월 스탈린에게 편지를 써 일하기 힘들다고 호소했고, 스탈린은 그의 편을 들었다. 7월 15일 소련 각료회의는 리센코 지지자를 중심으로 농업과학아카데미에 정회원 35명을 새로 임명했고, 7월 27일 리센코는 스탈린의 집무실에 불려 갔다. 회의는 7월 31일부터 8월 7일까지 열렸다.

마지막 날 리센코는 결론 연설에 앞서 이렇게 밝혔다. “쪽지로 저에게 당 중앙위원회가 제 보고를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이 왔습니다. 대답합니다. 당 중앙위원회는 제 보고를 검토하고 승인했습니다.” 속기록은 “폭풍 같은 박수가 환호로 바뀌었다. 모두 일어선다”고 적었다. 이 한마디로 과학 논쟁은 당 결정에 대한 복종의 문제가 되었다.

Я отвечаю: ЦК партии рассмотрел мой доклад и одобрил его. (Бурные аплодисменты, переходящие в овацию. Все встают.)

같은 날 유전학 쪽 학자들의 자기비판이 이어졌다. 식물학자 표트르 주콥스키는 이틀 전 자기 발언이 “공산당원과 소비에트 과학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고 고백했고, 같은 날 《프라우다》에는 유리 즈다노프가 자기 비판을 거둬들이는 편지를 실었다. 유전학자 이오시프 라포포르트만이 끝까지 유전학을 과학으로 옹호하고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아 당에서 쫓겨났다.

было недостойно члена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ой партии и советского ученого.

회의 뒤 숙청이 대학과 연구소를 휩쓸었다. 8월 23일 고등교육부 장관 세르게이 카프타노프는 명령 제1208호로 대학의 생물학 교육과정을 ‘미추린 생물학’에 맞춰 다시 짜게 했고, 8월 26일 과학아카데미 간부회도 같은 결정을 내렸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대학의 생물학부는 프레젠트가 맡았다. 이때 행정적 박해를 받은 유전학자는 러시아 연구자들의 추산으로 약 300명이고, 1930년대부터의 전체 기간을 놓고 보면 해고되거나 투옥된 생물학자는 3천 명이 넘는다. 이보다 앞서 1930년대 말에는 이미 여러 유전학자가 처형되었고, 바빌로프는 1940년 체포되어 1943년 감옥에서 죽었다. 1950년에는 같은 방식으로 이반 파블로프의 유산을 내건 회의가 생리학과 세포학을 공격했다.

리센코주의는 어떻게 끝났나?

1952년 말부터 신문에 리센코를 비판하는 글이 실리기 시작했고, 1955년에는 물리학자와 생물학자 300여 명이 ‘300인의 편지’로 생물학의 정상화를 요구했다. 그러나 니키타 흐루쇼프는 ‘민중 출신 학자’ 리센코를 여전히 아꼈고, 리센코주의를 비판하는 일은 다시 금지되었다. 그 사이 유전학은 엉뚱한 곳에서 살아남았다. 원자탄과 원자로를 만들던 물리학자들이 비밀 연구소 안에 방사선 유전학 실험실을 차린 것이다. 스탈린은 핵물리학자들의 계산에는 간섭하지 않았는데, 역사가 토니 주트는 이를 두고 “스탈린은 미쳤을지는 몰라도 어리석지는 않았다”고 썼다.

1964년 10월 흐루쇼프가 물러나자 상황이 바뀌었다. 1965년 3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전환점이 되었고, 농업과학아카데미와 과학아카데미의 위원회는 리센코의 연구가 과학적 절차를 어기고 신뢰할 수 없게 수행되었다는 공식 결론을 냈다. 리센코는 지도적 지위에서 물러났지만 1976년 죽을 때까지 고전 유전학에 반대하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 리센코주의를 어떻게 읽어야 하나?

냉전기 서방에서 리센코주의는 공산주의가 과학과 함께할 수 없다는 증거로 자주 쓰였다. 소련 안에서도 1965년 이후 그것은 개인숭배 시대의 일탈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두 설명은 모두 너무 간단하다. 리센코의 춘화처리는 한때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유전학자 J. B. S. 홀데인도 “큰 가치”를 인정한 기술이었고, 서방의 마르크스주의 생물학자들은 뒤에 변증법적 사고가 생물학에 줄 수 있는 것과 리센코주의를 구별하려고 애썼다. 문제는 변증법이라는 낱말이 아니라, 실험과 동료 검토로 가려야 할 물음을 공식 철학의 문장과 당의 승인으로 가렸다는 데 있었다.

이 사전의 다른 항목들은 이 사건의 다른 면을 다룬다. ‘야로비자치야 (춘화처리)’는 기술 자체를, ‘300인의 편지’는 과학자들의 저항을, ‘즈다노프시나’는 같은 시기 문화계의 이념 통제를 다룬다. 이 항목의 초점은 철학이 과학 논쟁의 심판으로 쓰인 방식이다. 1920년대 기계론자와 데보린파의 논쟁에서 이미 철학적 쟁점이 정치적 충성의 문제로 번역되었고, 1938년의 교과서는 그 결론을 고정했으며, 1948년에는 그 교과서의 문장이 유전학을 금지하는 근거가 되었다. 철학이 과학에 질문을 던질 수는 있어도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역사가 남긴 교훈으로 흔히 꼽힌다.

관련 인물

출처

  1. 위키백과 (러시아어)
  2. 위키백과 (러시아어)
  3. 위키백과 (영문)
  4. shipunov.depo.msu.ru
  5. lib.ru
  6. 위키백과 (러시아어)
  7. 위키백과 (러시아어)
  8. 위키백과 (러시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