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미학 (리프시츠)
Marxist Aesthetics (Lifshitz)
소련 철학자 미하일 리프시츠가 1920년대 말부터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흩어진 예술 관련 발언을 모아 하나의 체계로 다시 세운 미학 이론이다. 아름다움과 예술의 가치가 한 계급의 취향으로 환원되지 않는 객관적 근거를 가진다고 보았고, 1930년대에는 루카치 죄르지와 함께 잡지 《문학비평가》(1933~1940)를 무대로 저속사회학과 싸우며 선집 『마르크스·엥겔스 예술론』(1937)을 엮었다. 반대자들은 이 그룹을 ‘흐름’(테체니예)이라 불렀고, 잡지는 1940년 당 중앙위원회 결정으로 폐간되었다.
상세
마르크스에게 미학이 있었나?
마르크스주의는 흔히 경제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이론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예술은 그 시대 경제와 계급 이해관계의 반영일 뿐이고, 셰익스피어나 톨스토이를 읽는 일은 낡은 지배계급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일에 지나지 않을까? 1920년대 소련의 마르크스주의 예술론은 대체로 그렇게 답했다.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은 더 중요한 문제에 매달렸기 때문에 예술에 관해서는 “끝까지 다듬어지지 않은 단편적 발언”만 남겼다는 것이 통념이었고, 마르크스의 전기를 가장 잘 알던 프란츠 메링도 그렇게 보았다. 마르크스주의 미학은 주로 플레하노프의 글에 기대어 있었고, 예술 같은 ‘상부구조’를 경제적 ‘토대’로 바로 환원해 설명했다.
В двадцатые годы в марксистской литературе господствовала мысль, что у Маркса, Энгельса и Ленина, занятых более серьёзными проблемами, существовали лишь «недоразвитые до конца, частные высказывания по вопросам искусства».
그런데 마르크스 자신이 이 도식에 들어맞지 않는 문장을 남겼다. 1857년에 쓰고 생전에 발표하지 않은 『정치경제학 비판』 서설에서 그는 그리스 예술과 서사시가 특정한 사회 발전 형태에 묶여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고 썼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물었다. “어려움은 그것들이 우리에게 아직도 예술적 즐거움을 주며, 어떤 점에서는 규범이자 도달할 수 없는 모범으로 통한다는 데 있다.” 1920년대의 해석자들은 이 대목을 마르크스가 미처 떨쳐 내지 못한 헤겔주의의 흔적으로 처리했다.
Die Schwierigkeit ist, daß sie für uns noch Kunstgenuß gewähren und in gewisser Beziehung als Norm und unerreichbare Muster gelten.
1905년 멜리토폴에서 태어난 미하일 리프시츠는 처음에 화가가 되려고 모스크바의 아방가르드 미술학교 브후테마스에 들어갔다가, 1923~1924년 무렵 모더니즘과 결별하고 고전 리얼리즘의 전통으로 돌아섰다. 그 무렵 그는 마르크스의 미학에 몰두해 1927년 첫 원고를 썼다. 출발점은 대담한 가정이었다. 마르크스에게는 예술 창작에 관한 일관된 견해가 있었고, 흩어진 발언을 꼼꼼히 모아 정리하면 그것을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리프시츠는 무엇을 주장했나?
1927년 브후테인(브후테마스의 후신)에서 발표한 「예술사에서의 변증법」 테제에서 리프시츠는 평생 지킬 생각을 압축해 내놓았다. 핵심은 모든 형태의 상대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 레닌이 철학 노트 「변증법의 문제에 관하여」에서 “객관적 변증법에서는 상대적인 것 안에 절대적인 것이 있다”고 쓴 데 기대어, 리프시츠는 “상대성 역시 상대적이다”라고 정리하고 “상대주의는 바보들의 변증법”이라고까지 말했다. 그의 중심 명제는 당시로서는 도발이었다. “우리 시대의 유행하는 문구와는 달리, 절대적 미는 절대적 진리와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그는 이 상대주의의 대표로 1920년대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으뜸 이론가로 꼽히던 블라디미르 프리체를 비판했다.
абсолютная красота существует так же, как абсолютная истина
이 말은 아름다움이 하늘에 걸린 영원한 이데아라는 뜻이 아니다. 리프시츠는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마르크스가 동물과 달리 인간은 어떤 종의 척도로도 생산할 줄 알며 “그러므로 인간은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서도 형상을 만든다”고 쓴 대목을 중시했다. 아름다움은 인간이 노동으로 세계를 다루면서 발견하는 현실 자체의 성질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그의 반영론으로 이어졌다. 리프시츠에게 반영이란 “인간이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자체가 인간 안에서 반영되는 것”이었다. 예술 작품에 드러나는 형식은 그에 앞서 삶 속에 실제로 존재한다.
der Mensch formiert daher auch nach den Gesetzen der Schönheit.
1936년 논문 「레닌주의와 예술 비평」에서 그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문장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를 두 갈래로 읽어 보였다. 하나는 존재가 이른바 사람의 “등 뒤에” 있으면서 그에게 이런저런 생각과 취향을 자동으로 불어넣는다는 읽기다. 저속사회학은 이 읽기로 톨스토이를 ‘지주 계급의 이데올로그’로 정리했다. 다른 하나는 존재가 사람의 앞에 놓인 대상으로서 의식을 규정한다는 읽기다. 레닌이 톨스토이를 “러시아 혁명의 거울”이라고 했을 때 중요한 것은 톨스토이의 출신 계급이 아니라 그의 작품이 무엇을 비추었느냐였다. 두 번째 읽기에서야 의식은 조건에 묶여 있으면서도 원칙적으로 한계가 없는 것, 곧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이 된다.
Оно также определяет сознание, но определяет его как внешний предмет ощущения и мышления.
‘흐름’과 《문학비평가》는 무엇이었나?
1930년 초, 리프시츠는 일하던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에서 1929년 12월 모스크바에 온 헝가리 철학자 루카치 죄르지를 만났다. 두 사람은 1930년대 내내 서로 깊이 영향을 주고받았다. 리프시츠는 뒷날 자신이 루카치를 마르크스주의 미학과 레닌의 반영론으로 이끌었다고 썼고, 루카치는 이 시기를 대등한 협력으로 기억했다. 이들 둘레에 블라디미르 그리프, 옐레나 우시예비치, 이고리 사츠 같은 비평가들이 모였고, 작가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도 가까웠다. 반대자들은 이 그룹을 ‘흐름’(테체니예)이라 불렀다.
이들의 지면은 소비에트 작가동맹 조직위원회가 1933년 여름부터 낸 월간지 《문학비평가》였다. 루카치는 여기에 리얼리즘론을 잇달아 실었고, 그의 『역사소설』은 1937년 러시아어로 먼저 나왔다. 같은 무렵 루카치는 독일어 망명 잡지 《국제문학》에 「표현주의의 위대함과 몰락」(1934)을 실어, 블로흐·브레히트 등과 벌인 이른바 표현주의 논쟁의 한쪽 축이 되었다. 리얼리즘 전통을 지키고 모더니즘에 회의적이었다는 점에서 리프시츠와 루카치는 한목소리를 냈다.
리프시츠 자신이 가장 아낀 작업은 선집이었다. 1933년 초판 『마르크스·엥겔스 예술론』은 그의 이름이 붙었지만 그의 구상대로 엮이지 않았고, 1937년판이 그의 계획대로 나왔다. 이 선집 덕분에 소련의 일반 독자는 처음으로 청년 마르크스의 글과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의 발췌를 읽을 수 있었다. 이듬해에는 『레닌의 문화·예술론』이 나왔다. 영어권에는 1933년 소책자를 줄여 옮긴 『칼 마르크스의 예술철학』(1938)이 거의 유일하게 알려졌다.
저속사회학,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무엇이 다른가?
이 사전의 ‘저속사회학’ 항목이 다루는 1920년대 경향, 곧 예술 작품을 계급 이해관계의 암호로 보고 그것을 풀어 폭로하는 것을 비평의 임무로 삼은 흐름이 리프시츠 미학의 직접적인 적이었다. 저속사회학은 왜 지나간 시대의 위대한 예술이 오늘도 감동을 주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리프시츠의 답은 위대한 예술이 자기 시대의 계급적 한계를 넘어 현실의 진실을 비추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1936년 무렵 논쟁은 리프시츠 쪽으로 기울었다. 그해 8월 8일 《프라우다》 사설 「학생들에게 고전문학에 대한 사랑을 심어 주자」는 리프시츠의 표현을 그대로 담았고, ‘리얼리즘’과 ‘인민성’ 같은 말이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 리프시츠는 이를 하나의 사상적 전환으로 보면서도 뒷날 “그토록 놀라운 변화가 너무 빨리, 마치 마법처럼 일어났다”고 썼다. 새 사상은 곧 통속화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중요한 말을 하려는 시도는 위험에 부딪혔다는 것이다.
«Перемена, столь разительная, — писал Лифшиц в своем позднем комментарии, — произошла слишком быстро, как бы по щучьему велению».
그러므로 리프시츠의 미학을 1934년 제1차 소비에트 작가대회가 공식화한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둘 다 고전 유산과 리얼리즘을 내세웠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당이 정한 창작 방법이었고 리프시츠의 관심은 아름다움과 진리의 객관성이라는 철학적 문제였다. 그는 1934년 《문학비평가》에 실은 「문화와 그 악덕에 관하여」에서 1920년대의 금욕주의와 1930년대의 신고전주의를 함께 비판하며, 갓 들어서던 스탈린 시대 건축에서 보이는 “형식의 과잉과 지나친 성숙, 겉으로 드러나는 위대함의 상징, 거대하고 짓누르는 것에 대한 병적인 끌림”을 꼬집었다.
왜 탄압받았고, 그 뒤 어떻게 평가되었나?
1939년 9월 비평가 블라디미르 예르밀로프가 「《문학비평가》의 해로운 견해에 관하여」를 발표하면서, 리프시츠가 편집한 루카치의 책 『리얼리즘의 역사를 위하여』를 계기로 두 번째 큰 논쟁이 시작되었다. 공격하는 쪽은 정치적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예르밀로프는 즈다노프에게 편지를 보냈고, 1940년 2월에는 작가동맹 서기 알렉산드르 파데예프와 발레리 키르포틴이 당 중앙위원회에 「소비에트 비평의 반당 그룹에 관하여」라는 보고서를 올렸다. 그해 《문학비평가》는 볼셰비키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특별 결정으로 폐간되었다.
В 1940 г. журнал «Литературный критик» закрывается специальным постановлением ЦК ВКП(б).
리프시츠는 독소전쟁에 자원해 참전했지만 전후에도 시련은 이어졌다. 1949년 ‘코즈모폴리터니즘과의 투쟁’이라는 반유대주의 캠페인 속에 그는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에서 해고되었고, 철학연구소 지도부는 그를 “코즈모폴리턴이자 절충주의자”로 몰았다. 루카치와의 길은 루카치가 1945년 헝가리로 돌아간 뒤 갈라졌다. 1960년대에 그가 모더니즘 비판에 나서자(이 사전의 ‘추함의 위기’ 항목 참고), 많은 지식인에게 그의 이름은 리얼리즘에서의 작은 일탈까지 박해한 보수주의의 대명사가 되었다.
평가는 지금도 갈린다. 리프시츠를 잊힌 거장으로 다시 읽으려는 사람들은 그가 거의 혼자서 마르크스의 미학을 재구성했고, 그것이 소련에서 같은 이름으로 가르친 교과서 미학과는 하늘과 땅만큼 달랐다고 강조한다. 화가 드미트리 구토프 같은 이들이 그 재평가를 이끌었다. 반면 철학자 에발트 일리옌코프의 계승자들은 리프시츠의 존재론적 인식론이 의식을 물질에서 곧바로 끌어내는 당대 변증법적 유물론의 자식이라고 비판한다. 리프시츠는 만년에 일리옌코프를 “전후에 길러진 우리 ‘철학자’ 가운데 가장 재능 있고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 부르면서도, 미완의 「일리옌코프와의 대화」에서 ‘이상적인 것’이 인간의 사회적 활동 속에만 있다는 그의 생각에 맞서 이상적인 것은 자연과 존재 자체에도 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왜 다시 읽는가?
리프시츠의 질문은 마르크스주의 문화론이 지금도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예술을 계급과 이데올로기로 설명하는 일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왜 어떤 작품이 시대를 넘어 살아남는지 말할 수 없다. 리프시츠는 그 답을 아름다움과 진리의 객관성에서 찾았고, 그 때문에 한편으로는 상대주의에 맞선 고전적 휴머니즘의 옹호자로,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예술 실험을 받아들이지 못한 보수주의자로 읽힌다. 그의 이론을 공식 교리와 구분해 읽는 일, 그리고 그가 1930년대와 1960년대에 서로 다른 적과 싸웠다는 사실을 함께 보는 일이 이 미학을 이해하는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