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ité central de la Garde nationale · 1871.03.15–05.28

국민방위군 중앙위원회 (1871)

Central Committee of the National Guard (1871)

1871년 파리 국민방위군 대대들이 만든 「국민방위군 공화 연맹」의 집행 기관. 3월 15일 215개 대대 대표 1,325명이 규약을 채택하며 세웠고, 3월 18일 몽마르트르 대포 탈취 시도가 실패하자 시청에 들어가 3월 28일 코뮌 평의회에 권한을 넘길 때까지 파리를 다스렸다. 그 뒤에도 국민방위군의 지휘권을 두고 코뮌과 다투며 피의 주간까지 남았다.

상세

1871년 1월 28일 휴전과 2월 8일 왕당파 다수 국민의회 선거 뒤, 파리 국민방위군 대대 대표들은 공화국을 지키려 모이기 시작했다. 2월 15일 티볼리보크스홀에서 상설 조직의 규약을 만들 임시 위원회를 뽑았고, 2월 24일에는 약 200개 대대 대표 2,000명이 정부의 무장 해제에 따르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프로이센군 입성 전날 위원회는 포위 중 시민 모금으로 사들인 대포를 몽마르트르와 벨빌 같은 노동자 구역으로 옮겼다. 3월 15일 보크스홀에서 215개 대대 대표 1,325명이 규약을 채택하고 중앙위원회를 세웠으며 가리발디를 총사령관으로 지명했지만 그는 사양했다. 부르주아 구역의 대대는 대표를 보내지 않았다.

위원회에는 노동자와 함께 소경영자, 소상인, 자유업 종사자가 섞여 있었고 국제노동자협회와 노동조합 회의소 대표도 20명쯤 있었다. 3월 18일 정부군의 대포 탈취가 실패하고 티에르가 정부와 군대를 베르사유로 빼내자, 위원회는 그날 밤 시청을 차지했다. 위원회는 자기 권한이 국민방위군의 대표와 방위에 그친다고 보고 곧바로 시의회 선거를 공고했으며, 주르드와 바를랭에게 재정을, 뒤발과 리고에게 경찰청을 맡겼다. 계엄을 풀고 정치범을 석방했으며 집세 지급을 유예하고 세입자 퇴거를 금지했다. 베르사유로 진격하자는 블랑키파의 요구는 내전을 두려워해 받아들이지 않았다.

3월 26일 선거로 뽑힌 코뮌 평의회가 3월 28일 선포되자 위원회는 권한을 넘겼지만, 국민방위군에 대한 지휘권은 놓지 않으려 했다. 위원회는 클뤼즈레를 전쟁 담당으로 지명하고 자체 신문을 냈으며, 로셀에게 지휘권을 나누라고 압박해 코뮌 의원들과 계속 부딪혔다. 국민방위군은 위원회와 코뮌 집행위원회 두 지휘 계통에 보고했고, 누가 전쟁을 책임지는지 분명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전』에서 3월 18일부터 코뮌이 들어설 때까지 중앙위원회가 혁명의 임시정부였다고 하면서도, 그 무렵 무력하던 베르사유로 곧장 진격하지 않은 것을 결정적인 실수로 꼽았다. 엥겔스는 1891년 서문에서 코뮌 의원의 다수파이던 블랑키파가 중앙위원회에서도 우세했다고 썼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fr.wikipedia.org
  2. fr.wikipedia.org
  3. 위키백과 (영문)
  4.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5.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