Наши политические задачи · 1904.08

우리의 정치적 과제

Our Political Tasks

트로츠키가 1904년 8월 제네바에서 ‘N. 트로츠키’라는 이름으로 펴낸 소책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이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갈라진 뒤 레닌의 『일보 전진, 이보 후퇴』에 맞서, 레닌의 조직 방식은 당이 노동계급을 대신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대행주의”로 흐른다고 비판했다. 당 조직이 당을, 중앙위원회가 당 조직을, 끝내 독재자가 중앙위원회를 대신하게 되리라는 경고는 훗날 스탈린 체제를 내다본 예언으로 자주 인용되었다.

상세

트로츠키는 왜 이 소책자를 썼나?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에서 시베리아 연합 대의원이던 스물네 살의 트로츠키는 당원 자격 규약 제1조와 《이스크라》 편집부 선거를 두고 마르토프 편에 섰다. 대회 뒤 그는 마르토프, 포트레소프, 악셀로드, 단과 함께 소수파의 지도 기구에 들어가 레닌과 공개적으로 부딪쳤다. 1904년 5월 레닌은 『일보 전진, 이보 후퇴』에서 대회를 되짚으며 소수파를 기회주의로 몰아붙였고, 그 준비 메모에서는 트로츠키를 마르토프파의 “기회주의자”로 분류했다.

트로츠키의 답이 『우리의 정치적 과제』(부제 「전술 문제와 조직 문제」)다. 1904년 8월 제네바에서 당 출판사 이름으로 나온 107쪽짜리 책으로, 표지에는 “N. 트로츠키”라는 필명이, 첫머리에는 “친애하는 스승 파벨 보리소비치 악셀로드에게” 바치는 헌사가 있었다. 원고를 먼저 읽은 마르토프는 악셀로드에게 “아주 좋다”고 써 보냈다. 트로츠키 자신은 이 책이 반쯤 스콜라 철학이 된 조직 논쟁에 지친 동지들의 눈을 당의 운명이 걸린 정치 전술 문제로 돌리려는 시도라고 밝혔다.

“대행주의”란 무엇인가?

이 책의 중심 개념은 러시아어 자메스티텔스트보(заместительство), 곧 다른 이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는 뜻의 말이다. 이 사전에서는 “대행주의”로 옮기며, 영어권에서는 substitutionism이라 한다. 트로츠키는 《이스크라》 시기의 당이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일깨우고 교육하기보다 노동계급을 대신해 생각하고 그 자리에서 행동하는 데 익숙해졌다고 보았다. 그는 페테르부르크 위원회를 예로 들어, “직업 혁명가”들의 위원회가 자각한 노동자들의 앞장에 서지 않고 그들 대신 움직였다고 비판했다.

그는 대행주의를 경제주의와 짝지었다. 경제주의자들은 노동자의 당면 경제 요구 뒤를 따라가며 정치를 포기했고, 대행주의자들은 역사 발전을 분석한 결론을 손에 쥐고 계급 대신 행동했다. 둘 다 노동계급을 스스로 정치 주체로 키우는 어려운 과제 앞에서 지름길을 찾아 역사를 “속이려” 한다는 점에서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방법이 당 내부 정치에 들어오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이렇게 썼다. “당 조직이 당을 대신하고, 중앙위원회가 당 조직을 대신하며, 마침내 ‘독재자’가 중앙위원회를 대신한다.” 트로츠키가 중앙집권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바루흐 크네이파스의 분석에 따르면 그는 강한 중앙위원회를 원했지만, 그것은 지역 조직에 명령하기보다 활동을 조율하고 당에 봉사하는 기구여야 했고, 당의 힘은 노동자들을 당 생활로 끌어들이는 데서 나와야 했다.

레닌은 『일보 전진, 이보 후퇴』에서 무엇을 주장했나?

레닌의 입장은 이랬다. 규약 제1조의 마르토프 안은 조직에 들지 않은 사람까지 당원으로 받아들여 규율과 조직을 꺼리는 지식인에게 문을 열어 준다. 당은 사적 친분과 막연한 신뢰로 묶인 서클의 모임이 아니라 형식을 갖춘 규약으로 묶여야 하며, 소수파가 이것을 “관료주의”라 부르는 것은 서클의 습관에 젖은 지식인의 “귀족적 무정부주의”라는 것이다. 소수파의 편집부는 레닌 쪽의 체제를 개인의 창의와 자주적 활동을 기계적으로 누르는 관료적 중앙집중주의라고 비난했는데, 레닌은 이 비난이야말로 기회주의자의 조직관이 드러난 것이라고 보았다.

트로츠키가 가장 날카롭게 문제 삼은 대목은 레닌의 자코뱅 비유였다. 레닌은 “자기 계급 이익을 자각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과 떼려야 뗄 수 없이 결합된 자코뱅, 그것이 바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라고 쓰고, 교수와 학생들을 아쉬워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두려워하는 쪽을 지롱드파, 곧 기회주의자라고 불렀다.

트로츠키는 자코뱅주의를 어떻게 보았나?

마지막 장 「자코뱅주의와 사회민주주의」에서 트로츠키는 레닌의 비유를 뒤집었다. 자코뱅은 추상적 진리와 보편 도덕을 절대적으로 믿으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은 믿지 않았고, 그래서 의심을 정치의 방법으로 삼아 단두대를 불러들였다는 것이다. 로베스피에르가 마지막 연설에서 선량한 시민과 나쁜 시민의 두 당파만 안다고 한 말을 끌어온 트로츠키는, 그 경구가 “막시밀리안 레닌”의 가슴에 새겨져 있다고 비꼬았다. 사회민주주의는 자코뱅주의와도 개량주의와도 똑같이 멀며, 그것이 기대는 것은 이념이 아니라 실제 계급이고, 계급 안의 차이는 단두대가 아니라 정치 투쟁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트로츠키는 레닌이 대회 뒤 당에 “계엄 상태”를 펴려 했지만 그 공포 체제는 처음부터 무력했다고 조롱하고, 이 방식을 버리지 않으면 당이 정치적·도덕적·이론적으로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책 곳곳에는 레닌을 겨냥한 신랄한 인신공격도 많았다. 레닌은 1904년 10월 엘레나 스타소바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책을 “가장 뻔뻔한 거짓말이자 사실 왜곡”이라 불렀고, 살티코프셰드린 소설의 허풍선이 이름을 따서 트로츠키를 “발랄라이킨-트로츠키”라고 불렀다.

이 “예언”은 뒤에 어떻게 읽혔나?

트로츠키는 곧 멘셰비키 지도부와도 멀어져 어느 분파에도 속하지 않은 사회민주주의자로 남았고, 1917년 볼셰비키에 들어가 10월 혁명과 내전의 지도자가 되었다. 권력을 쥔 시기에 그는 이 책을 다시 찍지 않았고 글이나 연설에서 언급하지도 않았다. 그의 주요 저작 가운데 이런 대접을 받은 것은 이 책뿐이었다.

책을 다시 꺼낸 것은 그의 적들이었다. 1920년대 후계 투쟁에서 스탈린과 다수파는 트로츠키가 원래 레닌주의 조직 원칙의 적이었다는 증거로 이 책을 들었고, 1928년 당사 편찬 기관 이스트파르트는 예멜리얀 야로슬랍스키의 머리말과 주석을 붙여 『1904년의 L. D. 트로츠키 당론』이라는 제목으로 2만 부를 찍었다. 트로츠키 자신은 1927년 여름 볼셰비키와 자코뱅의 연속성에 관해서는 레닌이 옳았다고 썼다. 1930년 자서전 『나의 생애』에서는 제2차 대회 때 옛 편집진을 잘라 낸 레닌을 두고 이렇게 회고했다. “그의 행동은 내게 용납할 수 없고 끔찍하며 분통 터지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으로 옳았고, 따라서 조직적으로 필요했다.”

트로츠키가 추방된 뒤, 사슬처럼 이어지는 “대행”의 경고는 한 사람의 독재로 끝난 소련 공산당의 역사를 미리 그린 예언으로 널리 읽혔다.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전기 3부작과 크네이파스의 연구(1978)가 이 책을 다시 조명했고, 트로츠키 전기를 쓴 펠시틴스키와 체르냐프스키는 이 대목을 “선견지명 있는 악몽”이라 불렀다. 크네이파스는 트로츠키가 여기서 처음 쓴 관료적 중앙집중주의라는 생각이 훗날 『배반당한 혁명』의 스탈린 체제 분석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다만 이 경고가 트로츠키만의 것은 아니었다. 같은 시기 악셀로드, 플레하노프(「중앙집권주의인가 보나파르티즘인가?」), 마르토프, 자술리치, 룩셈부르크도 레닌의 독재적 경향을 비판했다. 트로츠키의 문장이 유독 기억된 것은 그가 1917년 이후 레닌 편에 선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크네이파스는 레닌의 방식이 반드시 무너지리라는 결론이 책의 다른 논증과 잘 이어지지 않는다고 지적했고, 역사가 안토니오 카를로는 조직 문제에 관한 두 사람의 차이가 1905~1907년 혁명 속에서 사실상 좁혀졌다고 보았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2.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3.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4. 위키백과 (러시아어)
  5. 위키백과 (영문)
  6. 위키백과 (영문)
  7.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8.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9.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