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그롬
Pogrom
특정 민족·종교 집단을 겨냥한 폭력적 약탈과 살육을 수반하는 집단 폭동. 러시아어 '그로미트(파괴하다)'에서 유래했으며, 19세기 말~20세기 초 러시아 제국 유대인 정주 구역에서 반복된 반유대주의 폭력 사태를 가리키는 말로 세계 각국에 차용어로 퍼졌다. 내전기(1918~1921) 우크라이나에서는 약 1,500건의 포그롬으로 3만 5천~25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고, 백군·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일부 적군 부대까지 가담했다. 이후 이 말은 유대인뿐 아니라 다른 소수집단에 대한 유사한 집단 폭력에도 확장 적용되었다.
상세
말의 기원
'포그롬'은 러시아어 '그로미트(громить, 부수다·파괴하다)'에서 나온 말이다. 영어에 처음 기록된 것은 1882년이며, 이디시어를 거쳐 유럽 여러 언어에 차용어로 들어갔다는 설명도 있다. 러시아어 단어 자체가 이주해 온 것은 1881~1883년 러시아 제국에서 벌어진 반유대주의 폭력이었고, 그 뒤로는 유대인이 아닌 소수집단에 대한 유사한 집단 폭력을 가리키는 데에도 쓰인다. 러시아의 《간추린 유대인 백과사전》은 이 말이 대부분의 유럽 언어에 들어간 것은 19세기~20세기 초 러시아 남부와 서부의 유대인 포그롬을 통해서라고 설명한다. 한국어에서는 '대박해(大迫害)'라는 역어도 함께 쓰인다.
정주 구역과 폭력의 조건
러시아 제국은 원래 유대인이 거의 없던 나라였는데, 1772·1793·1795년 폴란드 분할로 유대인 인구가 많은 영토를 얻었다. 1791년 예카테리나 2세가 설정한 정주 구역(Pale of Settlement)에 대부분의 유대인 거주가 묶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등 대도시에서는 칙령으로 축출된 가족들도 이 구역 안에 살아야 했다. 1821년 오데사 포그롬이 19세기 러시아 포그롬의 시작으로 꼽히며, 세기말까지 오데사에서만 네 차례 더 일어났다. 러시아 제국의 포그롬은 대체로 1821~1871년의 산발적 시기, 1881년 차르 암살 직후의 1881~1884년 파도, 1905~1907년 혁명기의 격화, 내전기의 네 시기로 구분된다.
1881~1884년과 1903~1906년의 파도
1881년 인민의 의지당이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한 뒤 반유대주의 사건은 현대적 정의로 200건이 넘는 포그롬의 파도로 번졌고, 이는 몇 해 동안 이어졌다. 이때 차르 당국의 사전 계획과 동기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20세기 러시아의 첫 대형 포그롬은 1903년 키시네프 포그롬으로, 유대인 49명이 죽고 수백 명이 다쳤으며 가옥 700채가 파괴되고 상점 600곳이 약탈당했다. 이 포그롬은 한 신문이 혈서 고발(유대인이 소년을 죽여 그 피를 의식에 쓴다는 거짓 주장)을 퍼뜨린 뒤 일어났고, 지역 당국은 가해자를 두둔했으며 니콜라이 2세는 학살을 변호했다. 같은 해 고멜(벨라루스), 스멜라·페오도시야·멜리토폴(우크라이나)에서도 포그롬이 일어났고, 부상자를 훼손하는 극단적 잔혹함이 특징이었다. 이어 지토미르 포그롬(29명 사망)과 1905년 10월 키예프 포그롬(약 100명 학살)이 뒤따랐다. 1903~1906년 3년 동안 우크라이나와 베사라비아에서 약 660건, 벨라루스에서 몇 건이 기록되었으며 러시아 정부의 공모가 있었다. 같은 시기 유대인 노동총연맹(분트)이 무장 자위대를 조직하기 시작하면서 포그롬은 여러 해 잠잠해졌다.
내전기의 포그롬 (1918~1921)
제1차 세계대전 뒤 내전기에 포그롬은 최대 규모로 폭발했다. 1918~1920년 1,300곳이 넘는 지역에서 1,500건의 포그롬이 일어났고 사망자는 3만 5천~25만 명으로 추산된다. 우크라이나에서 활동한 모든 무장 세력이 가담했으며, 특히 반공산주의 우크라이나 인민군과 남러시아 무장군이 두드러졌다. 당시 유대인 측 자료는 백만 명 이상이 물질적 피해를 입었고 5만~30만 명의 아이들이 고아가 되었으며 50만 명이 집을 잃거나 떠났다고 추정한다.
학살자의 구성은 연구자마다 다르게 집계된다. 나훔 게르겔은 1918~1921년 반유대주의 폭력 1,236건을 세고 그중 887건을 대규모 포그롬으로 분류했는데, 페틀류라가 이끈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세력이 약 40퍼센트, 우크라이나 녹색군과 여러 민족주의 무장단체가 25퍼센트, 데니킨 부대를 중심으로 한 백군이 17퍼센트, 붉은군대 병사들이 8.5퍼센트를 차지했다. 다른 집계에서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 50퍼센트, 백군 17퍼센트, 볼셰비키 9퍼센트로 제시된다. 적군에 의한 포그롬은 볼셰비키 지도부의 승인 없이 자행되었고, 최고사령부는 이를 규탄하고 책임 연대를 무장해제했으며 칼리닌이 우크라이나 군사 퍼레이드 연설에서 이를 비난했다. 반면 1918년 봄 체르니히우주에서 후퇴하던 적군은 '부르주아지와의 투쟁'을 구실로 포그롬을 저질렀고, 3월 7~8일 체르니히우와 흘루히우에서는 어린이를 포함한 유대인 주민 약 400명이 이틀 만에 학살당했다.
피해는 우크라이나에 그치지 않았다. 1918년 르부프(리비우)에서는 폴란드군 병사들이 포함된 폴란드인 폭도들이 유대인 72명을 죽였다. 1919년 8월 민스크 점령 당시 폴란드군은 볼셰비즘을 지지한 혐의로 유대인 31명을 죽이고 377곳의 유대인 상점을 약탈했다. 전후 독립 전쟁기에는 폴란드 제2공화국 여러 도시에서도 포그롬이 보고되었다. 동유럽 전역의 이 폭력은 약 25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 서방 이주를 낳았다.
용어의 확장과 논쟁
포그롬은 이후 유대인만의 경험을 넘어 확장되었다. 나치 독일에서는 1938년 수정의 밤이 첫 포그롬으로 불렸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1941년 이라크의 파르후드, 루마니아의 이아시 포그롬, 독일 점령 폴란드의 예드바브네 포그롬 등이 일어났다. 전후에는 1945년 트리폴리, 1946년 키엘체, 1947년 알레포, 1955년 이스탄불 포그롬이 이어졌다. 다른 민족·종교적 소수집단도 이 유형의 폭력의 대상이 되었으며, 1984년 시크교도 학살과 2002년 구자라트 포그롬이 그 예로 거론된다. 아르메니아인 학살의 경우 1894~1896년 사건은 포그롬보다 '학살(резня)'로, 1915년 사건은 제노사이드로 규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포그롬을 정의하는 보편적으로 합의된 특징은 없다. 베르너 베르크만은 포그롬을 '다수 집단이 거의 무방비 상태의 소수 민족 집단을 상대로 일으키고, 다수 집단이 국가의 도움을 기대하지 않는 일방적·비정부적 집단 폭력'으로 정의할 것을 제안한다. 존 클리어는 이 말을 동유럽 사건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면 오해를 낳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1919년 모건소 보고서는 폴란드 도시들의 사건을 포그롬이라 부르기를 피하고 '과잉(행위)'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포그롬이라는 말이 반유대주의적 성격을 전제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떤 특징을 포그롬의 정의로 삼을 것인가는 오늘도 학술적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위키백과 (영문) historical definition, etymology from Russian громить, scope in Russian Empire and Civil War
- 위키백과 (영문) 1,500 pogroms in 1,300 localities; 35,000–250,000 Jewish dead; perpetrators across all armed forces
- quest-cdecjournal.it Quest journal (2019): pogroms of the Russian Civil War as a catastrophe second only to the Holocaust in Jewish history; contemporary witnesses used 'khurbn' (destruction) rather than 'pogrom'
-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러시아어)
- 위키백과 (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