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론장
Public sphere
사적 개인들이 국가와 시장 바깥에서 모여 공동의 문제를 따지고 토론해 여론을 만드는 사회적 공간. 위르겐 하버마스가 1962년 『공론장의 구조변동』에서 개념화했다. 그는 18세기 커피하우스·살롱·신문을 무대로 ‘부르주아 공론장’이 생겨난 과정을 그렸고, 대중매체와 홍보가 토론을 대신하는 ‘재봉건화’로 그것이 무너졌다고 분석했다. 낸시 프레이저는 여성과 하층을 배제한 점을 들어 ‘대항 공론장’을 제시했다. 오스카르 네크트와 알렉산더 클루게는 노동자의 경험에 뿌리를 둔 ‘프롤레타리아 공론장’을 내세웠다.
상세
공론장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동네 카페에서 손님들이 구청의 재개발 계획을 두고 언성을 높인다. 신문 독자 투고란에 어느 교사가 입시 제도를 비판하는 글을 싣고, 온라인 게시판에서는 수백 명이 그 글을 놓고 찬반을 다툰다. 이 사람들은 누구의 명령을 받아 모인 것도 아니고 돈을 벌려고 모인 것도 아니다. 각자 사적인 개인으로서 ‘모두에게 관계된 일’을 따지고 있을 뿐이다. 이런 대화가 쌓여 ‘여론’이 되고, 여론은 정부와 의회에 압력이 된다. 이렇게 대화가 오가며 여론이 만들어지는 사회적 공간을 공론장이라 부른다.
원어는 독일어 Öffentlichkeit다. ‘공개성’, ‘공중’, ‘공공 영역’으로도 옮기며, 우리말 번역서와 연구서에서는 ‘공론장’이 널리 쓰인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것을 “공중으로 모인 사인(私人)들의 영역”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사인’은 관직이나 신분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말하는 사람을 뜻한다. 공론장은 국가(공권력)와도 다르고, 가정이나 시장 같은 사적 영역과도 다르다. 그 둘 사이에서 사적 개인들이 공적인 문제를 다루는 중간 지대다.
하버마스는 왜 이 개념을 꺼냈는가?
하버마스는 1962년 교수 자격 논문 『공론장의 구조변동』을 냈다. 부제는 ‘부르주아 사회의 한 범주에 대한 연구’다. 원래는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에서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지도로 교수 자격을 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하버마스가 마르크스주의 연구 보고서에서 비판 이론과 혁명적 실천의 통일을 마르크스주의의 전제라고 쓰자, 호르크하이머는 그가 “동쪽 나리들의 일을 거든다”며 반발했다. 결국 하버마스는 1959년 연구소를 떠났고, 1961년 마르부르크에서 마르크스주의 법학자 볼프강 아벤트로트의 지도로 교수 자격을 얻었다. 책은 아벤트로트에게 헌정되었다.
이 책은 부르주아 공론장이 어떻게 생겨나고 쇠퇴했는지를 다룬 역사서다. 동시에 현재 사회를 그 핵심 범주인 공론장을 통해 파악하고 계몽의 이성에 따라 민주화하려는 기획이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 하버마스가 펼친 담론 이론과 의사소통 행위 이론의 기본 구도도 이미 이 책에 담겨 있다.
부르주아 공론장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버마스에 따르면 중세와 근세 초의 ‘공공성’은 왕과 귀족이 자신의 위엄을 백성 앞에 내보이는 ‘과시적 공공성’(repräsentative Öffentlichkeit)이었다. 궁정의 화려한 의식처럼, 권력은 보여 주는 것이었지 토론의 대상이 아니었다.
16세기 이후 상업과 금융으로 경제력을 쌓은 부르주아지가 성장했다. 이들은 절대왕정이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사적 자유의 영역을 요구했다.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정기 간행 신문이 생겼다. 신문은 정치·경제 소식을 전하고 오락거리도 실었지만, 하버마스가 가장 중시한 기능은 따로 있었다. 독자들이 군주의 통치를 비판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신문을 읽는 공중의 여론은 점점 통치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이 토론이 벌어진 장소로 하버마스는 세 곳을 든다. 영국의 커피하우스는 비교적 여러 계층에 열려 있었지만 남성만의 공간이었다. 프랑스의 살롱에서는 상류층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독일에서는 식탁 모임(Tischgesellschaft)이 그 몫을 했다. 정치 토론보다 먼저 문학 토론이 있었다는 것도 그의 주장이다. 사람들은 새뮤얼 리처드슨의 소설 『파멜라』 같은 심리 소설을 읽고 그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판단하는 법을 익혔다. 그렇게 생긴 ‘문예 공론장’이 나중에 정치 비판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공중에 낄 수 있는 사람의 조건도 정해져 있었다. 재산을 가진 덕에 경제적으로 독립했고 교양을 갖춘 사람이어야 했다. 부르주아 가족 안에서 그런 ‘사인’은 대개 가장인 아버지뿐이었다.
부르주아 공론장은 무엇을 약속했고, 어디서 어긋났는가?
부르주아 공론장은 원칙적으로 지배 없이 평등하게, 누구에게나 열린 토론을 내세웠다. 그 안에서 통하는 힘은 오직 하버마스가 말한 “더 나은 논증의 강제 없는 강제”뿐이어야 했다. 신분이나 재산이 아니라 논리가 더 설득력 있는 쪽이 이긴다는 뜻이다. 그리고 모두에게 관계된 일이라면 모두가 토론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 공론장의 약속이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그 공론장이 무너질 씨앗도 있었다. 재산과 교양이라는 입장 조건 때문에 대다수 사람은 커피하우스·살롱·신문에서 오가는 토론에서 밀려났다. 하버마스 자신도 이런 공론장은 불완전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전혀 공론장이 아니다”라고 썼다. 근대 헌법은 언론의 자유처럼 부르주아 공론장의 조건을 보장했다. 그러나 동시에 사유재산을 지키려고 ‘제4신분’, 곧 프롤레타리아로부터 그 공론장을 가르는 경계도 지켰다. 부르주아 공론장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경제를 꽃피우는 데는 쓰였지만, 그 지배의 ‘계급적 성격’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그런데 보편성이라는 원칙은 공론장을 스스로의 한계 너머로 밀어붙였다. 노동운동이 일어나고 선거권이 넓어지고 사회국가가 등장하면서 공론장의 사회적 바탕이 넓어졌다. 하버마스는 그 결과 부르주아 공론장의 비판적 힘이 약해지고 결국 해체되었다고 본다.
‘재봉건화’란 무엇인가?
부르주아 공론장은 국가와 사회, 공과 사를 나누는 데 기대고 있었다. 하버마스는 이 공론장이 19세기 후반까지 약 백 년 동안 전성기를 누렸다고 본다. 그 뒤 자본과 사회 권력이 몇몇 손에 집중되면서 작은 상품 소유자들이 대등하게 교환한다는 자유주의 모델은 설득력을 잃었다. ‘사회국가적으로 구성된 산업사회’가 들어서면서 국가와 사회가 뒤섞였다.
다음 차례는 문예 공론장이었다. 문화산업이 커지자 문화를 두고 함께 따지는 일은 시들었다. 신문·라디오·텔레비전 같은 대중매체는 소식을 한쪽 방향으로만 흘려보냈고, 공중은 점점 말을 잃었다. 비판적 공개성은 조작적인 광고로 바뀌었다. 정당과 기업, 이익 단체는 홍보(PR)를 통해 자기들의 사적 이익을 마치 모두의 이익인 양 내보였다.
하버마스는 이것을 공론장의 ‘재봉건화’(Refeudalisierung)라고 불렀다. 옛 군주가 백성 앞에서 위엄을 과시했듯, 이제는 기업과 단체가 홍보라는 형태로 자신을 과시한다는 뜻이다. 오늘날에 빗대면 이런 모습이다. 기업이 만든 보도 자료가 그대로 기사가 되고, 선거 운동이 정책 토론보다 이미지 광고로 치러지며, 시민은 그것을 보고 듣는 관객이 된다.
하버마스는 어떤 해법을 내놓았나?
하버마스는 사회국가 때문에 공론장이 무너졌으니 사회국가를 되돌리자는 쪽으로 가지 않았다. 처음에 그가 내놓은 처방은 정당·노조·이익 단체처럼 반쯤 공적인 거대 조직을 민주화하는 것이었다. 각 조직 안에 제대로 작동하는 공론장을 만들고, 조직들 사이에도 전체 공론장을 세우자는 것이다. 나중에 그는 이 둘째 구상은 접었지만, 정치 밖의 영역까지 민주화한다는 생각은 버리지 않았다. 또 인권·시민권에 사회적 참여권과 정치적 참여권이 더해져야 권리 체계가 완성된다고 보았다.
이 책은 전후 서독 아데나워 시대의 탈정치화된 공론장을 겨냥한 비판으로도 읽혔다. 1968년 학생운동은 하버마스를 이어받아 공론장의 재정치화와 모든 공적 문제에 대한 공개 토론을 요구했다.
누가 빠져 있었는가? 페미니즘과 역사학의 비판
이 책은 1989년에야 영어로 번역되었다. 번역을 계기로 하버마스도 참석한 학술 대회가 열렸고, 그 성과는 1992년 크레이그 캘훈이 엮은 논문집 『하버마스와 공론장』(Habermas and the Public Sphere)으로 나왔다. 비판의 중심에는 낸시 프레이저의 「공론장 다시 생각하기」(Rethinking the Public Sphere)가 있었다.
프레이저는 새로운 역사 연구를 근거로 부르주아 공론장이 애초에 “여러 중대한 배제”로 짜여 있었다고 지적했다. 자선·시민·직업·문화 단체의 그물망은 누구에게나 열린 곳이 아니었다. 그것은 스스로를 ‘보편 계급’으로 여기기 시작한 부르주아 남성들의 훈련장이자 권력 기반이었다.
프레이저는 하버마스의 ‘신분 차이를 괄호 친다’는 생각도 비판했다. 토론하는 동안 출신과 재산의 차이를 없는 것처럼 치자는 것인데, 실제로는 이것이 대개 지배 집단에 유리하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차라리 불평등을 괄호에서 꺼내 대놓고 주제로 삼는 편이 낫다고 그는 주장했다. 무엇이 사적인 일이고 무엇이 ‘모두의 관심사’인지도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가정 폭력은 오랫동안 집안일로 여겨졌지만, 긴 논쟁 끝에 공적인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프레이저는 하나의 보편적 공론장 대신 여러 공론장을 생각했다. 여성·노동자·소수 인종처럼 지배적 공론장에서 밀려난 집단은 자기들만의 공론장을 꾸려 왔다. 프레이저는 이를 ‘하위 대항 공론장’(subaltern counterpublics)이라 불렀다.
역사학계의 평가도 엇갈린다. 독일어권 역사학에서는 1980년대 이후 하버마스가 그린 17~18세기 초기 부르주아 공론장이 사료로 뒷받침되지 않는 이상화라는 평가가 자리 잡았다. 신문이 처음부터 정치 보도를 했다는 점을 들어, 문예 공론장이 정치 공론장보다 앞섰다는 그의 도식을 반박하는 연구도 있다.
프롤레타리아 공론장이란 무엇인가?
하버마스 자신도 부르주아 공론장 옆에 다른 공론장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기에 도시의 여러 하층민이 자기들에게 맞는 공론장을 만들려 했던 시도를 ‘평민적 공론장’(plebejische Öffentlichkeit)이라 불렀다. 다만 이것은 그의 책에서 곁가지로만 다뤄졌다.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것이 1972년 오스카르 네크트와 알렉산더 클루게의 『공론장과 경험』(Öffentlichkeit und Erfahrung, 국내 미번역)이다. 1962년부터 1970년까지 하버마스의 조교로 일했고 마르크스주의 좌파와 노동조합의 협력에 힘쓴 사회학자 네크트, 그리고 아도르노에게 배운 작가이자 영화감독 클루게는 ‘프롤레타리아 공론장’이라는 이름을 골랐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것은 부르주아 공론장의 한 변종이 아니라 역사 속에 잠재한, 사회 전체의 연관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를 뜻한다.
이 생각을 쉽게 풀면 이렇다. 부르주아 공론장은 공장과 가정에서 겪는 일을 ‘사적인 일’로 밀어내고, 교양 있는 말로 정리된 의견만 받아들인다. 그러나 노동자가 작업장에서 겪는 피로와 굴욕, 생계의 불안 같은 경험이야말로 사회 전체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네크트와 클루게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생겨나는 모순이 어떻게 대항 공론장(Gegenöffentlichkeit)을 낳는지 살폈다. 그리고 대항 공론장을 ‘프롤레타리아 공론장의 전(前) 형태’로 보았다. 이들에게 프롤레타리아 공론장은 한 계급의 이익을 관철하는 수단을 넘어, 여러 사회 집단이 연대할 수 있게 되는 변혁 과정이었다.
오늘날 ‘대항 공론장’이라는 말은 대안 언론, 운동 단체의 신문, 주류 매체가 다루지 않는 목소리를 모으는 공간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인다. 다만 그것을 프롤레타리아 공론장으로 가는 전 단계로 보는 네크트와 클루게의 생각은 이런 쓰임새 속에서 대체로 희미해졌다.
하이데거가 말한 ‘공공성’과는 어떻게 다른가?
같은 독일어 Öffentlichkeit는 하버마스보다 35년 앞서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1927)에도 나온다. 하지만 뜻은 거의 정반대다. 하이데거는 사람들이 “남들이 하는 대로” 즐기고 판단하며 사는 익명의 평균 상태를 ‘세상 사람’(das Man)이라 불렀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평평하게 고르고 남다른 것을 깎아 내는 세상 사람의 기능을 ‘공공성’(Öffentlichkeit)이라고 했다.
하이데거에게 공공성은 개인이 본래의 자기를 잃어버리는 곳이다. 하버마스에게 공론장은 사람들이 이성적 논증으로 지배에 맞설 수 있는 곳이다. 같은 말을 두고 한쪽은 대중 사회에 대한 불신을, 다른 쪽은 민주적 토론에 대한 기대를 담은 셈이다. 하이데거 쪽 이야기는 현존재 항목에서 다룬다.
오늘날 공론장 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버마스는 이후 『의사소통행위이론』(1981)과 『사실성과 타당성』(1992)에서 공론장을 담론 이론과 민주적 법치국가론 안에 다시 자리매김했다. 2022년에는 『공론장의 새로운 구조변동』을 펴냈다. 이 책은 2021년 논문을 고친 글과 인터뷰 등을 묶은 것으로, 플랫폼 미디어가 민주적 과정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다. 소셜 미디어 시대에 누구나 발언할 수 있게 되었지만 공론장이 오히려 조각나고 있다는 진단이다. 60년 전의 ‘구조변동’ 테제를 이어받은 것이다.
공론장 개념은 지금도 언론학과 정치학, 사회운동 연구의 기본 개념으로 쓰인다. 그리고 하버마스, 프레이저, 네크트와 클루게의 논쟁이 보여 주듯, 공론장을 다룰 때마다 ‘누가 말할 수 있고 누가 들리지 않는가’라는 물음이 함께 따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