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sion · 1850.08–1851.12.02

왕당파 융합 (1850–1851)

Royalist fusion (France, 1850–1851)

상위 항목 질서당 (1848–1851)

1850년 8월 루이 필리프가 죽은 뒤 프랑스 질서당 안에서 부르봉 본가(정통왕조파)와 오를레앙가(오를레앙파)를 하나로 묶어 왕정을 되살리려 한 시도. 자식이 없는 샹보르 백작(앙리 5세)이 왕이 되고 루이 필리프의 손자 파리 백작을 후계자로 삼는다는 구상이었으나, 깃발과 헌법을 둘러싼 샹보르 쪽의 고집과 오를레앙가 일부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이 실패가 질서당을 원래의 두 분파로 갈라놓았다고 보았다.

상세

1848년 2월 혁명으로 7월 왕정이 무너지자 두 왕당파는 질서당으로 손잡고 의회를 지배했지만, 왕이 누구여야 하는지를 두고는 여전히 갈라져 있었다. 정통왕조파는 샤를 10세의 손자 샹보르 백작을, 오를레앙파는 루이 필리프 집안을 받들었다. 두 왕가를 하나로 합치자는 구상은 티에르가 처음 꺼냈을 수 있고, 기조와 몰레 같은 보수 오를레앙파가 이어받았다. 오를레앙 왕자들이 앙리 5세를 왕으로 인정하고, 앙리 5세는 그들을 자기 후계자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1850년 8월 루이 필리프가 망명지 영국에서 죽자 길이 열리는 듯했다. 샹보르는 고인을 위한 미사를 올리고 왕비 마리아멜리에게 편지를 썼다. 스물아홉 살에 자식이 없던 샹보르 뒤를 열두 살 파리 백작이 잇는다면 두 왕가가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샹보르 쪽은 삼색기와 자유주의 헌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신권 왕정을 고집했고, 루이 필리프의 아들 일부도 이 화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티에르 같은 오를레앙파는 차라리 1852년 대통령 선거에 루이 필리프의 아들 주앵빌 공을 내세우려 했다. 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두 왕당파는 질서당 안에 남았지만 공동 행동을 정하지 못한 채 제2제정 선포를 막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브뤼메르 18일』 6장에서 이 시도를 길게 비꼬았다. “질서당의 외교가들은 두 왕조를 하나로 합쳐서, 이른바 왕당파 정당들과 그 왕가들의 융합으로 이 싸움을 가라앉힐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복고 왕정과 7월 왕정의 진짜 융합은 의회 공화국이었다.” 그는 정통왕조파 베리에, 브누아 다지, 생프리스트가 오를레앙가를 설득하러 클레어몬트로 순례를 떠났고, 기조와 뒤샤텔도 융합을 거들었지만, 주앵빌의 출마가 9월에 공식 선언되면서 “왕당파 융합 시도는 실패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의회 융합, 곧 공화국이라는 공동 형태를 깨뜨리고 질서당을 다시 원래의 성분으로 분해해 버렸다”고 썼다.

융합 논의는 그 뒤에도 되살아났다. 1871년 왕당파가 국민의회 다수를 차지하자 두 파는 샹보르를 왕으로 세우는 데 합의했지만, 샹보르가 삼색기를 끝내 거부해 1873년 왕정복고가 무산되었다. 1883년 샹보르가 죽자 정통왕조파 다수가 파리 백작을 상속자로 인정하면서, 이른바 「융합 오를레앙파」가 생겨났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fr.wikipedia.org
  2. fr.wikipedia.org
  3. fr.wikipedia.org
  4.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