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11월 트로츠키에게 체포되어 '소비에트 정권에 대항하지 않겠다'는 가석방 약속을 하고 풀려났으나, 이튿날 바로 돈 지역으로 탈출해 반소비에트 투쟁에 합류했다.
돈 카자크 장군 가문 출신의 제국 육군 중장으로, 1918년 아타만에 선출되어 독일의 지원 아래 독자적인 반볼셰비키 국가 '전대돈군주'를 세웠다. 망명 후 다작 소설가로 1926년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카자크 중앙관리국을 이끌며 소련에 대항하는 카자크 부대를 조직했다가 종전 후 소련으로 송환되어 1947년 처형되었다.
"프로이센의 야전원수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하지 않은 이유를 이 한 마디로 답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나치 독일의 야전원수이자 동부전선에서 가장 위험한 작전적 두뇌로 꼽혔던 군인이다. 1940년 프랑스 침공의 아르덴 우회 기동안(낫질 작전)의 입안자이며, 1941~42년 크림반도와 세바스토폴을 함락시키고 1943년 2~3월 하리코프에서 소련군의 과신장된 진격을 역습해 독일 남부전선의 붕괴를 막고 쿠르스크 돌출부를 형성시켰다. 히틀러와의 작전적 불화로 1944년 3월 해임되었고, 전후 영국 군사재판에서 전쟁범죄로 18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1953년 석방되어 서독 군 재건에 조언했다.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는 홀로코스트와 국방군 범죄를 외면한 채 '깨끗한 국방군' 신화의 주춧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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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프로이센 근위보병 제3연대 소위 임관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양 전선에서 참모 장교로 복무하고 대위로 종전
1920s–1935제국방위군 참모·지휘관, 국방성 근무; 소령에서 대령으로
1936육군 참모본부 수석 부참모총장 (소장)
1939–1940폴란드·프랑스 전역: 남부집단군 참모장, 낫질 작전 입안, 제38군단장
1941–1942제11군 사령관: 크림반도·세바스토폴 함락; 야전원수 진급
1942–1944돈 집단군→남부집단군 사령관; 하리코프 역습, 쿠르스크 남부 축; 1944년 3월 해임
1949–1955전쟁범죄로 18년 형(1953년 석방); 『잃어버린 승리』 출간, 서독 군사 고문
1942년 여름, 히틀러는 남부 집단군을 A군과 B군으로 나누어 코카서스 석유와 볼가 강 유역을 동시에 겨냥하게 했고, 그 결과는 제6군의 포위와 파괴로 이어졌다.
아돌프 히틀러(1889~1945)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브라우나우암인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 시민권을 세습으로 가졌고, 1913년 뮌헨으로 옮겨 스스로 무국적으로 신고했다. 1919년 독일노동자당에 들어가 1921년 당수가 되었고, 1923년 뮌헨 폭동 실패 후 복역 중 《나의 투쟁》을 구술했다. 1925년 오스트리아 시민권에서 해제되어 1932년 독일 시민권을 얻기까지 무국적이었다. 1933년 1월 30일 수상이 되어 3월 23일 전권위임법으로 독재를 구축했고, 1934년 8월 2일 힌덴부르크 사망 후 국가원수를 겸했다. 그의 정권은 약 600만 유대인 학살과 민간인·포로 약 1,930만 명의 의도적 살해에 책임이 있었다. 1945년 4월 30일 베를린에서 자살했다.
헤르만 괴링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기 조종사에서 나치 독일의 핵심 권력자이자 공군 최고지휘관으로 변신했다. 그는 프로이센 경찰과 게슈타포 창설, 재무장과 전시경제 동원을 주도하며 독재와 침략전쟁의 국가기구를 세우는 데 기여했다.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그는 루프트바페의 역량을 과대평가했고, 공군기지와 전투기 방어망을 압박하던 작전을 영국 도시 폭격으로 돌리는 데 관여해 RAF가 회복할 시간을 주었다. 전쟁 뒤 뉘른베르크에서 주요 전쟁범죄자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집행 전날 자살했다.
디트리히 폰 콜티츠는 제1차 세계대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복무한 독일 직업군인으로,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에서 나치 독일의 전쟁을 수행했다. 그는 1944년 8월 파리 군정관으로서 히틀러의 도시 파괴 명령을 실행하지 않고 프랑스군에 주둔군을 넘겨주어 파리 해방의 조건을 만들었다. 그러나 전후 영국의 도청 기록에는 크림반도에서 유대인 학살을 수행했다고 인정하는 발언이 남아 있어, 파리에서의 불복종이 그의 전쟁 책임을 지우지는 않는다.
전과자들로 편성된 부대를 지휘한 무장친위대 지휘관. 1940년부터 점령한 폴란드와 벨라루스에서 반(反)빨치산 작전을 지휘하며 민간인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나치 독일의 SS 장교이자 전쟁범죄자. 1940년부터 자신의 이름을 딴 특수부대를 지휘했으며, 부대는 폴란드와 벨라루스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진압에 투입되어 볼라의 민간인 학살에 가담했다. 그의 지휘 책임은 나치 점령정책과 SS·경찰 지휘체계 속에서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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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뷔르템베르크군에 입대해 기관총수로 복무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위까지 올라 두 등급의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1919~1921프라이코어단에 가담해 독일 혁명과 노동자 봉기·파업·공산주의자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1922~1934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나치당에 입당했으나, 1934년 미성년자 성범죄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당에서 제명되고 박사 학위와 군사 훈장을 박탈당했다.
1937~1939콘도르 군단에 배속되어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고 세 차례 부상했으며, 이 복무를 근거로 1940년 유죄 판결이 취소되고 당籍이 회복되었다.
1940밀렵 전과자들로 편성된 오라니엔부르크 밀렵부대를 인수해 지휘하기 시작했고, 이 부대는 특수부대로 개칭되어 점령한 폴란드에서 경비·반(反)빨치산 임무를 맡았다.
1943부대의 연대급 확대가 인가되었고, 부대는 벨라루스에서 반(反)빨치산 작전을 벌이며 민간인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1944바르샤바 봉기 진압과 볼라 학살에 참가했고, 이어 슬로바키아 민족 봉기 진압에도 투입되었다.
19452월 구벤 부근에서 소련군과 교전 중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며, 4월에 부대를 버리고 탈영해 숨었다.
1941년 가을, 포로가 된 그는 독일 당국에 적군 후방의 '철도·창고 등'을 타격하여 보급과 지휘를 마비시킬 부대의 창설을 제안했다.
트루힌은 러시아 제국군 장교 출신으로 적군에서 경력을 쌓아 군사교육과 참모 업무를 맡은 장군이었다.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때 발트 군관구와 북서전선의 작전 지휘 체계에서 복무했으나, 전선 후퇴 중 포로가 되었다. 그는 포로 상태에서 독일 당국과 협력하고 블라소프의 러시아 해방군 및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 군사조직의 참모장으로 활동했다. 전쟁 뒤 소련에 넘겨져 반역죄로 처형되었으며, 그의 이력은 전문 군사 관료의 지식이 독일 점령전과 반소 무장 프로젝트에 전용된 사례를 보여준다.
1943년 10월 포젠에서 그는 친위대 장교들에게, 시체 백 구에서 천 구를 견디며 '품위 있는 자'로 남은 것이 '기록되지도, 기록될 수도 없는 영광의 장'이라고 말했다.
하인리히 히믈러는 나치 독일의 친위대와 경찰 체계를 확장해 인종주의적 지배와 대량학살을 관료적으로 조직한 핵심 지도자였다. 그는 강제수용소와 절멸정책, 점령지의 학살 부대를 통솔하며 유대인과 여러 집단에 대한 집단살해를 실행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때에는 도시를 파괴하고 주민을 살해·추방하는 독일의 보복 작전을 승인하고 지시했다. 전쟁 말기 서방과의 독자적인 협상을 시도하다 히틀러에게 해임됐고, 영국군에 체포된 뒤 자살했다.
카를 볼프는 나치 독일의 고위 SS 장교로, 하인리히 힘러의 개인 참모장을 지내며 정권의 핵심 의사결정과 범죄에 접근했다. 이탈리아 점령기에 최고 SS·경찰 지도자로서 유대인 검거와 강제노동, 저항운동 탄압을 관할했고, 그 책임을 전후 협상 참여로 지울 수는 없었다. 1945년 스위스에서 미국 OSS의 앨런 덜레스와 비밀 협상인 작전 선라이즈를 진행해 북이탈리아 독일군의 조기 항복을 이끌었지만, 그 영향력과 동기는 제한적으로 평가된다. 전후에는 전쟁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란사소에서 무솔리니 앞에 선 장면은 실제 지휘권보다 선전의 공로가 더 크게 기록된 순간이었다.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스코르체니는 Waffen-SS 장교로서 나치 독일의 사보타주와 특수작전을 지휘했다. 1943년 그란사소 작전에서 베니토 무솔리니의 위치를 찾고 SS 분견대를 이끌어 현장에 참여했지만, 작전 전체의 계획과 지휘는 공수부대 장교 하랄트 모르스와 쿠르트 슈투덴트의 몫이었다. 나치 선전은 그를 ‘무솔리니의 구출자’로 내세웠고, 그는 헝가리 정권 전복과 아르덴 공세의 위장작전에도 관여했다. 전후 전범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스페인에서 극우 네트워크와 연결되며 살았다.
1987년 리옹 재판에서 그는 이지외 급습을 부인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레지스탕스와 싸웠다. 그것은 전쟁이었다.”
클라우스 바르비는 나치 친위대와 보안방첩대에서 활동한 장교로, 점령기 리옹 게슈타포를 지휘하며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유대인을 체계적으로 박해했다. 그는 칼뤼르에서 장 물랭을 체포하고 고문했으며, 이지외의 유대인 아동 44명과 교사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내는 데 책임이 있었다. 전후 미국 정보기관의 반공 작전에 이용되어 볼리비아로 도피한 그는 오랫동안 처벌을 피했지만, 1987년 리옹 재판에서 반인도적 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사례는 나치 범죄의 연속성과 냉전 반공주의가 만든 면책의 구조를 함께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