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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당·나치 정권 인물 11명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크라스노프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Краснов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69–1947 ✕ 처형

반볼셰비키 돈 카자크 국가를 세우고 나치와 협력한 백군 아타만이자 노벨상 후보 작가

1917년 11월 트로츠키에게 체포되어 '소비에트 정권에 대항하지 않겠다'는 가석방 약속을 하고 풀려났으나, 이튿날 바로 돈 지역으로 탈출해 반소비에트 투쟁에 합류했다.

돈 카자크 장군 가문 출신의 제국 육군 중장으로, 1918년 아타만에 선출되어 독일의 지원 아래 독자적인 반볼셰비키 국가 '전대돈군주'를 세웠다. 망명 후 다작 소설가로 1926년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카자크 중앙관리국을 이끌며 소련에 대항하는 카자크 부대를 조직했다가 종전 후 소련으로 송환되어 194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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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1914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근위 아타만 연대 복무, 러일전쟁 종군기자, 제10돈 코사크 연대장
  • 1914–1917제2복합 코사크 사단장 겸 제3기병군단장, 루츠크 돌파 주도, 소장 진급
  • 1917.10–11케렌스키-크라스노프 봉기: 700명의 카자크로 페트로그라드 진격, 실패 후 체포되었다가 트로츠키에 의해 석방
  • 1918.5–1919.2돈 카자크 아타만 당선, 독일 지원으로 돈 군대 조직, '전대돈군주' 수립
  • 1919–1936도임 후 북서군 신문 편집, 독일·프랑스 망명, 반소비에트 망명 정치 활동
  • 1921–1939『쌍두독수리에서 붉은 기까지』 3부작 등 20여 편 집필, 1926년 노벨 문학상 후보
  • 1943–1945나치 동부점령지부 카자크 중앙관리국장, 대소련 카자크 부대 조직
  • 1945–1947영국군에 체포되어 소련 송환, 모스크바에서 재판 후 1947년 1월 16일 교수형

에리히 폰 만슈타인

Erich von Manstein
군사·지휘 나치당·나치 정권 독일 독일 1887–1973 ○ 1949년 전범 유죄, 53년 석방

나치 독일 최고의 작전 전략가이자 '깨끗한 국방군' 신화의 정점

"프로이센의 야전원수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하지 않은 이유를 이 한 마디로 답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나치 독일의 야전원수이자 동부전선에서 가장 위험한 작전적 두뇌로 꼽혔던 군인이다. 1940년 프랑스 침공의 아르덴 우회 기동안(낫질 작전)의 입안자이며, 1941~42년 크림반도와 세바스토폴을 함락시키고 1943년 2~3월 하리코프에서 소련군의 과신장된 진격을 역습해 독일 남부전선의 붕괴를 막고 쿠르스크 돌출부를 형성시켰다. 히틀러와의 작전적 불화로 1944년 3월 해임되었고, 전후 영국 군사재판에서 전쟁범죄로 18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1953년 석방되어 서독 군 재건에 조언했다.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는 홀로코스트와 국방군 범죄를 외면한 채 '깨끗한 국방군' 신화의 주춧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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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프로이센 근위보병 제3연대 소위 임관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양 전선에서 참모 장교로 복무하고 대위로 종전
  • 1920s–1935제국방위군 참모·지휘관, 국방성 근무; 소령에서 대령으로
  • 1936육군 참모본부 수석 부참모총장 (소장)
  • 1939–1940폴란드·프랑스 전역: 남부집단군 참모장, 낫질 작전 입안, 제38군단장
  • 1941–1942제11군 사령관: 크림반도·세바스토폴 함락; 야전원수 진급
  • 1942–1944돈 집단군→남부집단군 사령관; 하리코프 역습, 쿠르스크 남부 축; 1944년 3월 해임
  • 1949–1955전쟁범죄로 18년 형(1953년 석방); 『잃어버린 승리』 출간, 서독 군사 고문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인종주의 전쟁국가를 만든 독재자

1942년 여름, 히틀러는 남부 집단군을 A군과 B군으로 나누어 코카서스 석유와 볼가 강 유역을 동시에 겨냥하게 했고, 그 결과는 제6군의 포위와 파괴로 이어졌다.

아돌프 히틀러(1889~1945)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브라우나우암인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 시민권을 세습으로 가졌고, 1913년 뮌헨으로 옮겨 스스로 무국적으로 신고했다. 1919년 독일노동자당에 들어가 1921년 당수가 되었고, 1923년 뮌헨 폭동 실패 후 복역 중 《나의 투쟁》을 구술했다. 1925년 오스트리아 시민권에서 해제되어 1932년 독일 시민권을 얻기까지 무국적이었다. 1933년 1월 30일 수상이 되어 3월 23일 전권위임법으로 독재를 구축했고, 1934년 8월 2일 힌덴부르크 사망 후 국가원수를 겸했다. 그의 정권은 약 600만 유대인 학살과 민간인·포로 약 1,930만 명의 의도적 살해에 책임이 있었다. 1945년 4월 30일 베를린에서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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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9–1918오스트리아 출생,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 복무
  • 1919독일노동자당 가입, 정치 활동 시작
  • 1921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지도자
  • 1923–1924뮌헨 폭동 실패, 투옥 중 《나의 투쟁》 집필
  • 1933독일 국가수상, 나치 독재 수립
  • 1934–1945총통 겸 국가원수, 제2차 세계대전 지휘
  • 1942남부 집단군을 A군과 B군으로 분할, 스탈린그라드·코카서스 공세 지시
  • 1945베를린에서 자살

헤르만 괴링

Hermann Göring

나치 국가의 전쟁과 약탈을 조직한 공군 원수

1940년 8월, 런던과 민간 도시로 공습을 돌린 결정은 RAF에 회복할 시간을 주었다.

헤르만 괴링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기 조종사에서 나치 독일의 핵심 권력자이자 공군 최고지휘관으로 변신했다. 그는 프로이센 경찰과 게슈타포 창설, 재무장과 전시경제 동원을 주도하며 독재와 침략전쟁의 국가기구를 세우는 데 기여했다.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그는 루프트바페의 역량을 과대평가했고, 공군기지와 전투기 방어망을 압박하던 작전을 영국 도시 폭격으로 돌리는 데 관여해 RAF가 회복할 시간을 주었다. 전쟁 뒤 뉘른베르크에서 주요 전쟁범죄자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집행 전날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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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제1전투비행단 지휘관
  • 1923돌격대 최고지휘관
  • 1932–1945제국의회 의장
  • 1933–1945프로이센주 총리
  • 1935–1945공군 최고사령관
  • 1936–19454개년 계획 전권위원
  • 1940–1945제국원수
군사·지휘 나치당·나치 정권 독일 독일계 1894–1966 ○ 자연사

파리를 넘겨 파괴 명령을 거부한 독일 장군

1944년 8월 25일 그는 파리 주둔군의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디트리히 폰 콜티츠는 제1차 세계대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복무한 독일 직업군인으로,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에서 나치 독일의 전쟁을 수행했다. 그는 1944년 8월 파리 군정관으로서 히틀러의 도시 파괴 명령을 실행하지 않고 프랑스군에 주둔군을 넘겨주어 파리 해방의 조건을 만들었다. 그러나 전후 영국의 도청 기록에는 크림반도에서 유대인 학살을 수행했다고 인정하는 발언이 남아 있어, 파리에서의 불복종이 그의 전쟁 책임을 지우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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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8왕립 작센군 제107보병연대 장교, 서부전선 복무
  • 1919–1939제국방위군 장교, 제16보병연대 제3대대 지휘관
  • 1939–1940제16공수보병연대 지휘관, 폴란드·네덜란드 전역
  • 1941–1942제16보병연대 지휘관, 크림·세바스토폴 전투
  • 1943제11기갑사단 및 제48기갑군단 지휘관, 동부전선
  • 1944제76기갑군단·제84군단 지휘관, 이탈리아·노르망디
  • 1944대파리 Wehrmacht 사령관 겸 파리 군정관, 8월 25일 항복
  • 1944–1947트렌트파크와 미국 포로수용소에 억류

오스카르 디를레방어

Oskar Dirlewanger
군사·지휘 나치당·나치 정권 독일 독일 1895–1945 ✕ 구타로 사망

볼라 학살에 가담한 SS 특수부대 지휘관

전과자들로 편성된 부대를 지휘한 무장친위대 지휘관. 1940년부터 점령한 폴란드와 벨라루스에서 반(反)빨치산 작전을 지휘하며 민간인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나치 독일의 SS 장교이자 전쟁범죄자. 1940년부터 자신의 이름을 딴 특수부대를 지휘했으며, 부대는 폴란드와 벨라루스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진압에 투입되어 볼라의 민간인 학살에 가담했다. 그의 지휘 책임은 나치 점령정책과 SS·경찰 지휘체계 속에서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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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뷔르템베르크군에 입대해 기관총수로 복무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위까지 올라 두 등급의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 1919~1921프라이코어단에 가담해 독일 혁명과 노동자 봉기·파업·공산주의자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 1922~1934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나치당에 입당했으나, 1934년 미성년자 성범죄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당에서 제명되고 박사 학위와 군사 훈장을 박탈당했다.
  • 1937~1939콘도르 군단에 배속되어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고 세 차례 부상했으며, 이 복무를 근거로 1940년 유죄 판결이 취소되고 당籍이 회복되었다.
  • 1940밀렵 전과자들로 편성된 오라니엔부르크 밀렵부대를 인수해 지휘하기 시작했고, 이 부대는 특수부대로 개칭되어 점령한 폴란드에서 경비·반(反)빨치산 임무를 맡았다.
  • 1943부대의 연대급 확대가 인가되었고, 부대는 벨라루스에서 반(反)빨치산 작전을 벌이며 민간인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 1944바르샤바 봉기 진압과 볼라 학살에 참가했고, 이어 슬로바키아 민족 봉기 진압에도 투입되었다.
  • 19452월 구벤 부근에서 소련군과 교전 중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며, 4월에 부대를 버리고 탈영해 숨었다.

표도르 이바노비치 트루힌

Фёдор Иванович Трухи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896–1946 ✕ 처형

전선 참모에서 반소 무장조직 지도자로 전향한 장군

1941년 가을, 포로가 된 그는 독일 당국에 적군 후방의 '철도·창고 등'을 타격하여 보급과 지휘를 마비시킬 부대의 창설을 제안했다.

트루힌은 러시아 제국군 장교 출신으로 적군에서 경력을 쌓아 군사교육과 참모 업무를 맡은 장군이었다.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때 발트 군관구와 북서전선의 작전 지휘 체계에서 복무했으나, 전선 후퇴 중 포로가 되었다. 그는 포로 상태에서 독일 당국과 협력하고 블라소프의 러시아 해방군 및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 군사조직의 참모장으로 활동했다. 전쟁 뒤 소련에 넘겨져 반역죄로 처형되었으며, 그의 이력은 전문 군사 관료의 지식이 독일 점령전과 반소 무장 프로젝트에 전용된 사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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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7러시아 제국군 장교,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18–1921적군 중대·대대·연대 지휘관, 내전에 참전
  • 1922–1925적군 군사아카데미 수학
  • 1932–1936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관 및 전투훈련 방법론 학과장
  • 1937–1940총참모부 군사아카데미 고급 교관, 소장 진급
  • 1940–1941적군 전투훈련국 부국장, 발트 군관구 작전부장 겸 참모차장
  • 1941.06북서전선 참모차장, 리투아니아에서 포로가 됨
  • 1943–1945다벤도르프 러시아 해방군 학교장,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 군사조직 참모장

하인리히 히믈러

Heinrich Himmler

나치 인종국가의 핵심 설계자

1943년 10월 포젠에서 그는 친위대 장교들에게, 시체 백 구에서 천 구를 견디며 '품위 있는 자'로 남은 것이 '기록되지도, 기록될 수도 없는 영광의 장'이라고 말했다.

하인리히 히믈러는 나치 독일의 친위대와 경찰 체계를 확장해 인종주의적 지배와 대량학살을 관료적으로 조직한 핵심 지도자였다. 그는 강제수용소와 절멸정책, 점령지의 학살 부대를 통솔하며 유대인과 여러 집단에 대한 집단살해를 실행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때에는 도시를 파괴하고 주민을 살해·추방하는 독일의 보복 작전을 승인하고 지시했다. 전쟁 말기 서방과의 독자적인 협상을 시도하다 히틀러에게 해임됐고, 영국군에 체포된 뒤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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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독일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에 가입하고 뮌헨 폭동에 가담했다.
  • 1925친위대에 가입했다.
  • 1929–1945제국지도자 친위대로서 친위대를 지휘했다.
  • 1936–1945독일 경찰장으로서 경찰과 정치탄압 기구를 장악했다.
  • 1943–1945내무장관을 겸임했다.
  • 1944바르샤바 봉기에 대한 도시 파괴와 주민 학살·추방 작전을 지시했다.
  • 1945서방과의 독자 협상 시도로 해임되고 체포 뒤 자살했다.

카를 프리드리히 오토 볼프

Karl Friedrich Otto Wolff

나치 SS의 고위 조정자이자 전쟁 말기의 협상 대표

1945년 3월 8일, 볼프는 스위스에서 앨런 덜레스와 북이탈리아 항복 조건을 논의했다.

카를 볼프는 나치 독일의 고위 SS 장교로, 하인리히 힘러의 개인 참모장을 지내며 정권의 핵심 의사결정과 범죄에 접근했다. 이탈리아 점령기에 최고 SS·경찰 지도자로서 유대인 검거와 강제노동, 저항운동 탄압을 관할했고, 그 책임을 전후 협상 참여로 지울 수는 없었다. 1945년 스위스에서 미국 OSS의 앨런 덜레스와 비밀 협상인 작전 선라이즈를 진행해 북이탈리아 독일군의 조기 항복을 이끌었지만, 그 영향력과 동기는 제한적으로 평가된다. 전후에는 전쟁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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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0독일 제국군 제115 보병연대 장교 후보생, 서부전선 복무
  • 1931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과 SS 가입
  • 1935–1943SS 국가 지도자 개인참모장
  • 1943–1944이탈리아 최고 SS·경찰 지도자
  • 1944–1945이탈리아 주둔 독일군 전권대장
  • 1945작전 선라이즈 독일 측 협상 대표, 북이탈리아 항복 관여
  • 1964–1969뮌헨 법원에서 유대인 30만 명 살해 방조죄로 15년형, 1969년 석방

오토 스코르체니

Otto Skorzeny
군사·지휘 나치당·나치 정권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계 1908–1975 ○ 자연사

나치 특수작전의 지휘관이자 선전의 산물

그란사소에서 무솔리니 앞에 선 장면은 실제 지휘권보다 선전의 공로가 더 크게 기록된 순간이었다.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스코르체니는 Waffen-SS 장교로서 나치 독일의 사보타주와 특수작전을 지휘했다. 1943년 그란사소 작전에서 베니토 무솔리니의 위치를 찾고 SS 분견대를 이끌어 현장에 참여했지만, 작전 전체의 계획과 지휘는 공수부대 장교 하랄트 모르스와 쿠르트 슈투덴트의 몫이었다. 나치 선전은 그를 ‘무솔리니의 구출자’로 내세웠고, 그는 헝가리 정권 전복과 아르덴 공세의 위장작전에도 관여했다. 전후 전범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스페인에서 극우 네트워크와 연결되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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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오스트리아 나치당 가입
  • 1938오스트리아 병합 과정에서 SS 대원으로 활동
  • 1943RSHA 제6국 특수공작 부문 지휘
  • 1943그란사소 작전에서 SS 분견대 지휘
  • 1944헝가리 판처파우스트 작전 관여
  • 1944아르덴 공세 그라이프 작전 지휘
  • 1947다하우 군사재판에서 무죄 판결
  • 1953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의 군사 고문

클라우스 바르비

Klaus Barbie
보안·정보·치안 나치당·나치 정권 독일 독일계 1913–1991 ○ 반인도적 범죄로 종신형

나치의 리옹 게슈타포 책임자

1987년 리옹 재판에서 그는 이지외 급습을 부인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레지스탕스와 싸웠다. 그것은 전쟁이었다.”

클라우스 바르비는 나치 친위대와 보안방첩대에서 활동한 장교로, 점령기 리옹 게슈타포를 지휘하며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유대인을 체계적으로 박해했다. 그는 칼뤼르에서 장 물랭을 체포하고 고문했으며, 이지외의 유대인 아동 44명과 교사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내는 데 책임이 있었다. 전후 미국 정보기관의 반공 작전에 이용되어 볼리비아로 도피한 그는 오랫동안 처벌을 피했지만, 1987년 리옹 재판에서 반인도적 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사례는 나치 범죄의 연속성과 냉전 반공주의가 만든 면책의 구조를 함께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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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친위대 입대, 보안방첩대 복무
  • 1940–1941암스테르담 보안방첩대, 유대인·공산주의자 탄압
  • 1942디종 파견, 점령 프랑스 보안 업무
  • 1942–1944리옹 게슈타포장, 레지스탕스 탄압과 유대인 강제이송
  • 1947–1951미군 방첩대 정보원
  • 1951–1983볼리비아에서 클라우스 알트만으로 활동
  • 1987리옹 재판, 반인도적 범죄 유죄 및 종신형
  • 1991리옹 교도소에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