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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민주당 인물 20명

조건 모두 해제

유진 V. 뎁스

Eugene V. Debs

5선 미국 사회당 대통령 후보이자 철도노동자 산업별조합의 선구자

1918년 법정 최후진술에서 "하층 계급이 존재하는 한 나는 그 안에 있고, 범죄자가 존재하는 한 나는 그 일부이며, 감옥에 갇힌 영혼이 있는 한 나는 자유롭지 않다"고 선언했다.

미국 사회주의의 가장 상징적인 인물로, 산업별 노동조합주의의 선구자였다. 미국철도연합(ARU)을 이끌어 1894년 풀먼 파업을 조직하고 투옥 중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했으며, 미국 사회당(1901)과 IWW(1905) 창립에 참여했다. 다섯 차례 대선에 출마해 1912년 90만 표(6.0%)를 얻었고, 1차 대전 반대 연설로 수감된 1920년에도 91만 표를 득표해 미국 사회주의 선거운동의 정점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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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5기관화부형제단(BLF) 가입
  • 1880–1893BLF 사무총장 겸 기관지 편집장
  • 1885인디애나 주의회 의원 (민주당)
  • 1893–1897미국철도연합(ARU) 창립·위원장
  • 1901미국 사회당 공동 창립
  • 1905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 창립 멤버
  • 1900–1920사회당 대통령 후보 (5회 출마)
  • 1919–1921애틀랜타 연방교도소 수감

우드로 윌슨

Woodrow Wilson

14개조와 국제연맹을 내걸었으나 상원 비준을 얻지 못한 미국 대통령

버지니아에서 태어나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과 뉴저지 주지사를 거쳐 1912년 대통령이 되었고, 취임 첫해 연방 관료 조직에 인종 분리를 들여왔다. 1917년 4월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전을 이유로 참전을 요청했고, 1918년 1월 14개조로 국제연맹과 민족자결의 구상을 내놓았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연맹 규약 기초를 이끌었지만 연맹을 위해 독일에 대한 여러 요구를 양보했다. 1919년 10월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타협을 거부해 상원의 조약 비준이 무산되었다. 같은 시기 파머 습격의 「적색 공포」가 벌어졌다. 191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1924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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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1910프린스턴 대학교 총장
  • 1911–1913뉴저지 주지사
  • 1913–1921미국 대통령
  • 191814개조 발표
  • 1919파리 강화회의, 국제연맹 규약 기초 위원회 의장

코델 헐

Cordell Hull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인 1871–1955 ○ 자연사

자유무역과 국제기구를 밀어붙인 미국 외교가

1941년 11월 26일, 그는 일본 대사에게 「미일 간 합의의 기초로 제안된 개요」를 전달했다.

코델 헐은 미국의 자유무역과 다자적 국제질서를 설계한 민주당 정치가이자 외교가였다. 그는 1930년대 무역장벽 완화와 선린정책을 추진했지만, 외교정책의 최종 결정권을 쥔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자주 긴장했다. 1941년 일본과의 협상에서 미국의 요구를 정리한 11월 26일 합의안 개요를 전달했으며, 이는 전쟁 직전 외교의 마지막 문서가 되었다. 전후에는 국제연합 창설을 이끈 공로로 1945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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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1897테네시주 하원의원
  • 1907–1921미국 연방 하원의원
  • 1921–1924민주당 전국위원회 의장
  • 1923–1931미국 연방 하원의원
  • 1931–1933테네시주 연방 상원의원
  • 1933–1944미국 국무장관
  • 1945국제연합 샌프란시스코 회의 대표

윌리엄 N. 해스켈

William N. Haskell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인 1878–1952 ○ 자연사

기근 한복판의 국제 구호 지휘관

1921년 10월 모스크바의 해스켈은 후버에게, 굶주림이 겨울에 절정에 이르러 1,600만 명을 덮칠 것이라고 타전했다.

윌리엄 N. 해스켈은 미 육군 장교로서 전후 국제 구호 행정과 군사 지휘를 결합한 인물이었다. 허버트 후버의 임명으로 1921년부터 1923년까지 소련 러시아에서 미국구호행정의 작전을 이끌며, 기근 속 식량·의료품의 대규모 배급을 조직했다. 그의 임무는 볼셰비키 관료의 통제와 협조를 동시에 상대하면서 구호의 속도와 행정적 책임을 조정하는 일이었다. 이후 뉴욕 주방위군과 미국 민방위 조직을 지휘하며 군과 국가 행정에서 긴 경력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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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미 육군사관학교 졸업, 기병 장교
  • 1905육군참모대학 졸업
  • 1906–1907필리핀에서 미군 작전 복무
  • 1916–1917뉴욕 주방위군 제69보병연대 임시 대령
  • 1918–1919미 원정군 포병 복무, 임시 대령 및 공로훈장 수훈
  • 1919–1921ARA 아르메니아 사절단장
  • 1921–1923ARA 소련 러시아 지부장, 러시아 기근 구호 지휘
  • 1926–1940뉴욕 주방위군 사령관, 소장
  • 1944–1945미국 민방위국장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80–1966 ○ 자연사

세계 최대 면화상을 일군 자유무역론자, 유럽 붕괴를 경고한 메모로 마셜 플랜을 촉발한 국무차관

1947년 5월 27일 마셜 국무장관에게 보낸 메모에서 클레이턴은 이렇게 썼다: '즉각적이고 대규모인 미국의 원조 없이는 경제·사회·정치적 붕괴가 유럽을 뒤덮을 것입니다.'

클레이턴은 13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속기사로 출발해 앤더슨·클레이턴 사를 세계 최대 면화 무역회사로 키운 사업가였다. 자유무역을 신봉한 민주당원으로서 1944년 국무부 경제담당 차관보, 1946년 경제담당 차관에 임명되었고, 1947년 5월 전후 유럽의 참상을 목격한 후 조지 마셜에게 보낸 「유럽의 위기」 메모에서 '즉각적이고 대규모인 미국의 원조 없이는 경제·사회·정치적 붕괴가 유럽을 뒤덮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메모는 마셜 플랜 발표의 직접적 촉매가 되었고, 찰스 볼런은 연설문 초안을 쓸 때 클레이턴의 문장을 대거 인용했다. 퇴임 후에도 자유무역과 대서양 동맹을 옹호하며 1961년 크리스천 허터와 애틀랜틱 카운슬을 공동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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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0미시시피주 투펄로 인근 면화 농장에서 출생
  • 1904앤더슨·클레이턴 사 공동 창업,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면화 중개 시작
  • 1916본사를 휴스턴으로 이전, 이후 세계 최대 면화 무역회사로 성장
  • 1918전시산업위원회 면화분배위원으로 제1차 세계대전 정부 봉사
  • 1940–1944재건금융공사·수출입은행·잉여전쟁자산청에서 연이어 근무
  • 1944–1946국무부 경제담당 차관보, 포츠담 회담 경제 고문
  • 1946–1947국무부 경제담당 차관, 「유럽의 위기」 메모로 마셜 플랜 촉발
  • 1961크리스천 허터와 애틀랜틱 카운슬 공동 설립

대공황과 세계대전의 미국, 얄타에서 마지막 힘을 쥐어짠 4선 대통령

얄타에서 돌아온 루스벨트는 1945년 3월 1일 의회 연설에 앉아서 임했다. 걸을 수 없는 대통령이 평생 숨겨온 장애를 처음으로 공개한 순간이었다.

루스벨트는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관통한 미국의 32대 대통령으로, 4선에 오른 유일한 대통령이다. 뉴딜로 연방정부의 역할을 재정의했고 진주만 공격 이후 연합국을 이끌며 독일 우선 전략을 관철했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그는 소련의 대일 참전과 유엔 창설이라는 두 가지 목표에 외교력을 집중했고 스탈린과의 개인적 관계에 신뢰를 걸었으나, 이미 심부전과 고혈압으로 쇠약해져 있었다. 회담 두 달 뒤 뇌출혈로 사망했으며, 얄타 합의는 유엔을 낳고도 동유럽을 넘겨주었다는 비판 속에 냉전기 내내 논쟁의 중심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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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2뉴욕주 하이드파크의 부유한 명문가에서 출생
  • 1913–1920해군 차관보, 제1차 세계대전 중 해군 확장 주도
  • 1921소아마비 진단, 하반신 영구 마비
  • 1929–1932뉴욕 주지사, 대공황 대응 실업구제 정책 선도
  • 1933–1945제32대 대통령, 뉴딜·제2차 세계대전 지휘
  • 1943.11테헤란 회담, 스탈린과 첫 대면
  • 1945.02.04–11얄타 회담, 소련의 대일 참전·유엔 안보리 틀 합의
  • 1945.04.12그루지야주 웜스프링스에서 뇌출혈로 사망

루스벨트의 '보조 대통령'이자 포츠담 배상안을 설계한 국무장관

번스의 국무장관 취임 선서 직후, 트루먼이 말했다. "지미, 성경에 입 맞춰." 번스가 그러고 나서 성경을 트루먼에게 건네며 말했다. "대통령님도 입 맞추시죠." 트루먼이 그렇게 하자 자리 전체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제임스 F. 번스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민주당 정치인으로, 뉴딜 입법을 주도한 상원의원, 전시 동원을 총괄하며 '보조 대통령'으로 불린 루스벨트의 오른팔, 그리고 트루먼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포츠담 회담에서 독일 배상의 틀을 설계한 인물이다. 포츠담에서 번스는 각 점령국이 자국 점령지역에서 배상을 취하되 소련에는 서방 지역 산업설비의 15%를 식량·원자재와 교환하고 10%를 무상 제공하는 절충안을 몰로토프와 협상해 타결시켰다. 루스벨트의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뒤 트루먼과의 관계도 점차 냉각되었으나,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로 당선되어 인종 분리 교육 체제를 고수하며 '분리하되 평등하게' 노선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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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25사우스캐롤라이나주 하원의원
  • 1931–1941사우스캐롤라이나주 상원의원
  • 1941–1942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 1942–1943경제안정국 국장
  • 1943–1945전시동원국 국장
  • 1945–1947미국 국무장관
  • 1951–1955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해리 S. 트루먼

Harry S. Truman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884–1972 ○ 자연사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으로 냉전의 미국 틀을 세운 33대 대통령

트루먼의 집무실 책상에는 '책임은 여기서 끝난다(The buck stops here)'라는 문구가 놓여 있었고, 원자폭탄에서 맥아더 해임까지 그는 그대로 살았다.

트루먼은 루스벨트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명령한 미국의 33대 대통령이다. 1947년 3월 '무장 소수파나 외부 압력에 저항하는 자유민을 지원한다'는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했고, 1948년 4월 마셜 플랜에 서명해 서유럽 재건과 소련 봉쇄의 제도적 기반을 구축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 파병을 주도했고 중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해 맥아더를 해임함으로써 민간 통제 원칙을 재확인했다. 퇴임 당시 역대 최저 지지율로 떠났으나 냉전 승리와 함께 '위대에 가까운' 대통령으로 사후 재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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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4미주리주 라마에서 농부의 아들로 출생
  • 1917–1918제1차 세계대전, 프랑스 전선 포병대 대위로 참전
  • 1935–1945미주리주 상원의원, 트루먼 위원회로 전시 계약 부패 조사
  • 1945.01–04부통령, 루스벨트 사망으로 4월 12일 대통령 승계
  • 1945–1953제33대 대통령, 원자폭탄 투하·트루먼 독트린·마셜 플랜·NATO 창설·한국전쟁
  • 1947.03.12트루먼 독트린 선언, 그리스·터키 군사원조 요청
  • 1948.04.03마셜 플랜(경제협력법) 서명
  • 1951.04.11맥아더 극동사령관 해임

애들레이 유잉 스티븐슨

Adlai Ewing Stevenson

유엔 안보리에서 소련의 쿠바 미사일 배치를 추궁한 두 번의 대선 후보

1962년 10월 25일 유엔 안보리에서 소련 대표 발레리안 조린에게 "통역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예입니까, 아니오입니까?"라고 몰아붙였고, 그가 답변을 거부하자 "지옥이 얼어붙을 때까지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미사일 사진을 공개했다.

애들레이 유잉 스티븐슨 2세(1900~1965)는 미국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일리노이 주의 정치 명가 출신이며 1952년과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두 번 패했다. 일리노이 주지사(1949~1953년, 관행에 따라 31대 또는 33대로 계산)로는 주 경찰 인사에서 정치적 고려를 없애고 실적제를 도입했으며, 적색 공포기에 공직자의 충성서약을 요구하는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1949년 앨저 히스의 인품 증인으로 선서 진술을 했고, 이는 1952년 선거에서 매카시와 닉슨이 그를 공산주의에 무르다며 공격하는 데 쓰였다. 1961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유엔 대사로 재임했으며, 1965년 7월 14일 런던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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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4해군장관실 수석 법률보좌관
  • 1945국무장관 특별보좌관 · 유엔 준비위원회 미국 부대표
  • 1948–1953제31대 일리노이 주지사
  • 1952민주당 대통령 후보
  • 1956민주당 대통령 후보 (재지명)
  • 1961–1965유엔 주재 미국 대사

제임스 웨브

James Edwin Webb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인 1906–1992 ○ 자연사

아폴로를 조직한 행정가

아폴로 1호 화재 뒤 그는 NASA가 조사와 수습을 맡아야 한다고 존슨 대통령에게 요구했다.

제임스 웨브는 과학자나 기술자가 아니라 대규모 공공사업을 조직한 미국의 행정가였다. NASA 국장으로서 아폴로 계획에 안정적인 예산과 정치적 지지를 결합하고, 연구센터와 산업·대학을 조정하는 중앙집중적 운영 체계를 세웠다. 그는 유인 달 착륙을 추진하면서도 마리너와 파이어니어 같은 행성과학 및 우주망원경 연구를 지지했다. 아폴로 1호 화재 뒤에는 조사를 이끌고 NASA의 책임을 의회에 설명하며 계획의 연속성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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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졸업
  • 1936워싱턴 법학대학원 졸업, 변호사 자격 취득
  • 1936–1944스페리 자이로스코프 인사·재무·경영 담당
  • 1946–1949미국 예산국 국장
  • 1949–1952미국 국무부 차관
  • 1961–1968미 항공우주국 국장
  • 1969대통령 자유훈장 수훈, 『우주시대의 관리』 출간

린든 B. 존슨

Lyndon B. Johnson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908–1973 ○ 자연사

개혁과 전쟁 사이의 냉전 대통령

1968년 7월, 미국과 소련이 전략무기 제한 협상을 시작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린든 B. 존슨은 의회에서 다져진 협상력으로 미국의 국내 개혁과 냉전 전략을 함께 밀어붙인 대통령이었다. 그는 민권법과 투표권법, 메디케어를 포함한 ‘위대한 사회’를 확장했지만, 베트남전의 확대는 그 성과를 압도하는 역사적 책임이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경쟁을 지속하면서도 소련과 전략무기 제한을 모색해 1967년 글래스버러 정상회담과 1968년 전략무기 협상 합의로 훗날 SALT로 이어질 길을 열었다. 선거에서 물러난 마지막 해에도 베트남 평화협상과 군비통제를 병행하려 했으나, 합의의 결실은 후임 정부가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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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9텍사스 제10선거구 연방 하원의원
  • 1949–1951텍사스주 연방 상원의원
  • 1951–1953상원 민주당 원내총무
  • 1953–1955상원 민주당 원내대표
  • 1955–1961상원 다수당 원내대표
  • 1961–1963미국 부통령
  • 1963–1969미국 제36대 대통령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911–2004 ○ 자연사

핵폐기를 진심으로 믿었으나 SDI만은 양보하지 않았던, 냉전의 마지막 미국 대통령

1986년 10월 12일 오후,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모든 핵무기를 2000년까지 폐기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리고 40분 뒤, SDI 연구를 실험실에 가두라는 고르바초프의 조건을 레이건이 거부하면서 협상은 무너졌다.

로널드 레이건은 배우에서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거쳐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이 된 인물로, 레이거노믹스와 대규모 군비 증강으로 1980년대를 열었다. 취임 초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르며 대결을 고조시켰으나, 핵무기 없는 세상을 진심으로 염원하여 고르바초프와 네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 1986년 레이캬비크에서 전면 핵폐기 합의 직전까지 갔지만, 전략방위구상(SDI)을 양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협상은 막판에 결렬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중거리핵전력조약(INF)에 서명하여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을 통째로 폐기했고, 냉전은 그가 퇴임한 지 몇 달 만에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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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일리노이주 탬피코의 아일랜드계 가정에서 출생
  • 1937–1964할리우드 배우, 영화 53편 출연, 영화배우조합 회장 역임
  • 1967–1975캘리포니아 주지사, 대학 시위 진압과 복지 개혁 추진
  • 1981–1989제40대 대통령, 레이거노믹스·군비 증강·'악의 제국' 연설
  • 1986.10레이캬비크 정상회담, 전면 핵폐기 직전까지 갔으나 SDI로 결렬
  • 1987.06브란덴부르크문 앞 '이 벽을 허무시오' 연설
  • 1987.12INF 조약 서명, 중거리 핵미사일 전량 폐기
  • 1994–2004알츠하이머병 진단, 200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

헨리 M. 잭슨

Henry M. Jackson

유대인 이민을 통상 지위와 묶어 데탕트를 흔든 민주당 매파 상원의원

미국민은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데탕트', 곧 사람과 사상의 자유로운 이동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노르웨이 이민자의 아들로 워싱턴주에서 태어나 40년 넘게 의회에서 활동한 냉전 자유주의자였다. 민권과 환경 정책에는 앞장섰지만 데탕트에는 회의적이어서, 소련의 유대인 이민을 통상 지위와 연결한 잭슨-배닉 수정안을 주도했다. 1974년 키신저·도브리닌과의 비공식 협상이 소련의 거부로 무산되며 잭슨은 1972년 통상협정을 사실상 좌초시킨 인물로 남았다. 그의 매파 보좌관들은 훗날 신보수주의의 핵심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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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0스노호미시군 검사장
  • 1941–1953연방 하원의원
  • 1953–1983연방 상원의원
  • 1963–1981내무·에너지·천연자원위원회 위원장
  • 1972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출마
  • 1976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출마
  • 1974잭슨-배닉 수정안 공동 발의

찰스 배닉

Charles Vanik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계 체코인 1913–2007 ○ 자연사

이민의 자유를 무역법에 새긴 의원

1974년 그는 잭슨-배닉 수정조항을 하원에 제출해 이민의 자유를 무역 조건으로 만들었다.

찰스 배닉은 클리블랜드 동부의 노동자와 동유럽계 주민을 기반으로 활동한 민주당 하원의원이었다. 그는 조세 형평, 사회보장, 메디케어, 오대호 환경 문제를 다루며 국내 개혁 의제를 외교정책과 연결했다. 1974년 헨리 잭슨과 함께 잭슨-배닉 수정조항을 발의해, 이민을 제한하는 비시장경제 국가에 대한 정상 무역관계 부여를 조건부로 묶었다. 이 법은 소련계 유대인을 비롯한 종교적 소수자의 이주를 압박하는 수단이 되었지만, 데탕트와 무역을 인권 조건에 연계한 미국 의회의 개입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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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39클리블랜드 시의회 의원
  • 1940–1942오하이오주 상원의원
  • 1942–1945미 해군 예비역 장교, 대서양·태평양 전선 복무
  • 1947–1954클리블랜드 시 법원 판사
  • 1955–1969미국 하원의원, 오하이오 제21선거구
  • 1969–1981미국 하원의원, 오하이오 제22선거구
  • 1973–1981하원 세입위원회 무역소위원회 위원장
  • 1985–1995Squire Sanders & Dempsey 워싱턴 사무소 변호사, 동유럽 무역 담당
  • 2007플로리다주 주피터에서 사망

로버트 맥나마라

Robert McNamara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916–2009 ○ 자연사

베트남전을 주도하고 쿠바 위기에서 핵전쟁을 막은, 양적 분석의 국방장관

쿠바 미사일 위기의 가장 큰 교훈: 인간의 오류 가능성과 핵무기의 무기한 결합은 국가들을 파괴할 것이다.

미국 제8대 국방장관(1961–1968)으로, 케네디와 존슨 두 행정부에서 7년 이상 국방을 이끈 최장수 재임자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EXCOMM 내 공습 대신 해상 '격리' 봉쇄를 처음 제시하고 강력히 밀어붙여, 흐루쇼프에게 결의를 보여주면서도 군사 충돌로 번지지 않을 통제된 선택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서는 계량적 분석과 병력 증강을 주도하다 점차 회의에 빠졌고, 퇴임 27년 뒤 회고록에서 그 전쟁이 '잘못됐다'고 고백했다. 이후 세계은행 총재(1968–1981)로 빈곤 퇴치로 은행의 방향을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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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6USAAF 통계통제실, 중령 전역
  • 1946–1960포드 자동차, 사장(1960)
  • 1961–1968제8대 미국 국방장관
  • 1968–1981세계은행 총재

존 F. 케네디

John F. Kennedy

냉전의 최전선에서 핵전쟁 직전까지 간 최연소 미국 대통령

조국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으라.

미국 제35대 대통령(1961–1963)으로, 43세의 최연소 당선자이자 최초의 가톨릭 대통령이었다. 1961년 피그만 침공을 승인했으나 실패로 끝났고, 같은 해 흐루쇼프와의 빈 정상회담에서 위협을 느낀 소련은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했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해상 '격리' 봉쇄를 선택하고, 로버트 케네디를 통해 튀르키예의 주피터 미사일 철수라는 비밀 양보로 핵전쟁을 막았다. 1963년 11월 22일 댈러스에서 암살당했으며, 그의 죽음 이후 민권법과 세제 개혁 등 의제가 의회를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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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1953매사추세츠주 하원의원
  • 1953–1960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
  • 1961–1963제35대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

Jimmy Carter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24–2024 ○ 자연사

데탕트의 정점과 종말을 모두 품은 미국의 39대 대통령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후, 카터는 1980년 1월 국정연설에서 '페르시아만 지역에 대한 외부 세력의 지배 시도는 미합중국의 중대한 이익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루지야 땅콩 농장에서 자란 침례교도로, 해군 핵잠수함 장교를 거쳐 남부의 인종차별 철폐를 공약한 '뉴사우스' 주지사가 되었다. 1976년 워싱턴 아웃사이더를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파나마 운하 반환,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성사시켰다. 1979년 6월 빈에서 브레즈네프와 SALT II에 서명하며 데탕트를 정점으로 이끌었으나, 같은 해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조약 비준을 철회하고 카터 독트린을 선언하며 데탕트의 종막을 알렸다. 퇴임 후 카터 센터를 설립해 인권과 공중보건, 분쟁 중재에 헌신했으며,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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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1967그루지야주 상원의원
  • 1971–1975제76대 그루지야 주지사
  • 1977–1981제39대 미국 대통령
  • 1982카터 센터 설립
  • 2002노벨 평화상 수상

형 대통령의 최측근 법무장관에서 쿠바 미사일 위기 타결의 실무자가 된 정치인

그는 훗날 이렇게 적었다. 〈전면 기습 공격에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는, 그것이 역(逆)진주만이 되어 전 세계의 눈에 미국의 이름을 더럽히리라는 점이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남동생이자 가장 신임받는 정치 고문으로, 35세에 법무장관이 되어 조직범죄 소탕과 시민권 보호에 앞장섰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초기에는 침공을 선호했으나, 해상 봉쇄 측으로 전환한 뒤 위기 후반 도브리닌 소련 대사와의 비밀 회담에서 튀르키예 미사일 철수 약속을 전하며 타결의 열쇠가 되었다. 형의 암살 후 상원의원으로 베트남 전쟁 반대와 빈곤 퇴치에 나섰고, 1968년 대선 경선 중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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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존 F. 케네디 상원 선거 캠프 매니저
  • 1953–1955상원 상설조사소위원회(매카시 위원회) 법률고문
  • 1957–1959상원 노동부패조사위원회(매클렐런 위원회) 수석법률고문
  • 1961–1964제64대 미국 법무장관
  • 1965–1968뉴욕주 상원의원

테드 소렌슨

Ted Sorensen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28–2010 ○ 뇌졸중

쿠바 위기에서 케네디의 펜을 잡은 연설문 작성자, '격리'라는 길을 낸 사람

'그 유명한 구절을 당신이 썼습니까?'라는 질문에 소렌슨의 평생 대답은 '묻지 마시라(Ask not)'였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수석 연설문 작성자이자 측근 보좌관으로, 케네디는 그를 '나의 지적 혈액은행'이라 불렀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합동참모본부의 공습 주장에 맞서 해상 봉쇄를 지지했고, 10월 22일 대국민 TV 연설을 초안하며 '봉쇄(blockade)' 대신 '격리(quarantine)'라는 용어를 선택해 전쟁 선포의 법적 함정을 피했다. 후일 이 연설을 '지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케네디의 연설'이라고 평했으며, 흐루쇼프와의 비밀 서한 초안도 작성했다. 케네디 암살 후 린든 존슨의 '계속 나아갑시다' 연설을 기초하고 1964년 사임, 이후 변호사와 저술가로 활동하며 2008년 버락 오바마를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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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61존 F. 케네디 상원의원 수석 입법 보좌관
  • 1961–1964대통령 특별고문 겸 수석 연설문 작성자
  • 1964–1966저술가 (『케네디』 출간, 국제적 베스트셀러)
  • 1966–2010국제 변호사, Paul, Weiss 로펌
  • 1977CIA 국장 지명자 (인준 철회)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폴란드 1928–2017 ○ 자연사

소련을 아프간 늪으로 끌어들인 카터의 국가안보보좌관

그 비밀 작전은 탁월한 발상이었다. 그것은 러시아인들을 아프간 덫으로 끌어들였다… 소련이 국경을 넘던 날 나는 카터 대통령에게 썼다: 우리는 지금 소련에게 베트남 전쟁을 선사할 기회를 가졌다.

폴란드 출신의 미국 정치학자이자 외교 전략가로, 카터 행정부(1977–1981)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다. 소련 견제를 위한 인권 외교와 대중국 관계 정규화,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주도했으며, 카터 독트린으로 페르시아만 군사 개입 의지를 천명했다. 1979년 7월 3일, 소련 개입을 유발할 위험을 알리는 메모를 대통령에게 보내면서도 무자헤딘 비밀 원조 지시에 서명했으며, 훗날 "소련에게 베트남 전쟁을 선사할 기회"라 평했다. 냉전 후에는 《거대한 체스판》(1997)으로 유라시아 지정학과 NATO 확장을 주창하며 미국 외교에 지속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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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1981국가안보보좌관
  • 1973–19763극위원회 디렉터
  • 1966–1968국무부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 1960–1972컬럼비아대학교 교수, 공산권연구소 소장
  • 1953–1960하버드대학교 교수
  • 1981–2017존스홉킨스대학교 SAIS 교수, CSIS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