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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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당 지도 ·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인물 15명

조건 모두 해제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보그다노프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огданов

레닌을 철학으로 분노하게 만든 남자, 그리고 자신의 피를 바꾸다 죽은 사이버네틱스의 선구자

모든 조직은 사회에서 결정적 영향력을 얻으면, 아무리 민주적인 강령을 내걸어도 자신의 내부 구조를 사회 전체에 강제하려 한다. 모든 집단은 사회 환경을 자신의 형상과 모습으로 재창조한다.

볼셰비키 공동 창립자이자 레닌의 철학적 라이벌. 보편적 조직 과학 '텍톨로지'로 시스템 이론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세계 최초 수혈 연구소를 설립했다. 1928년 교환 수혈 자가 실험 중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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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1899모스크바대학 자연과학부 입학, 불법 학생조직 활동으로 1894년 퇴학·체포·툴라 유배; 하리코프대학 의학부 외부생으로 졸업, 의사 자격 취득
  • 1897『경제학 단기 강좌』 출간 — 레닌이 익명 서평에서 극찬한 노동자 교육용 교재
  • 1903–1904볼셰비키 창립 합류, 제네바 22인 회의에서 최초의 볼셰비키 지도기관인 '다수파위원회 국'에 선출
  • 1905–1909RSDLP 제3·4·5차 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 당내 '제2인자'로 레닌과 경쟁;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에서 중앙위원회 대표 활동
  • 1904–1909경험일원론(Empiriomonism) 3부작 출간;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9)에 의한 철학적 공격으로 결별, 볼셰비키 센터에서 축출
  • 1909–1911그룹 '프표료트(Vperyod)' 조직, 카프리 섬과 볼로냐에서 독자적 당학교 운영
  • 1908–1920sSF 소설 『붉은 별』(1908)과 『엔지니어 멘니』(1912) 출간; 텍톨로지(Tektology): 보편적 조직 과학 — 전3권 출간, 훗날 시스템 이론·사이버네틱스의 선구로 평가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중 군의관으로 징집; 1914년 귀국, 전선 복무
  • 1918–1920프롤레트쿨트(Proletkult) 이념가로 활동, 프롤레타리아 문화론 주창
  • 1918–1922모스크바대학 정치경제학 교수·공산주의 아카데미 상임간부회 위원
  • 1921–1923부하린에게 공개서한 발송, 당의 비상관리 방식 비판; 1923년 GPU에 체포, '노동자의 진리' 그룹 연루 혐의로 조사받았으나 제르진스키 면담 후 석방
  • 1926–1928세계 최초 수혈 연구소 설립·소장 취임, 교환 수혈을 통한 노화 방지 이론 주창; 1928년 11번째 교환 수혈 자가 실험 중 사망

로만 바츨라보비치 말리놉스키

Роман Вацлавович Малиновский

레닌의 신임을 받은 볼셰비키 중앙위원이자 오흐란카 비밀요원

1913년 2월 볼셰비키 무도회에서 말리놉스키가 빌려준 연미복을 입은 스탈린이 체포되자, 그는 스탈린과 대화 중이던 현장에서 '내가 구해내겠다'고 외쳤다.

볼셰비키 중앙위원이자 제4대 두마 의원으로 활약한 폴란드 출신 노동운동가. 레닌의 깊은 신임을 얻어 당내 최고위 노동자 출신 지도자로 부상했으나, 실은 제정 오흐란카의 최고액 비밀요원 '포르트노이'로서 오르조니키제·스베르들로프·스탈린의 체포를 초래하고 당 분열을 심화시켰다. 1914년 강제 사임 후 1918년 귀환, 재판에서 사형을 받고 크렘린에서 총살되었다. 그의 침투가 드러나면서 볼셰비키 내부의 음모적 불신이 깊어졌고, 이는 훗날 대숙청 시기 편집증적 숙청 논리의 한 기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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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5이즈마일롭스키 근위연대 복무
  • 1906–1909상트페테르부르크 금속노동자조합 서기
  • 1910오흐란카 비밀요원 '포르트노이'로 포섭됨
  • 1912프라하 당대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선출
  • 1912–1914제4대 국가두마 볼셰비키 의원·분파 지도자
  • 1914.5강제 사임, 해외 도피
  • 1914–1918독일군 포로수용소 수감
  • 1918.11귀환, 베르호프니 트리부날 사형 판결, 총살

그리고리 알렉세예비치 알렉신스키

Григорий Алексеевич Алексинский

혁명적 국제주의에서 전시 애국주의로 선회한 논객

1917년 7월, 그는 《Живое слово》에 레닌의 독일 간첩설 자료를 실었다.

그리고리 알렉신스키는 1905년 혁명기의 볼셰비키 활동가이자 제2국가두마 의원으로 부상했지만, 전쟁과 혁명의 압박 속에서 사회애국주의로 급선회했다. 1917년 그는 플레하노프의 《통일》 그룹에 합류해 볼셰비키를 공격했고, 7월에는 에르몰렌코의 불충분한 증언을 레닌이 독일 간첩이라는 주장으로 포장해 대중 언론에 올렸다. 이 폭로는 군대와 소비에트 안에서 반볼셰비키 정치를 강화했지만, 그가 혁명가에서 반볼셰비키 망명자로 바뀐 경로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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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04모스크바대학교 학생, 학생운동 참가
  • 1905모스크바 볼셰비키 조직 선동가
  • 1905–1907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 볼셰비키 출판물 필자
  • 1907제2국가두마 의원, 사회민주파 볼셰비키계 연설자
  • 1909–1914좌익 볼셰비키계 《전진》 그룹 지도자
  • 1914–1917전쟁 지지 사회민주주의자, 파리 《호소》 공동 편집자
  • 1917플레하노프의 《통일》 그룹 지도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원으로 선출
  • 1919–1967러시아 망명 정치가·논객, 파리 러시아 평의회 의장

이반 니키티치 스미르노프

Иван Никитич Смирнов

좌익 반대파의 시베리아 볼셰비키

1927년 인민위원직에서 물러난 스미르노프는 무일푼으로 노동교환소에 실업 등록을 하러 갔다. 서류의 '마지막 직위'란에 '우편·전신 인민위원'이라고 적자, 창구의 하급 관리가 눈앞에 서 있는 이 백발의 고매한 거한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1899년 RSDLP에 입당한 볼셰비키로, 일곱 차례 체포와 유배를 겪으며 혁명운동에 헌신했다. 내전기 우랄·시베리아의 당 조직가이자 시브레프콤 의장으로 콜차크 백군 분쇄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1920년대에는 좌익 반대파의 주요 지도자가 되었다. 1927년 제명 후에도 1931년부터 비밀 반대파 조직을 이끌며 베를린을 통해 트로츠키와 연락을 재개했고, 1933년 체포되어 1936년 첫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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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17볼셰비키 지하활동과 유배
  • 1918–1921시베리아·우랄 내전기 당 조직가
  • 1923–1927우편·전신 인민위원, 좌익 반대파 지도자
  • 1927–1930당 제명과 유배
  • 1933–1936재체포, 첫 모스크바 재판과 처형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라셰비치

Михаил Михайлович Лашевич
군사·지휘 소련 소련 러시아 1884–1928 사망 경위 논란

1917년 봉기와 내전을 지휘한 볼셰비키 군사 지도자

1917년 10월 24일 저녁, 라셰비치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벨리셰프를 통해 순양함 아브로라 호에 명령을 내려 전날 사관생도들이 끊어 놓은 니콜라예프스키 다리를 복구하게 했고, 이 임무는 완수되었다.

1884년 러시아 제국 오데사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1901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1903년부터 볼셰비키였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에서 10월 봉기에 참여했고 내전기에는 제3군 사령관과 동부·남부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을 지냈다. 1925년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겸 전쟁·해군 제1부인민위원에 올랐으나 1926년 통합 반대파 가담 뒤 강등되어 1926~1928년 하얼빈 중동철도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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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5RSDLP 입당, 오데사·니콜라예프·예카테리노슬라프·페테르부르크에서 당 활동, 반복적 체포와 유배
  • 1915–17제1차 세계대전 징집, 두 번 부상, 공로로 상급 하사관 진급
  • 1917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볼셰비키 분파 서기·의장,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0월 봉기 지휘
  • 1918–20제3군 사령관, 동부·남부·서부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제7군 사령관 대행
  • 1922–25시베리아 혁명위원회 의장, 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
  • 1925–26소련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겸 전쟁·해군 제1부인민위원
  • 1926–27통합 반대파 가담, 불법 집회 조직, 중앙위 후보위원 해임, 15차 당대회 출당
  • 1928반대파 철회 선언, 당적 회복, 하얼빈에서 사망

얀 안벨트

Jaan Anvelt

에스토니아 노동 코뮌의 수반, 1924년 봉기의 지도자

1918년 11월 나르바에서 선포된 에스토니아 노동 코뮌의 수반으로 동부 에스토니아를 통치했고, 1937년 스탈린 대숙청 중 체포되어 심문 중 구타로 받은 상처로 12월 11일 죽었다.

1918년 11월 나르바에 선포된 에스토니아 노동 코뮌의 수반으로 두 달 남짓 에스토니아 동부를 통치했고 1924년 탈린 봉기를 조직했다. 1937년 체포되어 심문 중 구타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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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볼셰비키에 가담해 혁명 운동에 나선 교사
  • 1912나르바에서 노동자 신문 『키르』 편집자
  • 1917에스틀랴트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탈린 권력 장악 주도
  • 1918에스토니아 노동 코뮌 평의회 의장
  • 1921에스토니아 공산당 지하 지도자, 1924년 12월 봉기 지휘
  • 1926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정치위원
  • 1929민간항공총국 부국장, 이후 국장
  • 1935코민테른 국제통제위원회 위원 겸 책임비서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킴

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на Ким

러시아 혁명에 투신한 최초의 조선인 공산주의자

1918년 9월 16일, 아타만 칼미코프의 백군에게 끌려나가 총살당하기 직전 그녀의 마지막 외침: '자유와 독립을 조선에!'

시베리아 한인 이주민의 딸로 태어나 1916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최초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다. 레닌의 지시로 극동에 파견되어 하바롭스크 소비에트 외무인민위원을 지내고 이동휘와 함께 한인사회당을 창당했으며, 조선인 적위대를 조직해 백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1918년 33세로 처형당한, 러시아 혁명과 조선 독립운동을 잇는 상징적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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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 1917하바롭스크 볼셰비키 지부 서기 겸 극동 인민위원회 외무인민위원
  • 1918.4한인사회당(이후 조선공산당의 전신) 공동 창당
  • 1918.6–8조선인 적위대 및 국제 적위대 조직, 백군·일본군에 맞서 전투
  • 1918.9.4백군과 일본군에 체포됨
  • 1918.9.16하바롭스크에서 백군 코사크에 의해 처형됨

알렉산드르 가브릴로비치 실랴프니코프

Александр Гаврилович Шляпников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소련 러시아 1885–1937 ✕ 처형

노동자 반대파의 지도자. 레닌에게 패배하고 숙청되다

1937년 9월 2일 군사합의회의 비공개 재판에서 테러 음모 혐의를 끝까지 부인하고 다른 사람도 끌어들이지 않았다. 제10차 당대회 강령이 옳았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다른 야권과 달리 과거가 아니라 철저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요구했다고 진술했다.

무롬의 가난한 옛의식파 집안에서 태어난 숙련 선반공이었다. 1901년 RSDLP에 입당해 1903년 분열 뒤 볼셰비키로 섰고, 프랑스·독일·영국 공장을 전전하며 유럽 노동운동을 체득했다. 1917년 2월 혁명 때 수도에 있던 최고위 볼셰비키로서 당 중앙위원회 러시아국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0월혁명 후 초대 노동인민위원으로 8시간 노동제의 기초를 놓았고, 내전 말기 콜론타이와 함께 '노동자 반대파'를 이끌며 노동조합의 경제 통제를 주장했으나 1921년 제10차 당대회에서 패배했다. 외교직으로 밀려난 뒤 1933년 출당, 1935년 징역형을 거쳐 1937년 9월 2일 거짓 기소로 처형되었다. 1963년 사법적 복권, 1988년 당적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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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RSDLP 입당, 1903년 분열 뒤 볼셰비키로
  • 1917당 중앙위원회 러시아국 위원
  • 1917–18초대 노동인민위원 (RSFSR)
  • 1918–19남부전선·카스피-캅카스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0–22'노동자 반대파' 지도, 중앙위원
  • 1923'46인 선언' 서명
  • 1924–25주프랑스 통상대표
  • 1933당 제명, 행정적 추방

예브게니 알렉세예비치 프레오브라젠스키

Евгений Алексеевич Преображенский
학술·연구 소속 미확정 소련 러시아 1886–1937 ✕ 처형

신경제정책 논쟁의 이론가

빅토르 세르주의 회고: "회의 중에 언제든 쓰러져 잠들 것 같았지만, 두뇌는 여전히 맑고 통계치로 가득 차 있었다."

볼셰비키 경제 이론가이자 부하린과 함께 『공산주의 ABC』(1919)를 집필한 선전가로, 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내며 초기 소비에트 국가 건설에 참여했다. 1923년 '46인 선언'의 발기인이자 좌익 반대파의 핵심 논객으로서, 『새로운 경제학』(1926)에서 농민 부문의 잉여를 공업화 자본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사회주의적 원시축적'론을 정식화해 신경제정책 논쟁을 이끌었다. 1929년 스탈린 노선으로 복귀했으나 곧 집단화 폭력에 반대하며 다시 지하 조직을 결성했고, 1937년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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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0당 중앙 지도부와 경제 이론 활동
  • 1923–1927좌익 반대파·46인 선언
  • 1928–1937유배, 재체포와 처형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스미르노프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Смирнов
경제·재정·계획 소련 소련 러시아 1887–1937 ✕ 처형

모스크바 봉기 포병 지휘관에서 좌파 공산주의자·민주중앙집권파로

러시아 단독 사회주의는 '유럽 사회주의라는 간선도로에서 갈라져 나온 곁길이며 실패할 운명'이라고 보았다.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모스크바 법대생으로, 니콜라이 부하린·오신스키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트리오를 이루었다. 1917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중포병을 지휘했고 1918년 초 RSFSR 상업·공업 인민위원을 지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반대한 좌파 공산주의자로 물러난 뒤, 민주중앙집권파·46인 선언·통합 야당을 거치며 당내 민주주의를 일관되게 주장했다. 1921~1927년 고스플란 상임위원, 최고경제회의 금융위원회 의장, 노동국방회의 이사로 중앙계획 기구에서 활동했다. 러시아 단독 사회주의를 '유럽 사회주의의 곁길'로 보았고, 제명 후에는 '혁명과 볼셰비즘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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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볼셰비키 입당
  • 1909–1914모스크바 대학 법학부, 모스크바위원회 선동가
  • 1914–1917러시아 제국군 포병 준위, 서부전선
  • 1917모스크바 볼셰비키 신문 《소치알-데모크라트》 편집, 10월 봉기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중포병 지휘
  • 1918.02–1918.04RSFSR 상업·공업 인민위원
  • 1918–1921좌파 공산주의자, '군사야당' 지도자, 최고경제회의(VSNKh) 근무
  • 1920–1923민주중앙집권파('데치스트') 지도자
  • 1921–1927고스플란 상임위원, 노동국방회의 이사, 최고경제회의 금융위원회 의장, 중앙통계국 이사
  • 192346인 선언 서명
  • 1924–1926《프라우다》 및 《에코노미체스카야 지즌》 편집위원 겸직
  • 1926–1927사프로노프와 '15인 그룹' 결성, 통합 야당 참여
  • 1927.12제15차 당대회에서 제명, 우랄 유형 3년형
  • 1930–1937수감·유형 반복, 수즈달 정치격리소 수감 중 모스크바로 이송
  • 1937.05.26군사최고재판소에서 사형 선고, 당일 총살

티모페이 블라디미로비치 사프로노프

Тимоф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Сапронов

당내 민주주의를 요구한 '민주중앙집권파' 지도자

「이런 경제를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노동계급 앞에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며 공산주의 사상을 실추시키는 일이다」. 「소부르주아 독재의 아고니」, 1931년 12월 집필, 1932년 발표

툴라주 모스타우시카 마을의 러시아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15세부터 도장공으로 일했고, 1905년 혁명 운동에 들어가 1912년 볼셰비키가 되었다. 10월 혁명 후 모스크바 주 집행위원회 의장, 하리코프 주 혁명위원회 의장, 최고경제회의 부의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서기, 소인민위원회 의장 등을 지냈다. 1920년대 초 '민주중앙집권파'를 이끌며 당내 민주화를 요구했으나 1927년 제15차 당 대회에서 제명되어 유배되었고, 이후 좌익 반대파의 주요 이론가로 활동했다. 1931년 12월 「소부르주아 독재의 아고니」를 써서 소련 체제를 '기형적 국가자본주의'로 분석했으며, 1937년 9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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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6모스크바에서 도장공 노동자 조직, 건설노조 결성
  • 1917–1919모스크바 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20하리코프 주 혁명위원회 및 집행위원회 의장
  • 1920–1921'민주중앙집권파' 지도자, 당내 민주화 투쟁
  • 1921–1923최고경제회의(VSNKh) 부의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VTsIK) 서기
  • 1923–1925소(小)인민위원회 의장, 전러시아 중앙노동조합평의회 의장
  • 1926–192715인파 성명 주도, '국가자본주의' 테제 제출
  • 1927–1937당 제명, 유배, 「소부르주아 독재의 아고니」 집필, 체포 및 총살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시베르니크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Шверник
입법·국가 대표 소련 소련 러시아 1888–1970 ○ 자연사

스탈린 말기의 공식 국가원수

1905년 1월 9일, 16세의 공장 소년공이었던 시베르니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앞에서 '피의 일요일' 발포를 목격했다. 같은 해 가을, 그는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7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출신으로,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제1서기를 14년간 맡으며 소비에트 노조체계를 구축했다. 1946년 칼리닌의 뒤를 이어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이 되었으나 실권은 스탈린과 정치국에 있었다. 전시에는 산업 대피와 나치 전쟁범죄 조사위원회를 이끌었고, 스탈린 사후에는 흐루쇼프와 함께 당통제위원장으로서 정치적 억압 피해자들의 복권을 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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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s–1930s노동조합과 당 행정에서 성장
  • 1938–1946민족소비에트 의장, 스탈린기 공식 연방대표제의 한 축
  • 1946–1953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명목상 국가원수
  • 1953–1956스탈린 사후 노조·국가 행정 원로로 이동
  • 1956 이후당통제위원회 등에서 복권·징계 문제에 관여

가브릴 일리치 먀스니코프

Гавриил Ильич Мясников

레닌에게 언론자유를 요구하며 '먀스니코프주의'를 촉발한 노동자 볼셰비키

'열일곱인가. 많군. 그러나 다른 방법은 없다. 혁명은 무도회가 아니다.' — 미하일 로마노프 처형을 계획하며 쓴 회고록에서, 1918.

모토빌리하 금속노동자 출신의 러시아 혁명가. 1905년 볼셰비키에 합류, 1918년 페름 체카 부의장으로 미하일 대공 처형을 조직했다. 내전 후 당내 검열을 정면 비판하며 '군주제파에서 무정부주의자까지' 언론자유를 요구했고, 레닌의 직접 반박을 불러일으켜 '먀스니코프주의'로 불렸다. 1922년 제명 후 '노동자 그룹'을 결성, 프랑스 망명 중 『최근의 사기』에서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분석했다. 1944년 귀국 후 체포돼 이듬해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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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06모토빌리하 병기공장 금속노동자, 사회혁명당 입당 후 RSDLP(볼셰비키)로 전향, 무장투쟁반 활동
  • 1906–1917반복적 체포·탈옥·유형, 오룔 중앙감옥 복역 후 2월혁명으로 석방
  • 1917–1918모토빌리하 소비에트 의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VTsIK) 위원, 페름 체카 부의장
  • 1918–1920미하일 대공 처형 조직, 제16사단 정치위원, 페름 현당위원장
  • 1921–1923'노동자 그룹' 결성, 언론자유 요구로 레닌과의 공개 논쟁 — '먀스니코프주의' 논쟁, RCP(b) 제명·체포
  • 1928–1944이란·터키 경유 프랑스 망명, 『최근의 사기(Ocherednoy Obman)』 집필 — 소련 국가자본주의론 전개
  • 1944–1945소련 대사관 초청으로 귀국, 직후 체포되어 1945년 11월 16일 총살 (2001년 12월 25일 복권)

게오르기 레오니도비치 퍄타코프

Георгий Леонидович Пятаков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우크라이나 1890–1937 ✕ 처형

혁명과 산업 계획 사이의 볼셰비키

1937년 1월,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피고석에서. 독일 작가 리온 포이히트방어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중간 키에 중년, 약간 벗겨진 머리와 붉은빛이 도는 옛날식의 떨리는 뾰족 수염을 한 퍄타코프가 마이크 앞에 서서, 자기가 맡은 산업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조용하고도 공들여 이야기하는 모습을. 마치 대학 강사처럼 손가락을 뻗어 설명하며, 오래전에 죽은 '퍄타코프'라는 인물의 삶과 행적을 상세히 밝히려는 역사학자처럼, 청중이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납득하기를 바라는 한 가지 소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초대 수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민족자결권 문제에서 좌파 공산주의자로서 레닌과 맞섰고, 레닌이 '유언'에서 언급한 단 여섯 명의 볼셰비키 중 한 명이다. 좌익 반대파로 출당되었다가 복당 후 중공업 부인민위원으로 5개년 계획을 주도했으며, 1937년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주피고인으로 처형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0–1917볼셰비키 입당, 키예프 지하활동, 유형과 망명
  • 1917–1918키예프 위원장, 국립은행 인수, 좌파 공산주의자
  • 1918–1920CP(b)U 중앙위 서기, 우크라이나 임시정부 수반, 군사정보국장
  • 1920–1927돈바스·고스플란·최고경제회의 부의장, 좌익 반대파
  • 1928–1930복당, 고스방크 총재, 신용개혁
  • 1930–1936중공업 부인민위원·제1부인민위원, 5개년 계획
  • 1936–1937체포, 제2차 모스크바 재판 주피고인, 처형

혁명 군사평의회의 젊은 반대파

1927년 11월 7일 혁명 10주년, 크렘린 맞은편 자택에서 레닌·트로츠키·지노비예프의 초상화와 '레닌의 유언을 이행하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스탈린 지지자들이 난입해 파괴했고, 거리에서 구타당해 체포되었으나 그날 탈출했다.

라트비아 출신의 볼셰비키 혁명가·경제가. 열네 살에 입당하여 1917년 24세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레닌의 핀란드 은신 시기 핵심 협력자였고, 10월혁명 당시 핀란드 주둔군을 페트로그라드로 수송했다. 내전기에는 동부·남부·서부·캅카스 전선의 혁명군사평의회 위원과 붉은군대 정치총국장을 지냈다. 좌익 반대파의 주요 지도자로 1927년 11월 마지막 공개 시위를 주도했고, 1930년 트로츠키주의 결별 선언 후 복권되었으나 이반 스미르노프의 지하 조직에 계속 가담했다. 1937년 1월 처형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7–1921혁명·내전기 당과 군사 지도부
  • 1923–1927좌익 반대파 활동
  • 1937체포와 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