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2월 8일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루덴코는 나치 지도부를 향해 그들이 '식인종의 도덕과 강도의 탐욕'을 독일 민족에게 주입했다고 규탄하며 소련 검찰의 개시 진술을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코사크 가문 출신으로 1926년 입당, 1944년 우크라이나 검사장이 되었다. 1945~1946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소련 수석검사로 괴링을 신문하며 나치 전쟁범죄의 실체를 법정에 세웠다. 1953년부터 사망 시까지 28년간 소련 검찰총장으로 재임하며 베리야 재판을 주도하고 정치범 재활위원회를 이끌어 흐루쇼프 해빙기의 사법 복권을 추진했다. 브레즈네프 시기에는 안드로포프와 함께 반체제 인사에 대한 '예방적 경고' 제도를 도입하고 1979년 소련 검찰법 제정으로 검찰 제도의 법적 기반을 완성했다.
알렉산드르 부시긴은 고리키 자동차 공장의 대장장이로서 생산성 향상 방법을 현장에 도입하고 노동자 집단의 조직을 이끈 소련의 대표적 생산 노동자였다. 1935년 그의 작업반은 교대 한 번에 규정량 675개를 크게 웃도는 크랭크축 966개와 1001개를 단조해, 스타하노프 운동이 기계공업으로 확산되는 상징이 되었다. 그는 전쟁과 전후에도 공장 관리와 노동자 교육에 참여했으며, 노동 영웅의 성취가 개인의 숙련뿐 아니라 작업장 조직과 국가적 동원에 의존했음을 보여 준다.
1965년 브레즈네프가 당-국가통제위원회를 분할했을 때, 셸레핀은 의장직에서 물러났지만 그의 부하였던 코바노프가 신설 인민통제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 경쟁자의 부하를 승진시키며 우두머리를 무력화하는 브레즈네프식 관료정치의 전형이었다.
아지트프롭 부서에서 출발하여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를 거친 당 기구의 산물이었다. 이후 알렉산드르 셸레핀 휘하에서 당-국가통제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고, 1965년 브레즈네프가 셸레핀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통제 기구를 분할했을 때 신설된 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었다. 그의 재임기는 수백만 명의 자원봉사 감독관이 정부와 기업의 실적을 감사하는 대중 참여형 통제 기구로 전환되던 초기 브레즈네프 시기와 맞물린다. 이전에는 시골 교사, 집단농장 위원장, 3개 전선의 종군기자로도 활동했으며, 퇴임 후에는 석유·가스 건설 연구소의 과학 고문으로 일했다.
"지하에서는 쥐밖에 만날 수 없다" — 반체제 활동은 공개적으로 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을 담아 회고록 제목이 된 말.
소련군 소장(1959) 출신의 반체제 인사로, 크림 타타르인의 귀환 권리 투쟁을 이끌고 모스크바·우크라이나 헬싱키 그룹 창립에 모두 참여한 인권운동가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공개 규탄하고 두 차례 정치적 정신병원에 강제 수감(1964–65, 1969–74)되면서 소련의 정신의학 정치적 남용을 상징하는 사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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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1929콤소몰 간부 · 우크라이나 콤소몰 중앙위원
1934–1939군사공학 아카데미 및 참모 아카데미 우등 졸업
1939–1943할힌골 전투 · 극동전선 참모 · 여단장
1943–1945독소전: 제10근위군 부참모장 · 제8소총사단 참모장 (부상)
1945–1961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수 · 군사사이버네틱스 학과장 (1959 소장 진급)
베리야에게 밤마다 전화로 공장 상황을 보고할 때면, 차관임에도 전화기 앞에서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소련의 중공업 행정가로, 1965년부터 1983년까지 중공업·에너지·수송기계부 장관을 역임하며 브레즈네프 시대 군수산업과 민간 중공업의 핵심 축을 담당했다. 레닌그라드의 이조르스키 공장 노동자로 출발해 '크라스니 메탈리스트' 공장 책임자까지 오른 현장형 기술관료였으며, 1940년대에는 라브렌티 베리야의 직접 지휘 아래 노보크라마토르스크 중기계공장(NKMZ)의 방산 생산을 현장에서 감독했다. 중앙위원회 위원(1964~1986)과 최고회의 대의원(6~10기)을 지냈고, 1977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의 장기 집권은 소련 군산복합체가 당-국가 체제 안에서 제도화된 안정적 관리 구조를 확립했음을 보여준다.
스탈린 사후에도 그는 처벌을 피하지 못했다. 1958년 소련 최고재판소는 사건 조작과 수감자 고문의 죄로 그에게 15년형을 선고했고, 그는 형기를 하루도 감형받지 못한 채 다 채우고 나왔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의 러시아화된 프랑스계 집안에서 태어나 1931년 OGPU에 들어갔다. 대숙청 시기 NKVD 심문관으로 외무인민위원 대리 크레스틴스키, 코민테른의 퍄트니츠키와 크노린, 에스토니아 공산당의 안벨트 등의 사건을 맡아 구타로 자백을 받아 냈다. 전시에는 작전부서를 지휘하며 투바·몽골·신장에 파견됐고 1945년 중장까지 올랐다. 1955년 해임되고 계급을 박탈당한 뒤 1957년 체포되어, 1958년 사건 조작과 수감자 고문의 죄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형기를 다 채우고 1972년 출소해 1990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복권되지 않았다.
소련 각료 중 31년 이상 단일 장관직을 유지한 인물은 옐류틴이 유일하다. 고등교육부는 1954년부터 1985년까지 단 한 번도 주인이 바뀌지 않았다.
사라토프의 철도원 가정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제강연구소를 졸업한 금속공학자로, 전기제강·페로합금 기술을 개척해 1952년 스탈린상을 수상했다. 1945년 모교 소장이 되어 연구 중심 공과대학으로 탈바꿈시켰고, 1954년 고등교육부 장관에 임명된 후 31년간 소련의 대학·전문학교 체계를 총괄했다. 재임 기간 고등교육기관과 재학생 수는 두 배 이상 확대되었고, 공학·자연과학 분야의 대규모 인력 양성 체계는 우주 개발과 군수산업을 뒷받침했다. 과학아카데미 준회원(1962)이자 당 중앙위원(1961–1986)으로서 연구·행정·정치를 연결하는 소련 테크노크라트의 전형이었다.
“러시아인은 곰이 아니라 코끼리다. 우리는 기억이 길기 때문이다.” — 1980년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올림픽에서 미국의 보이콧 위협에 답하며.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건설위원회(고스스트로이) 의장으로 21년간 소련의 건설·에너지 인프라를 총괄한 경제 관료이자,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드네프로제르진스크 동창. 크레멘추크 수력발전소 건설로 1961년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고,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조직위원장으로 미국 주도의 보이콧 위기 속에서 대회를 성사시켰으나, 브레즈네프 사후 안드로포프 주도로 1983년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1937년 6월 20일, 북극 상공에서 치칼로프가 저산소증으로 코피를 흘리자 바이두코프가 조종간을 잡았다. 그는 마지막 13시간을 홀로 비행해 ANT-25기를 밴쿠버 피어슨 비행장에 내려놓았다.
소련의 시험비행사, 군사 지휘관, 그리고 소비에트 훈장 최다 수훈자(21개). 1936년과 1937년 발레리 치칼로프의 ANT-25기 부조종사로서 모스크바–우드 섬 및 모스크바–북극–밴쿠버 무착륙 비행에 참여해 소비에트 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위대한 조국전쟁에서는 항공사단과 항공군단을 지휘했고, 전후 민간항공단 총국장(1947–1949)을 지냈다. 1957년부터 1972년까지 국방부 제4총국장으로서 방공군(PVO)의 무기 조달을 총괄하며 소련 방공무기 체계 건설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작가동맹 회원으로 치칼로프 전기를 비롯한 여러 저서를 남겼으며, 1988년까지 PVO 최고사령관 과학고문으로 복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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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1928레닌그라드 군사항공이론학교·카차 군사비행학교 수료, 전투기 조종사
1931–1934NII VVS 시험비행사, 계기비행 방식 개발 참여
1935–1937ANT-25기 부조종사 — 모스크바–우드 섬(1936)·모스크바–북극–밴쿠버(1937) 무착륙 비행, 소비에트 연방영웅
1941–1945제4근위돌격항공사단장, 제4돌격항공군단장 — 모스크바·르제프·베를린 작전 참가
장군은 배신하지 않는다 — 20년 뒤 체포된 CIA 이중간첩 폴랴코프에 대한 첫 경고가 왔을 때 치뇨프가 한 말이다.
브레즈네프가 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당 시절부터 신임한 야금 기술자 출신 KGB 간부로, 부의장 자리에서 15년간 안드로포프 의장의 움직임을 총비서에게 직접 보고한 'KGB 안의 브레즈네프의 눈'이었다. 육군대장·사회주의노동영웅까지 올랐으나 음모와 전횡으로 동료들의 평판은 나빴다.
스카치코프가 이끈 GKES는 25년 동안 단 다섯 명의 수장만을 두었고, 같은 기간 미국은 12명의 원조기관장을 교체했다.
하리코프 기계제작연구소를 졸업한 공장 기술자 출신으로, 독소전쟁 시기 우랄바곤자보드의 당 조직자(파르토르크)로서 3만 5천 대의 전차 생산을 뒷받침했다. 전후 주요 중공업 공장장을 거쳐 1958년 국가대외경제관계위원회(GKES) 의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25년간 소련의 대외 경제·기술 원조 전체를 관장하며 75개국에 걸친 산업 플랜트 수출과 군사기술 공여를 지휘했다. 그의 재임 기간은 소련 대외원조 체제가 제도적으로 가장 안정되고 규모가 컸던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1977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고 1983년 은퇴할 때까지 단 한 번의 조직도 개편 속에서도 자리를 지킨, 소련 관료제의 지속성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베리야는 우리가 추천한 사람들이 유죄인지 무죄인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던진 질문은 단 하나였다: '그들이 정말로 필요한가?' — 『특수임무』
멜리토폴의 제분업자 아들로 태어나 열두 살에 붉은군대에 뛰어든 소년병은 남북전쟁의 무법지를 헤치고 GPU의 암약요원으로 성장했다. 1938년 로테르담에서 스탈린의 친필 명령으로 OUN 지도자 코노발레츠를 암살했고, 1940년에는 나움 에이팅곤과 함께 '오리 작전'을 지휘해 트로츠키를 제거했다. 독소전쟁기에는 제4국장으로서 적 후방의 파르티잔·사보타주 활동과 원자력 첩보(그룹 'S')를 총괄했다. 1953년 베리야의 '공범'으로 체포되어 15년을 감옥에서 보냈고, 석방 후 필명으로 역사소설을 쓰며 살다가 소련 붕괴 뒤인 1992년 완전히 복권되었다. 그의 회고록 『특수임무』는 소련 정보기관의 가장 내밀한 작전들을 처음으로 공개한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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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21붉은군대 소년병; 포로·탈출 후 오데사에서 부랑자 생활
1921–1932우크라이나 GPU·OGPU 정보장교로 두각을 드러냄
1933–1938OGPU·NKVD 외국부(INO) — 베를린 OUN 내부 침투, 해외 암약
1938코노발레츠 암살(로테르담); NKVD 외국정보국장 대행(11월–12월)
1939–1941외국정보부국장; '오리 작전' — 트로츠키 암살 지휘
1941–1946NKVD 제4국장 — 적 후방 파르티잔·사보타주 전쟁; 원자력 첩보 그룹 'S' 지휘
1946–1953전후 대NATO 사보타주 작전; MVD 제1총국 부국장 (1953)
1953–1968베리야 '공범'으로 체포, 15년형 — 블라디미르 교도소에서 복역
1968–1996석방 후 필명으로 소설 집필; 1992년 완전 복권, 회고록 『특수임무』 출간
1984년 12월 베이징, 15년 만의 최고위 소련 방문에 중국은 그를 '라오펑유'(옛 친구)라 불렀다. 9일간의 방문은 3건의 경제협정과 중소관계 정상화의 첫걸음으로 이어졌다.
14세 선반공에서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까지 오른 경제 관료로, 1950년 스탈린의 지시로 중국에 파견되어 156개 중공업 프로젝트의 소련 기술 지원을 총괄하며 중소 경제협력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80년부터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고르바초프 4대 서기장을 보좌하며 소련 경제를 실무에서 지휘했고, 1984년 15년 만의 최고위 소련 대표로 베이징을 방문해 관계 정상화의 물꼬를 텄다.
중성자원을 제거한 뒤에도 이온화실은 계속 신호를 냈다. 우주선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모스크바 지하철 디나모 역 50m 지하로 실험을 옮긴 끝에, 페트르자크와 플료로프는 우라늄이 스스로 갈라진다는 것을 증명했다.
소련의 핵물리학자. 1940년 게오르기 플료로프와 함께 우라늄-235의 자발핵분열을 발견하여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과학적 토대를 놓았다. 전쟁 중 군복무를 거쳐 1942년 카잔으로 복귀, 쿠르차토프의 지휘 아래 중성자원 측정법(동반입자법)을 개발하고 플루토늄 신속검출 기술을 확립했다. 1947년 흘로핀 라듐연구소에 중성자물리·핵분열 연구실을 설립해 40년 가까이 이끌었으며, 1949년 렌소베트 기술원에 핵물리학과를 창설해 소련 핵산업 인력을 양성했다.
1954년, 예고로프는 로켓 설계자 세르게이 코롤료프와 함께 수상함과 잠수함에 미사일 무장을 배치하는 원칙을 공동 개발했다 — 소련 해군을 미사일-핵 해양함대로 탈바꿈시킨 기술적 전환점이었다.
소련의 조선 기술관료이자 군사·국가 지도자로, 1976년부터 1984년까지 소련 조선공업부 장관을 지내며 소련 해군의 대양함대화를 완성한 인물이다. 1930년 해군 공병학교 졸업 후 연구기관에서 선박의 항해성능을 연구했고, 1939년 조선공업인민위원회 제13총국장으로 발탁되어 전시에는 설계국 재배치와 함정 재무장을 진두지휘했다. 1954년 세르게이 코롤료프와 수상함·잠수함 미사일 탑재 원칙을 공동 수립했으며, 첫 원자력 쇄빙선 '레닌'과 중항공순양함 개발을 주관했다. 장관 재임 8년 동안 전략원잠 941형, 원자력 미사일순양함 1144형, 항공순양함 '바쿠' 등을 진수시켜 소련의 해군 전략적 균형을 확보했고, 상선톤수도 세계 3위로 끌어올렸다.
1942년 6월 3일, 최고회의 상임간부회 포고령: '생산 조직과 신형 포병·소화기 무기의 숙달, 공장의 능숙한 지휘에서 탁월한 공로.' 34세의 노비코프는 반니코프, 우스티노프와 함께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이제프스크 군수공장 기술자로 출발해 1942년 34세의 나이로 사회주의노동영웅이 된 방위산업 테크노크라트. 레닌그라드 소브나르호스 의장과 러시아공화국 고스플란 의장을 거쳐 1960년 흐루쇼프에 의해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에 임명되었으나 소브나르호스 개혁으로 분권화된 경제 속에서 2년 만에 물러났고, 이후 브레즈네프 아래서 15년간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남아 군수·경제 분야에서 조용히 영향력을 행사한 내구력 있는 실무 관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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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1939이제프스크 방위공장: 기술자·설계사·주임기술자·기사장
1939–1941제74공장(무장인민위원부) 소장, 이제프스크
1941–1948소련 무장인민부위원·무장차관; 공병포병소장 (1944)
1948–1957레이더위원회·방위공업부·일반기계제조부 지도부
1957–1960레닌그라드 소브나르호스 의장; 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제1부의장·고스플란 의장
1949년, 저명한 과학자 리나 시테른을 심문하며 "이 늙은 창녀야!"라고 고함치자, 시테른은 "장관께서 학자에게 말하는 태도가 그렇습니까"라고 답했다.
스탈린 시대 말기 국가보안을 총괄한 실력자로, 14세에 적군 입대 후 OGPU·굴라그를 거쳐 대숙청에서 살아남았고, 전시 방첩 기구 스메르시 총국장으로 발탁되어 스탈린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다. 종전 후 MGB 장관으로서 레닌그라드 사건과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 탄압을 설계·집행하며 베리야를 견제하는 스탈린의 핵심 카드로 군림했다. 그러나 1951년 부하의 밀고로 '의사들 음모' 은폐 혐의로 체포되어 자신이 구축한 체제에 삼켜졌고, 스탈린 사후 레닌그라드 사건 조작 혐의로 재판받아 1954년 총살되었다.
1959년 7월 13일, 미국 『타임』지는 코즐로프의 사진을 표지에 싣고 「흐루쇼프의 후계자?」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로부터 4년 뒤 뇌졸중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랴잔 농가 출신의 금속공학자로, 이젭스크 군수공업 현장에서 올라와 전후 레닌그라드 당을 장악했다. 1957년 반당그룹 사건에서 흐루쇼프를 결정적으로 지지한 뒤 중앙위 서기 겸 상임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1960년부터는 흐루쇼프의 공인된 후계자로서 서기국과 상임위원회를 사실상 지휘했다. 당·군·보안기관의 인사권을 독점할 정도로 권력이 집중되었으나, 1963년 4월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흐루쇼프의 후계 구도 전체가 붕괴했고, 그의 빈자리는 브레즈네프가 차지했다.
가가린 귀환 후 흐루쇼프 앞에서 코롤료프가 이사예프를 소개했다. "이분이 바로 우리 일을 죄다 제동 거는 사람입니다." 흐루쇼프는 농담을 알아듣고 웃으며 거듭 감사를 표했다 — 우주선을 지구로 되돌리는 제동엔진을 만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광산기술자로 출발해 로켓 비행기 BI-1의 엔진 개발을 계기로 액체추진 로켓에 뛰어든 설계자. 1949년 폐쇄식 사이클(단계식 연소)을 세계 최초로 제안하고, 얇은 구리 연소실과 평판 분사기를 도입해 독일 V-2 계열의 복잡한 배관 설계에서 소련 로켓공학을 독립시켰다. 그의 제동엔진 TDU는 가가린을 포함한 모든 보스토크·보스호트 우주비행사를 지구로 귀환시켰고, KTDU 기동엔진 계열은 소유스·살류트·미르와 루나·베네라·마르스 탐사선 전체를 움직였다. R-11(스커드) 미사일 엔진과 SLBM 추진체계 설계에서도 결정적 기여를 했으며, 그가 세운 KB KhimMash는 오늘날까지 러시아 우주선 엔진의 핵심 설계국으로 남아 있다.
소련 라디오·전자공업을 20년간 창설·지휘하며 우주 비행과 미사일 방어의 전자적 기반을 구축한 군수 행정가
1961년 6월 17일, 가가린의 우주 비행을 가능케 한 전자 시스템의 공로로 비공개 포고령에 의해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1954년부터 사망까지 20년간 소련 라디오·전자공업을 지휘한 군수 행정가로, 부처 명칭이 세 차례 바뀌는 동안 단 한 번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로스토프나도누 전기기술자로 출발해 모스크바 동력대학 야간부를 졸업하고, 조선공업 연구소에서 해군 레이더와 유도무기를 개발하며 스탈린상을 두 차례 수상했다. 1954년 신설 무선기술공업부 장관에 취임한 뒤 그가 구축한 전자산업 체계는 유인 우주 비행의 통신·유도 장비와 세계 최초의 작전 배치형 탄도미사일 방어 체계인 모스크바 A-35의 핵심 기반이 되었다. 가가린 비행의 전자 장비 공로로 1961년 사회주의 노동영웅을 받았으며, 7개의 레닌 훈장을 받은 몇 안 되는 인물이다.
1957년 6월 반당 그룹과의 대결에서 키리첸코는 논거를 고르는 수고도 없이 모든 비난을 거칠게 쳐내며 흐루쇼프 편에 섰다. 흐루쇼프 없이는 자신에게도 미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당 역사상 첫 우크라이나인 제1서기로, 1957년 반당 그룹에 맞서 흐루쇼프를 결사적으로 지지하며 모스크바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었다. 1958년 사실상 당 제2서기로서 서기국을 주재하고 인사권을 장악했으나, 거친 성격과 독자적 행보로 동료들의 반감을 사고 흐루쇼프의 신임마저 잃었다. 1960년 실각 후 공장장으로 전락했다가 연금 생활자로 완전히 밀려났다.
1952년 10월, 19차 당대회 직후 체르노우소프는 중앙위 조직국원과 러시아 공화국 총리직에서 동시에 해임되었다. 그의 다음 직장은 모스크바 탐조등 공장이었다.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볼가 강변의 시즈란에서 태어나, 콤소몰 활동가로 출발해 모스크바 동력공학원을 졸업한 기술관료형 당료였다. 1939년부터 1948년까지 모스크바 주당위 제2서기로 알렉산드르 셰르바코프를 보좌했고, 1949년 미하일 로디오노프가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숙청된 직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에 임명되어 스탈린 말년의 러시아 정부를 이끌었다. 1952년 19차 당대회 직후 모든 당직에서 해임되어 모스크바 탐조등 공장장으로 좌천되었고, 스탈린 사후에야 자동차공업부 차관으로 복귀해 고스플란과 코메콘에서 조용히 경력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