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제16차 당대회 연단에서 그는 스탈린의 강제 집단화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연설을 마치자 강당은 침묵—박수는 터지지 않았다.
그루지야 출신 볼셰비키로, 코민테른 시절 중국 혁명에 깊이 개입했다. 1927년 8·7 긴급회의를 주재해 천두슈를 경질하고 마오쩌둥을 정치국으로 끌어올렸으며, 광저우 봉기를 승인했다. 중국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근거로 자본주의 단계를 건너뛸 수 있다는 이론을 폈다. 1930년 시르초프와 함께 스탈린의 강제 집단화에 맞선 첫 당내 반대파를 결성했다가 좌천되었고, 1935년 체포 위협 속에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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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페트로그라드 군사조직에서 활동, 쿠타이시 당비서
1918–20트빌리시·바쿠 위원회, 아제르바이잔 당 중앙위 간부
1921–22크론슈타트 반란 진압 참여, 페트로그라드 비보르크구 당 조직자
1922–24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1925–29코민테른 청년인터내셔널 서기, 1927년 중국 대표로 8·7 긴급회의 및 광저우 봉기 주도
7월 26일 슈누레와의 만찬에서 '대화가 너무 멀리 나아가기 시작한다고 느꼈다'고 일기에 적었을 때까지, 이 비밀 통로의 주인공은 모스크바의 아무 지시도 받지 못했다.
귀족 집안의 문인으로 출발해 소련 외교관이 된 인물.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언론·외교를 오갔고, 1928년에는 소련 최초로 아랍 국가인 예멘과 우호조약을 맺었다. 그를 역사에 남긴 것은 1939년 봄 베를린 대리대사가 되어 바이츠제커·슈누레·리벤트로프와 독소 접근의 신호를 주고받은 일이며, 7월 29일 몰로토프의 지시를 받고 소련의 태도 변화를 전한 뒤 조약 직전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1940년 체포된 채 수용소에서 죽었다.
콜론타이는 1927년 멕시코에서 일기에 적었다: 「간부라고는 가이키스와 나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암호를 직접 친다. 소름 끼치도록 고립되어 있다.」
1898년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유대계 폴란드인으로, 청년기에는 폴란드 사회당 좌파와 사회민주당에서 활동하다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치체린의 비서, 멕시코 주재 일등서기관, 이스탄불 총영사를 거쳐 1936년 스페인 공화국 대사관 고문으로 마드리드에 파견됐고, 1937년 2월 로젠베르크의 후임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석 달 뒤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도착 즉시 체포되었고, 1937년 8월 21일 「조국에 대한 배신」 혐의로 총살된 뒤 1955년 복권되었다. 가이키스의 처형으로 소련은 종전까지 스페인에 대사를 다시 두지 않았고, 공화국 수도에는 사실상 빈 대사관만 남았다.
1975년 방광암으로 사망해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라는 추도사를 받으며 국장으로 묻혔으나, 사인방 재판 직전인 1980년 10월 사후 제명되고 바바오산에서 유해가 옮겨졌다.
산둥의 지주 집안 출신으로 상하이 지하활동을 거쳐 1933년 모스크바에서 왕밍의 오른팔로 소련 숙청을 배웠다. 1937년 옌안에 돌아와 마오 편에 서서 사회부장으로 정풍운동의 「구조 운동」을 지휘해 수천 명을 특무로 몰았다. 건국 후 한동안 물러났다가 1960년대 중소 논쟁과 문화대혁명에서 중앙문혁소조 고문으로 복귀해 류사오치·허룽 등 원로들에 대한 조사와 박해를 주도했다. 1975년 암으로 사망했고 1980년 당적을 박탈당했다.
1946년 1월 11일 제헌의회 회의에서 그는 20인 위임검증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첫 회의를 폐회했고, 같은 날 정오 두 번째 회의에서 의회는 알바니아를 인민공화국으로 선포했다.
알바니아 공산주의 운동가·외교관. 이집트 파이윰에서 민족운동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베이루트와 하버드를 거쳐 1923~24년 뉴욕 영사, 모스크바 코민테른 학교에서 교직을 맡았다. 1938년 알바니아로 파견되어 1941년 창당에 참여했고, 1943년 민족해방총평의회 서기, 1945년 제헌의회 서기를 지냈다. 1946~47년 모스크바 대사, 외무부 차관, 1954~55년 소피아 대사를 거쳐 당 통제·감사위원장을 맡았으나, 1960년 수정주의 공격 속에 숙청되어 8년 억류와 10년 부렐 형무소 생활 끝에 1980년 석방되었고 1984년 사망했다.
에드워드 스테티니우스는 대기업 경영과 국가 동원 행정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 말 미국 외교의 중심에 선 정치가였다. 무기대여 원조를 관리하며 동맹국의 전쟁 수행을 뒷받침했고, 얄타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함께 전후 유럽과 국제기구의 틀을 협의했다. 그는 얄타 의정서에 미국 대표로 서명한 뒤 유엔 창설회의를 이끌었지만, 소련과의 긴장을 유엔을 통한 협력으로 풀려 한 구상은 트루먼 행정부와 충돌했다. 이 경력은 기업과 국가의 전시 동원이 전후 다자주의로 이어지는 동시에 냉전의 문턱에서 제약받은 과정을 보여 준다.
1958년 1월 27일 워싱턴에서 자루빈은 윌리엄 레이시와 함께 문서에 서명했다. 소련과 미국이 영화, 음악, 과학, 스포츠 교류를 정부 간 협정으로 제도화한 것은 양국 관계 사상 처음이었다.
소련 외교관으로, 1944년부터 1958년까지 캐나다, 영국, 미국 대사를 차례로 역임하며 초기 냉전기 소련 외교의 핵심적인 대서양 창구였다. 1958년 1월 27일 윌리엄 레이시와 함께 「미소 문화·기술·교육 교류 협정」(레이시-자루빈 협정)에 서명하여 양국 간 최초의 정부 간 문화교류 틀을 수립했으며, 이 협정은 소련 붕괴 시까지 연장되며 볼쇼이 발레단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등 냉전 문화외교의 상징적 장면을 만들어냈다. 1952년부터 1958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지냈으며, 말년에는 외무부 차관으로 임명되어 모스크바로 복귀한 지 10개월 만에 사망했다.
1931년 1월, 미프는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4차 전원회의에 코민테른 대표로 직접 참석해 왕밍과 그의 그룹을 정치국으로 진입시키며 '28인의 볼셰비키'의 약진을 현장에서 주도했다.
10대 후반에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내전에 참전한 뒤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수학했다. 모스크바 중산대학(중국 노동자 공산대학)의 부총장을 거쳐 1927년 26세의 나이로 총장에 올랐고, 왕밍을 비롯한 '28인의 볼셰비키'로 불리는 중국 유학생 집단을 직접 길러내 초기 중국공산당 내 친소련·정통파 세력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28년부터 1935년까지 코민테른 동양사무국 부소장으로서 중국 혁명 노선을 조정했으며, 1935년부터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대중국 정치보좌관을 지냈다. 중국 혁명과 식민지 문제에 관한 다수의 저작을 남긴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중국학의 개척자였다.
1936년 겨울, 부상과 병고 속에 매령에서 포위된 천이는 죽음을 각오한 시 세 수를 옷 속에 숨겨 두었다. 「이 몸은 황천으로 가 옛 부하를 모으리니, 십만 깃발로 염라대왕을 베리라.」
쓰촨 출신으로 프랑스 근공검학 뒤 입당했고 난창 봉기 잔여 부대를 주더와 함께 징강산으로 이끌었다. 대장정에 참여하지 않고 남방에서 3년 유격전을 버텼으며 1941년 완난 사변 뒤 신4군 대리군장이 되었다. 국공내전에서 화둥 야전군(제3야전군)을 지휘해 회하이 전역에 참전하고 상하이를 점령해 초대 시장이 되었다. 1955년 원수, 1958년 외교부장이 되어 반둥 노선의 아시아·아프리카 외교를 이끌었다. 문화대혁명에서 「2월 역류」로 비판받았고 1972년 암으로 사망했으며 마오가 장례에 참석했다.
루스벨트는 각료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참을 수 없는 소련 대사 우만스키가 완고하고 비협조적이며 금 보유고로 결제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려 들지 않자, 화가 난 루스벨트는 그를 '더러운 거짓말쟁이 꼬마'라고 불렀다."
콘스탄틴 우만스키는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주미 소련 대사를 지낸 외교관으로, 당시 워싱턴 최연소 대사였다. TASS 특파원과 외무인민위원부 언론정보국장을 거치며 외신 검열을 총괄했고, 언론인 경력 속에 NKVD 정보 활동이 섞여 있었다는 정황이 여러 사료에서 제기된다. 주미 대사 시절 군수 물자 협상에서의 고압적 태도는 루스벨트로 하여금 각료회의에서 그를 '더러운 거짓말쟁이 꼬마'라고 부르게 할 정도였다. 1943년 주멕시코 대사로 부임해 3개월 만에 스페인어를 익혀 가장 인기 있는 외교관이 되었으나, 1945년 코스타리카 부임길 항공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스탈린이 휴양지 식탁에 오른 썩은 바나나를 보고 격노하자, 모든 책임은 대외무역부 장관인 멘시코프에게 돌아갔다. 하루 전 '엄중 경고'를 받은 바로 다음 날, 그는 '직무를 감당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전격 해임되었다.
소련의 무역 관료이자 외교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회계 강습을 거친 뒤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했고, 모스크바 플레하노프 국민경제연구소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런던의 소련 무역 협동조합 아르코스(ARCOS) 책임자를 거쳐 1949년 소련 대외무역부 장관에 올랐으나, 1951년 멕시코산 바나나 품질 문제로 스탈린의 노여움을 사 해임되었다. 스탈린 사후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주인도 대사(1953~1957), 주미 대사(1958~1962)를 역임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 직전까지 워싱턴에서 미소 관계를 관리했다. 이후 러시아공화국(RSFSR) 외무장관으로 6년간 재직하며 소련 외교의 연방 차원과 공화국 차원을 모두 경험한 드문 이력을 남겼다.
1943년 7월 25일, 치아노는 장인 무솔리니의 축출을 뜻하는 그란디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갈레아초 치아노는 무솔리니의 사위이자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핵심 외교관으로, 정권의 팽창과 독일 의존을 추진하면서도 전쟁의 파국이 다가오자 그 노선에서 이탈했다. 그는 에티오피아 전쟁과 알바니아 침공, 그리스 공격을 지지했으며 외무장관 재임 중 외교 기록과 일기를 남겼다. 1943년 7월 파시스트 대평의회에서 디노 그란디 결의안에 찬성해 무솔리니 축출에 가담했지만, 자신의 특권적 지위가 보존될 것이라는 계산은 빗나갔다. 독일로 달아났다가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에 넘겨진 그는 베로나 재판 뒤 처형되었고, 그의 일기는 파시즘 내부의 책임과 붕괴를 보여 주는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알제 히스는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소볼레프와 파스볼스키에 대해 “그들이야말로 헌장의 형태를 만든 진짜 책임자들이었다”고 증언했다.
국제법 전문가로서,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미국 측 리오 파스볼스키와 함께 유엔헌장의 구체적 문안을 책임진 공동 기초자였다. 전후 유엔 사무차장(안전보장·정치 담당)으로 국제기구의 제도화에 참여했고, 1955년부터 1960년까지 소련의 유엔 상임대표로서 헝가리 봉기 직후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의 입장을 대변하는 등 냉전기 소련 외교의 최전선에 섰다. 이후 생애 마지막까지 외무차관으로 재직하며 소련 외교의 실무를 지휘했다.
그는 모스크바로 보내는 4,004단어의 전문에서 이렇게 썼다: '그러한 전개는 전 세계에서 미국 경제적 지위의 심각한 강화를 의미하며, 미국의 세계 지배로 가는 하나의 단계가 될 것이다.'
소련 외교관이자 미국 주재 대사(1946–1947). 1946년 9월 조지 케넌의 '장전보(長電報)'에 대응하여 4,004단어의 '노비코프 전보'를 작성해 모스크바로 송부했다. 이 전문에서 그는 미국의 전후 외교정책이 독점자본의 세계 패권 추구이며 소련이 그 주요 장애물로 간주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문은 몰로토프의 지시로 작성되었으며 상당 부분 그의 공동 집필이었다. 냉전의 기초 문서로 평가받는 이 전보는 1990년 글라스노스트 시기까지 비밀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는 1943~1944년 카이로 주재 대사로 근무하며 시리아·레바논과의 외교 관계 수립에 기여했으나, 워싱턴 대사직에서 1947년 돌연 해임된 후 외교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흐루쇼프의 마음을 읽고 해법을 제시한 인물
「흐루쇼프에게 중요한 것은 '나는 쿠바를 구했다, 나는 침공을 막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 ExComm 회의에서.
미국 외교관으로, 1957년부터 1962년까지 모스크바 주재 대사를 역임하며 흐루쇼프와 독자적인 신뢰 관계를 구축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의 국가안전보장회의 집행위원회(ExComm)에서, 10월 27일 도착한 두 통의 흐루쇼프 서한 중 강경한 두 번째 서한을 무시하고 26일의 첫 번째 서한에 응답하라고 권고했으며, 이 전략이 위기 해소의 핵심이 되었다. 이후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다시 모스크바 대사를 지내며 SALT 협상과 핵비확산 정책 수립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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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미국 외교관으로 임용
1941주소 미국대사관 2등서기관, 독소전 발발 후 모스크바 잔류
1952–1957주오스트리아 고등판무관·대사, 오스트리아 국가조약 및 트리에스테 협상
1957–1962주소 미국 대사 (1차), 캠프 데이비드·빈 정상회담, U-2 사건, 부엌 논쟁
「포츠담 이후, 소련이 세계 공동체의 합리적이고 협력적인 구성원이 되도록 유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회고록 『역사의 증인』에서.
미국 외교관이자 소련 전문가로, 1934년 주소 미국대사관 개설부터 냉전기까지 미소관계의 거의 모든 중대한 장면에 입회했다. 루스벨트와 트루먼의 통역으로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에 배석했으며, 1947년 마셜 국무장관의 요청으로 케넌과 클레이턴의 정책 메모를 하버드 졸업식 연설문으로 작성해 마셜 플랜의 공개적 출발을 이끌었다. 1953년 주소 대사로 임명되었으나 매카시의 공격을 받으며 인준 청문회를 겪었고, 이후 프랑스 대사까지 지내며 '현자들'로 불린 초당파 외교 고문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코민포름 창립 회의의 이탈리아 대표로, 스탈린의 전화선을 목격한 공산주의자에서 반공 비판자로 전향한 인물
“스탈린은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으면서 회의의 절대적 지배자였다. 토론 중에 우리가 이 사실을 의식하게 된 것은 슈클라르스카 포렝바 성과 크렘린 사이에 직통 전화선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1966년 회고록)
이탈리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의사로, 전후 연립정부에서 외무차관을 지냈고 폴란드 대사를 역임했다. 1947년 코민포름을 창립한 슈클라르스카 포렝바 회의에 이탈리아 대표로 참석했으며, 1966년 회고록은 크렘린으로 직통된 스탈린의 전화선과 프랑스·이탈리아 공산당에 대한 즈다노프의 사전 계획된 공격을 포함한 회의의 가장 상세한 목격 증언이 되었다.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계기로 이탈리아 공산당과 결별했고, 이후 반공 비판자로 활동하며 『사회주의 통신』을 창간했다.
처칠이 구세프에 대해 묻자, 주소 영국대사 클라크 커는 이렇게 답했다: '무례하고, 경험 없고, 교양 없는 자입니다.'
표도르 구세프는 스탈린 시대 외교관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의 대영국 대사(1943~1946)를 지내며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에 모두 참가했다. 레닌그라드 법학을 전공하고 1935년 외무인민위원부에 입부한 그는, 캐나다 공사(1942~1943)를 거쳐 전시 동맹 외교의 핵심 실무자로 부상했다. 영국 측은 그를 '무뚝뚝하고 경험 없는 인물'로 평가했지만,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전쟁 말기 연합국과의 협상에서 요구를 밀어붙일 강경한 외교관을 원했다. 종전 후 외무차관(1946~1952)을 지내며 냉전 초기 외교 정책에 관여했고, 1956~1962년 스웨덴 대사를 끝으로 은퇴했다.
1951년 6월 23일 유엔 라디오 방송에서 말리크는 말했다. "교전국들이 38도선에서 상호 철군하는 휴전과 정전을 위한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한국의 평화를 위해 치르기에 너무 큰 대가는 아닐 것이다."
야코프 말리크는 두 차례 유엔 상임대표(1948~1952, 1967~1976)를 지낸 소련의 대표적 외교관이다. 하리코프 주 농민 가정 출신으로 경제학을 전공하고 당 간부를 거쳐 1937년 외무인민위원부에 입부했다. 1951년 6월 유엔 라디오 방송에서 한국전쟁 휴전과 38도선 상호 철군을 제안해 정전 협상의 물꼬를 텄고, 1968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안보리에서 정당화했다. 일본·영국 대사와 외무차관을 두루 거친 말리크의 유엔 외교는 스탈린 말기부터 브레즈네프 시대까지 소련의 국제적 입장을 관철하는 핵심 통로였다.
1950년 6월 25일, 그는 한국의 상황을 보고하고 결의안 표결을 위한 안전보장이사회 절차를 이끌었다.
어니스트 그로스는 국제법률가이자 미국 외교관으로, 법률 자문과 전후 점령지 행정을 거쳐 유엔에서 미국의 정책을 대표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미국 대표단을 이끌며 안전보장이사회가 결의 82를 채택하도록 절차와 표결을 조율했다. 이 과정은 소련 대표의 불참이라는 조건을 활용한 미국 외교의 성과였지만, 유엔의 집단안보가 강대국 경쟁 속에서 작동한 방식이라는 긴장도 남겼다. 이후 그는 국제변호사로서 티베트 문제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다뤘다.
북조선 소련군정의 실질적 수장, 김일성의 무력통일 구상을 스탈린에게 전달해 개전을 이끌어낸 중개자
안드레이 란코프는 시티코프가 '일본 식민정치인들을 제외한 어떤 외국인보다도 한반도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1945~50년 북조선 국가의 실질적 설계자'라고 평가했다.
벨라루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레닌그라드 콤소몰에서 경력을 쌓고 레닌그라드 주당 제2서기(1938~1945)로 부상한 소련의 군사정치 지도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여러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복무하고 1944년 상장 계급을 받았으며, 1945년 극동전선군 정치위원으로 북조선에 진입했다. 1945~1948년 북조선 소련군정의 실질적 수장으로서 김일성을 집권시키고 토지개혁을 설계했으며, 1948~1950년 초대 주조선 대사로 김일성의 남침 구상을 스탈린에게 전달해 개전 승인을 이끌어냈다. 전황 역전 후 정보 실패로 1950년 해임·강등되었고, 흐루쇼프 시기 노브고로드·프리모리예 당서기와 주헝가리 대사를 지내고 1964년 사망했다.
스탈린은 1948년 3월 27일 서한에서 이렇게 썼다: '영국 스파이 벨레비트가 여전히 유고슬라비아 외무부 제1차관으로 남아 있는 이유를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유고슬라비아의 변호사 출신 파르티잔 장군이자 외교관으로, 전시에는 연합군 군사 임무단과의 접촉 창구를 맡았고 전후에는 외무차관으로서 서방과 협상했다. 1948년 3월 스탈린은 그를 '영국 스파이'라고 직접 지목하며 티토와의 솔직한 외교 서신 교환을 거부했고, 이는 티토-스탈린 결별의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사임 후 복권되어 로마·런던 주재 대사와 유엔 유럽경제위원회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냉전기 유고슬라비아의 독자 노선을 외교적으로 구현한 인물이다.
1958년 당 중앙위 정보부장 푸시킨이 흐루쇼프에게 서베를린 '자유도시' 구상의 위험을 경고했다. 흐루쇼프는 "말도 안 돼! 군대를 들여보내도 전쟁은 안 난다"며 그를 끊고 정보부를 해체했다.
전시 슬로바키아, 전후 헝가리, 동독, 소련의 동유럽 위성국 형성기 세 수도에 차례로 대사를 지낸 경력 외교관이다. 1945년 헝가리 연합국 통제위원회 정치고문으로서 스탈린식 체제 이식의 주요 창구였으며, 1949–1952년과 1954–1958년 두 차례 동독 주재 대사로 재임하며 동독 국가 건설을 소련 측에서 감독했다. 1958년 신설된 당 중앙위 대외정보부장으로서 흐루쇼프에게 국제정세를 직접 브리핑했으나, 서베를린 '자유도시' 구상이 무력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가 해임되었다. 1959년 외무차관으로 복귀해 1961–1962년 라오스 중립화 제네바 회의 소련 대표단을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