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8월 26일 팽덕회와 좌권이 이 작전을 「백단대전」으로 명명했으나, 그 개전은 뒤에 모택동과의 노선 갈등 속에 팽덕회를 겨눈 죄목으로 되살아났다.
산시 출신으로 1936년 당의 지시로 국민당 감옥에서 「전향서」에 서명하고 출옥한 61명 중 한 사람이었고, 이 일은 문화대혁명에서 「61인 반도 집단」 사건으로 되살아나 그를 12년 감금으로 몰았다. 건국 후 초대 재정부장으로 세제와 통화 통일을 맡았고 1953년 「신세제」 논란으로 마오의 비판을 받았다. 1979년 복귀해 부총리와 중앙고문위원회 부주임으로 「팔대 원로」의 한 사람이 되어 1987년 후야오방 해임 회의를 주재했다. 2007년 98세로 사망했으며 아들이 보시라이다.
1963년 해임을 둘러싼 경위는 증언마다 엇갈린다. 측근들은 그가 술기운에 흐루쇼프에게 전화해 욕설을 들었다고 하고, 경호원의 증언은 다차 산책길의 대면 충돌에서 그가 모자를 벗어 던졌다고 전한다.
볼로그다현 로파리카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7년제 학교를 마치고 1923~1929년 회계원으로, 1929~1930년 클럽 관리자와 촌소비에트 의장으로 일했으며, 1936년 레닌그라드 재정경제연구소를 졸업하고 1937년 당에 입당했다. 1940년부터 고스방크 중앙기구 국장들을 맡아 1953년 소련 재무차관, 1958년 국가은행 총재가 되었고, 1959년 은행체계 개편과 1961년 10:1 화폐개혁을 이끌었다. 1963년 흐루쇼프와의 갈등 끝에 총재직에서 물러났으나 탄압은 받지 않았고, 이후 러시아공화국 재무부에서 국가수입·산업금융 국장과 콜레기움 위원으로 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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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1936회계원·클럽 관리자·촌소비에트 의장을 거쳐 레닌그라드 재정경제연구소 졸업
1936–1939레닌그라드 주·시 공동은행 선임검사관, 부행장, 행장
1939–1940레닌그라드 시 재정국장
1940–1953고스방크 중앙기구 각 국장, 잡지 《화폐와 신용》 편집장, 이사, 부총재
1950–1955소련 대외무역은행(브네슈토르그방크) 이사장
1953–1958소련 재무차관, 재무부 콜레기움 위원
1958–1963소련 국가은행 총재(1959년 은행체계 개편, 1961년 10:1 화폐개혁)
중앙계획경제를 굳게 믿은 정통파 공산주의자로 시장화를 막았고, 1989년 천안문 시위에 대한 군사 진압을 열렬히 주장했다.
후베이 목수 출신으로 제4방면군의 정치위원이었고 서로군 궤멸 뒤 살아남았다. 항일전쟁기 후베이의 신4군 제5사단을 세웠고 국공내전 초기 중원 돌파를 이끌었다. 1954년부터 재정부장으로 22년간 경제 운영을 맡았으며 문화대혁명에서도 저우언라이 곁에서 살아남았다. 1976년 4인방 체포에 참여했고 화궈펑의 「양개범시」와 덩샤오핑 사이에서 천윈과 함께 계획경제 우선을 주장했다. 1983~1988년 국가주석을 지냈으며 1989년 강경 진압을 지지했다.
스탈린이 직접 주재한 자리에서, 측근들이 자샤트코의 음주벽을 문제 삼자 스탈린은 그를 불러 보드카 세 잔을 권했다. 자샤트코는 두 잔을 단숨에 비우고 세 번째는 정중히 사양했다. 스탈린은 파이프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자샤트코는 분수를 안다!" 임명은 결정되었다.
소련의 탄광 기술자이자 경제 관료. 돈바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광산기계공에서 시작해 38세에 소련 석탄공업장관이 되었고, 전후 돈바스 탄광 재건을 진두지휘했다. 흐루쇼프 시기에는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과학경제위원회 의장으로 발탁되어 고스플란 체계와 나란히 중앙계획을 조율하는 자리에 올랐다. 1957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고, 다섯 차례 레닌 훈장을 받은 중공업 행정의 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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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1935루간스크·고를롭카·노보샤흐틴스크에서 견습공과 기계공으로 일하며 돈바스 탄광에 입문, 도네츠크 광산대학 졸업
1935–193910bis 탄광에서 기사장·주임기사·광장으로 승진하며 현장 경영 두각
1939–1943석탄공업인민위원부에서 '스탈린우골'·'몰로토프우골'·'툴라우골' 콤비나트 장으로 전시 탄광 운영
1943–1948석탄공업 부인민위원으로 돈바스 탄광 복구 총괄, 5년 만에 전쟁 전 생산량 회복 달성
1948–1955소련 석탄공업장관 ― 전후 석탄 산업 전반을 지휘하며 거대 신규 탄광 건설과 기계화 추진
1955–1957체랴빈스크우골 콤비나트 장, 우크라이나 석탄공업장관으로 복귀해 생산 반등 주도
1957–1958국가계획위원회 연료공업 부문장(장관급) 겸 부의장
1958–1962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과학경제위원회 의장 ― 중앙계획의 최고위 조정자
1935년 7월 1일, 크리보노스의 기관차 편대가 화물열차 속도를 종전의 시속 30킬로미터에서 53킬로미터로 끌어올렸다.
표트르 크리보노스는 기관사로서 철도의 운송 능력을 끌어올린 소련의 생산성 혁신가였다. 그는 1935년 7월 화물열차의 기술 속도를 크게 높이는 운전법을 선보여 스타하노프보다 앞서 철도 부문 노동 영웅의 전형을 만들었고, 이를 따르는 ‘크리보노스파’가 확산됐다. 전쟁 때는 철도 수송과 파괴된 철도망 복구를 지휘했으며, 전후에는 교육을 보완해 장기간 철도를 운영했다.
1970년 3월 4일, 소련 유대인 기자회견의 주인공으로 나서 소련의 민족 정책을 옹호하고 이스라엘을 규탄했다. 유대인으로서 브레즈네프 체제의 핵심부에서 23년간 부총리를 지낸 그에게 주어진 모순된 순간이었다.
소련 최장수 부총리 중 한 명으로, 마그니토고르스크·아조프스탈·자포로지스탈·인도 빌라이 제철소 등 전략적 공업 프로젝트의 건설을 지휘한 기술관료다. 1962년 흐루쇼프에 의해 부총리로 발탁된 후 브레즈네프 시대 내내 경제 부총리로 남아 고스플란·최고국민경제회의·고스스나프를 차례로 이끌며 소련 계획경제의 물자공급 체계를 총괄했다. 스탈린상 2회 수상자이며, 유대인 출신으로 당 중앙위원과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내며 소비에트 체제 내 기술 엘리트의 전형을 보여준 인물이다.
1957년 흐루쇼프의 소브나르호스 개혁으로 수십 명의 연방 차관들이 지방으로 밀려났다. 마르티노프도 예외는 아니었다. 타슈켄트로 보내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원하던 발령은 아니었지만, 일이 있는 곳으로 간다.'
소련 경제 관료로, 제2차 세계대전 중 탄약 부인민위원으로 군수 공급을 총괄했고, 1965년부터 20년간 국가물자공급위원회(고스스나브)에서 근무하며 소련 계획경제의 물자 유통을 실제로 작동시킨 인물이다.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툴라 병기공장장에서 시작해 각료회의 부의장 겸 고스스나브 의장(1976~1985)까지 오르며 50년간 소련 산업의 물적 토대를 떠받친 실무형 기술관료였다.
1941년 10월 자원입대한 화학자 프로코피예프는 해군 소방국에서 적의 소이무기에 대응하는 화학방어 및 독가스 제독 교재를 직접 집필해 전선의 소방대원들을 훈련시켰다.
유기화학자로서 모스크바대학에 천연화합물화학과를 창설하고 12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한 핵산화학의 선구자였으며, 동시에 1966년 신설된 연방 교육부의 초대 장관으로서 1984년까지 18년간 소련 교육을 총괄한 국가행정가다. 그의 재임기는 전면 중등교육으로의 이행기로, 차별화된 과학교육 도입과 교육과정 개혁을 진두지휘했으며, 1971년부터 1991년까지 당 중앙위원을 지냈다. 모스크바대학 당위원회 서기(1948~1952)를 거쳐 고등·중등전문교육 차관으로 행정 경력을 쌓았고, 장관 퇴임 후에도 모스크바대학 교수로 강단에 서며 소련 과학계와 교육계를 잇는 독특한 경력을 완성했다.
1969년 고스방크 총재에 오른 직후 부하를 불러 말했다: "자, 그동안 자네를 충분히 굴렸으니, 이제 은행을 굴려 보세."
니주니노브고로드 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기업 부기계원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1929년 은행에 들어가 스베르들롭스크주 고스방크 지점들의 수석회계사와 지배인을 거쳤다. 중앙기구로 발탁된 후 카자흐 공화국 고스방크 지배인과 고스방크 부총재를 역임하며 핵심 간부로 성장했고, 1960년부터 대외무역은행 총재로서 소련의 대외결제를 관장했다. 1969년 고스방크 총재에 올라 코시긴 개혁 후반기부터 브레주네프 체제 초기까지 통화·신용 정책을 총괄했으며, 재임기는 1965년 개혁의 신용 레버리지 실험이 퇴조하고 중앙집권적 재정 규율로 복귀한 전환기였다.
볼가-돈 운하 건설 현장에서, 제1서기 그리신은 수감자 노동력으로 공사를 서두르라는 모스크바의 압박 속에서도 둑 높이를 둘러싼 기술 논쟁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이반 티모페예비치 그리신은 1911년 랴잔현 농가에서 태어나, 1931년 당에 입당한 후 콤소몰과 당 통제 기관에서 경력을 쌓았다. 1942년부터 노보시비르스크주 집행위원장을 맡았고, 전후에는 스탈린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1949–1955)로서 볼가-돈 운하 건설을 지휘했다. 1955년 체코슬로바키아 주재 대사로 외교 무대에 진출한 뒤, 1959년부터 사망하는 1985년까지 소련 대외무역성 차관으로 재직하며 서방 산업 설비와 기술 도입 협상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26년간 차관직을 지키며 흐루쇼프에서 체르넨코까지 네 명의 지도부를 거친 그는 소련 대외경제 관계의 제도적 연속성을 체현한 관료였다.
25년간 소련 예산을 쥐고 흔든 그가 남긴 말: "예산이란 국가경제계획이라는 엉덩이에 난 뾰루지다. 불편해도 앉을 수는 있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목수 견습공으로 일하다 하리코프 재정경제대학을 졸업했다. 키예프 재정경제대학 학장과 우크라이나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을 거쳐, 1960년부터 1985년 사망할 때까지 25년간 소련 재무장관을 지냈다, 소련 역사상 최장 재임이다. 1965년 코시긴 경제개혁의 구상에 참여했으며, 브레즈네프 시대 내내 보수적 예산 운용으로 재정 안정을 유지했다. 당 중앙위원과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고, 1981년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회고록 『기억의 계산』(1983)에서 통계청장으로서의 평생을 돌아보며: 「숫자는 침묵하지 않는다 — 다만 우리는 그것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소련 국가통계청(ЦСУ СССР) 청장(1975~1985)으로서 브레즈네프 후기와 고르바초프 초기 소련 계획경제의 통계 인프라를 총괄한 경제학자. 레닌그라드 공학경제연구소 출신으로 고스플란에서 경력을 쌓은 후 30년 가까이 ЦСУ에서 부청장·제1부청장을 거쳐 청장에 올랐다. 그의 재임 기간 소련 통계는 체계적 왜곡과 대외 신뢰도 하락이라는 구조적 문제에 직면했으며, 그는 『통계가 말하다』(1982)와 영문 회고록 『기억의 계산』(1983)을 통해 통계의 사회적 역할을 대중적으로 옹호했다. 1918년 암살된 페트로그라드 선전 인민위원 V. 볼로다르스키의 친동생으로, 혁명 순교자의 유산과 소비에트 테크노크라시의 접점에 선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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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29레닌그라드 제1소비에트학교 콤소몰 책임비서
1934레닌그라드 공학경제연구소 졸업
1934–40레닌그라드 지방공업 계획 부문에서 선임 경제기사 → 계획부장
1940–42레닌그라드 주재 고스플란 전권위원
1942–48고스플란 소련 부서장 → 국장
1948–67ЦСУ 소련 부청장(1948~53, 1956~67), 통계출판사 주필(1953~55), 공업통계국장(1955~56)
함께 일했던 이들이 배신하고 나를 '인민의 적'으로 몰아가려 했다. 그 더러운 수사를 피해 붉은 군대로 도망쳤다.
바쿠 유전 지대에서 성장한 석유 기술자로, 30대에 소련 석유산업을 이끌며 '바이바코프 공법'으로 불리는 고압 시멘트 주입 기술을 개발했다. 전시에는 코카서스 유전 방어의 극적인 임무를 수행했고, 전후에는 로마슈키노 유전 개발을 주도하며 소련의 산유 대국화에 기여했다. 1965년부터 20년간 고스플란 의장으로 코시긴 개혁 이후의 중앙계획경제를 상징했으며, 브레즈네프 시대 계획 관료제의 핵심 축으로서 고르바초프 초기까지 버텼다.
자주관리 도입을 앞둔 어느 연설에서, 노동 대중은 '정당의 전위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그리고 매일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유고슬라비아 혁명가이자 정치가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슬로베니아 해방전선과 파르티잔 저항운동의 주요 조직자였다. 전후 초대 슬로베니아 정부 주석을 지낸 뒤 연방 경제 담당 장관으로서 제1차 5개년 계획을 주도했으나, 1948년 티토-스탈린 결별 이후 소련식 중앙집권 계획에서 노동자 자주관리로의 전환을 설계한 핵심 경제 이론가였다. 그의 1951년 「전환기 경제에 관한 테제」는 상품생산과 가치법칙이 사회주의 경제에서도 작동함을 인정함으로써 소련식 국가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유고슬라비아의 독자 노선을 정당화한 대표적 저작이다.
1947년 11월 18~19일 정치국 회의에서 쇼체가 그를 '반당적 민족주의 활동'으로 고발했고, 이튿날 그는 국가기획위원회 사무실에서 총상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사고에서 자살로 공식 설명이 바뀌었고 살해 주장도 있어 경위는 확정되지 않았다.
본명 아타나스 스피루. 두러스의 부유한 정교회 가정에서 태어나 코르푸와 토리노에서 수학했고, 1941년 신생 알바니아 공산당에 입당해 청년부를 이끌었다. 1944년 정치국원, 1946년 3월 22일 경제장관, 1947년 산업장관 겸 국가기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당 지도부에서 유일한 경제학 전공자였다. 1946년 7월 유고슬라비아와의 경제협정에 마지못해 서명했으나 이후 관세동맹과 통화통합을 포함한 경제통합 계획에 반대했고, 1947년 베오그라드 교섭과 모스크바 방문으로 유고슬라비아 의존에서 벗어날 근거를 마련해 '유고슬라비아 로비'의 코치 쇼체와 충돌했다. 동시에 알바니아 공산주의 범죄연구소는 그를 당·민족해방군의 탄압 행위에 직접 책임이 있는 인물로 기록한다.
소련의 모든 가격을 11년간 관리한 그가 사후에 남긴 자서전의 제목은 『마법 같은 숫자, 혹은 부름받지 못한 러시아』였다.
소련 국가가격위원회 의장(1975~1986)으로서, 11년간 계획경제의 도매·소매 가격 체계 전체를 총괄한 인물이다. 뱟카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촌락 회계사로 일을 시작했고, 노릴스크 광산·제련 콤비나트에서 재무 책임자로 성장한 뒤 크라스노야르스크 국민경제회의와 비철금속부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가 가격위원회를 이끌던 시기는 공식 가격이 수십 년째 동결되는 한편 억압된 인플레이션과 만성적 부족이 누적되던 '정체의 시대'였으며, 이 모순을 관리하는 일 자체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과제였다. 퇴임 후 사후 출간된 자전적 저서에 '마법 같은 숫자, 혹은 부름받지 못한 러시아'라는 제목을 붙였다.
1977년 8월 9일, 해운장관은 무르만스크 부두에서 아르크티카호에 직접 올랐다. 실패하면 모든 책임은 자신의 몫이었다. 8일 뒤 인류 최초로 수상 선박이 북극점에 닿았다.
오룔 현의 농촌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나, 전시 무르만스크 항에서 북극 호송선단 하역을 책임지며 엔지니어로 성장했다. 사할린 해운회사를 흑자로 전환시켜 37세에 소련 최연소 해운회사장이 되었고, 1970년 해운장관에 올랐다. 16년 재임 동안 적자 부문이던 해운부를 80여 개 부처 중 외화 수입 5위의 핵심 산업으로 탈바꿈시켰으며, 레닌호 1척에 불과하던 원자력 쇄빙선대를 8척 체제로 확장했다. 1977년 직접 원자력 쇄빙선 아르크티카호에 승선해 세계 최초로 수상 선박의 북극점 도달을 지휘, 사회주의 노동영웅이 되었다. 1986년 여객선 아드미랄 나히모프호 침몰 참사로 경질되었으나, 그가 구축한 북극 항로와 쇄빙선대는 오늘날 러시아 북극 전략의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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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949무르만스크 항에서 교대 기사로 시작, 기계화 부서장·항만 주임기사로 승진하며 전시 북극 호송선단 하역 복구 책임
1951–1955홀름스크 항만장 → 코르사코프 항만장 → 사할린 해운회사장, 적자 회사를 흑자로 전환
1955–196037세, 소련 최연소 해운회사장으로 사할린 해운회사 경영 정상화
1960–1962해운부 인사국장
1962–1966CPSU 중앙위원회 교통·통신부 부장
1966–1970해운부 제1차관
1970–1986해운장관: 적자 부문을 외화 수입 5위로 전환, 원자력 쇄빙선대 1척→8척으로 확장, 연중 북극 항로 개설
1985년 4월 4일, 데멘체프는 보드카 생산 축소가 1986년 40억 루블, 1990년에는 150억에서 160억 루블의 예산 손실을 낳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빅토르 데멘체프는 지방 재정기관에서 출발해 소련 재무 행정의 고위 관료로 성장한 경제 관리자였다. 그는 알코올 판매 수입에 기대던 국가재정의 구조적 긴장을 드러내며, 1985년 반알코올 캠페인의 급격한 생산 축소에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의 경고는 재정 수입 감소뿐 아니라 밀주와 설탕 부족이라는 정책 부작용을 함께 계산한 것이었다.
모두 달아난 뒤, 무전기와 홀로 남았다. "50kg 중포탄의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우리 쪽이 퍼붓기 시작했다!" 전차 넉 대는 불타고 두 대는 멈춰 섰다.
스몰렌스크 농민 가정 출신으로,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포병 장교로 복무하며 자신의 위치로 포격을 유도해 소비에트 연방 영웅이 되었다. 전후 대외무역 분야에서 성장해 1976년부터 1986년까지 소련 국가은행 총재를 지내며 브레즈네프 시기 계획경제의 통화·신용 시스템을 관리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금융개혁 요구와 가족의 망명 사건이 겹치며 퇴임했다.
1967년 12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시크는 안토닌 노보트니의 사임을 최초로 공개 요구하며 경제 개혁이 정치적 변혁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고르바초프보다 20년 앞서서.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으로, 프라하의 봄 경제 개혁의 설계자였다. 1964년 저서에서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시장 메커니즘을 접목하는 신경제모델을 제시했고, 1967년 12월 중앙위원회에서 노보트니 체제를 공개 비판하며 경제 개혁이 정치적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968년 두브체크 내각에서 부총리로 개혁을 주도했으나, 바르샤바조약군 침공으로 유고슬라비아 망명길에 올랐고 이후 스위스에서 '제3의 길'을 이론화하며 생을 마감했다.
게르하르트 쉬러는 1965년부터 1989년까지 동독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경제 관료였다. 그는 호네커의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의 통일' 노선이 투자보다 소비에 치우쳐 국가를 파산으로 몰고 있다고 경고했으나, 정치국에서 '사보타주'라는 비난을 받으며 18년간 후보 위원에 머물렀다. 1989년 10월 30일 크렌츠의 요청으로 제출한 「동독 경제 상황 분석」에서 서방 부채 490억 발루타마르크와 임박한 지급불능을 폭로하며 국경 통제 완화를 대가로 한 서독 차관을 제안했고, 이 보고서는 체제의 절박함을 드러내는 결정적 문건이 되었다. 통일 후 '신뢰 남용' 혐의로 18일간 구금됐다가 무혐의로 풀려났으며, 회고록 『모험과 상실』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