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은행 관료들의 태업을 진압하라는 임무를 맡아 1917년 11월 은행의 초대 관리자가 되었고 금고 열쇠와 인민위원회 자금을 넘겨받았으며, 12월 23일에는 최고경제회의 초대 의장으로 옮겼다.
쿠르스크현의 소지주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모스크바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7년 11월 국가은행 관리자로 임명되어 은행 금고 열쇠와 자금을 확보했고, 그해 12월 최고경제회의(VSNKh) 초대 의장에 올랐다.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반대한 좌파 공산주의자 그룹의 이론적 지도자였으며, 1920~21년에는 소수파의 의견 개진과 공개 토론을 요구한 민주집중제 그룹을 공동 지도했다. 이후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과 중앙통계국장을 지냈고,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9월 1일 처형되었으며 1957년 복권되었다.
흐루쇼프가 1956년 소개한 재판 기록에서, 루주타크는 NKVD의 사건 조작과 강요된 자백을 중앙위원회에 알리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라트비아 출신의 볼셰비키·노동조합 지도자. 농업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1905년 입당했고 1909년 카토르가형을 선고받았다가 1917년 석방됐다. 교통인민위원과 정치국 정위원, 중앙통제위원회 의장을 지냈으며 1937년 5월 체포된 뒤 법정에서 혐의를 부인하고 NKVD의 사건 조작을 고발했다. 1938년 7월 29일 총살됐고 1955년 재검토에서 사건이 조작으로 확인돼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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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09리가·빈다바 지하 볼셰비키 조직원, 체포되어 10년 카토르가형
1917전러시아 섬유노조 서기, 모스크바 노조평의회 간부
1918–1920모스크바 국민경제회의 의장, 최고경제회의 간부
1920–1921투르키스탄 인민위원회의 의장, 투르키스탄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1924–1930소련 교통인민위원
1926–1932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정위원
1931–1934중앙통제위원회 의장 겸 노농검열인민위원
1937.5.25'라트비아 민족주의 반소 조직' 혐의로 체포, 법정에서 NKVD 조작 규탄
그의 성은 코가노비치(Коганович)이고 정치국원 라자르 카가노비치의 성은 카가노비치(Каганович)다. 46인 선언 명단의 이니셜 없는 "카가노비치"가 누구인지를 두고 혼동이 생기는 까닭이다.
코스트로마에서 태어나 1905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혁명 전까지 여러 차례 체포되었다. 1917년 코스트로마에서 소비에트 권력 수립에 참여했고, 내전기에는 식량 조달 계통에서 일했다. 1920년 4월부터 시베리아식량위원회 의장을 맡으면서 시베리아혁명위원회에 의결권을 가진 위원으로 참여했다. 1927년 좌익반대파에 가담해 83인 강령에 서명했다. 1937년 6월 20일 체포되어 1938년 3월 17일 최고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날 처형되었으며, 1958년 7월 10일 복권되었다. 서명자에 주석을 붙인 46인 선언 판본들은 명단의 이니셜 없는 "카가노비치"를 그로 본다. 당시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장이었던 라자르 카가노비치와는 다른 인물이다.
1935년 1월 25일, 오전 내내 회의를 주재한 그는 창백한 얼굴로 귀가했다. 가정부가 의사를 부르자고 했으나 거절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크렘린 주치의가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관상동맥 혈전으로 사망해 있었다.
짜르 군관의 아들로 태어나 16세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여덟 차례 체포와 유형을 겪으며 볼셰비키 지하운동을 헤쳐왔다. 내전기 제1군·제4군 혁명군사위원, 이후 라프크린·최고경제회의·고스플란 의장을 거쳐 스탈린 공업화의 설계자이자 집행자가 되었다. 1927년 정치국원으로서 경제정책 전반을 총괄했고, 사후 도시·공장에 그의 이름이 붙은 공업화의 충성스러운 상징으로 남았다.
1919년 무장 부대를 이끌고 벨라루스 마을들을 돌며 곡물을 강제 징발했다. 18년 후 자신이 세운 체제에 의해 '해충'으로 처형되었다.
시베리아 유대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1904년 사회혁명당에 입당, 1917년 볼셰비키로 전향했다. 10월 혁명기 민스크 수비대장과 서부전선 군사혁명위원회에서 활동했고, 내전기 벨라루스와 리투아니아-벨라루스에서 식량인민위원을 지내며 강제 곡물 징발 조직자 중 하나였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소련 국가은행 총재 겸 재정부인민위원으로서 집단화와 병행된 신용개혁(1930–1932)을 주관했고, 1934년부터 1937년까지 곡물·축산 국영농장 인민위원으로 국영농장 체제를 이끌었다. 대숙청 중 체포되어 1937년 11월 처형되었다.
1936년, 임업인민위원부가 생산계획을 초과 달성하자 레닌 훈장을 받았다. 1년 뒤 같은 당이 그를 '반소비에트 테러 조직' 혐의로 체포했고, 1937년 10월 30일 선고와 동시에 총살했다.
스몰렌스크 현의 산림감독관 아들로 태어나 건설노동자·제도사로 일했고,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내전기 페트로그라드·사라토프·바시키르 체카 의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보안기구의 초기 간부로 성장했다. 네프기 연료·석유 신디케이트를 관리한 뒤 1926년 러시아 최고경제회의(ВСНХ РСФСР) 의장에 올라 공업화의 행정적 토대를 닦았다. 1932년부터 임업인민위원으로 5개년계획기 목재 공급을 책임졌고, 계획 초과 달성으로 1936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1937년 6월 체포되어 10월 30일 총살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노동경제 이론 시론」(1912~1913)에서 "모든 노동경제에는 그 산출의 한계가 있으며, 그것은 연간 노동과 농가의 욕구 충족 정도 사이의 비례에 의해 정해진다"고 썼다.
1888년 1월 17일(구력 29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1937년 10월 3일 알마아타에서 사망한 러시아·소비에트 농업경제학자로, 농민가족농의 노동-소비 균형 이론을 세우고 조직-생산학파를 이끌었다. 「노동경제 이론 시론」(1912~1913)에서 농민가족농이 이윤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일하며 소비 필요와 노동의 고역 사이에서 자기착취의 정도를 정한다고 주장했다. 1930년 7월 '노동농민당' 조작 사건으로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1935년 유형이 연장된 뒤 1937년 10월 3일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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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911모스크바 농업대학에서 수학, 이탈리아·벨기에 농업협동조합 연구 발표
1912–1915『노동경제 이론 시론』 출간, 페트롭스카야 농업아카데미 조교수·부교수
1915–1919중앙아마협동조합(리노첸트르) 공동 창립, 전러시아 협동조합 회의 평의원
1917임시정부 농업차관, 예비의회 의원 — 급진적 농업 개혁안 작성
1919–1930농업경제연구소 창립 소장, 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 정교수 — 농민경제·협동조합 이론 체계화
1925년 12월 제14차 당 대회(대의원 1,306명)에서 소콜니코프는 연단에 올라 스탈린의 총서기직 사퇴를 공개 요구하고 네프의 계속을 주장했다. 연단에서 이를 요구한 발언자는 그가 유일했다. 제안은 다수를 얻지 못했다.
스탈린 시대에 옥중에서 살해된 볼셰비키 지도자. 본명은 그리고리 브릴리안트로, 소르본에서 법학 학위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여섯 개 언어에 능통했다. 10월 혁명 뒤 은행 국유화를 주도하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서명했으며, 내전 시기 제8군을 지휘해 데니킨군을 격파했다. 재무인민위원으로서 1922~1924년 화폐 개혁을 이끌어 금 태환 체르보네츠로 루블을 안정시켰고, 긴축 재정과 점진적 사회주의 건설을 주장하며 급속 공업화와 강제 집단화에 반대했다. 1925년 제14차 당 대회에서 총서기 사퇴를 요구했다.
10월 혁명의 밤, 밀류틴의 부대는 참모본부 아치에서 알렉산드르 원주 바리케이드를 향해 정면 돌격을 감행했고, 그 방어선을 최초로 돌파했다.
니콜라이 밀류틴은 10월 혁명 당시 겨울궁전 습격에 참여한 볼셰비키 활동가로, 이후 RSFSR 재무인민위원(1924–1929)을 역임했다. 재무인민위원으로서 모이세이 긴즈부르크의 나르콤핀 건물(소비에트 구성주의 건축의 기념비적 작품)을 발주했으며, 1930년에는 사회주의 도시계획을 위한 선형도시 개념을 제시한 저서 『소츠고로드』를 출간했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잡지 『소베츠카야 아르히텍투라』의 편집장을 맡았고, 1930년대 내내 교육·문화 행정직을 거치며 마르크스주의 정주 이론을 발전시켰다. 대숙청을 살아남았으나(베개 밑에 권총을 두고 잠들었다는 증언이 있다) 1942년 위암으로 사망하여, 혁명적 국가건설과 아방가르드 건축 사상을 잇는 유산을 남겼다.
1937년 그린코가 '인민의 적'으로 체포되자, 그의 서명이 박힌 1·3·5루블 지폐는 정치적 곤란을 야기했다. 당국은 동일한 도안에서 서명만 지운 비상 발행 지폐를 내놓았고, 이후 소련 지폐에서는 아예 어떤 관리의 서명도 인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르키우현에서 태어난 우크라이나 혁명가. 좌파 사회혁명당(보로트비스트)을 이끌다 1920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우크라이나 교육인민위원과 고스플란 의장을 지낸 뒤 1926년 모스크바로 올라가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과 농업 부인민위원을 역임했다. 1930년 10월 소련 재무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제1·2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공업화 자금을 조달하고 재정 제도를 정비했다. 그의 서명이 찍힌 루블 지폐가 전국에 유통될 만큼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으나, 1937년 대숙청 와중에 체포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의 피고로 서고 1938년 총살당했다. 1959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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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917사회혁명당 당원(1906–1912); 모스크바·하르키우 대학에서 학생운동으로 제적;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예카테리노슬라프 근위척탄병연대 장교
1919–1920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보로트비스트) 조직 및 지도; 전우크라이나 혁명위원회 위원
1920–1922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1922–1926우크라이나 SSR 고스플란 의장(1922–1923, 1925–1926); 키예프 현 집행위원장 겸 시의회 의장(1923–1925)
1926–1930소련 고스플란 부의장(1926–1929); 소련 농업 부인민위원(1929–1930)
1930–1937소련 재무인민위원; 제1·2차 5개년 계획 재정 정책 총괄;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 후보(1934–1937)
1937–19381937년 8월 해임·제명·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피고; 1938년 3월 15일 총살
1924년 정부 연구 여행으로 독일·영국·캐나다·미국을 돌며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농업 생산 조직을 연구하던 중 소로킨을 만났고, 소로킨은 소련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권했지만 콘드라티예프는 귀국해 연구를 계속하기로 했다.
1892년 3월 4일(신력 3월 16일) 코스트로마현 키네솀마 우예즈드 갈루옙스카야 마을에서 열 자녀를 둔 농민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난 러시아·소비에트 경제학자이다. 자본주의 경제의 약 50년 장기 순환을 규명한 '콘드라티예프 파동' 이론의 창시자로, 1905년 사회혁명당에 들어가 1906년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1915년 페테르부르크대 법학부를 졸업했다. 1917년 케렌스키의 농업 비서관과 식량차관을 지냈고, 네프 시기 콘윤크투라 연구소를 창립해 1928년까지 소장을 맡으며 1923~1928년 농업 장기계획을 주도했다. 1927년 1차 5개년 계획의 불균형을 지적했고 1928년 4월 해임, 1930년 체포되어 1932년 8년형을 받고 1938년 9월 17일 처형되었다.
각료회의 중 파란 연필로 동료 간부 캐리커처를 그린 메즐라우크. 낙서 532점이 보로실로프의 비밀 파일에 남았고, 체포 후 베리야는 한 장에 '메즐라우크의 작품'이라는 쪽지를 붙여 보내왔다.
소련 계획경제의 이론가이자 실무 책임자로, 1·2·3차 5개년계획 수립을 주도했다. 고스플란 의장으로 공업화 지표와 자원 배분을 총괄했으며, 1929년 포드 사와 고리키 자동차 공장 건설 계약을 체결했다. 기관지 《За индустриализацию》 편집장을 지냈고, 각료 회의에서 그린 당 간부들의 캐리커처로도 유명했다. 라트비아계였던 그는 대숙청 속 '라트비아 반혁명 조직' 혐의로 1938년 총살되었다.
1937년 3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그는 트로츠키주의자·지노비예프주의자·우익파가 '독일과 일본 파시스트에게 고용된 피비린내 나는 파괴공작자-살인자 덩어리'라고 규탄했다. 넉 달 뒤 그 자신이 체포되었다.
12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0월 혁명 당시 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간부로 활동했고, 내전기에는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을 지냈다. 1924년 중앙위 조직배치부(오르그라스프레드) 책임자로서 스탈린의 노멘클라투라 체계 구축에 핵심 역할을 했으며, 이후 우랄·레닌그라드 지역당 서기, 체신인민위원을 거쳐 1935년 소비에트통제위원회 의장 겸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에 올랐다. 당-국가 통제기구의 정점에서 중앙계획 규율을 감독했으나, 1937년 6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제명·체포되어 1938년 7월 총살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1936년 7월 14일, 스탈린의 집무실. 고스방크 총재 마랴신이 자신의 운명을 걱정하자 스탈린은 그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너는 반대파도 아니잖나. 우리의 붉은 은행가야. 뭐가 두렵나?" 일주일 뒤 그의 집무실은 봉인되었다.
모길료프의 법률고문 아들로 태어나 1915년 볼셰비키에 입당, 혁명기 모스크바 군관구 교육기관 정치위원을 시작으로 내전기 전러시아 총참모부에서 보편군사훈련 부서를 이끌었다. 1920년대 당 조직국과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보통계부를 거쳐 1927년 볼셰비키 전당 중앙위원회 조직배치부 부장에 올랐으며, 이 시기 니콜라이 예조프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930년 적색교수양성소를 졸업하고 국가은행에 입행하여 1934년 4월부터 1936년 7월까지 고스방크 총재를 지내며 재정부인민위원과 노동국방평의회 위원을 겸임했다. 해임된 지 5개월 만에 체포되어 1938년 8월 총살되었으며, 한때 '료부시카'라 부르던 예조프가 직접 고문을 지시했다.
1933년, 소련 전역이 대기근에 시달리던 때 골레프는 하리코프에 파견되어 국가 수확고 위원회를 이끌었다. 그의 경력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였고, 이후 그가 다룰 모든 재정 숫자들 뒤에는 이 장면이 놓여 있었다.
야코프 골레프는 소련의 재정·은행 기술관료로,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소련 국가은행(고스방크) 총재를 지냈다.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제정군 포병으로 1차 대전을 겪고 내전기에 붉은 군대에 복무했으며, 이후 지역 재무 부서를 거쳐 중앙 재정 기구로 진입한 전형적인 소비에트 승진 경로를 밟았다. 고스방크 총재 임기 동안 그는 전시 경제에서 평시 재건으로 이행하는 과도기(1947년 화폐 개혁 직전까지의 신용·발권 체계)를 관리했으며, 이는 전후 소련 재정 안정화의 기술적 토대를 마련한 시기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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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러시아 제국군 포병 복무
1918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1919붉은 군대 복무
1920–1924피야티고르스크 식량위원회 · 볼로콜람스크 현 재무과 근무
1924–1930모스크바 주 재무국 근무
1930–1933과학연구 콜호스 연구소 대학원생
1933–1935국가 수확고 위원회 위원장 (하리코프) · 전권위원 (체르니고프, 스탈리노)
쑹쯔원은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재정가이자 외교관으로, 국가 재정과 대외 원조를 연결해 전쟁기 국민당 국가의 운영을 뒷받침했다. 그는 재정 통합과 관세 자주권을 추진했지만, 중앙집권적 전쟁 재정과 가족·금융 네트워크의 결합이라는 긴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1945년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중소조약을 협상하며 만주 철도와 뤼순의 처리, 외몽골의 지위를 둘러싼 중국의 양보를 조율했고, 그 합의는 일본 패전 뒤 동북아 질서를 규정했다. 전후 행정원장으로서 인플레이션과 내전 재정 위기를 수습하지 못한 뒤 미국으로 이주했다.
1937년 1월 인구총조사 결과가 크렘린에 도착했을 때, 크라발의 통계는 스탈린이 선전해온 인구 성장 신화를 숫자로 깨뜨렸다. 불과 4개월 후 그는 체포되었다.
라트비아 출신 소련 경제학자이자 통계학자로, 노동경제학 박사. 고스플란 부의장 겸 중앙국민경제회계국(TSUNKHU) 국장으로서 1937년 전연방 인구총조사를 주관했다. 집단화와 기근으로 인한 인구 손실을 반영한 낮은 수치가 정치 지도부의 분노를 샀고, 이는 그의 몰락으로 직결되었다. 그가 수립한 통계 방법론은 소련 계획경제의 기초 통계 인프라를 형성했다.
1948년 11월 혁명기념일 리셉션에서 폴리나 젬추지나는 이스라엘 공사 골다 메이어의 딸 사라를 끌어안고 이디시어로 속삭였다. 「몸조심하렴. 너희에게 모든 일이 잘 풀리면, 온 세상 유대인에게도 잘 풀릴 테니까.」
소련 최초의 여성 산업인민위원(1939, 수산공업)으로서 소비에트 여성의 정치적 진출에 이정표를 세웠다. 유대인 재단사 집안에서 태어나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 내전기 정치장교로 활동했으며, 1930년대 향수공장 「노바야 자랴」 책임자와 글라브파르퓌메리야 총책임자를 거쳐 식품공업 부인민위원까지 올랐다.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아내이자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의 절친으로 스탈린 가문의 내밀한 삶을 공유했으나, 전쟁 중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에서 적극 활동하며 유대인 정체성을 드러냈다. 1948년 이스라엘 공사 골다 메이어와의 이디시어 대화가 빌미가 되어 1949년 체포·출당·유배되었고, 1953년 스탈린 사후 풀려나 1970년 자연사했다.
1948년 6월 21일, 그는 라디오를 통해 일부 공산품의 가격 통제와 강제 배급을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는 전후 서독의 경제 질서를 자유로운 경쟁과 사회적 안전의 결합으로 구상한 경제학자이자 정치가였다. 1948년 비조네 경제행정 책임자로서 통화 개혁을 준비하고 독일마르크 도입과 맞물려 가격·생산 통제를 단계적으로 풀어 서독 경제 회복의 제도적 출발을 열었다. 그의 역할은 흔히 ‘경제 기적’의 단독 설계자로 신화화되지만, 연합국의 개혁과 국제 경기, 노동자와 기업의 생산 회복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으며 가격 자유화는 초기 생활비 상승과 노동계급의 저항도 낳았다. 이후 경제부 장관과 수상으로서 그 질서를 서독의 국가 정체성으로 굳혔으나, 경기 침체와 연정 붕괴 속에서 1966년 사임했다.
전시 전기공업을 지휘하고 수소폭탄의 리튬-6을 낳은, 소련의 마지막 스탈린 시기 대외무역장관
1953년, 카바노프는 전자기 동위원소 분리법과 리튬-6 생산으로 스탈린상 1등급을 받았다. 그 기술로 소련은 이윽고 수소폭탄을 완성했다.
페름 현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자물쇠공에서 출발해 내전 정치위원을 거쳐 전기공업 관료로 성장했다. 1941년 전기공업인민위원이 되어 전시 소련의 발전설비 대피와 재건을 총괄했고, 1945년부터 원자폭탄 계획에 참여해 우라늄 동위원소 전자기 분리법과 열핵무기용 리튬-6 생산기술 확립을 주도하여 1953년 스탈린상 1등급을 수상했다. 같은 해 대외무역장관이 되어 흐루쇼프 시기 소련 대외경제의 방향 전환을 집행했으며, 1958년 파톨리체프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1960년 5월 16일, 흐루쇼프의 화폐개혁이 단순한 '디노미네이션'이 아니라 평가절하라고 보고 재무장관직을 내려놓았다. 원자재 수출 중심으로 경제가 기울 것을 우려한 결정이었다.
농민 출신으로 1919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지방 재정기관에서 성장했다. 1938년 38세로 소련 재무인민위원이 된 뒤 22년간 재무장관을 지내며 대조국전쟁 군수 재원 조달, 국채 발행, 1942년 원자력 개발용 라듐·백금 지급을 감독했다. 1947년 전시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킨 화폐개혁을 설계했으며, 1960년 흐루쇼프의 새로운 화폐개혁 방안에 반대해 사임했다. 스탈린과 흐루쇼프 두 체제를 관통한 유일한 장기 재무수장이었다.
1956년 제20차 당 대회 준비 과정에서 카가노비치·몰로토프·보로실로프가 숙청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위대함'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사부로프는 미코얀과 함께 반대하며 말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용서할 수 없다."
소련의 핵심 경제계획 관료로, 고스플란 의장을 세 차례 역임하며 전후 공업 재건과 제5차 5개년 계획을 주도했다. 스탈린 말기부터 흐루쇼프 집권 초까지 국가계획의 중심에 서서 중공업 우선 노선과 소비재 균형 논쟁 속에서 실무를 책임졌다. 1957년 흐루쇼프 해임을 시도한 반당 그룹에 가담했다가 상임위에서 제명되고, 이후 지방 공장장으로 밀려났다.
1945년 9월 2일, 스탈린은 대일전 승리 명령에서 '프수르체프 휘하 통신부대'를 특별히 지목했다. 3년 뒤 스탈린이 그를 체신장관으로 직접 지명했다.
니콜라이 프수르체프는 1948년부터 1975년까지 27년간 소련 체신장관을 지내며 전화·전신·우편·방송 인프라를 총괄한 최장수 장관이다. 키예프의 러시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전신기사가 되었고, 내전기에는 제9군과 제12군의 통신을 책임졌다. 위대한 조국전쟁 당시 서부전선 통신부장으로서 벨로루시아·스몰렌스크·모스크바 전투에서 사령부 통신망을 유지했으며, 1945년 대일전에서는 극동 소련군 총사령부 통신을 지휘했다. 체신장관 시절 모스크바-블라디보스토크 케이블 간선과 세계 최초의 위성 TV 방송망 '오르비타'를 건설하고 국제위성통신기구 '인테르스푸트니크' 창설을 주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