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네프르 급류의 여러 소규모 발전소 대신, 당시로서 초대형인 560메가와트 단일 댐 하나를 세우자고 제안했다.
이반 알렉산드로프는 철도·교량 기술에서 출발해 수력공학과 경제지역화의 결합을 개척한 러시아·소련의 공학자였다. 그는 대규모 단일 댐이라는 구상으로 드네프르 수력발전소를 설계하고, 전력 생산을 산업 배치와 교통망의 문제로 함께 다루었다. GOELRO 작성에 참여한 그의 작업은 전기화를 기술 사업이 아니라 계획된 국민경제 재편의 틀로 놓았으며, 이후 5개년계획의 공간적 사고에도 흔적을 남겼다. 학술 연구와 국가 계획 사이에서 활동한 그는 1930년대 초 고스플란의 에너지 부문을 이끌었지만, 말년에는 다시 과학 연구와 교육에 집중했다.
1920년대 소련 군사 이론의 대논쟁에서 투하쳅스키는 스베친을 향해 이렇게 선언했다: "스베친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적도, 되려 한 적도 없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는 제국주의 간섭의 대행자다." 학문적 논쟁은 정치적 공격으로 변질되었고, 스베친은 끝내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차르 장군 출신의 소련 최고 군사이론가. 『전략』(1927)에서 '작전술' 개념을 정립하고 미래 전쟁을 경제적 총력전으로 예견했으나, 그의 경고는 외면되었고 1938년 숙청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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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1903미하일롭스크 포병학교 졸업,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1904–05러일전쟁 참전: 제22동시베리아연대 중대장, 제16군단 참모
1914–16제1차 세계대전: 제6핀란드소총연대장, 흑해해병사단장, 소장 진급
1918볼셰비키 편입, 전러시아 주참모부장 역임
1918–31참모본부 아카데미(후일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수, 전략 및 전쟁사 주임 지도관
흐루쇼프의 회고: "당내에서 야로슬랍스키를 '소비에트의 성직자'라 불렀다." 그가 내건 구호 — "종교에 대한 투쟁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다."
야로슬랍스키는 소비에트 반종교 정책의 최고 이데올로그로, '전투적 무신론자동맹'(1925~1943) 의장으로서 조직적 무신론 운동을 총괄했다. 1898년 RSDLP에 입당, 1917년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무장봉기를 이끌었고 내전기에는 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위원을 지냈다. 1924년부터 10년간 중앙통제위원회 당규율위원회 서기로 당내 숙청을 주도했으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위한 성서》 등 방대한 무신론 저작을 남겼다. 스탈린의 충실한 지지자이자 공식 당사 해석자였고, 1939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다.
1929년 대공황을 예측하고도 자본주의의 적응력을 인정했다는 이유로 연구소가 폐쇄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1920년대 말, 모두가 자본주의 안정화를 확신할 때 대공황을 예측했고, 모두가 자본주의 붕괴를 말할 때 그 종말을 예측하여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다.
헝가리 출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1927년부터 20년간 소련 과학아카데미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ИМХМП)를 이끌며 코민테른 최고의 경제분석가로 활약했다. 1929년 대공황의 도래와 종료를 정통 노선에 역행하여 정확히 예측해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으나, 전후에는 전시 국가개입으로 자본주의가 적응·안정화될 수 있다고 분석한 저작으로 1947년 연구소 폐쇄와 함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1963년 레닌상을 수상했고, 유언에 따라 사후 공개된 유고에서는 소련 관료제의 변질과 국제주의 포기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1923년 7월 18일 《프라우다》 1면 기사 「시간이 비행기를 만든다」에서: "우리는 오늘 회의 시작을 기다리느라 7천 노동시간을 허비했다. 그 정도 노동력이면 비행기 한두 대는 만들 수 있었다. 우리는 또 '비행기 반 대分'을 더 기다린 뒤에야 회의가 시작됐다." 이 글이 계기가 되어 '시간' 동맹이 창립되었다.
1904년 입당. 프롤레트쿨트 이론가로 '시간' 동맹을 이끌며 노동과학(NOT)을 주도했다. 전연방 예술위원회 초대 의장(1936–38)으로 스탈린기 문화 통제를 구축했고, 《파리코뮌의 역사》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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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볼셰비키 입당, 모스크바대학 퇴학, 타간카 감옥 수감
1905–1912니즈니노브고로드·페테르부르크·키예프에서 지하활동과 볼셰비키 언론 기고
1912–1917런던·파리·뉴욕 망명, 《프라우다》 특파원, 아일랜드 독립운동 취재
1918–1920프롤레트쿨트 이론가·《이즈베스티야》 부편집장·로스타 책임자
1921–1926주스웨덴 전권대표, 노동과학조직(NOT) 연구 주도, 주이탈리아 전권대표
1928–1930볼셰비키 중앙위 선전부 부장·공산주의아카데미 문학예술언어연구소장
1930–1936인민위원회비서국장·전연방 라디오위원회 의장
1936–1938전연방 예술위원회 초대 의장 — 불가코프·메이예르홀트 탄압, 형식주의 미술 숙청
동시대인들은 사제복을 입은 플로렌스키가 소비에트 정부 부서의 다른 지도자들과 나란히 일하는 모습을 놀라운 광경으로 기억했다.
파벨 플로렌스키는 러시아 정교회 사제, 신학자, 철학자, 수학자, 물리학자, 전기공학자로, 20세기 초 러시아 지성사에서 가장 독특한 인물 중 하나다. 대표작 『진리의 기둥과 터』(1914)는 정교회 신정론의 기념비적 저작으로, 합리적 분석을 넘어선 직관적 체험을 통해 신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혁명 후에는 트로츠키의 추천으로 GOELRO 전기화 계획에 참여했으며, 사제복을 벗지 않은 채 소비에트 과학자들 사이에서 일하는 이중적 삶을 살았다. 1922년 에세이 「역원근법」은 이콘의 공간 구성에 대한 선구적 분석으로 타르투 기호학파에 영향을 미쳤으며, 1937년 대숙청 시기 NKVD에 의해 처형되었다.
“사회 분야에서도 정밀한 측정, 공식, 도면, 통제 게이지, 사회적 노르말의 시대가 도래해야 한다. 우리는 정신생리학과 경제학의 완전한 수학화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우리의 과제」(1921)
1882년 10월 8일(구력 9월 26일) 블라디미르 주 수즈달에서 교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스크바 교사대학 재학 중 1902년 학생 시위를 주도한 일로 제적된 뒤 직업혁명가가 되었고, 1905년 코스트로마 소비에트 의장을 맡았다. 프랑스에서 금속노동자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중앙노동연구소(CIT)를 창설해 '사회공학'과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NOT)를 정립했고, 1932~1936년 전연방표준화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1938년 9월 반혁명 테러조직 가담 혐의로 체포되어 1939년 4월 15일 코무나르카에서 총살되었고, 1956년 3월 복권되었다.
"수하노프는 소부르주아지의 가장 훌륭한 대표자 중 한 명이다" — 레닌, 1917년 9월 1일
본명 니콜라이 기메르. 1917년 2월 혁명 직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창립 위원이 되었으며, 멘셰비키-국제주의자로서 전쟁과 임시정부를 비판하고 사회주의 연합을 주장했다. 7권짜리 회고록 『혁명의 기록』은 1917년의 가장 생생한 1차 사료로 남아 있다. 1917년 10월 10일 볼셰비키 중앙위원회가 무장봉기를 결의한 역사적 회의가 그의 페트로그라드 아파트에서 열렸다. 1931년 멘셰비키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1940년 거짓 혐의로 총살,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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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1905사회혁명당(SR) 입당; 1904년 체포, 타간카 감옥 수감; 1905년 10월 석방 후 12월 모스크바 무장봉기 참가
1911–1913아르한겔스크주로 3년 유형; 농업 통계 자료 정리
1914–1917잡지 『소브레멘니크』『레토피시』 편집자; 반전 국제주의자; 1917년 2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창립 위원, 『이즈베스티야』 창간 주도
1917–1918멘셰비키-국제주의자; 『노바야 지즈니』 편집자; VTsIK 2·3·4기 구성원; 1918년 6월 제명
1919–19237권짜리 회고록 『혁명의 기록』(Записки о революции) 집필·출간
1920–1929멘셰비키당 탈퇴; 대외무역 기관·농업경제연구소 근무; 공산주의 아카데미 회원; 1928년 강제 집단화 반대 연설
『골로스 트루다』, 1917년: '볼셰비키가 권력을 공고히 하고 합법화하면… 국가와 인민의 삶을 위에서부터 운영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은 모든 반대를 철권으로 분쇄할 권위주의적 정치·국가 기구를 발전시킬 것이다.'
러시아 아나키스트 지식인이자 마흐놉시치나의 지도적 이론가. 페트로그라드에서 『골로스 트루다』를 편집하고, 우크라이나에서 나바트 연합을 공동 창설했으며, 마흐노 군사혁명평의회 의장으로서 아나키스트 통합 이론을 발전시켜 공산주의·개인주의·생디칼리즘 아나키스트들의 협력을 주창했다. 1922년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추방된 후, 1917–1921년 혁명의 아나키스트적 결정판인 『미지의 혁명』을 저술했으며, 동지 마흐노가 추진한 플랫폼주의 중앙집권화에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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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 중퇴, 사회혁명당 입당, 노동자 학습 모임 조직
1905피의 일요일 행진 참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결성 참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1907오흐라나에 체포, 시베리아 유배; 탈출하여 프랑스 망명
1911아폴론 카렐린의 영향으로 아나키스트 전향, 파리에서 '자유 공산주의자 형제단' 가입
1915–1916반전 활동으로 프랑스 당국 추적 피해 미국 도피; 뉴욕에서 『골로스 트루다』 편집
1917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귀환; 『골로스 트루다』를 주요 아나코생디칼리즘 기관지로 재창간
1918–1920우크라이나 나바트 연합 공동 창설; 마흐노 군사혁명평의회 의장; 체카에 두 차례 체포
폭탄이 떨어지자 그는 "진정하십시오, 별일 아닙니다. 곧 무슨 일인지 확인하겠습니다"라고 외치며 폭발물 쪽으로 달려갔다.
볼셰비키 조직가로, 소비에트 러시아 최초의 해외 외교 사절단인 독일 전권대표부 초대 서기를 지냈고, 1918년 7월부터 모스크바 당위원회 서기로 내전기 수도의 당을 이끌며 도시방어를 지휘했다. 1919년 9월 무정부주의자들의 폭탄 테러로 현장에서 순직했으며,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힘으로 악에 저항함』에서 "체포하고, 단죄하고, 사격할" 용기를 요구했고, 고리키는 이를 '복수의 복음'이라 불렀다.
모스크바대학에서 헤겔 법철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동시에 받고 교수가 된 러시아 법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다. 1905년 혁명기 급진적 입장에서 출발했으나 10월 혁명을 '국가적 재앙'으로 규정하고 반볼셰비키 투쟁의 이론가로 전향, 1922년 '철학자의 배'로 추방되었다. 망명 중 『힘으로 악에 저항함』(1925)에서 무력 저항을 정당화했으며 파시즘을 볼셰비즘에 대항하는 '건강한 현상'으로 옹호했다. 사후 저작은 솔제니친과 푸틴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민족주의·권위주의 담론의 핵심 원천이 되었다.
화학도였던 젊은 바르딘은 이젭스키 교수의 강의를 듣고 “나는 용광로 기술자가 될 것이다”라고 다짐했다. 30년 뒤 그 다짐은 유럽 최대 제철소가 되었다.
시골 재단사의 아들로 키예프 공대에서 야금을 전공하고 미국 공장 노동자로 제철을 배웠다. 용광로의 대가 미하일 쿠라코의 제자로 유좁카·예나키예보·마케옙카·드네프로제르진스크 제철소들을 재건했고, 1929–1937년 쿠즈네츠크 제철 콤비나트 수석 엔지니어로 유럽 최대 용광로를 1,000일 만에 완성했다. 논문 한 편 없이 1932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고 1942년부터 부원장을 지냈다. 전시에 우랄 과학력을 방위생산에 결집했고 전후 산소전로·연속주조를 주도했다. 무소속으로 체카의 손길을 피했으며 숙청된 동료의 자녀 11명을 입양했다.
1917년 10월, 사라토프 소비에트 의장으로서 시내 음악원에서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선포하고 적위대를 지휘했다.
1902년 RSDLP에 입당한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법률가로, 1917년 사라토프 소비에트 의장으로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주도했고 1920~1921년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을 지냈다. 1923년부터 1938년까지 소련 인민위원회 산하 입법제안위원회 의장과 대법원 판사를 겸하며 소비에트 사법·입법 체계의 기초를 설계했고, 샤흐티 재판·멘셰비키 재판·산업당 재판에 판사로 참여했다. 회고록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깃발 아래』(1925)와 『붉은 해』(1927)를 남겼다.
“진정한 기원은 시작이 아니라 끝에 있다. 사회와 존재가 스스로를 뿌리에서 파악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 『희망의 원리』
『희망의 원리』(Das Prinzip Hoffnung)로 '아직-아닌 것'(Noch-Nicht)과 구체적 유토피아의 철학을 정립한 독일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카치·벤야민·아도르노·브레히트와 교류하며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한 축을 형성했다. 1948년 동독으로 귀환해 라이프치히 대학 철학 교수와 국가상을 받았으나, 1956년 헝가리 봉기 후 인본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하여 강제 은퇴당했고 1961년 서독으로 망명했다. 그의 사상은 해방신학과 1968년 학생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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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08뮌헨·뷔르츠부르크에서 철학·물리학·음악 수학, 『리케르트 비판』으로 박사
1912–1914하이델베르크에서 막스 베버·짐멜·루카치와 교류
1918『유토피아의 정신』 출간 — 초기 주저
1921『혁명의 신학자 토마스 뮌처』 출간
1920s베를린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 브레히트·벤야민·아도르노와 교류
1933–1938나치 집권 후 스위스·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 망명
1935『이 시대의 유산』 출간 — 비동시성 개념으로 파시즘의 대중적 매력 분석
1938–1947미국 망명 중 『희망의 원리』 3부작 집필
1949–1957라이프치히 대학 철학 교수, 동독 국가상(1955), 독일 과학아카데미 회원
빅토르 세르주의 회고: "회의 중에 언제든 쓰러져 잠들 것 같았지만, 두뇌는 여전히 맑고 통계치로 가득 차 있었다."
볼셰비키 경제 이론가이자 부하린과 함께 『공산주의 ABC』(1919)를 집필한 선전가로, 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내며 초기 소비에트 국가 건설에 참여했다. 1923년 '46인 선언'의 발기인이자 좌익 반대파의 핵심 논객으로서, 『새로운 경제학』(1926)에서 농민 부문의 잉여를 공업화 자본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사회주의적 원시축적'론을 정식화해 신경제정책 논쟁을 이끌었다. 1929년 스탈린 노선으로 복귀했으나 곧 집단화 폭력에 반대하며 다시 지하 조직을 결성했고, 1937년 처형됐다.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공동 창시자, 『마르크스주의와 철학』으로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맞선 독일 철학자
“이런 교수들이 몇 명만 더 나와 이론을 뽑아내면 우리는 끝장이다.” — 1924년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지노비예프가 코르슈와 루카치를 겨냥해
루카치와 함께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기초를 놓은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혁명적 실천가. 『마르크스주의와 철학』(1923)에서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유물사관을 적용해 헤겔 변증법의 혁명적 회복을 주장했고, 이는 코민테른의 맹렬한 비판을 불렀다. 1923년 튀링겐 노동자 정부의 법무장관, KPD 제국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좌파 반대파로 당에서 축출되었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 학자로 활동하며 브레히트·벤야민·프랑크푸르트학파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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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910뮌헨·제네바·베를린에서 법학·철학 수학, 예나 대학 법학 박사
1912–1914런던에서 법률 연구, 페이비언협회 가입
1914–1918독일군 복무 — 무기 소지 거부, 두 차례 철십자 훈장 수여
1917독립사회민주당(USPD) 입당, 군인평의회 대표
1920USPD 좌파와 함께 KPD 합류, 예나 대학 강사
1923.3『마르크스주의와 철학』 출간 — 코민테른의 격렬한 비판 대상이 됨
1923.10–11튀링겐 노동자 정부 법무장관 — 제국군의 진압으로 27일 만에 붕괴
1924–1928KPD 제국의회 의원, 코민테른 제5차 대회 참석
1926.4KPD에서 축출 — 당내 좌파 반대파 '결연한 좌파(Entschiedene Linke)' 결성
1933제국의회 방화 사건 당일 독일 탈출 — 덴마크·영국 경유
1936–1961미국 망명 — 툴레인 대학, 사회연구소(프랑크푸르트학파) 연구, 브레히트에 마르크스주의 강의
'전진, 화성으로!'라는 평생 구호를 남기고 1933년 3월 발진티푸스로 숨졌으며, 자신이 설계한 소련 최초의 액체 연료 로켓 GIRD-X가 6개월 후 발사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발트 독일인 가문 출신의 소비에트 로켓 공학자이자 우주 비행 이론가. 1931년 세르게이 코롤료프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반응 추진 연구 그룹(GIRD)을 공동 창립하고 제1여단장을 맡아 소련 최초의 액체 연료 로켓 GIRD-X를 설계했다. 우주 온실, 태양 돛, 날개형 로켓, 대기권 제동 등 선구적 개념들을 제안했으며, '전진, 화성으로!'라는 구호로 평생 행성 간 비행의 꿈을 추구했다.
수감 중 스물아홉 차례 심장 발작이 일었고, 그중 열 번은 류민의 사무실에서 심문 도중에 찾아왔다.
벨라루스 민스크의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의학을 공부한 소비에트 심장병학자. 크렘린 진료국의 오랜 컨설턴트로 키로프, 오르조니키제, 디미트로프, 톨랴티 등 소련과 국제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치료했으며, 심전도 진단법의 선구자로 1950년 노벨상 후보로도 거론되었다. 1950년 11월 '의사 사건'의 첫 체포자가 되어 류민의 고문 속에 1951년 3월 레포르토보 감옥에서 사망했고, 류민은 그의 죽음을 아바쿠모프 탄핵의 지렛대로 이용해 사건을 전면화했다.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중앙위원 피시만은 독일 대사 미르바흐 암살에 사용될 폭탄 두 개를 직접 제조해 동지들에게 건넸다.
에스에르 전투원이었던 피시만은 시베리아 유형에서 탈출해 이탈리아 나폴리대학에서 폭발물·독가스 화학을 전공했고, 1917년 귀국 후 좌파 사회혁명당 중앙위원으로 1918년 미르바흐 암살의 폭탄을 직접 제조했다. 1920년 볼셰비키에 합류한 후 1925년 적군 군사화학국(VOKhIMU) 초대 국장으로 임명되어 소련 화학·생물학 무기 프로그램의 기초를 설계했고, 1928년 보고서에서 세균전의 공세적 운용을 주장했다. 1937년 체포되어 10년형을 받았으나 NKVD 특별기술국에서 방독면 신형을 개발했고, 1955년 복권되어 기술병 소장 계급을 받았다.
1918년 벨리키 우스튜크의 체카 지하실에서 사형을 기다리며 쓴 공개서한에서 소로킨은 에스에르 탈당과 정치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러시아 혁명기 사회주의혁명당(에스에르)의 주요 지도자로, 케렌스키 총리의 비서, 제헌의회 의원을 지냈다. 차르 체제에서 세 차례 투옥되었고 볼셰비키 집권 후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922년 '철학의 배'로 추방되었다. 미국으로 건너가 1930년 하버드대에 사회학과를 창설하고, 사회 계층화·사회 이동성 연구와 『사회문화동학』에서의 순환 이론으로 20세기 가장 중요한 사회학자 중 한 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