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르노보는 1914년 각서에서 경고했다: '러시아에서 정치혁명은 불가능하며, 모든 혁명운동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으로 변질될 것이다.'
표트르 두르노보는 러시아 제국 경찰국장(1884~1893)과 내무장관(1905~1906)을 지낸 보수 관료로, 1905년 혁명을 무력 진압해 '반혁명의 도살자'로 불렸다. 해군 장교에서 경찰 수장으로 변신한 특이한 이력을 지녔으며, 내무장관 시절 비테 총리와 대립하다 함께 퇴진했다. 1914년 니콜라이 2세에게 올린 각서에서 독일과의 전쟁이 제정의 붕괴와 사회혁명을 초래하리라 예측했고, 이 예언은 1917년 혁명으로 실현되었다.
"혁명을 막으려면 작은 승리의 전쟁이 필요합니다" — 러일전쟁을 앞두고 세르게이 비테에게 했다고 전해지는 말.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이나 러시아 정교도로 성장한 플레베는 1881년 알렉산드르 2세 암살 후 경찰국장으로 발탁되어 '인민의 의지'를 분쇄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02년 내무장관에 오른 그는 농민 봉기를 무력 진압하고 지방 자치기관(젬스트보)을 옥죄었으며, 경찰 주도의 노동운동(주바토프시나)을 시험했다가 곧 폐기하는 등 일관된 강경 노선으로 체제를 방어했다. 1904년 7월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의 예고르 사조노프가 던진 폭탄에 암살당했고, 그의 죽음은 스뱌토폴크-미르스키의 '신뢰의 시대'로 가는 문을 열어 피의 일요일 직전의 정치적 전환을 촉발했다.
「탄약을 아끼지 말라」는 초안을 읽은 모솔로프가 "제정신이냐"고 묻자, 트레포프는 답했다. "제정신이네. 내일이면 발포해야 할 거야. 지금까지 나는 피를 흘리지 않았어. 이 불행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 이 문구라네."
악명 높은 페테르부르크 시장의 아들로 태어나 모스크바 경찰을 거쳐 1905년 혁명기 제국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총독, 내무차관, 경찰 및 헌병대 사령관을 동시에 겸하며 독재적 권한을 행사했다. 1905년 10월 "빈 총알 쓰지 말고 실탄을 아끼지 말라"는 명령은 혁명의 상징이 되었고, 바로 그 순간 그가 밀어붙인 10월 선언은 시민적 자유를 약속했다. 선언 이후 궁정 경비사령관으로 밀려났지만 니콜라이 2세의 가장 신임받는 조언자로 남았고, 1906년 심부전으로 급사했다.
1917년 3월, 점심 식사 중 미하일 대공 퇴위 소식이 전해지자, 말없이 옆방으로 걸어가 권총 자살했다.
모스크바 오흐라나 국장(1896–1902)과 경찰국 특별부장(1902–1903)을 지내며, 유럽식 비밀수사 체계를 러시아에 도입한 정치경찰 근대화의 주역이다. 혁명 이론에 정통했던 그는 탄압만으로 혁명을 막을 수 없다고 보아, 노동자 경제투쟁을 정부가 중재하는 친정부 합법노조, 이른바 '주바톱시치나(경찰사회주의)'를 창안했다. 1903년 오데사 총파업으로 실험이 무너지고 플레베에게 축출되었으나, 사회개혁을 통한 전제체제 유지라는 그의 구상은 혁명 전야 구체제가 내놓은 가장 독창적인 대응으로 평가된다.
2월 24일, 발크는 하발로프에게 경찰이 '군중의 이동과 집결을 멈출 수 없다'고 보고하고 군에 전권을 이양했다.
알렉산드르 발크는 제정 러시아의 군인이자 경찰 관료로, 16년간 바르샤바 경찰에서 근무하며 도시 치안을 책임졌다. 1916년 11월 페트로그라드 시장(градоначальник)에 임명되어 식량 공급과 교통 문제에 적극 대처했으나, 1917년 2월 혁명 발발 나흘 만에 하발로프에게 경찰이 군중을 통제할 수 없다고 보고하고 군에 전권을 넘긴 뒤 체포되었다. 내전기 백군에 가담했고, 망명길에 올라 브라질의 한 수도원 양로원에서 91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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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제16라도가 보병연대 배속
1887근위 볼린스키 연대로 전속
1903–1915바르샤바 부경무총감 (1906 정식 임명, 1912 소장 진급), 독일군 점령 후 모스크바 주재
1916.11–1917.02페트로그라드 시장 (градоначальник)
1917.02–062월 혁명 중 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임시정부에 의해 석방
1918–1920백군 의용군 및 남러시아군 참전, 크림에서 철수
1920–1945유고슬라비아 망명, 볼린스키 연대 퇴역병회 및 러시아 장교협회 베오그라드 지부장
1918년 8월 30일, 레닌이 총격을 당해 크렘린으로 이송되자 비노쿠로프가 응급처치를 했다. 의대를 나온 혁명가가 6년 후 소련 사법부의 정점에 오를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의학을 공부한 볼셰비키 법률가로, 1924년부터 1938년까지 소련 최고재판소 초대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사법 체계의 기틀을 세웠다. 1903년 볼셰비키에 합류한 혁명 1세대로, 1893년 모스크바 사회민주주의 조직을 공동 창립하고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 시두마의 첫 볼셰비키 의장을 지냈다. 1918년 레닌 피격 직후 응급처치를 한 의사였으며, 1918–1921년 러시아 사회보장인민위원으로 복지 행정의 초석을 놓았다. 최고재판소 의장 재임기간 내내 비신스키·크릴렌코와 사법 통제권을 놓고 경쟁했고, 법의 규칙성을 중시했으나 대숙청에 제도적으로 연루되었다. 1938년 해임 후 보건인민위원부 위생교육 부서로 밀려났고, 1944년 자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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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1902모스크바·예카테리노슬라프 사회민주주의 조직 공동 창립; 체포·독방·유배
1903–1917볼셰비키 당원; 예카테리노슬라프·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당 활동, 「보험문제」지 편집
「나는 결코 무른 사람이 아니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내 손으로 모든 반혁명분자를 쏘아 죽이고도 마음이 평온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형이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반대한다」 — 페트로그라드 체카 동료들에게
체르카시 유대인 가정 출신. 키예프 대학 법학부 졸업 후 1898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처음에는 멘셰비키로 활동했다. 1917년 8월 제6차 당대회에서 볼셰비키에 합류해 중앙위원이 되었고, 10월 무장봉기 당시 군사혁명당중앙에서 봉기를 지휘했다. 1918년 3월 페트로그라드 체카 초대 의장에 임명되었으나 인질 구금과 초법적 처형에 반대하며 모스크바보다 절제된 노선을 취했다. 1918년 8월 30일 암살당했으며, 같은 날 레닌 피격과 함께 적색 테러 공식 선포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범죄자는 '현재 위험한 사람이며, 격리하거나 교화하려고 시도해야 하지만, 결코 복수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 1922년 형법 초안 작업 중
키예프 출신의 법률가로, 1904년 볼셰비키에 합류하여 모스크바 무장봉기와 육군 병사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918년부터 1928년까지 법무인민위원 겸 초대 검찰총장으로서 소비에트 형법·민법·가족법의 기초를 놓았고,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정치적 필요에 법을 종속시키는 '혁명적 합법성' 개념을 정식화했다. 1919~1920년에는 군사정보기관을 이끌었고, 말년에는 이탈리아 대사로 일했다.
인민재정위원이 된 첫날, 사무실로 소파를 끌어들여 '재정인민위원부'라고 써 붙이고 그 위에 누웠다. 레닌이 들어왔을 때 그는 잠들어 있었다.
폴란드 귀족 출신의 볼셰비키로, 19개 국어를 구사하고 은세기 문단에서 소설을 발표한 지식인이었다. 제르진스키 사후 1926년부터 1934년까지 OGPU 의장을 지내며 집단화, 초기 쇼 재판, 굴라그 체계 확대를 감독했다. 파리 망명 시절 교통사고 후유증과 심장병으로 대부분 병상에서 기관을 지휘했으며, 실무는 야고다에게 넘어갔다.
1926년 7월 20일, 연합반대파를 격렬히 비판하는 두 시간의 중앙위원회 연설을 마친 직후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육신은 이미 병들어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연단을 떠나지 않았다.
차르의 감옥과 유형지에서 11년을 보낸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 혁명가. 1917년 12월 체카를 창설해 적색 테러를 집행했고, 요원들에게 「깨끗한 손, 차가운 머리, 뜨거운 심장」을 요구했다. 1926년 중앙위원회에서 격렬한 연설을 마친 직후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가 만든 기관은 이름을 바꿔 가며 그보다 오래 살았다.
니콜라이에게 말했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당신을 사살하기로 결정했다고. 그가 "뭐라고?" 하며 알렉세이를 돌아보는 순간, 나는 그를 쏘아 즉사시켰다.
톰스크 현의 유대인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시계공이 되었고, 1905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8년 7월 이파티예프 하우스 사령관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로마노프 일가의 처형을 직접 지휘하고 차르를 자신의 마우저 권총으로 사살했으며, 시신의 은닉과 훼손까지 진두지휘했다. 내전 후 예카테린부르크 현 체카 의장과 모스크바 구역 체카 책임자를 역임했고, 1921년부터 국가귀금속보관소(Gokhran) 금 부서장으로 일하며 부패 척결에서 신망을 얻었다. 말년에는 모스크바 폴리테크닉 박물관장을 지냈으며, 대숙청 와중에 딸 리마가 트로츠키주의자로 체포된 직후인 1938년 위궤양 천공으로 사망했다.
「그렇다면 나는 거리에 있게 되겠군요」, 해임을 통보하는 달라디에와의 전화에서, 1934년 2월 3일. 우파 신문은 이 말을 거리로 나가겠다는 예고로 읽었고, 시아프는 실직을 뜻했을 뿐이라고 했다
코르시카 아자시오 출신의 경찰 관료로 1927년부터 1934년까지 파리 경찰청장을 지냈다. 좌파 시위에는 엄격하고 극우 동맹의 가두 행동에는 관대하다는 평이 따라다녔으며, 우파 신문과 참전군인 조직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1934년 2월 3일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그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자 우파는 공화국이 자기 편 경찰을 쳐낸 사건으로 받아들였고, 사흘 뒤 콩코르드 광장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해임된 뒤에도 파리에서 우파 정치의 중심 인물로 남았고, 1940년 비시 정권이 레반트 고등판무관으로 임명해 부임하던 길에 지중해 상공에서 비행기가 격추되어 죽었다.
“저는 결백하게 고통받고 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시간이 증명할 것입니다.” — 1939년 레포르토보 감옥에서 안드레예프에게 보낸 편지. 1956년 흐루쇼프가 제20차 당대회 비밀연설에서 이 편지를 낭독했다.
볼셰비키 군사조직에서 활동하다 1918년 9월 체카 군사부장, 이후 특별부장이 되어 북부 전선의 적색테러를 총괄했다. 아르한겔스크·볼로그다에서 수천 명을 처형하고, 홀모고리 절멸수용소를 세웠으며, 솔로베츠키 수도원을 폐쇄해 초기 강제노동수용소로 전환했다. 그의 아내 올가의 자매들은 니콜라이 포드보이스키와 결혼했고 아르투르 아르투조프의 어머니였다. 1921년 건강 악화로 체카를 떠난 뒤 경제·보건·스포르틴테른 등 변방 직책을 전전하다 1939년 체포되었고, 1941년 7월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베리야의 지시로 석방되지 못한 채 사라토프에서 총살되었다.
경찰이 압수한 그의 수학 공책을 가리키며 "이게 암호라면 풀어 보시지"라고 조롱했다. 차르 비밀경찰은 끝내 해독하지 못했다.
구 러시아 제국 말기 지하혁명운동에서 암호 작성술을 익힌 올드 볼셰비키.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과 동부·투르케스탄 전선 특별부장을 거쳐 1921년 체카 산하 스페츠오트델(Спецотдел)을 직접 기획·창설하여 1937년까지 이끌며 소련의 통합 암호·도청·무선정보 체계를 구축했다. 국가기밀 보호, 외교공관 도청 및 암호 해독, 무선 펠렌게이션, 최초의 정부보안통신망을 한 부서 아래 통합한 공로로 소련 신호정보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한편 솔로프키 특수수용소(SLON)의 큐레이터로서 굴라그 체계 초기 형성에도 관여했으며, 밀교와 티베트 탐사에 경도된 이력이 후일 기소의 빌미가 되었다.
1938년 7월 28일 군사재판부 법정에서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을 번복하며 "나는 '폴란드 군사조직'에 가담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으나, 재판은 20분 만에 끝났고 사형이 선고되었다.
폴란드 미아바(당시 러시아 제국 플로츠크 주)의 유대인 소시민 가정에서 태어나 바르샤바 고등기술과정에서 전기기사 자격을 얻었고, 1900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SDKPiL)에 입당했다. 1902~1913년 여러 차례 체포되어 차르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을 겪었다는 점은 사료가 일치하나 체포 횟수는 6차례와 7차례 기록이 갈린다. 1917년 이르쿠츠크 소비에트 위원이자 볼셰비키로 활동했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부 위원과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10월 봉기에 참여했으며 제헌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부터 체카·GPU 부의장을 지내고 1925~1930년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을 역임했으며,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으나 1956년 복권되었다.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봉기 당시 벨렌키는 제르진스키와 함께 체포되었다. 양측 서술은 이 사건을 7월 6일로도, 8월로도 기록한다.
1882년 또는 1883년 벨라루스 스베르줸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02년 1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볼셰비키로 활동하다 1904년 12월 프랑스로 망명했고, 파리에서 구두장이와 인쇄공으로 일하며 롱쥐모 당학교에서 레닌을 만났다. 1917년 5월 귀국해 12월까지 중앙위원회 인쇄소 《트루드》를 관리했고, 같은 해 12월 체카에 배속되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레닌 경호 책임자로 있었고, 1928년까지 당·정부 지도부 경호를 담당하는 특별부서를 이끌었다. 1930년부터 OGPU·NKVD 특별전권위원을 지냈으나 1938년 5월 9일 체포되어 1941년 10월 16일 코뮤나르카에서 총살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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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1904볼셰비키 지하운동, 반복 체포
1904–1917파리 망명: 구두장이·인쇄공, 롱쥐모 당학교 수학
1917.5–12중앙위원회 인쇄소 《트루드》 관리자
1919–1924레닌 경호 책임자
1921–1928ВЧК-ОГПУ 특별부서장 (당·정부 지도부 경호)
1930–1936ОГПУ·НКВД 특별전권위원
1936–1938특별전권위원 보좌역
1938–1941체포·수용소·총살
1917.12–체카 배속, 출판 문제 담당 체카 위원
1921–1928체카 위원회 위원, 체카 프레지디움 특별부서장, 이후 GPU·OGPU 특별부서장
베를린에서 중요한 요원과 접선하기 위해 역사학 교수로 위장했을 때, 단벌 신사 트릴리세르에겐 양복이 하나뿐이었다. 새 옷을 급히 맞추고 넥타이를 맨 그날이 그의 진짜 '출장'이었다.
아스트라한의 가난한 구두장이 집안에서 태어나 18세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직업혁명가. 1905년 카잔과 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전투조직을 이끌었고, 스베아보르크 봉기를 조직했으며, 5년간 슐리셀부르크 감옥에서 카토르가를 보냈다. 1922년부터 1929년까지 GPU·OGPU 해외부(INO) 부장으로서 소비에트 대외정보망의 토대를 구축했고, 1926년 OGPU 부의장까지 올랐다. 1938년 체포되어 1940년 총살당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솔제니친이 기록한 프렌켈의 공식: "수감자에게서 처음 3개월 안에 모든 것을 취하라 — 그 이후로는 필요 없다."
콘스탄티노플 태생의 유대계 상인으로, 오데사에서 '흑해의 목재왕'이라 불리던 밀수업자였다. 1924년 솔로프키 죄수로 수용된 후 노동량에 따라 식량을 차등 배급하는 '식량 기준제'를 제안해 1년 만에 수용소 행정가로 발탁되었다. 이후 백해-발트 운하, BAM, 철도건설총국을 이끌며 굴라그 강제노동 체계의 실질적 설계자가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볼가 록카다 철도를 6개월 만에 완공해 전황에 기여했으며, 레닌훈장 3회를 받고 중장으로 퇴역해 모스크바에서 병사했다.
“크리스털 같은 청렴함과 당에 대한 헌신… 타고난 부드러움이 혁명의 이익이 요구하는 곳에서는 무자비함과 공존했다.” — 동료 체키스트들의 증언, 1926년
스몰렌스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방직공장 노동자로 혁명운동에 투신한 볼셰비키. 1917년 12월 체카 창설 멤버로 합류해 제르진스키의 비서를 맡았고,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체카 제1부의장 겸 특별재판소장으로서 좌파SR 반란 진압, '전술중앙' 재판, 크론슈타트 봉기 진압을 직접 지휘했다. 내전기 내내 제르진스키·페테르스·라치스와 함께 '체카의 불변 지도핵심 4인'으로 불렸다. 1922년부터 1925년까지 당 중앙위원회 업무관리자로 스탈린의 기구 장악을 보좌했으며, 말년에는 사회보장 부인민위원을 지냈다.
1921년 초대 이녜 부장으로 취임한 모길렙스키에게 주어진 것은 겨우 몇 명의 요원과 모스크바의 허름한 사무실이 전부였다. 그로부터 불과 8개월 후 소비에트 해외정보기관의 첫 거점망이 유럽과 중동에 뿌리를 내렸다.
파블로그라드의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18세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직업혁명가. 1904년 체포된 뒤 스위스로 망명해 제네바에서 레닌을 만났고, 그의 추천으로 볼셰비키 분파에 합류했다. 1919년 전연방비상위원회(체카)에 배치되어 모스크바 체카와 특별부에서 활동했으며, 1921년 8월 GPU 해외부(INO)의 초대 부장으로 임명되어 소비에트 대외정보기관의 기초 조직을 구축했다. 1922년 자캅카스 GPU 전권대표 겸 의장으로 전임되어 튀르키예·이란 방면 첩보망을 지휘하고 1924년 그루지야 8월봉기 진압에 참여해 적기훈장을 받았다. 1925년 3월 트빌리시 근방에서 발생한 의문의 항공기 폭발 사고로 먀스니코프, 아타르베코프와 함께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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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파블로그라드 RSDLP 조직 입당
1904체포, 이후 스위스 망명 — 제네바에서 레닌과 만남
1906–1916러시아 귀국 후 예카테리노슬라프 선전활동, 대학 수학, 군 복무
1917민스크 RSDLP 위원, 4월 당 대회 대의원, 10월 혁명 참가
1917–1919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모스크바·키예프 사법기관, 제12군 혁명재판소
1919–1920모스크바 체카, 좌파 SR 음모 적발; GPU 특별부 전권대표
1921–1922GPU 해외부(INO) 부장 — 소비에트 대외정보기관 초대 책임자
1922–1925자캅카스 GPU 전권대표 겸 의장 — 튀르키예·이란 첩보, 1924년 8월봉기 진압
“그는 사형 영장에 서명할 때마다 육체적 고통을 느낀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그의 성격에는 감상적인 면이 강했지만, 볼셰비즘과 자본주의의 충돌에 관해서는 광신자였고 무자비한 의무감으로 목표를 추구했다.” — 영국 외교관 로버트 브루스 록하트, 1918년 회고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체카의 핵심 설계자. 1904년 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1905년 혁명 참여 후 런던 망명. 1917년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10월 봉기를 준비했고, 혁명 후 체카 부의장으로 보안기관의 초석을 놓았다. 1918년 좌파SR 반란 당시 체카 권한대행, 이후 GPU·OGPU 동부국장으로 중앙아시아 바스마치 소탕을 지휘했다.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총살, 1956년 복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