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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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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정보·치안 인물 210명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두르노보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Дурново

1905년 혁명을 무력 진압하고 세계대전의 파국을 예견한 제정 내무장관

두르노보는 1914년 각서에서 경고했다: '러시아에서 정치혁명은 불가능하며, 모든 혁명운동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으로 변질될 것이다.'

표트르 두르노보는 러시아 제국 경찰국장(1884~1893)과 내무장관(1905~1906)을 지낸 보수 관료로, 1905년 혁명을 무력 진압해 '반혁명의 도살자'로 불렸다. 해군 장교에서 경찰 수장으로 변신한 특이한 이력을 지녔으며, 내무장관 시절 비테 총리와 대립하다 함께 퇴진했다. 1914년 니콜라이 2세에게 올린 각서에서 독일과의 전쟁이 제정의 붕괴와 사회혁명을 초래하리라 예측했고, 이 예언은 1917년 혁명으로 실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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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0해군사관학교 졸업, 태평양·발트 함대 복무
  • 1870군사법률학교 졸업 후 법무성 검사보로 전임
  • 1884–1893내무성 경찰국장
  • 1893–1900원로원 의원
  • 1900–1905내무차관 (우편·전신 담당)
  • 1905.10–1906.04내무장관 (비테 내각)
  • 1906–1915국무회의 의원, 우파 그룹 지도자

뱌체슬라프 콘스탄티노비치 폰 플레베

Вячеслав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фон Плеве

짜르 체제를 지키려 "작은 승리의 전쟁"을 요구한 최후의 강경파 내무장관

"혁명을 막으려면 작은 승리의 전쟁이 필요합니다" — 러일전쟁을 앞두고 세르게이 비테에게 했다고 전해지는 말.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이나 러시아 정교도로 성장한 플레베는 1881년 알렉산드르 2세 암살 후 경찰국장으로 발탁되어 '인민의 의지'를 분쇄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02년 내무장관에 오른 그는 농민 봉기를 무력 진압하고 지방 자치기관(젬스트보)을 옥죄었으며, 경찰 주도의 노동운동(주바토프시나)을 시험했다가 곧 폐기하는 등 일관된 강경 노선으로 체제를 방어했다. 1904년 7월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의 예고르 사조노프가 던진 폭탄에 암살당했고, 그의 죽음은 스뱌토폴크-미르스키의 '신뢰의 시대'로 가는 문을 열어 피의 일요일 직전의 정치적 전환을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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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7법무부 입부, 검사보로 임관
  • 1879페테르부르크 사법부 검사
  • 1881경찰국장
  • 1884원로원 의원
  • 1885내무차관
  • 1894국무장관 겸 법전편찬 총괄
  • 1899핀란드 대공국 담당 장관-국무비서관
  • 1902내무장관 겸 헌병단장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트레포프

Дмитрий Фёдорович Трепов
보안·정보·치안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55–1906 ○ 심부전

진압 명령과 개혁 약속을 한 손에 쥔 1905년의 얼굴

「탄약을 아끼지 말라」는 초안을 읽은 모솔로프가 "제정신이냐"고 묻자, 트레포프는 답했다. "제정신이네. 내일이면 발포해야 할 거야. 지금까지 나는 피를 흘리지 않았어. 이 불행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 이 문구라네."

악명 높은 페테르부르크 시장의 아들로 태어나 모스크바 경찰을 거쳐 1905년 혁명기 제국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총독, 내무차관, 경찰 및 헌병대 사령관을 동시에 겸하며 독재적 권한을 행사했다. 1905년 10월 "빈 총알 쓰지 말고 실탄을 아끼지 말라"는 명령은 혁명의 상징이 되었고, 바로 그 순간 그가 밀어붙인 10월 선언은 시민적 자유를 약속했다. 선언 이후 궁정 경비사령관으로 밀려났지만 니콜라이 2세의 가장 신임받는 조언자로 남았고, 1906년 심부전으로 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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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4파제스키 군단 졸업, 근위기마연대 배속
  • 1877–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텔리시 전투에서 부상
  • 1896–1905모스크바 경찰총감
  • 1900소장 진급
  • 1905.1–10상트페테르부르크 총독 (비상대권)
  • 1905.5–10내무차관, 경찰·헌병대 사령관
  • 1905.10–1906.9황실 궁정 경비사령관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주바토프

Сергей Васильевич Зубатов

차르 체제 안에서 노동운동을 길들이려 한 경찰사회주의의 창안자

1917년 3월, 점심 식사 중 미하일 대공 퇴위 소식이 전해지자, 말없이 옆방으로 걸어가 권총 자살했다.

모스크바 오흐라나 국장(1896–1902)과 경찰국 특별부장(1902–1903)을 지내며, 유럽식 비밀수사 체계를 러시아에 도입한 정치경찰 근대화의 주역이다. 혁명 이론에 정통했던 그는 탄압만으로 혁명을 막을 수 없다고 보아, 노동자 경제투쟁을 정부가 중재하는 친정부 합법노조, 이른바 '주바톱시치나(경찰사회주의)'를 창안했다. 1903년 오데사 총파업으로 실험이 무너지고 플레베에게 축출되었으나, 사회개혁을 통한 전제체제 유지라는 그의 구상은 혁명 전야 구체제가 내놓은 가장 독창적인 대응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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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6–1889모스크바 오흐라나의 비밀정보원으로 혁명조직 침투
  • 1889–1896모스크바 오흐라나 특별임무관, 부국장으로 승진
  • 1896–1902모스크바 오흐라나 국장, 정치사찰 체계 근대화
  • 1901–1903친정부 합법노조 설립 — '경찰사회주의' 주도
  • 1902–1903경찰국 특별부장, 전국적 오흐라나 네트워크 구축
  • 1903–1917플레베에 의해 해임·유배, 후일 사면받았으나 공직 복귀 거부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발크

Александр Павлович Балк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페트로그라드 시장, 2월 혁명의 물결 앞에 선 경찰 관료

2월 24일, 발크는 하발로프에게 경찰이 '군중의 이동과 집결을 멈출 수 없다'고 보고하고 군에 전권을 이양했다.

알렉산드르 발크는 제정 러시아의 군인이자 경찰 관료로, 16년간 바르샤바 경찰에서 근무하며 도시 치안을 책임졌다. 1916년 11월 페트로그라드 시장(градоначальник)에 임명되어 식량 공급과 교통 문제에 적극 대처했으나, 1917년 2월 혁명 발발 나흘 만에 하발로프에게 경찰이 군중을 통제할 수 없다고 보고하고 군에 전권을 넘긴 뒤 체포되었다. 내전기 백군에 가담했고, 망명길에 올라 브라질의 한 수도원 양로원에서 91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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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6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제16라도가 보병연대 배속
  • 1887근위 볼린스키 연대로 전속
  • 1903–1915바르샤바 부경무총감 (1906 정식 임명, 1912 소장 진급), 독일군 점령 후 모스크바 주재
  • 1916.11–1917.02페트로그라드 시장 (градоначальник)
  • 1917.02–062월 혁명 중 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임시정부에 의해 석방
  • 1918–1920백군 의용군 및 남러시아군 참전, 크림에서 철수
  • 1920–1945유고슬라비아 망명, 볼린스키 연대 퇴역병회 및 러시아 장교협회 베오그라드 지부장
  • 1945–1957브라질 이주, 상파울루 근교 오자스쿠의 수도원 양로원에서 사망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비노쿠로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Винокуров

소련 최고재판소 초대 의장, 14년간 사법부를 이끈 의사 출신 볼셰비키

1918년 8월 30일, 레닌이 총격을 당해 크렘린으로 이송되자 비노쿠로프가 응급처치를 했다. 의대를 나온 혁명가가 6년 후 소련 사법부의 정점에 오를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의학을 공부한 볼셰비키 법률가로, 1924년부터 1938년까지 소련 최고재판소 초대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사법 체계의 기틀을 세웠다. 1903년 볼셰비키에 합류한 혁명 1세대로, 1893년 모스크바 사회민주주의 조직을 공동 창립하고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 시두마의 첫 볼셰비키 의장을 지냈다. 1918년 레닌 피격 직후 응급처치를 한 의사였으며, 1918–1921년 러시아 사회보장인민위원으로 복지 행정의 초석을 놓았다. 최고재판소 의장 재임기간 내내 비신스키·크릴렌코와 사법 통제권을 놓고 경쟁했고, 법의 규칙성을 중시했으나 대숙청에 제도적으로 연루되었다. 1938년 해임 후 보건인민위원부 위생교육 부서로 밀려났고, 1944년 자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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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1902모스크바·예카테리노슬라프 사회민주주의 조직 공동 창립; 체포·독방·유배
  • 1903–1917볼셰비키 당원; 예카테리노슬라프·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당 활동, 「보험문제」지 편집
  • 1917.10첫 볼셰비키 페트로그라드 시두마 의장; 노동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 1918–1921러시아 사회보장인민위원
  • 1921–1924기근구제위원회 및 기근후속대책위원회 위원
  • 1924–1938소련 최고재판소 의장
  • 1938–1944보건인민위원부 위생교육부장; 메드기즈 근무

아론 알렉산드로비치 솔츠

Аро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ольц

당의 양심이라 불린 볼셰비키 원로, 대숙청기에 검찰총장과 맞선 법률가

「나는 뜨리포노프를 30년 동안 진짜 볼셰비키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너는 멘셰비키로 알고 있다!」 — 1938년, 체포된 동료를 변호하며 비신스키에게 던진 말.

1898년 입당한 볼셰비키 법률가. 중앙통제위원회에서 당 윤리 체계를 설계해 '당의 양심'으로 불렸다. 1937년 비신스키의 조작 사건을 공개 비판한 뒤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되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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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РСДРП) 입당
  • 1903–1905예까쩨리노슬라브 지하인쇄소 조직 혐의로 체포, 6년형 선고 후 조기 석방
  • 1905–1917뚜멘·뚜린스크·나름에서 유형 생활; 첫 비합법 신문 『뚜멘스끼 라보치』 발행
  • 1917모스크바 당위원회 위원, 『사회민주주의자』『쁘라브다』 편집진
  • 1920–1934중앙통제위원회(ЦКК) 위원 및 상임위원 (1923–1934); 당 윤리·징계 제도 구축
  • 1921–1934러시아·소련 대법원 판사, 노동농민감찰원 법률부장
  • 1935–1938.2소련 부검사 (비신스키 산하), 대법원 법률합의체 의장
  • 1938.2–1945비신스키 비판 후 강제 정신병원 격리; 말년에 민족박물관 기록보관원

모이세이 솔로모노비치 우리츠키

Моисей Соломонович Урицкий

붉은 테러를 막으려 했으나 그 방아쇠가 된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

「나는 결코 무른 사람이 아니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내 손으로 모든 반혁명분자를 쏘아 죽이고도 마음이 평온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형이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반대한다」 — 페트로그라드 체카 동료들에게

체르카시 유대인 가정 출신. 키예프 대학 법학부 졸업 후 1898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처음에는 멘셰비키로 활동했다. 1917년 8월 제6차 당대회에서 볼셰비키에 합류해 중앙위원이 되었고, 10월 무장봉기 당시 군사혁명당중앙에서 봉기를 지휘했다. 1918년 3월 페트로그라드 체카 초대 의장에 임명되었으나 인질 구금과 초법적 처형에 반대하며 모스크바보다 절제된 노선을 취했다. 1918년 8월 30일 암살당했으며, 같은 날 레닌 피격과 함께 적색 테러 공식 선포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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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s키예프에서 사회민주주의 운동 시작
  • 1897키예프 대학 법학부 졸업, 군 복무 중 선동 혐의 체포
  • 1901–05야쿠티야 올료크민스크 8년형 유형, 1905년 탈출
  • 1906–14볼로그다·아르한겔스크 유형, 1912년 빈 SD 회의 참가
  • 1914–17망명: 『나셰 슬로보』 특파원, 스톡홀름 체류
  •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1917.7–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 합류, 중앙위원
  • 1917.10–12군사혁명당중앙·VRK 위원, 제헌의회 선거관리위원
  • 1918.3–8페트로그라드 체카 초대 의장, 내무위원 겸임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쿠르스키

Дмитрий Иванович Курский

혁명적 합법성의 건축가, 첫 소비에트 법무인민위원 겸 검찰총장

범죄자는 '현재 위험한 사람이며, 격리하거나 교화하려고 시도해야 하지만, 결코 복수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 1922년 형법 초안 작업 중

키예프 출신의 법률가로, 1904년 볼셰비키에 합류하여 모스크바 무장봉기와 육군 병사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918년부터 1928년까지 법무인민위원 겸 초대 검찰총장으로서 소비에트 형법·민법·가족법의 기초를 놓았고,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정치적 필요에 법을 종속시키는 '혁명적 합법성' 개념을 정식화했다. 1919~1920년에는 군사정보기관을 이끌었고, 말년에는 이탈리아 대사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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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1900모스크바대학 법학부 졸업, 변호사 개업
  • 1904RSDRP 가입, 1905년 모스크바 12월 무장봉기 참여
  • 1906–1909RSDRP(b) 모스크바 지역국 위원, 볼셰비키 신문 발행 참여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에 소위로 동원, 루마니아 전선 제4군 병사위원회 의장
  • 1917.10오데사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8–1928RSFSR 법무인민위원 겸 초대 검찰총장 — 형법·민법·가족법 초안 주도
  • 1919–1920전러시아 총참모부 및 야전참모부 정치위원, 군사정보 등록국장
  • 1928–1932주이탈리아 소련 전권대표

뱌체슬라프 루돌포비치 멘진스키

Вячеслав Рудольфович Менжинский

병상에서 OGPU를 지휘한 제르진스키의 후계자

인민재정위원이 된 첫날, 사무실로 소파를 끌어들여 '재정인민위원부'라고 써 붙이고 그 위에 누웠다. 레닌이 들어왔을 때 그는 잠들어 있었다.

폴란드 귀족 출신의 볼셰비키로, 19개 국어를 구사하고 은세기 문단에서 소설을 발표한 지식인이었다. 제르진스키 사후 1926년부터 1934년까지 OGPU 의장을 지내며 집단화, 초기 쇼 재판, 굴라그 체계 확대를 감독했다. 파리 망명 시절 교통사고 후유증과 심장병으로 대부분 병상에서 기관을 지휘했으며, 실무는 야고다에게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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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s–1917볼셰비키 지하활동과 망명, 혁명 뒤 재무·외교 업무 수행
  • 1919–1923체카와 GPU에서 제르진스키의 측근으로 보안 업무에 진입
  • 1926–1934OGPU 의장, 병약한 수장 아래 야고다 등 실무진이 성장
  • 1928–1933샤흐티 사건, 산업당 사건 등 초기 쇼 재판과 강제수용 체계 확대기 감독
  • 1934사망 뒤 OGPU가 NKVD로 편입되고 야고다가 내무인민위원이 됨

「철의 펠릭스」: 혁명의 칼을 만든 금욕주의자

1926년 7월 20일, 연합반대파를 격렬히 비판하는 두 시간의 중앙위원회 연설을 마친 직후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육신은 이미 병들어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연단을 떠나지 않았다.

차르의 감옥과 유형지에서 11년을 보낸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 혁명가. 1917년 12월 체카를 창설해 적색 테러를 집행했고, 요원들에게 「깨끗한 손, 차가운 머리, 뜨거운 심장」을 요구했다. 1926년 중앙위원회에서 격렬한 연설을 마친 직후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가 만든 기관은 이름을 바꿔 가며 그보다 오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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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17체포와 유형 11년, 1917년 석방
  • 1917.12체카 창설, 의장
  • 1921–24교통인민위원 겸임: 철도 복구
  • 1924–26국민경제최고회의 의장: 공업 재건
  • 1926.7중앙위 연설 직후 심장마비로 사망

야코프 미하일로비치 유롭스키

Яков Михайлович Юровский
보안·정보·치안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78–1938 ○ 위궤양 천공

마지막 차르를 손수 사살한 체카 집행자

니콜라이에게 말했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당신을 사살하기로 결정했다고. 그가 "뭐라고?" 하며 알렉세이를 돌아보는 순간, 나는 그를 쏘아 즉사시켰다.

톰스크 현의 유대인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시계공이 되었고, 1905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8년 7월 이파티예프 하우스 사령관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로마노프 일가의 처형을 직접 지휘하고 차르를 자신의 마우저 권총으로 사살했으며, 시신의 은닉과 훼손까지 진두지휘했다. 내전 후 예카테린부르크 현 체카 의장과 모스크바 구역 체카 책임자를 역임했고, 1921년부터 국가귀금속보관소(Gokhran) 금 부서장으로 일하며 부패 척결에서 신망을 얻었다. 말년에는 모스크바 폴리테크닉 박물관장을 지냈으며, 대숙청 와중에 딸 리마가 트로츠키주의자로 체포된 직후인 1938년 위궤양 천공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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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톰스크에서 볼셰비키 입당
  • 1912체포되어 예카테린부르크로 유배; 사진관 개업
  • 1917예카테린부르크 소비에트 위원; 군사부에서 골로쇼킨의 부관
  • 1918이파티예프 하우스 사령관; 7월 17일 로마노프 일가 처형 지휘
  • 1918–1919모스크바 체카 콜레기움 위원, 구역 체카 책임자
  • 1919예카테린부르크 현 체카 의장
  • 1921국가귀금속보관소(Gokhran) 금 부서장
  • 1928–1933폴리테크닉 박물관장

장 시아프

Jean Chiappe

좌파에 엄격하고 동맹에 관대했던 파리 경찰청장, 그 해임이 2월 6일의 도화선이 되다

「그렇다면 나는 거리에 있게 되겠군요」, 해임을 통보하는 달라디에와의 전화에서, 1934년 2월 3일. 우파 신문은 이 말을 거리로 나가겠다는 예고로 읽었고, 시아프는 실직을 뜻했을 뿐이라고 했다

코르시카 아자시오 출신의 경찰 관료로 1927년부터 1934년까지 파리 경찰청장을 지냈다. 좌파 시위에는 엄격하고 극우 동맹의 가두 행동에는 관대하다는 평이 따라다녔으며, 우파 신문과 참전군인 조직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1934년 2월 3일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그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자 우파는 공화국이 자기 편 경찰을 쳐낸 사건으로 받아들였고, 사흘 뒤 콩코르드 광장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해임된 뒤에도 파리에서 우파 정치의 중심 인물로 남았고, 1940년 비시 정권이 레반트 고등판무관으로 임명해 부임하던 길에 지중해 상공에서 비행기가 격추되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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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8코르시카 아자시오에서 출생
  • 1900년대–1926경찰 행정의 요직을 거치며 승진
  • 1927–1934파리 경찰청장
  • 1934.02.03달라디에가 해임, 모로코 총감 제안을 거부
  • 1935–1940파리 우파 정치의 중심 인물로 남음
  • 1940.11비시의 레반트 고등판무관 임명, 부임 길에 격추되어 사망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케드로프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Кедров

체카 특별부를 이끌며 북부 적색테러와 최초의 강제수용소 체계를 구축한 올드 볼셰비키

“저는 결백하게 고통받고 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시간이 증명할 것입니다.” — 1939년 레포르토보 감옥에서 안드레예프에게 보낸 편지. 1956년 흐루쇼프가 제20차 당대회 비밀연설에서 이 편지를 낭독했다.

볼셰비키 군사조직에서 활동하다 1918년 9월 체카 군사부장, 이후 특별부장이 되어 북부 전선의 적색테러를 총괄했다. 아르한겔스크·볼로그다에서 수천 명을 처형하고, 홀모고리 절멸수용소를 세웠으며, 솔로베츠키 수도원을 폐쇄해 초기 강제노동수용소로 전환했다. 그의 아내 올가의 자매들은 니콜라이 포드보이스키와 결혼했고 아르투르 아르투조프의 어머니였다. 1921년 건강 악화로 체카를 떠난 뒤 경제·보건·스포르틴테른 등 변방 직책을 전전하다 1939년 체포되었고, 1941년 7월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베리야의 지시로 석방되지 못한 채 사라토프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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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5RSDDP 가입, 코스트로마 노동자대 조직, 모스크바 봉기 무기 공급
  • 1912–1916스위스 망명, 의학 학위 취득, 레닌의 측근
  • 1917군사조직 위원, 『솔다츠카야 프라브다』 편집, 군 해산 인민위원
  • 1918.9–1919체카 군사부장 → 특별부장 (내전기 군내 숙청 총괄)
  • 1920–1921체카 북부 전권대표: 홀모고리·페르토민스크·솔로베츠키 수용소 설립
  • 1927–1931적색스포츠인터내셔널 의장
  • 1939–1941체포·고문, 무죄 판결에도 석방되지 않고 총살

글레프 이바노비치 보키

Глеб Иванович Бокий

소련 신호정보의 아버지, 체카 스페츠오트델 창설자

경찰이 압수한 그의 수학 공책을 가리키며 "이게 암호라면 풀어 보시지"라고 조롱했다. 차르 비밀경찰은 끝내 해독하지 못했다.

구 러시아 제국 말기 지하혁명운동에서 암호 작성술을 익힌 올드 볼셰비키.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과 동부·투르케스탄 전선 특별부장을 거쳐 1921년 체카 산하 스페츠오트델(Спецотдел)을 직접 기획·창설하여 1937년까지 이끌며 소련의 통합 암호·도청·무선정보 체계를 구축했다. 국가기밀 보호, 외교공관 도청 및 암호 해독, 무선 펠렌게이션, 최초의 정부보안통신망을 한 부서 아래 통합한 공로로 소련 신호정보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한편 솔로프키 특수수용소(SLON)의 큐레이터로서 굴라그 체계 초기 형성에도 관여했으며, 밀교와 티베트 탐사에 경도된 이력이 후일 기소의 빌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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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RSDLP 입당, 페테르부르크 볼셰비키 지하조직 활동
  • 1904–1909RSDLP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위원
  • 1917.04–1918.03RSDLP(b) 페트로그라드 시위원회 서기
  • 1918.03–08북부지역·페트로그라드 체카 부의장
  • 1918.08–11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
  • 1919.01–09동부전선 체카 특별부장
  • 1919.09–1920.08투르케스탄 전선 체카 특별부장
  • 1921–1937체카·GPU·OGPU·GUGB NKVD 스페츠오트델(제9부) 국장
  • 1923–1934OGPU 콜레기야 위원
  • 1935국가보안 3등급 정치위원

이오시프 스타니슬라보비치 운쉴리흐트

Иосиф Станиславович Уншлихт

체카 부의장에서 민간항공까지: 혁명의 전천후 조직가

1938년 7월 28일 군사재판부 법정에서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을 번복하며 "나는 '폴란드 군사조직'에 가담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으나, 재판은 20분 만에 끝났고 사형이 선고되었다.

폴란드 미아바(당시 러시아 제국 플로츠크 주)의 유대인 소시민 가정에서 태어나 바르샤바 고등기술과정에서 전기기사 자격을 얻었고, 1900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SDKPiL)에 입당했다. 1902~1913년 여러 차례 체포되어 차르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을 겪었다는 점은 사료가 일치하나 체포 횟수는 6차례와 7차례 기록이 갈린다. 1917년 이르쿠츠크 소비에트 위원이자 볼셰비키로 활동했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부 위원과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10월 봉기에 참여했으며 제헌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부터 체카·GPU 부의장을 지내고 1925~1930년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을 역임했으며,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으나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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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SDKPiL 입당, 이후 RSDLP 볼셰비키 분파 합류
  • 1900–1917여섯 차례 체포, 차르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제헌의회 의원
  • 1917–1918내무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프스코프 전선
  • 1919리투아니아-벨로루시 SSR 군사인민위원
  • 1920서부전선·제16군 혁명군사평의회,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
  • 1921–1923체카·GPU 부의장, 능동정찰 특별국, 지식인 추방
  • 1925–1930소련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겸 육해군 부인민위원
  • 1927–1930오소아비아힘 의장
  • 1930–1933고스플란 부의장 (군수공업)
  • 1933–1935민간항공총국장
  • 1935중앙집행위원회 연방회의 서기 직무대행

소비에트 리투아니아의 내무 인민위원, 대숙청에 희생된 리투아니아 공산당 지도자

리투아니아가 독립 국가로 남도록 촉구했으나, 스스로는 그 독립을 사회주의 국가로 상상했다.

리투아니아 공산당 지도자로 1918~1919년 소비에트 리투아니아와 리트벨의 내무 인민위원을 지냈다. 망명 뒤 코민테른에서 일하며 리투아니아 노동운동사를 썼고, 1938년 체포되어 1940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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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 입당(1907년부터 중앙위원)
  • 1909체포되어 4년 카토르가형 선고, 이후 예니세이 지방 유형
  • 1917페트로그라드에서 리투아니아 담당 부인민위원, 『티에사』 편집
  • 1918–1919최초의 소비에트 리투아니아 정부 내무 인민위원
  • 1920리투아니아 공산당 해외국 서기(1921년부터 코민테른 집행위 대표)
  • 1926–1935코민테른 국제통제위원회 의장

아브람 야코블레비치 벨렌키

Абрам Яковлевич Беленький

레닌의 개인 경호를 맡은 체카 창립 멤버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봉기 당시 벨렌키는 제르진스키와 함께 체포되었다. 양측 서술은 이 사건을 7월 6일로도, 8월로도 기록한다.

1882년 또는 1883년 벨라루스 스베르줸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02년 1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볼셰비키로 활동하다 1904년 12월 프랑스로 망명했고, 파리에서 구두장이와 인쇄공으로 일하며 롱쥐모 당학교에서 레닌을 만났다. 1917년 5월 귀국해 12월까지 중앙위원회 인쇄소 《트루드》를 관리했고, 같은 해 12월 체카에 배속되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레닌 경호 책임자로 있었고, 1928년까지 당·정부 지도부 경호를 담당하는 특별부서를 이끌었다. 1930년부터 OGPU·NKVD 특별전권위원을 지냈으나 1938년 5월 9일 체포되어 1941년 10월 16일 코뮤나르카에서 총살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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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1904볼셰비키 지하운동, 반복 체포
  • 1904–1917파리 망명: 구두장이·인쇄공, 롱쥐모 당학교 수학
  • 1917.5–12중앙위원회 인쇄소 《트루드》 관리자
  • 1919–1924레닌 경호 책임자
  • 1921–1928ВЧК-ОГПУ 특별부서장 (당·정부 지도부 경호)
  • 1930–1936ОГПУ·НКВД 특별전권위원
  • 1936–1938특별전권위원 보좌역
  • 1938–1941체포·수용소·총살
  • 1917.12–체카 배속, 출판 문제 담당 체카 위원
  • 1921–1928체카 위원회 위원, 체카 프레지디움 특별부서장, 이후 GPU·OGPU 특별부서장
  • 1936–1938NKVD 특별전권위원 보좌역
  • 1938–1941체포·수용소·총살, 1956년 복권

테렌티 드미트리예비치 데리바스

Терентий Дмитриевич Дерибас

극동의 보안 총독

1937년 8월 11일, 예조프류시코프의 전보를 스탈린에게 전달하자, 스탈린은 여백에 직접 써넣었다. "데리바스를 체포해야 할 것이다. 스탈린." 몰로토프보로실로프가 '찬성'을 덧붙였고, 데리바스는 다음 날 체포되었다.

볼셰비키 체키스트 출신으로 1929년부터 극동 OGPU-NKVD 전권대표를 맡아 대일 방첩 작전과 BAM 강제노동 건설을 지휘했다. 8년간 '극동의 총독'으로 불렸으나 대숙청에 휩쓸려 1938년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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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7GPU·OGPU 비밀국장
  • 1927–1929OGPU 비밀작전총국 제1부국장
  • 1929–1934극동변경주 주재 OGPU 전권대표
  • 1933–1934BAM 건설 책임자
  • 1934–1937극동변경주 NKVD 관리국장 겸 극동군 특별부장
  • 1937–1938체포, 재판과 처형

미하일 아브라모비치 트릴리세르

Меер Абрамович Трилиссер

소비에트 해외정보기관의 설계자, 이녜의 7년

베를린에서 중요한 요원과 접선하기 위해 역사학 교수로 위장했을 때, 단벌 신사 트릴리세르에겐 양복이 하나뿐이었다. 새 옷을 급히 맞추고 넥타이를 맨 그날이 그의 진짜 '출장'이었다.

아스트라한의 가난한 구두장이 집안에서 태어나 18세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직업혁명가. 1905년 카잔과 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전투조직을 이끌었고, 스베아보르크 봉기를 조직했으며, 5년간 슐리셀부르크 감옥에서 카토르가를 보냈다. 1922년부터 1929년까지 GPU·OGPU 해외부(INO) 부장으로서 소비에트 대외정보망의 토대를 구축했고, 1926년 OGPU 부의장까지 올랐다. 1938년 체포되어 1940년 총살당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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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RSDLP 입당, 직업혁명가
  • 1905–1907카잔·페테르부르크 전투조직, 스베아보르크 봉기 주도
  • 1909–19145년 카토르가, 이후 이르쿠츠크주 영구유형
  • 1917–1921시베리아 체카·아무르 혁명위 활동, 극동 첩보망 구축
  • 1922–1929GPU·OGPU 해외부(INO) 부장 — 대외정보 체계 창설
  • 1926–1929OGPU 부의장 겸임
  • 1930–1934노농감찰 부인민위원, 중앙통제위원회 상임위원
  • 1935–1938코민테른 집행위 간부위원 (필명 '모스크빈')

나프탈리 아로노비치 프렌켈

Нафталий Аронович Френкель

죄수에서 총국장으로, 제 침대에서 죽은 굴라크 행정가

솔제니친이 기록한 프렌켈의 공식: "수감자에게서 처음 3개월 안에 모든 것을 취하라 — 그 이후로는 필요 없다."

콘스탄티노플 태생의 유대계 상인으로, 오데사에서 '흑해의 목재왕'이라 불리던 밀수업자였다. 1924년 솔로프키 죄수로 수용된 후 노동량에 따라 식량을 차등 배급하는 '식량 기준제'를 제안해 1년 만에 수용소 행정가로 발탁되었다. 이후 백해-발트 운하, BAM, 철도건설총국을 이끌며 굴라그 강제노동 체계의 실질적 설계자가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볼가 록카다 철도를 6개월 만에 완공해 전황에 기여했으며, 레닌훈장 3회를 받고 중장으로 퇴역해 모스크바에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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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7솔로프키 수용소 죄수에서 행정가로
  • 1931–1933백해-발트 운하 공사 책임자
  • 1933–1937BAM 수용소장
  • 1937–1947NKVD·MVD 철도건설총국장
  • 1947중장 계급과 연금으로 퇴역

이반 크세노폰토비치 크세노폰토프

Иван Ксенофонтович Ксенофонтов

체카의 영원한 2인자, 혁명재판의 설계자

“크리스털 같은 청렴함과 당에 대한 헌신… 타고난 부드러움이 혁명의 이익이 요구하는 곳에서는 무자비함과 공존했다.” — 동료 체키스트들의 증언, 1926년

스몰렌스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방직공장 노동자로 혁명운동에 투신한 볼셰비키. 1917년 12월 체카 창설 멤버로 합류해 제르진스키의 비서를 맡았고,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체카 제1부의장 겸 특별재판소장으로서 좌파SR 반란 진압, '전술중앙' 재판, 크론슈타트 봉기 진압을 직접 지휘했다. 내전기 내내 제르진스키·페테르스·라치스와 함께 '체카의 불변 지도핵심 4인'으로 불렸다. 1922년부터 1925년까지 당 중앙위원회 업무관리자로 스탈린의 기구 장악을 보좌했으며, 말년에는 사회보장 부인민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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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RSDRP 입당, 볼셰비키 분파
  • 1905–1914모스크바·리가에서 혁명 활동, 수차례 체포
  • 1914–1917서부전선 복무, 네스비시·슬루츠크 소비에트 의장
  • 1917.12체카 창설 멤버, 제르진스키 비서
  • 1919–1921체카 제1부의장 겸 특별재판소장
  • 1921크론슈타트 봉기 진압 참여
  • 1922–1925RKP(b) 중앙위원회 업무관리자
  • 1925–1926RSFSR 사회보장 부인민위원

솔로몬 그리고리예비치 모길렙스키

Соломон Григорьевич Могилевский
보안·정보·치안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85–1925 ✕ 항공사고

소비에트 대외정보기관의 첫 책임자: 이녜의 토대를 놓은 8개월

1921년 초대 이녜 부장으로 취임한 모길렙스키에게 주어진 것은 겨우 몇 명의 요원과 모스크바의 허름한 사무실이 전부였다. 그로부터 불과 8개월 후 소비에트 해외정보기관의 첫 거점망이 유럽과 중동에 뿌리를 내렸다.

파블로그라드의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18세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직업혁명가. 1904년 체포된 뒤 스위스로 망명해 제네바에서 레닌을 만났고, 그의 추천으로 볼셰비키 분파에 합류했다. 1919년 전연방비상위원회(체카)에 배치되어 모스크바 체카와 특별부에서 활동했으며, 1921년 8월 GPU 해외부(INO)의 초대 부장으로 임명되어 소비에트 대외정보기관의 기초 조직을 구축했다. 1922년 자캅카스 GPU 전권대표 겸 의장으로 전임되어 튀르키예·이란 방면 첩보망을 지휘하고 1924년 그루지야 8월봉기 진압에 참여해 적기훈장을 받았다. 1925년 3월 트빌리시 근방에서 발생한 의문의 항공기 폭발 사고로 먀스니코프, 아타르베코프와 함께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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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파블로그라드 RSDLP 조직 입당
  • 1904체포, 이후 스위스 망명 — 제네바에서 레닌과 만남
  • 1906–1916러시아 귀국 후 예카테리노슬라프 선전활동, 대학 수학, 군 복무
  • 1917민스크 RSDLP 위원, 4월 당 대회 대의원, 10월 혁명 참가
  • 1917–1919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모스크바·키예프 사법기관, 제12군 혁명재판소
  • 1919–1920모스크바 체카, 좌파 SR 음모 적발; GPU 특별부 전권대표
  • 1921–1922GPU 해외부(INO) 부장 — 소비에트 대외정보기관 초대 책임자
  • 1922–1925자캅카스 GPU 전권대표 겸 의장 — 튀르키예·이란 첩보, 1924년 8월봉기 진압

야코프 흐리스토포로비치 페테르스

Яков Христофорович Петерс

체카 창설 부의장, 명예체키스트 제2호

“그는 사형 영장에 서명할 때마다 육체적 고통을 느낀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그의 성격에는 감상적인 면이 강했지만, 볼셰비즘과 자본주의의 충돌에 관해서는 광신자였고 무자비한 의무감으로 목표를 추구했다.” — 영국 외교관 로버트 브루스 록하트, 1918년 회고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체카의 핵심 설계자. 1904년 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1905년 혁명 참여 후 런던 망명. 1917년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10월 봉기를 준비했고, 혁명 후 체카 부의장으로 보안기관의 초석을 놓았다. 1918년 좌파SR 반란 당시 체카 권한대행, 이후 GPU·OGPU 동부국장으로 중앙아시아 바스마치 소탕을 지휘했다.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총살,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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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LSDRP) 입당
  • 1907–1908체포·기소, 리가 군사법원에서 무죄 판결
  • 1909–1917런던 망명, 영국 사회당 및 라트비아 SD 그룹 활동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0월 무장봉기 준비
  • 1917.12–1918.07체카 부의장 (제1대)
  • 1918.07–1918.08체카 권한대행 의장 — 좌파SR 반란 진압
  • 1918.08–1919.03체카 부의장, 카플란 사건·로카트 음모 수사
  • 1920–1922투르키스탄 전권대표·타슈켄트 체카장, 바스마치 소탕
  • 1922–1929GPU·OGPU 동부국장, 국경군 감찰관 겸임
  • 1930–1934모스크바 통제위원회 위원장, 중앙통제위원회 위원
  • 1934–1937당 통제위원회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