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농민 가정 출신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내전에서 가장 용맹한 적군 지휘관 중 한 명으로 떠올랐다. 북카프카스, 크림, 탐보프, 크론슈타트 등 모든 주요 전선에서 부대를 지휘하며 적기훈장을 네 차례 수훈했다. 전후 군단·군관구 지휘관을 거쳐 1937년 키예프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38년 1등군사령관 계급과 함께 국방제1부인민위원에 올랐다. 대숙청기에는 키예프군관구에서 자신도 대규모 숙청을 주도했으나, 같은 해 7월 체포되어 고문 끝에 '군사 파시스트 음모'를 자백했다. 1939년 2월 사형 판결을 받고 당일 총살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제5차 콤소몰 대회에서 한 대의원이 스모로딘을 "노동청년의 지도자"로 전국에 선전하자고 제안하자, 그는 단상에서 이렇게 쏘아붙였다. "무슨 까닭에 나를 성상(이콘)으로 만들려는 거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4세에 페트로그라드 외과기구 공장의 견습공이 되었고, 1917년 5월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0월 무장봉기에 직접 참가했다. 페트로그라드 사회주의 노동청년동맹(SSRM) 창설을 주도했고, 1921년부터 1924년까지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서 NEP 시기 청년 조직의 대중적 기반을 다지고 '배움'을 콤소몰의 핵심 과제로 내세웠다. 이후 레닌그라드와 스탈린그라드 당 지역위원회 서기를 역임했고, NKVD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에 가담했으나 1938년 '인민의 적'으로 체포되어 1939년 총살당했으며 1954년 사후 복권되었다.
1938년 10월 체포된 뒤 그는 독일·폴란드·프랑스를 위해 간첩 활동을 했다고 「자백」했다. 2년 동안 그가 남들에게서 받아 내던 바로 그런 종류의 자백이었다.
코노토프의 우크라이나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키예프에서 김나지움을 마치고 법학부를 다니다 제정군 하급 장교로 복무했고, 1918년 적군에 들어갔다. 1919년부터 체카 군 방첩에서 일했으며 예브도키모프 아래에서 우크라이나와 북캅카스 보안기관을 거쳐 올라왔다. 1936년 말 모스크바로 옮겨 NKVD 작전부장이 되었고, 1937년부터 적군 탄압의 주무 부서인 특수부(제5부)와 방첩부를 차례로 이끌며 폴란드·독일·라트비아·조선인 민족 작전을 감독했다. 1938년 10월 체포되어 1940년 2월 예조프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됐다. 2013년 러시아 대법원은 그를 복권 대상이 아니라고 판정했다.
파리 몽마르트르 대로 근처에서 생선가게 주인으로 위장해 소련의 유럽 불법 첩보망을 지휘하던 시절, 그의 가게는 백군 망명자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침투 작전의 거점이었다.
1936년부터 소련 대외정보국(INO NKVD) 부국장, 1938년 2월부터 6월까지 국장 대행을 지냈다. 4개 국어에 능통한 체카 출신으로, 대숙청 시기 NKVD의 가장 중대한 해외 공작들(파리에서 백군 장군 예브게니 밀레르 납치, 스위스에서 망명자 이그나티 레이스 암살, 로테르담에서 OUN 지도자 예브헨 코노발레츠 제거)을 직접 지휘했다. 생선가게 주인으로 위장해 파리 불법 거점을 운영했으며, NKVD 특수목적학교에서 후대 정보장교들을 양성했다.
예조프에게 라트비아인 500명 체포를 청했다가 "말도 안 돼, 1,500~2,000명은 체포하라, 그들은 모두 민족주의자다"라는 답을 받았다.
모스크바 노동자 출신으로, 적군 복무와 국가계획위원회 당비서를 거쳐 1927년 OGPU에 입문했다. 1937년 스몰렌스크 UNKVD 국장으로서 '라트비아 민족중심' 사건을 조작해 예조프에게 보고했고, 예조프의 "라트비아인 1,500~2,000명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받아내 라트비아 작전 전역을 촉발시켰다. 1938년 벨라루스 내무인민위원으로서 독일·폴란드·라트비아·리투아니아계 주민을 겨냥한 대량 체포와 즉결처형 체계를 도입해 수개월 만에 수천 명을 사살했으며, 1938년 12월 베리야의 NKVD 숙청으로 체포돼 1940년 1월 총살되고 복권되지 않았다.
1940년 12월 고위지휘관 회의에서 파블로프는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는 인민의 적이 너무 많아서, 그 모두가 정말 적이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스탈린 시대에 장군의 입에서 나온 보기 드문 직언이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전차여단을 지휘하며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고, 1937년부터 붉은군대 자동차장갑전차국장으로서 T-34 개발과 기갑 교리를 주도한 소련 기갑군의 설계자였다. 농민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포로가 될 때까지 싸웠고, 붉은군대에 합류해 시베리아에서 바스마치 반란까지 진압했다. 1941년 6월 서부전선 사령관으로서 독일군 중앙집단군의 주공을 정면에서 맞았으나 전선은 참사로 무너졌다. 민스크 함락 후 체포되어 직무 태만으로 기소되었고, 전쟁 발발 정확히 한 달째 되던 날 총살되었다. 1957년 복권되었으며, 그가 설계를 주도한 T-34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차로 남았다.
7월 26일 슈누레와의 만찬에서 '대화가 너무 멀리 나아가기 시작한다고 느꼈다'고 일기에 적었을 때까지, 이 비밀 통로의 주인공은 모스크바의 아무 지시도 받지 못했다.
귀족 집안의 문인으로 출발해 소련 외교관이 된 인물.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언론·외교를 오갔고, 1928년에는 소련 최초로 아랍 국가인 예멘과 우호조약을 맺었다. 그를 역사에 남긴 것은 1939년 봄 베를린 대리대사가 되어 바이츠제커·슈누레·리벤트로프와 독소 접근의 신호를 주고받은 일이며, 7월 29일 몰로토프의 지시를 받고 소련의 태도 변화를 전한 뒤 조약 직전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1940년 체포된 채 수용소에서 죽었다.
『나는 군인들과 함께 왔고, 군인들과 함께 떠날 것이다』: 탈출용 비행기에 부상병과 군기를 싣고 자신은 포위된 채 남았다.
1차대전의 사관후보생에서 붉은 군대의 중장이 된 예프레모프는 내전 시기 장갑열차 부대를 이끌고 바쿠를 점령해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화를 앞당겼다. 1941년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33군을 지휘해 나로-포민스크 돌파를 분쇄했고, 이어진 반격에서 나로-포민스크·보롭스크·베레야를 해방했다. 1942년 1월 주코프가 뱌지마로 무리한 진격을 명령하자 33군은 독일군 후방 깊숙이 포위되었고, 스탈린이 퇴각을 허락한 것은 모든 것이 너무 늦은 뒤였다. 예프레모프는 스타프카가 보낸 탈출용 비행기를 거부하고 부상병과 군기를 먼저 보낸 뒤, 1942년 4월 19일 포로를 피해 권총으로 자결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15–1917제국군 포병 사관후보생, 브루실로프 공세 참전
1917–1920붉은 근위대 합류, 내전에서 중대·대대·연대·여단 지휘, 장갑열차로 바쿠 점령
1921–193333소총사단장, 군사고문으로 중국 파견, 프룬제 사관학교 졸업, 소총군단장
1937–1940볼가·자바이칼·오룔·북캅카스·자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1941.01–07보병총감 제1부감, 21군 사령관, 중부전선 사령관
1941.10–1942.0433군 사령관: 모스크바 방어전, 나로-포민스크 돌파 분쇄, 뱌지마 포위에서 전사
11월 17일, 공세 이틀 전, 볼스키는 직속 상관을 건너뛰어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냈다: '정직한 공산주의자로서' 우라누스 작전은 실패할 것이라고.
차르 군대 이등병으로 출발해 내전기 정치위원으로 복무한 볼스키는 1930년대 초 소련 최초의 기계화여단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제4기계화군단을 지휘하며 공세 이틀 전 '정직한 공산주의자로서'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내 우라누스 작전의 실패 가능성을 경고했으나, 스탈린과의 통화 후 편지를 철회하고 공세에 참가해 포위망 최초 봉쇄 부대가 되었다. 이후 제5근위전차군 사령관으로 발트 해방과 동프로이센 작전을 지휘했으며, 결핵 악화로 전선을 떠난 지 1년도 안 되어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재판에서 그는 예심 자백을 철회했고, 최후 진술에서 그 자백이 고문으로 짜낸 것임을 밝히려 했다.
불가리아 공산당 정치국원·부총리로, 지하운동 시절부터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에 이은 당의 실질 2인자였다. 1944년 9월 조국전선 정권에서 중앙위원회 서기를 맡아 인민재판소 설립을 주도하며 억압의 집행자였지만, 소련의 담배 매입가에 맞서 경제 독자성을 지키려다 스탈린과 충돌했다. 1949년 체포되어 영국 간첩·티토 결탁 혐의로 기소됐고, 법정에서 자백을 철회한 유일한 동유럽 전시재판 피고로 12월 16일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1944년 1월 27일 봉쇄 완전 해제. 스탈린은 관례를 깨고 승전 축포 명령을 고보로프에게 맡겼다. 대조국전쟁에서 어떤 전선군 사령관도 받지 못한 유일한 특권이었다.
뱌트카 농민 출신으로 1차대전에 동원되어 제국군 포병 소위가 되었다. 내전에서 콜차크 백군에 복무하다 1919년 탈주, 블류헤르 51사단에 들어가 적군으로 전향했다. 대숙청 시기 백군 경력으로 의심받았으나 살아남았다. 독소전에서 5군 사령관으로 모스크바 방어를 맡아 주코프의 신임을 얻었고, 1942년 레닌그라드 전선군 사령관으로서 포위된 도시 방어를 체계화했다. 1943년 이스크라 작전으로 봉쇄를 돌파하고 1944년 1월 완전 해방을 이뤘다. 전후 소련 방공군 초대 총사령관이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1916–17콘스탄틴 포병학교 졸업, 제국군 소위
1918–19콜차크 백군 8카마 사단 포대 장교, 중위 진급 후 탈주
1920–21블류헤르 51사단 포대장, 페레콥·카홉카 전투서 부상, 적기훈장
1933–38프룬제 사관학교·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원수 반', 포병 교관
1941.10–42.045군 사령관 — 모스크바 방어·반격
1942.04–45.05레닌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 이스크라 봉쇄 돌파, 완전 해방, 비보르크·발트 공세
예료멘코 원수는 이렇게 평했다: '자하로프는 머리는 나쁘지 않고 의지가 강하지만 끔찍한 무례자다. 제대로 파악도 안 하고 사람에게 소리지르고 때로는 구타하기까지 한다.'
사라토프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11세부터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 1916년 징집되었다. 1917년 10월 병사들에게 연대장으로 선출된 후 적군에 합류, 동부전선에서 내전을 치렀다. 프룬제 사관학교와 참모아카데미를 마친 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전선군 부사령관으로 좌익 부대를 성공적으로 지휘했고, 제2근위군을 이끌며 미우스 강 방어선 돌파와 세바스토폴 해방에 기여했다. 1944년 제2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으로 바그라티온 작전에 참가했으나 공세 지연으로 신임을 잃고 제4근위군 사령관으로 강등되었다. 전후 남우랄·동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과 비스트렐 과정장을 지냈다. 날카로운 작전 감각과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다.
스탈린 사후 역사학의 탈스탈린화를 주도한 노동계급사 권위자: 소련 최초 여성 역사학 아카데미크
1953년 『역사의 제문제』 주필이 된 판크라토바는 스탈린의 『단기 강좌』 도식을 공개 토론에 부치며 역사학의 탈스탈린화를 추진했다. 1957년 3월 중앙위 결정은 그녀의 노선을 '자유주의와 부르주아 객관주의'로 규탄하고 사실상 해임했다.
소비에트 노동계급사와 혁명운동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약 200편의 저작을 남겼다. 소련 역사학 분야 최초의 여성 정회원(아카데미크)이자, 카자흐스탄사의 첫 종합적 집필을 지도했다. 스탈린 사후 『역사의 제문제』 주필로서 「소련 공산당사 단기 강좌」의 도식적 서사를 재검토하고 탈스탈린화를 주도했으나, 1957년 중앙위로부터 '자유주의와 부르주아 객관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실질적으로 해임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1919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내전기 오데사 유격대 활동
1922–1925붉은 교수양성소 수학
1926–1939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 레닌 정치군사아카데미 · 모스크바 국립대 등에서 교편
1940년 7월, 리치코프는 검찰총장 판크라티예프와 함께 명령을 내렸다: 점심시간 후 20분 이상 지각하거나 종료 20분 전에 무단 퇴근한 노동자는 '무단결근'으로 형사 입건하고 최대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
우랄 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정규 고등교육 없이 법무인민위원까지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대법원 군사합의부 위원으로 모스크바 쇼 재판에 참여했고 동부 지역의 '반혁명' 재판을 주재했다. 1938년 1월 법무인민위원이 되어 대숙청 말기, 전시 사법 행정, 전후 독일 전범 공개 재판까지 10년간 소련 사법을 총괄했다. 1940년 20분 이상 지각을 형사 처벌하는 노동 규율 명령을 공동 서명했다. 1948년 당 인사 부서와의 갈등으로 해임되었으나 군 검찰 부직을 거쳐 1955년 은퇴했다.
1948년 9월 모스크바. 소련영웅 금성훈장을 단 크류코프 중장이 '전리품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압수품에는 다이아몬드 208개, 레핀과 세로프의 그림 132점, 고급 승용차 3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3년 후 형량은 징역 25년.
농민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소위까지 지낸 후 적군에 합류한 소련의 기병 지휘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제2근위기병군단장으로 비스와-오데르 작전과 동포메라니아 작전을 이끌어 1945년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종전 후 유명 민요 가수 리디야 루슬라노바와 결혼했으나, 1948년 '전리품 사건'으로 체포되어 25년형을 선고받고 계급과 훈장을 박탈당했다가 1953년 스탈린 사후 복권되었다.
절단 수술 후 라포포르트가 문병하자 보브시가 말했다. '지금 내 상태를 그때와 비교할 수 있겠나? 이제 나는 다리만 잃었을 뿐 사람으로 남았지만, 거기서 나는 사람이기를 그만뒀네.'
소련군 주임 내과의사(1941~1950)로서 위대한 조국전쟁 시기 군대 전역의 치료 체계를 조직하고 전시 내과학의 기초를 세웠다. 1948년 살해된 솔로몬 미호엘스의 사촌으로, 1953년 1월 '의사들 음모' 사건의 수괴로 타스 통신에 지목되어 체포·고문당했다. 스탈린 사후 석방되어 보트킨 병원에서 임상과 연구를 재개했으며, 말기 육종으로 다리를 절단한 뒤에도 병원에 머물며 죽을 때까지 일했다.
바쿠 유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유대인 기술자 출신으로, 툴라 병기공장 책임자를 거쳐 1939년 무기인민위원이 되었다. 전쟁 직전 체포·고문당했으나 독일 침공 후 스탈린이 소환해 탄약인민위원으로 임명했고, 종전까지 포탄 생산을 4배로 끌어올렸다. 전후에는 쿠르차토프와 함께 제1총국을 이끌며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행정·공업 기반을 총괄했고, 수소폭탄 개발까지 관장했다.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은 몇 안 되는 인물이다.
문서로 확인되는 소콜롭스키의 대표 행보는 1946~49년 소련군정청 최고책임자로서 서베를린 봉쇄를 개시·지휘한 것이며, 스탈린은 이 조치를 높이 평가해 그에게 레닌 훈장을 수여했다.
1897년 그로드노 현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교회부설 학교와 네벨 사범학교를 마치고 1918년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독소전쟁에서 서부방면군 참모장(1941~43)과 사령관(1943~44)을 지냈고, 오르샤·비텝스크 공세 실패로 1944년 4월 해임된 뒤 제1우크라이나 방면군 참모장으로 베를린 공세 준비에 참여했다. 1945년 5월 독일 무조건 항복 조인식의 소련 측 참여자였고,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소련군정청 최고책임자 겸 점령군 총사령관으로 서베를린 봉쇄를 지휘했다. 1952~60년 참모총장 겸 국방장관 제1차관을 지낸 뒤 196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국방부 총감찰로 재직했고, 1962년 『군사전략』을 주편해 서방에 널리 알려졌다.
1941년 6월 23일 체포되어 9월 6일 석방되었다. 회고록에는 두 달간 "내 의사와 무관한 사정"으로 모든 일에서 배제되었다고 적었다.
러시아 농민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 열두 살에 모스크바 제철공이 되었고, 1917년 수도그다에서 볼셰비키 세포를 조직해 서기가 되었다. 겨울전쟁에서 제7군을 지휘해 만네르헤임 선을 돌파하고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다. 참모총장이던 1941년 6월 23일 반소 군사음모 혐의로 체포되어 레포르토보에서 고문을 당했으나, 스탈린에게 편지를 써 9월 6일 석방되었고 수사 파일은 1955년 폐기되었다. 볼호프 전선과 카렐리야 전선을 지휘하며 1943년 이스크라 작전으로 봉쇄를 깼고, 1945년 제1극동전선을 이끌어 관동군을 격파했다. 1944년 원수에 올랐고 1968년 사망해 유골이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1917수도그다에서 볼셰비키 세포 조직, 서기 겸 적위대 참모장
1918–19218월부터 적군 복무, 카잔 전투에서 부상, 1921년 군사아카데미 졸업
1932–1937벨로루시·극동군관구 참모장, 1936~1937년 스페인 내전 군사고문(가명 페트로비치)
1939–19401939년 12월 9일부터 제7군 지휘, 만네르헤임 선 돌파로 소비에트연방영웅
1940–19411940년 8월부터 참모총장, 이듬해 1월 해임; 1941년 6월 체포·고문, 9월 석방
1942–1944볼호프·카렐리야 전선 사령관, 1943년 이스크라 작전으로 봉쇄 돌파, 1944년 원수
스탈린-흐루쇼프 이행기 정보총국(GRU)을 지휘한 참모, 판문점 정전 전 중국인민지원군 고문단장
1근위전차군 사령관 카투코프는 이렇게 회고했다: "샬린은 비정상적으로 일벌레였고, 정확하고 페달틱할 만큼 꼼꼼한 참모였다. 언제 사령부에 들여다봐도 그는 항상 책상 앞이었다. 민머리를 쓰다듬으며 지도 위에서 무언가를 궁리하고 있었다."
오렌부르크 농민 출신으로 교원양성소를 나온 뒤 제정군 소위, 내전기 적군 중대·대대장을 거쳐 소련군 정보총국장까지 오른 상장. 1근위전차군 참모장으로 쿠르스크에서 베를린까지 주요 공세를 기획했고, 종전 후 군사외교아카데미 원장을 지냈다. 1951–1952년 한국전쟁에 파견되어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의 수석 군사고문으로 복무했다. 1952–1956년과 1957–1958년 두 차례 GRU 국장을 지내며 스탈린 말기부터 흐루쇼프 집권 초까지 소련 군사정보를 총괄했고, 1954년에는 주코프 원수가 서방과 접촉해 쿠데타를 모의한다는 보고를 올려 군부 내 긴장을 부채질하기도 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16–1918제정군 105보병예비연대, 빌나 군사학교 졸업 후 소위 임관, 17시베리아소총예비연대 중대장
1918–1921적군 자원입대, 공산당 입당, 내전 종군 — 오르스크 연대 중대·대대장, 여단장 대리,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및 크론시타트 진압 참가
1922–1931오르스크 현·튜멘 군관구 병무위원, '비스트렐' 과정 수료, 바시키르 자치공화국 영토관구 국장
1948년 11월 혁명기념일 리셉션에서 폴리나 젬추지나는 이스라엘 공사 골다 메이어의 딸 사라를 끌어안고 이디시어로 속삭였다. 「몸조심하렴. 너희에게 모든 일이 잘 풀리면, 온 세상 유대인에게도 잘 풀릴 테니까.」
소련 최초의 여성 산업인민위원(1939, 수산공업)으로서 소비에트 여성의 정치적 진출에 이정표를 세웠다. 유대인 재단사 집안에서 태어나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 내전기 정치장교로 활동했으며, 1930년대 향수공장 「노바야 자랴」 책임자와 글라브파르퓌메리야 총책임자를 거쳐 식품공업 부인민위원까지 올랐다.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아내이자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의 절친으로 스탈린 가문의 내밀한 삶을 공유했으나, 전쟁 중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에서 적극 활동하며 유대인 정체성을 드러냈다. 1948년 이스라엘 공사 골다 메이어와의 이디시어 대화가 빌미가 되어 1949년 체포·출당·유배되었고, 1953년 스탈린 사후 풀려나 1970년 자연사했다.
1941년 12월, 바투틴이 작전과장 레드뇨프 대령의 즉결 처형을 명령했을 때 — 독일군이 사단 방어선을 뚫었는데 그가 잠들어 있었다는 이유로 — 쿠라소프는 바투틴의 머리 위로 모스크바에 직접 보고하여 총살 명령을 철회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에서 적군의 해군 파견대 지휘관을 거쳐 대장까지 오른 소비에트 군사 엘리트다.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제4충격군과 칼리닌·제1발트전선군의 참모장으로 복무하며 스몰렌스크, 벨라루스, 발트 작전을 설계했고, 특히 토로페츠-홀름 공세에서 한 달도 안 되어 300㎞를 진격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전후에는 중부군집단 총사령관과 참모본부 군사과학 부문 부참모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작전술의 이론적 토대를 다듬었고, 두 차례에 걸쳐 참모본부 아카데미 원장으로서 전후 세대의 고급 지휘관들을 양성했다. 1963년부터 바르샤바 조약군 통합사령부 대표로 동독 주둔 국가인민군을 지도하며 냉전기 동맹 체제의 작전적 일관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15러시아 제국군에 징집, 준위 학교 졸업 후 서부전선에서 소대장 복무
1918붉은 군대 입대, 발트함대 해군 파견대 지휘관으로 페트로그라드 방어전 참가
1921–1932군사교육기관 교관 복무,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후 벨라루스 군관구 참모
1936–1940참모본부 아카데미 수석 전술교관 → 작전국 부국장
1941–1942제4충격군 참모장 → 사령관, 토로페츠-홀름 공세 지휘
1943–1945칼리닌·제1발트전선군 참모장, 스몰렌스크·벨라루스·발트·동프로이센 작전 기획
1945년 4월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주코프의 제1벨로루시 전선군과 나란히 베를린으로 진격했다. 코네프의 부대가 먼저 시내에 들어갔지만 제국의사당 게양의 영예는 주코프에게 돌아갔고, 그는 남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5월 9일 프라하를 되찾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스텝·제2·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지휘하며 코르순-셰브첸콥스키 포위전, 비스와-오데르 작전, 베를린과 프라하 진격을 주도한 원수. 1944년 3월 붉은 군대 최초로 전전 국경을 넘어 루마니아에 진입했고, 같은 해 원수로 진급했다. 전후에는 지상군 총사령관과 바르샤바 조약군 총사령관을 지냈고, 1953년 베리야 재판부를 이끌었으며, 1956년 헝가리 봉기 진압을 지휘했고, 1957년 주코프 실각에 가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