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은 '무언가'로 들어간 제트 기류가 '무언가'에서 나와 어떻게 비행기를 움직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 1930년대 후반, 률카가 최초의 터보제트 엔진 구상을 처음 설명했을 때 마주한 반응.
우크라이나 태생의 소련 항공엔진 설계자. 1941년 세계 최초의 터보팬 엔진 설계 특허를 출원했고, 독일 포획 장비를 모방하기를 거부하며 독자적인 연구로 1947년 소련 최초의 터보제트 엔진 TR-1을 완성했다. OKB-165(후일 NPO 사투른)의 총설계자로서 AL-7, AL-21, AL-31F 등 AL 시리즈 엔진을 개발하여 수호이·미그·투폴레프 전투기 세대를 추진했으며, AL-31F는 오늘날까지 Su-27 계열의 심장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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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키예프 공과대학 졸업, 하리코프 터보발전기 공장
1933–39하리코프 항공연구소 강사, 가스터빈 연구
1939–41키로프 공장 SKB-1, RD-1 설계, 세계 최초 터보팬 특허
1941–43첼랴빈스크 전차공장 디젤 엔지니어
1946–57OKB-165 수석설계자; TR-1 소련 최초 터보제트 국가시험 통과 (1947)
“과학자라는 것은 직함도 직장도 아닙니다. 연구실에 들어서면서 과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과학자라는 것은 끊임없는, 때로는 괴로운, 때로는 아름다운 상태입니다.” — 1984년 사망 직전 콤소몰 상 시상식 연설.
소련의 실험물리학자. 1933년 노스코프와 함께 반도체에서 광자기 효과(키코인-노스코프 효과)를 발견했고, 액체 금속의 홀 효과와 초전도체의 자이로자기 비율을 선구적으로 측정했다. 1943년 쿠르차토프의 요청으로 제2연구소에 합류해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 과학 책임자를 맡았으며, 특별위원회 기술평의회에는 쿠르차토프와 함께 제2연구소에서 단 둘만 이름을 올렸다. 종전 후 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부소장(1960–1984)을 지내며, 수학자 콜모고로프와 《크반트》를 창간했고 형 아브람과 집필한 물리 교과서는 소련 표준이 되었다. 연구실에 사해문서 영인본을 꽂아둘 만큼 유대 전통과 히브리어에 정통했다.
그는 말했다: "누가 당신들의 진실을 필요로 하는가, 그게 우리 삶에 방해된다면?" — 스탈린 시기 실패와 탄압에 대한 모든 언급을 봉쇄하며.
소련군·해군 총정치국(GlavPUR)을 1962년부터 1985년까지 이끈 최장수 국장으로, 군대에 대한 당의 사상적 통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흐루쇼프가 군부에 대한 당 우위를 재확립하기 위해 소장에서 육군대장으로 파격 승진시켜 기용했으며, 이후 글라브푸르를 CPSU 중앙위원회 부서처럼 운용하며 국방장관조차 통제할 수 없는 정치장교 네트워크를 유지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소련 고위 관료 중 처음으로 군사개입 가능성을 공개 시사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직전에는 군사대표단을 이끌고 카불을 방문했다. "누가 당신들의 진실을 필요로 하는가, 그게 우리 삶에 방해된다면?"이라는 그의 말은 체제 정통성을 위해 역사적 사실마저 억압한 독단성의 단면을 보여준다.
맥나마라가 전황 측정 지표에 적어둔 'X 인자'가 무엇이냐고 묻자, 랜스데일은 '베트남 농촌 서민들의 감정'이라고 답했다. 맥나마라는 연필로 그 항목을 지워버렸다.
미 공군 소장으로, 광고계에서 군 정보장교로 전향한 후 필리핀 훅발라합 반란 진압에서 심리전을 무기화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베트남에서는 사이공 군사임무단을 이끌며 응오딘지엠 정권을 뒷받침했고, 1962년 케네디 대통령에게 몽구스 작전의 6단계 계획을 제출해 그해 10월 쿠바 내 반란과 정권 전복을 목표로 설정했다. 이 문서는 소련이 쿠바 침공이 임박했다고 판단한 핵심 근거가 되어 쿠바 미사일 위기를 촉발한 고리 중 하나가 되었다. 지엠 축출에 반대하며 1963년 강제 전역했고, 말년에는 심리전과 대분란전의 선구자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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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1947육군 군사정보대 및 OSS 복무, 소령 진급
1947–1950미 공군 대위로 전군, 전략정보학교 교관
1950–1954필리핀 합동군사원조단, 훅발라합 반란 진압 심리전 지휘, 막사이사이 대선 승리 지원
1954–1957사이공 군사임무단장, 지엠 정권 수립 지원, 북부 가톨릭 남하 작전 주도
1957–1961국방부 특수작전 부차관보, 해외 대분란전 기획
1961–1963몽구스 작전 작전책임자, 케네디에게 6단계 쿠바 전복 계획 제출(1962.2)
1964년 흐루쇼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것은 가장 정직한 사람이며 위대한 과학자입니다. 리센코 동지를 더러운 중상의 흐름으로부터 보호해야 합니다."
소련의 농학자·육종학자로, 목화 품종 개량 연구로 스탈린상을 두 차례 수상한 후 소비에트 농업과학 행정의 정점에 올랐다. 1951년부터 10년간 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VASKhNIL) 부총재로 재직하다가 1960년 말 흐루쇼프에 의해 농업장관에 임명되었으나, 1962년 농업 위기 속에서 물러나 VASKhNIL 총재로 복귀했다. 트로핌 리센코의 가장 충실한 동료 중 한 명으로, 1964년 안드레이 사하로프와 조레스 메드베데프의 리센코 비판에 맞서 흐루쇼프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리센코를 '위대한 과학자'로 옹호했다.
1924년 3월, 열다섯 살 글루시코가 치올콥스키에게 보낸 첫 편지: "행성 간 통신은 제 이상이자 평생의 목표입니다. 이 위대한 일에 인생을 바치겠습니다."
오데사 출신으로 열여섯 살에 치올콥스키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주비행 책을 썼다. 1929년 GDL에서 세계 최초의 전기열로켓을 시험한 후 소련 액체로켓엔진의 기초를 세웠다. 1938년 체포되어 8년형을 받고 샤라시카에서 설계를 이어갔으며, 1944년 석방·복권되었다. OKB-456(현 에네르고마시) 수석설계자로서 R-7의 RD-107/108 엔진을 개발해 스푸트니크와 가가린을 우주로 보냈다. 코롤료프 사후 1974년 NPO 에네르기야의 총괄설계자가 되어 15년간 소련 유인우주계획을 이끌었고, 세계 최강 액체로켓 RD-170과 에네르기야-부란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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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가스역학연구소(GDL) 입소, 전기열로켓·액체로켓 개발 주도
1933–38로켓연구소(RNII)에서 ORM 계열 엔진 개발
1938–44체포·8년형, 카잔 샤라시카에서 항공기용 보조로켓 RD-1 설계
1946–74OKB-456 수석설계자: R-7 계열 엔진(RD-107/108), 프로톤 엔진(RD-253) 개발
1973년 세계 최초의 BMD-1 승무원 탑승 낙하산 강하 시험에서 아들 알렉산드르를 지켜보며, 마르겔로프는 실패 시 자결할 권총을 손에 쥐고 있었다.
바실리 마르겔로프는 소련 공수군(VDV)을 23년간 지휘하며 현대 공수부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군사 지도자다. 1944년 드네프르 강 도하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은 정예 장교로, 1954년 VDV 사령관 취임 후 경보병이던 공수군을 중무장 기동타격군으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주도로 BMD-1 공수장갑차, 중량물 투하 플랫폼, 켄타브르·레악타브르 승무원 탑승 강하 시스템이 개발되고 An-22·Il-76 대형 수송기가 도입되었다. 65세까지 60회 이상 직접 낙하산 강하를 수행했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시 VDV 작전을 지휘했다. 퇴역 무렵 VDV는 소련군 최정예 부대로 '바샤 삼촌의 군대'라 불렸다.
1973년 사하로프 규탄 공개서한에서, 페도세예프를 비롯한 소련 과학아카데미 학자들은 사하로프가 '소련의 국가 체제와 대내외 정책을 비방하는 일련의 발언을 했다'고 규정하며 그의 활동을 '소비에트 과학자의 명예와 존엄을 훼손하는 것'으로 낙인찍었다.
소련의 철학 행정가로, 농민 출신에서 과학아카데미 부총재까지 올라 30년 가까이 인문사회과학 전반을 관리한 당 이념의 수호자였다. 철학연구소장,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장, 중앙위원(1961~1989)을 지내며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경계를 감시했고, 1973년 사하로프를 공개 규탄한 과학아카데미 서한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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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고리키 사범대학 졸업, 동 대학 철학 강사
1936모스크바 역사철학연구소 대학원 수료, 철학 후보박사
1936–1941소련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연구원
1941–1947전연방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국 제1부국장
1945–1949당 중앙 기관지 『볼셰비키』 주필 (1949년 7월 중앙위 결정으로 해임)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빅토르 그리신은 프로미슬로프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그는 대체로 대표 기능을 수행하는 데 바빴다. 수많은 해외 출장이 시간을 잡아먹었고, 시 집행위 업무와 도시 문제를 해결할 시간은 늘 부족했다."
토목 기술자 출신으로 1963년부터 1986년까지 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의장(사실상 시장)을 지내며 오스탄키노 타워, 로시야 호텔, 노비 아르바트, 수십 개 지하철역, 1980년 올림픽 경기장 등 전후 수도의 스카이라인을 바꾸었다.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빅토르 그리신은 회고록에서 그가 형식적 대외 활동과 해외 출장에 치중하고 실무를 보좌진에게 떠넘겼다고 비판했으며, 자신의 저서에 과도한 인세를 받은 스캔들도 남았다.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교체될 때까지 소비에트 수도 최장기 행정 수반으로서 도시 발전과 노멘클라투라 정치를 동시에 체현했다.
“그는 내 얼굴과 머리를 때리고, 내가 쓰러지자 배를 발로 찼다… 나는 의사가 주사기를 든 것을 보았다. 겁이 나서 바로 두 통의 조서에 서명했다.”
벨라루스계 출신으로 레닌그라드 공장과 당 기구를 거쳐 야로슬라블 주당위 제1서기(1946–1949)까지 오른 당 간부로, 전후 알렉세이 쿠즈네초프가 러시아 공화국 각지에 배치한 지역 간부 중 한 명이었다. 1950년 9월 29~30일 레닌그라드 사건 재판에서 중앙 피고인 6인과 함께 기소되어 사형 대신 1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MGB 수사관들에게 구타당해 허위 자백에 서명했고, 1954년 석방·복권된 후 조용히 살다 1994년 사망했다.
수슬로프가 "그대의 카자크는 시대착오요!"라고 외치자, 셸레스트는 "카자크가 없었다면 자네도 여기 없었을 것이네. 그들은 유목민 무리로부터 국경을 가슴으로 막아냈어." 하고 받아쳤다.
1963년부터 1972년까지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를 지내며 흐루쇼프에서 브레즈네프로 넘어가는 전환기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위기를 관통했다. 호르티차 역사보호구, 피로히우 민속건축박물관, 26권짜리 『우크라이나 도시와 마을의 역사』 등 우크라이나 문화유산 사업에 대규모 재정을 배정했다. 소비에트 연방 틀 안에서 우크라이나의 경제·문화적 이해를 대변하다가 1972년 브레즈네프 파벌에 의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혐의로 해임되었으며, 그의 몰락은 소비에트 연방제에서 공화국 자율성과 중앙 통제 사이의 긴장을 상징한다.
모스크바 근교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바우만 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에서 용접을 전공한 항공 엔지니어다. 전시에는 항공공장 주임기사와 공장장으로 전선 수리 임무를 수행했고, 1947년 항공공업 차관에 올랐으나 베리야의 항공산업 분할 구상에 반대했다가 좌천되어 항공기술연구소(NIAT) 소장으로 옮겼다. 1963년부터 21년간 소련 국가표준위원회(Gosstandart) 의장을 맡아 GOST 표준 체계를 현대화하고 전연방 계측·품질관리 인프라를 구축했으며, 1977~1979년 국제표준화기구(ISO) 회장으로서 ISO 9000 시리즈의 착수를 권고해 오늘날 전 세계 170개국에서 사용되는 품질경영 표준의 단초를 열었다.
로마노프는 월요일 출근길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주말 별장에서 영화를 본 지도부의 전화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한 분은 이렇게 말하고 다른 분은 정반대로 말한다. 같은 영화인데. 내가 어쩌란 말인가?"
1963년부터 1972년까지 소련 국가영화위원회(고스키노) 의장을 지낸 당 관료이자 언론인이다. 툴라현 벨료프 출신으로, 고리키주와 벨로루시의 신문 편집국을 거쳐 1955년부터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에서 일했으며, 1961년에는 중앙위원 후보와 러시아공화국 당뷰로 위원이 되었다. 고스키노 의장으로서 타르콥스키의 《안드레이 루블료프》 검열, 흐루쇼프 해빙기 말부터 브레주네프 정체기로 이행하는 시기의 영화 정책을 총괄했으며, '온건하지만 지나치게 규율적인' 인물로 평가받았다. 1972년 필리프 예르마시에게 자리를 넘기고 《소비에트 문화》 신문 주필로 옮겼다.
앙리 롤탕기는 금속 노동자 출신의 프랑스 공산주의자이자 국제여단 참전자로, 스페인 내전과 반나치 레지스탕스에서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그는 1944년 8월 파리 지역 프랑스 국내군(FFI) 사령관으로서 동맹군이 입성하기 전에 봉기를 조직하고 지휘했다. 그의 활동은 노동운동의 조직 경험과 무장 저항을 결합해 수도 해방을 내부에서 추진한 사례였다. 전후에는 군과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레지스탕스의 독자적 역할을 공적으로 옹호했다.
브레즈네프가 보건장관직을 제안하자 페트롭스키는 수술을 계속하고 싶다며 망설였다. 브레즈네프는 정치국이 이미 승인했다고 답했다. 페트롭스키는 회고했다: "잠시 생각한 뒤, 나는 당의 의지에 거스르지 않겠다고 말했다."
소련 보건장관(1965–1980)으로 15년간 재임하며 브레즈네프 시대 의료체계를 총괄한 외과의사이자 과학자였다. 1964년 소련 최초 승모판 기계 인공판막 치환술, 1965년 소련 최초 신장 이식 수술을 집도한 심장혈관외과의 선구자였다. 핀란드 전선과 대조국전쟁에서는 경동맥과 흉부대동맥에 직접 혈액을 주입하는 수혈법을 개발해 대량 출혈 환자를 구했다. 전연방외과학연구소를 설립·이끌며 미세수술과 마취과학을 독립 전문분야로 정착시켰고, 150명 이상의 의학박사를 배출했다. 1971년 소비에트 의사 선서와 인테르나투라(전문의 수련제도)를 도입했으며, 둘 다 체제 붕괴 후에도 러시아 의료교육의 근간으로 남아 있다.
1999년 에두아르트 라인 재단이 66년 전 젊은 공학도의 논문에 기초연구상을 수여하자, 91세의 코텔니코프는 말했다: “나는 그저 내 앞에 놓인 문제를 풀었을 뿐입니다.”
정보이론과 레이더 천문학의 선구자. 1933년 표본화 정리(코텔니코프 정리)를 공식화했고, 1941년 일회용 암호 패드의 절대적 안전성을 독자 증명했으며, 최적 잡음 면역 이론을 창시했다. 1961년 금성, 1962년 수성 레이더 탐사를 지휘해 행성 레이더 천문학을 열었다. 2차대전 중 정부용 암호 음성 통신 장비를 개발했고, 종전 후 MPEI 무선공학부 학장으로 소련 전자공학 인재 세대를 키웠다. 1954년부터 IRE 소장, 1970년부터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1973년부터 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의장을 지냈다. 두 차례 사회주의 노동 영웅, 레닌상, IEEE 벨 메달 수상.
1940년 8월 26일 팽덕회와 좌권이 이 작전을 「백단대전」으로 명명했으나, 그 개전은 뒤에 모택동과의 노선 갈등 속에 팽덕회를 겨눈 죄목으로 되살아났다.
산시 출신으로 1936년 당의 지시로 국민당 감옥에서 「전향서」에 서명하고 출옥한 61명 중 한 사람이었고, 이 일은 문화대혁명에서 「61인 반도 집단」 사건으로 되살아나 그를 12년 감금으로 몰았다. 건국 후 초대 재정부장으로 세제와 통화 통일을 맡았고 1953년 「신세제」 논란으로 마오의 비판을 받았다. 1979년 복귀해 부총리와 중앙고문위원회 부주임으로 「팔대 원로」의 한 사람이 되어 1987년 후야오방 해임 회의를 주재했다. 2007년 98세로 사망했으며 아들이 보시라이다.
재판에서 검사의 사형 구형에 답하며: 「검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법원의 판결을 미리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1949년 9월)
헝가리 공산당 정치인으로, 내무장관(1946~48) 시절 국가보안기관(ÁVH)을 창설하고 초기 숙청을 주도하며 라코시 체제 구축의 핵심 인물이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 헝가리 대대 정치위원으로 참전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지하 저항운동을 조직했다. 라코시가 자신의 인기를 위협으로 간주하자 외무장관으로 좌천되었다가 1949년 티토주의자라는 조작된 혐의로 체포·처형되어 동유럽 최초의 대규모 스탈린식 쇼재판 희생자가 되었다. 1956년 10월 6일 10만 인파가 모인 복권 장례는 3주 후 헝가리 혁명의 전주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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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불법 헝가리 공산당(KMP) 및 공산청년동맹(KIMSZ) 입당
1935건설노동자 파업 주도, 체포·추방
1937–39국제여단 헝가리 대대 정치위원·당서기로 스페인 내전 참전, 에브로 전투에서 중상
1958년 당 중앙위 정보부장 푸시킨이 흐루쇼프에게 서베를린 '자유도시' 구상의 위험을 경고했다. 흐루쇼프는 "말도 안 돼! 군대를 들여보내도 전쟁은 안 난다"며 그를 끊고 정보부를 해체했다.
전시 슬로바키아, 전후 헝가리, 동독, 소련의 동유럽 위성국 형성기 세 수도에 차례로 대사를 지낸 경력 외교관이다. 1945년 헝가리 연합국 통제위원회 정치고문으로서 스탈린식 체제 이식의 주요 창구였으며, 1949–1952년과 1954–1958년 두 차례 동독 주재 대사로 재임하며 동독 국가 건설을 소련 측에서 감독했다. 1958년 신설된 당 중앙위 대외정보부장으로서 흐루쇼프에게 국제정세를 직접 브리핑했으나, 서베를린 '자유도시' 구상이 무력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가 해임되었다. 1959년 외무차관으로 복귀해 1961–1962년 라오스 중립화 제네바 회의 소련 대표단을 이끌었다.
명사(明史) 연구자이자 베이징 부시장, 역사극 『해서파관』 비판으로 문화대혁명의 도화선이 된 인물
명대사를 연구한 중국의 역사학자로 1949년 이후 베이징시 부시장을 지냈다. 1965년 11월 역사극 『해서파관』이 마오를 겨냥한 우의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실각했고 그 여파로 펑전도 숙청되었다. 1969년 옥중에서 사망했다.
저장 출신으로 후스의 제자였던 명대사 연구자였고 1940년대 민주동맹의 활동가였다. 건국 후 베이징시 부시장으로 문화·교육을 맡았다. 1961년 마오의 권유로 쓴 역사극 『해서파관』은 청렴한 관리 해서가 황제에게 파면되는 이야기였는데, 1965년 11월 야오원위안이 이를 펑더화이 실각을 옹호하는 「독초」라 비판한 글이 문화대혁명의 신호탄이 되었다. 그는 1966년 체포되어 1969년 옥중에서 사망했고 아내와 딸도 박해로 죽었다. 1979년 복권되었다.
1941년 독일군이 진격해오자 밀은 특수구조부 기록보관소를 파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수년간 쌓아온 연구 자료를 차마 불태울 수 없었던 그는 문서를 연구실에서 몰래 빼내 탈출 행렬에 실었다. 훗날 그 자료들은 소련 헬리콥터 설계의 토대가 되었다.
소련 헬리콥터 산업의 창시자. 이르쿠츠크 유대계 가정 출신으로 ЦАГИ에서 카모프의 조수로 오토자이로를 연구했고, 1947년 독자 설계국을 세워 Mi-1을 탄생시켰다. Mi-4, Mi-6, Mi-8, Mi-10, Mi-12, Mi-24를 연달아 개발하며 60개 세계기록을 수립했고, Mi-8은 역사상 가장 많이 생산된 쌍발 헬리콥터가 되었다. 단일 로터 방식으로 카모프의 동축 반전 로터와 경쟁하며 소련 헬리콥터의 주류를 장악했고, 시코르스키의 아들로부터 중량물 분야에서 미국을 추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회주의노동영웅, 세 차례 레닌 훈장을 받고 1970년 뇌졸중으로 사망했으며, 사후 Mi-24는 100개국 이상에서 운용되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싸운 헬리콥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