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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디파 누산타라 아잇

Dipa Nusantara Aidit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세계 3대 공산당으로 키운 조직가

“마르크스주의는 행동의 지침이지 경직된 도그마가 아니다.” — PKI 간부들에게 반복한 말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서기장(1951–1965). 수카르노의 마르해니즘 노선 아래서 노동자·농민·여성·청년·문화 부문 대중조직을 체계적으로 건설했고, 1955년 총선에서 PKI를 인도네시아 최대 정당으로 만들었다. 당원 300만 명에 이르는 세계 3위 공산당을 이끌었으나, 1965년 9·30운동 직후 수하르토의 반공숙청 속에서 당과 함께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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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2게린도(인도네시아 인민운동) 청년조직 활동
  • 1943인도네시아 공산당 입당
  • 1944–1945지하 반파시스트 조직 '자유 인도네시아 운동' 지도부
  • 1947–1948PKI 중앙위원 → 정치국원
  • 1951–1959PKI 서기장
  • 1959–1965PKI 중앙위원회 의장
  • 1959–1965최고자문회의 위원, 임시국민협의회 부의장, 무임소장관 겸직
  • 1965.11.22중부자바에서 체포되어 즉결처형

페타르 2세

Petar II Karađorđević

망명 속에서 왕정의 정통성을 지킨 마지막 국왕

1941년 3월 27일, 두산 시모비치가 그에게 말한 순간이었다. "폐하, 이제부터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십니다."

페타르 2세는 아버지 알렉산다르 1세의 암살 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다. 1941년 3월 27일 쿠데타로 섭정 체제가 무너지고 즉시 성년으로 선포되었지만, 곧 추축국 침공으로 런던의 망명정부를 이끌어야 했다. 그의 왕권은 점령에 맞선 국가적 연속성을 상징했으나, 망명정부의 분열과 파르티잔의 군사적·정치적 승리 속에서 실제 통치 기반을 잃었다. 1945년 왕정이 폐지된 뒤에도 귀환하지 못한 그는 전후 유고슬라비아의 정통성을 둘러싼 미해결 긴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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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국왕 즉위, 섭정 아래
  • 1934–1941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명목상 국왕
  • 1941.03.27쿠데타 뒤 성년 국왕으로 선포
  • 1941.04–06추축국 침공 뒤 정부와 함께 망명
  • 1941–1945런던 유고슬라비아 왕정 망명정부의 국가원수
  • 1944.09유고슬라비아 군인들에게 티토 합류를 호소
  • 1945왕정 폐지로 폐위
  • 1945–1970미국에서 망명 생활
  • 1970미국 덴버에서 사망

빅토르 미하일로비치 글루시코프

Виктор Михайлович Глушк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3–1982 ○ 병사

OGAS라는 전국 실시간 네트워크로 계획경제를 관리하려 한 소련 사이버네틱스의 아버지

1964년 코시긴이 OGAS 비용을 묻자 글루시코프는 200억 루블과 3차 5개년 계획을 답했다. 경제학자들은 '개혁에는 결의문 인쇄용 종잇값밖에 안 들고 결과는 더 좋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코시긴은 시장 개혁을 택했고, 소련은 컴퓨터로 계획경제를 구할 기회를 잃었다.

소련 사이버네틱스의 아버지. 1962년 키예프 사이버네틱스 연구소를 창설하고, 실시간 컴퓨터 네트워크 OGAS로 전국 경제의 최적 계획을 구상했다. 당 관료들은 통제권 상실을 우려해 이를 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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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로스토프 대학 졸업, 우랄 산림공과대학 교편
  • 1951–1955물리수학 박사 (모스크바 대학) — 힐베르트 제5문제 연구
  • 1956–1962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계산센터 소장 — MESM 실험실 계승
  • 1962–1982사이버네틱스 연구소 창설 소장 겸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부원장
  • 1963–1982국가과학기술위 산하 전산기술·경제수학 도입 위원회 의장
  • 1966–1982키예프 대학 이론사이버네틱스 학과장, 사이버네틱스 학부 공동 창설
  • 1967–1982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MFTI) 키예프 분과 창설·지도
  • 1971–1982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제8~10대)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수탸긴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Сутяги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23–1986 ○ 자연사

미그 앨리의 최고 득점 소련 에이스

1951년부터 1952년까지 한국 상공에서 149회 출격해 22승을 기록했다.

니콜라이 수탸긴은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소련 전투기 조종사로, 제트전투기 시대의 대표적 에이스가 되었다. 한국전쟁에서 미그-15를 몰며 149회 출격과 66회 공중전을 기록했고, 소련 자료 기준 22대의 항공기를 격추해 소련군 조종사단의 전투 성과를 상징했다. 그의 전과는 냉전 초기 소련이 조선 상공에 비밀리에 개입한 현실과, 공중전의 승리 기록이 자료와 교전 당사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긴장을 함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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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2붉은군대 징집, 체르니고프 군사비행학교 조종사 과정
  • 1942–1947제5전투항공연대 조종사·편대장, 극동전선
  • 1945소련·일본 전쟁과 만주 전략공세에 참전
  • 1947–1951제17전투항공연대, MiG-15 전투기 전환
  • 1951–1952한국전쟁, 제17전투항공연대 부대 지휘·전술 담당, 22승
  • 1956–1964군사·총참모부 아카데미 수학, 교육부대 지휘
  • 1964–1978하르키우 항공학교장, 공군 지휘관, 베트남 항공 군사고문
  • 1978항공 소장으로 전역

세르게이 표도로비치 아흐로메예프

Сергей Фёдорович Ахромее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3–1991 ✕ 자살

INF 조약을 협상한 소련군 원수, 제국의 종말을 견디지 못하다

INF 사찰 대상으로 플로리다 올랜도의 공장을 제안한 아흐로메예프에게 조지 슐츠가 '거긴 디즈니랜드입니다!'라고 외치자, 그는 '그럼 사찰단이 디즈니랜드도 좀 구경하게 하시죠'라고 답했다.

1923년 러시아 탐보프주 빈드레이 마을에서 태어나 1983년 소련 원수, 1984~88년 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을 지낸 군인이다. 레닌그라드에서 생도로 참전해 부상과 동상을 입은 뒤 기갑 병과로 전환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개입의 작전 계획 수립에 관여했다. 고르바초프의 군사 파트너로서 INF 조약 등 군축 협상을 뒷받침했으나 군사개혁과 일방적 감축에 반발해 사임했고, 이후 대통령 군사고문으로 일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후 크렘린 집무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유서에는 평생을 바친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견딜 수 없다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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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5모스크바 제1해군특별학교 졸업, 해군생도로 레닌그라드 방어전 참전해 부상·동상. 전쟁 말 SU-76 자주포대대 부지휘관
  • 1945–1967기갑부대 지휘관·참모. 스탈린 기갑아카데미 금메달 졸업(1952), 참모아카데미 졸업(1967), 전차사단장
  • 1967–1974제8전차군 참모장, 제7전차군 사령관(1968~1972), 극동군관구 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 1974–1979참모본부 작전총국장 겸 참모차장. 아프가니스탄 침공 계획 입안
  • 1979–1984참모총장 제1차장. 소련원수 진급(1983). 아프가니스탄 작전 지휘
  • 1984–1988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 INF 조약 등 군축 협상 주도. 고르바초프 군사개혁에 반발해 사임
  • 1988–1991국방부 총감독부 감독관 겸 대통령 군사고문. 1991년 8월 GKChP 가담, 쿠데타 실패 후 크렘린 집무실에서 자살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콜두노프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Колдун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3–1992 ○ 자연사

독소전 최고의 Yak 에이스에서 방공군 총사령관으로, 루스트 사건 한 방에 퇴장한 항공 총원수

1944년 11월 니시 상공. 미군 P-38 편대의 오인 공격에 콜두노프 대위가 Yak-9로 미군 선도기 옆에 붙어 날개를 흔들며 적색 별을 보여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유일의 미소 직접 교전은 그렇게 15분 만에 끝났다.

독소전쟁에서 412회 출격, 96회 공중전을 치르며 46기를 격추한 Yak 전투기 최고의 에이스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4년 니시 상공에서 소련 부대를 오인 공격한 미군 P-38 편대와의 교전을 직접 종결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전후 방공군으로 전환해 1978년 방공군 총사령관에 올랐고, 1984년 항공 총원수 계급을 받았다. 1987년 마티아스 루스트의 경비행기가 방공망을 뚫고 붉은 광장에 착륙하자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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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5866전투항공연대 조종사 → 비행대장 — 412회 출격, 46기 격추,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 1952–1960공군사관학교·참모아카데미 졸업, 전투항공연대장·사단장
  • 1962–1968바쿠 방공군구 전투항공 사령관 → 제11방공군 사령관 (극동)
  • 1970–1975모스크바 방공군구 사령관
  • 1975–1978방공군 제1부총사령관
  • 1978–1987방공군 총사령관, 1984년 항공 총원수 진급
  • 1987.6마티아스 루스트 붉은 광장 착륙 사건으로 해임

표트르 게오르기예비치 루셰프

Пётр Георгиевич Луше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3–1997 ○ 자연사

바르샤바 조약군의 마지막 총사령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루셰프 육군대장은 바르샤바 조약 통합군의 마지막 총사령관이 되었다" — 1955년 창설된 이 직책은 36년 만에 그와 함께 조용히 사라졌다.

아르한겔스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42년부터 볼호프·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소총소대장으로 참전, 시냐비노 공세에서 두 차례 부상당하며 전투 경험을 쌓았다. 전후 기갑부대로 전환해 동독 주둔 소련군에서 핵심 경력을 쌓았고, 1985년 고르바초프 체제 아래 소련 주둔 독일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1986년 국방부 제1차관을 거쳐 1989년 바르샤바 조약 통합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1991년 조약 해체와 함께 이 직책의 마지막 보유자가 되었다. 소련 영웅(1983)과 육군대장(1981) 칭호를 받았고, CPSU 중앙위원(1981–1990)과 소련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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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볼호프·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소대장·중대장으로 참전, 두 차례 부상
  • 1950s–1960s기갑부대 장교로 복무, 전차연대장과 전차사단장 역임
  • 1969–1975동독 주둔 제1근위전차군 제1부사령관, 이후 사령관으로 진급
  • 1975–1985볼가·중앙아시아·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을 차례로 역임
  • 1985–1986소련 주둔 독일군 총사령관
  • 1986–1989소련 국방부 제1차관
  • 1989–1991바르샤바 조약 통합군 총사령관 (최종)
  • 1991–1992국방부 감찰장군단 군사고문, 이후 퇴역

빅토르 미하일로비치 체브리코프

Виктор Михайлович Чебриков
보안·정보·치안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3–1999 ↓ 해임 1988

정체 말기와 페레스트로이카 초의 KGB 의장

체브리코프는 죽기 1년 전 러시아 TV 인터뷰에서 KGB 시절을 이렇게 변호했다. "나는 과거를 얼려버리는 시각에 반대합니다."

2차대전에서 세 차례 부상당하며 대대장까지 오른 전투 장교 출신으로,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당 간부를 거쳐 1967년 안드로포프의 부름으로 KGB에 합류했다. 1982년부터 6년간 KGB 의장을 맡아 알드리치 에임스의 정보를 활용한 대미 첩보전과 우즈베키스탄 부패 수사를 동시에 진두지휘했다. 1985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으나 페레스트로이카의 속도에 반대하며 리가초프 계열에 섰고, 1988년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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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7–1982안드로포프 휘하 KGB에서 승진, 방첩·보안 행정 경험 축적
  • 1982–1988KGB 의장, 정체 말기와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보안기관 지휘
  • 1983–1985안드로포프-체르넨코기 반부패·규율 캠페인과 보안 통제 유지
  • 1985–1988고르바초프 초기 개혁 속에서도 한동안 보안기관 대표로 정치국에 잔류
  • 1988개혁 속도와 맞지 않아 KGB 의장에서 교체

블라디미르 표도로비치 웃킨

Владимир Фёдорович Утки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3–2000 ○ 자연사

'사탄' 미사일의 아버지: 냉전 핵균형의 기술적 초석을 놓은 설계자

1966년 바이코누르. 사일로에서 R-36이 솟아오르자 드골은 '콜로살!'을 연발했다. 웃킨은 훗날 회고했다. '그래도 진짜 전투발사로는 이어지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미하일 얀겔의 후계자로서 1971년부터 1990년까지 KB 유즈노예를 이끈 수석설계자. 얀겔의 저장성 추진제 로켓 노선을 계승하여 역대 가장 강력한 대륙간탄도미사일 R-36M(NATO명 SS-18 '사탄')을 완성했고, 철도기동형 RT-23 몰로데츠와 우수한 중형 발사체 제니트를 개발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과 국가상을 수상했으며 소련 과학아카데미와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CPSU 중앙위원(1976~1990)을 지냈다. 냉전 후기 소련 전략로켓군의 핵심 전력을 설계하며 미소 간 핵균형을 기술적으로 뒷받침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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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KB 유즈노예 입사, 엔지니어·선임엔지니어
  • 1967KB 유즈노예 수석설계자 제1대리
  • 1971KB 유즈노예 수석설계자 겸 소장
  • 1976우크라이나 SSR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CPSU 중앙위원
  • 1979KB 유즈노예 총설계자 겸 소장
  • 198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86NPO 유즈노예 총괄국장 겸 총설계자
  • 1990–2000TsNIIMASh 소장

레프 니콜라예비치 자이코프

Лев Николаевич Зайков
산업·생산 운영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3–2002 ↓ 실각 1990

방산 공장 견습공에서 군산복합체 총괄 정치국원이 된 테크노크라트

위대한 조국전쟁 중 열두 시간 교대 근무를 서던 열여덟 살 자이코프는 세 차례 전선으로 도망쳤다. 매번 공장으로 돌려보내졌지만, 방산 노동자로서의 그의 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레닌그라드 방산 공장 견습공으로 출발해 소련 군산복합체 전체를 총괄하는 정치국원 겸 중앙위 서기(1985–1990)까지 오른 산업 관료 출신 당 지도자다. 그리고리 로마노프로부터 방위산업 포트폴리오를 물려받아 핵·재래식 무기 감축 정치국 위원회를 주재했으며, 소련이 금지한 생물무기 프로그램을 알고 있던 극소수 고위 인사 중 한 명이었다. 1987년 보리스 옐친 축출 후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를 겸임했고, 방산 전자기업 노바토르와 레니네츠에서 노동자로 시작해 총책임자까지 오른 공장 경력으로 사회주의 노동 영웅(1971) 칭호를 받았다. 이념보다 실무를 중시한 전형적인 테크노크라트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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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45레닌그라드 방산 공장 견습공·자물쇠공, 3차례 전선 탈출 시도
  • 1961–71레닌그라드 국영 '노바토르' 공장장
  • 1974–76과학생산연합 '레니네츠' 총책임자
  • 1976–83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장
  • 1983–85레닌그라드 주 당 제1서기
  • 1985–90중앙위 서기(군수공업·기계제조 담당), 정치국 위원(1986–90)
  • 1987–89모스크바 시 당 제1서기 (겸임)

필리프 티모페예비치 예르마시

Филипп Тимофеевич Ермаш
이념·선전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3–2002 ○ 자연사

소비에트 할리우드를 꿈꾼 정체기 영화 총책

안드로폰프가 《시베리아다》를 보고 "이거 반소비에트 영화 아니냐"고 묻자, 예르마시는 "나도 시베리아인입니다, 그게 현실이었습니다"라고 답하며 영화를 지켰다.

1972년부터 1986년까지 소련 국가영화위원회(고스키노) 의장을 지내며 정체기 영화계를 총괄한 당 관료이다. 시베리아 농민 출신으로 공병으로 참전했고, 콤소몰과 스베르들롭스크 당 기구를 거쳐 1962년 중앙위원회 문화부 영화 부문 책임자가 되었다. 고스키노 의장으로서 이념 통제와 대중 흥행을 병행해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승무원》 등 블록버스터와 타르콥스키·콘찰롭스키의 작품을 모두 관리하며 소련판 스튜디오 시스템을 추구했다. 1986년 영화인대회의 비판 속에 물러났으나, 임기 중 소련 영화는 오스카 2개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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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붉은 군대 복무, 공병, 적성훈장·용기메달 수훈
  • 1951–1956스베르들롭스크 시 콤소몰 제2서기 → 제1서기
  • 1956–1962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 과학·학교·문화부장
  • 1962–1972중앙위 문화부 영화 부문 책임자 → 문화부 부장
  • 1972–1986국가영화위원회(고스키노) 의장
  • 1976–1989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헤이다르 아리르자 오글루 알리예프

Heydər Əlirza oğlu Əliyev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아제르바이잔 아제르바이잔 1923–2003 ○ 자연사

KGB에서 크렘린까지 오른 아제르바이잔의 실용주의자

KGB 제1부의장 표도르 보브코프가 "3년 동안 무엇을 해냈습니까?"라고 묻자 알리예프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28년간 복무한 아제르바이잔인으로, KGB 의장을 거쳐 1969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브레즈네프 시기 동안 공화국 경제를 급성장시키고 포도·석유·면화 생산을 대폭 확대했으며, 1982년에는 비슬라브인으로서는 드물게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겸 정치국 정위원에 올랐다. 1993년 독립 아제르바이잔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세기의 계약'으로 불리는 대규모 카스피해 석유 개발 협정을 체결하고, 취약한 신생국을 안정시켜 건국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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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1967아제르바이잔 SSR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간부, 방첩부장·부의장 역임
  • 1967–1969아제르바이잔 SSR 각료회의 산하 KGB 의장 (소장)
  • 1969–1982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76–1982CPSU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 → 정위원 (1982)
  • 1982–1987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기계·경공업·운송·문화·교육 담당)
  • 1993–2003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제3대 대통령

보리스 이바노비치 스투칼린

Борис Иванович Стукалин
이념·선전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3–2004 ○ 자연사

브레즈네프기 출판·검열의 최고 책임자

불가코프 작품에 대한 긍정적 평론을 실은 출판사들을 질책하며 그가 남긴 말: '소비에트 권력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작가를 왜 출판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브레즈네프 시대 12년간 소련 출판·인쇄·서적 유통 전체를 관장한 고스코미즈다트 의장으로, 모든 책·신문·잡지의 출간 여부를 결정하는 실질적 검열 최고 책임자였다. 언론인 출신으로 지역 신문 편집장에서 시작해 『프라우다』 부주필을 거쳐 1970년 국가출판위원회 수장에 올랐으며, 200권 『세계문학전집』과 같은 대규모 출판 기획을 진두지휘하며 소련을 1인당 도서 출간 세계 1위로 올려놓는 한편, 불가코프 같은 '소비에트 권력을 받아들이지 않은 작가'의 출판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이념적 보수성을 견지했다. 안드로포프 집권 후에는 중앙위 선전부장으로 승진했으나, 고르바초프 등장과 함께 헝가리 대사로 전출되며 중앙 무대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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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1보로네시주 지역 신문 『노바야 지즌』 문예부원
  • 1942–1946서부전선·제2벨로루시전선 통신대대 무선기술병, 베를린 입성
  • 1948–1960보로네시주 지역신문 편집장 → 주(州) 당 기관지 『콤무나』 편집장
  • 1960–1963CPSU 중앙위 선전부 RSFSR 담당 지도원 → 출판·방송·TV 섹터장
  • 1963–1965RSFSR 각료회의 출판위원회 의장
  • 1965–1970『프라우다』 부주필 → 제1부주필
  • 1970–1982소련 각료회의 출판위원회 의장 → 국가출판·인쇄·서적유통위원회(고스코미즈다트) 의장
  • 1982–1985CPSU 중앙위 선전부장
  • 1985–1990주 헝가리 소련 특명전권대사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야코블레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Яковлев

글라스노스트의 설계자: 이념 담당이 이념을 해체하다

1983년 5월 19일, 온타리오 주 애머스트버그의 유진 웰런 농장. 옥수수와 콩밭 사이 길을 걸으며 야코블레프는 훗날 "조심을 내던졌다"고 말했고, 외교의 어처구니없는 실책들을 털어놓았다. 그 산책 끝에 둘은 개혁의 동지가 되었다.

1923년 12월 2일 야로슬라블현 코롤료보 마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41년 징집되어 해병여단 소대장으로 볼호프 전선에서 싸우다 1942년 8월 양다리에 중상을 입고 1943년 2월 제대했다. 1944년 당에 입당했고, 1953년 중앙위 기구로 옮겨 1958~59년 컬럼비아대학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다녀왔다. 1972년 11월 국수주의를 비판한 논설로 당 기구에서 밀려나 1973년부터 10년간 캐나다 대사로 있었다. 1983년 8월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 소장이 되었고, 1985년 선전부장, 1987년 정치국원으로서 글라스노스트를 밀어붙였다. 2005년 10월 18일 오랜 지병 끝에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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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43해병여단 소대장; 1942년 8월 중상, 1943년 2월 제대
  • 1953–72중앙위 기구에서 성장, 선전부 부부장 대행
  • 1973–83캐나다 대사 10년
  • 1983–85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 소장
  • 1985–90선전부장, 정치국원: 글라스노스트 설계
  • 1989–비밀의정서 조사위원장, 이후 복권위원회 위원장

마르쿠스 볼프

Markus Wolf

냉전 정보전의 장기 설계자

1984년 8월 RYaN 회의에서 그는 서방의 핵공격 징후보다 ‘실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마르쿠스 볼프는 나치 박해를 피해 소련으로 망명한 뒤 독일민주공화국의 대외정보기관을 이끈 공산주의 관료이자 정보 책임자였다. 그는 1952년부터 1986년까지 슈타지 해외정보국 HVA를 지휘하며 서독 정치·군사·경제를 겨냥한 첩보와 공작을 조직했다. 1980년대 초 소련이 핵 선제공격 공포 속에서 RYaN 작전을 확대하자, 볼프는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현장 정보가 실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긴장을 드러냈다. 독일 통일 뒤 그는 해외 망명과 재판을 거쳤고, 자신의 국가보안 활동에 대한 책임과 사회주의의 개혁 가능성을 회고록과 공개 발언으로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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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33슈투트가르트에서 성장
  • 1933–1943소련 망명, 모스크바와 코민테른 학교에서 수학
  • 1943–1945모스크바 독일인민방송 편집자·방송원
  • 1949–1951독일민주공화국 모스크바 대사관 초대 참사관
  • 1952–1986대외정보기관 IWF와 HVA 국장
  • 1953–1986국가보안부 장관 제1차관
  • 1986–1990퇴임 후 회고록 집필과 개혁 논쟁 참여
  • 1990–2006망명과 재판을 거쳐 베를린에서 사망

보리스 파블로비치 부가예프

Борис Павлович Бугаев

브레즈네프의 개인 조종사에서 항공원수가 된 민간항공 수장

1961년 지중해 상공, 납치된 프랑스 전투기가 브레즈네프의 Il-18기에 발포했을 때 조종간을 잡은 부가예프는 급선회로 공격을 회피했다. 착륙 후 브레즈네프는 "네 덕분에 살았다"고 말했다.

브레즈네프의 개인 조종사로 발탁되어 1970년부터 17년간 민간항공부 장관을 지내며 아에로플로트를 제트기 중심의 세계적 항공사로 성장시켰다. 1977년 항공원수로 진급하여 모든 병종을 통틀어 소련 최후의 원수 계급 보유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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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3항공훈련대대 생도, 악튜빈스크 항공학교 교관
  • 1943–1947215항공대 조종사·편대장, 당파운동 중앙참모부 임무 수행
  • 1948–1957브누코보 공항 기장·교관 조종사, 아에로플로트 최초 장거리 노선 개척
  • 1957–1966제235특별항공대대장, 브레즈네프 전용기 조종사
  • 1966–1970민간항공부 차관, 제1차관
  • 1970–1987민간항공부 장관, 아에로플로트 제트화·세계적 확장 주도
  • 1987–1992국방부 감찰총감

이반 모이세예비치 트레티야크

Иван Моисеевич Третьяк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23–2007 ○ 자연사

KAL 007 격추 명령을 내린 소련 방공군 총사령관

1983년 9월 1일, 극동군관구 사령관 트레티야크는 참모본부로부터 소련 영공을 침범한 여객기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부하 부대에 그대로 하달했다.

소련의 육군대장(1976)으로, 독소전쟁에서 21세에 연대장을 지내며 소련영웅 칭호를 받은 전쟁영웅이었다. 전후 벨라루스군관구 사령관(1967~1976)과 극동군관구 사령관(1976~1984)을 거쳐, 1986년 국방차관에 임명되고 이듬해 방공군 총사령관(1987~1991)으로서 소련 영공방어를 총괄했다. 1983년 9월 1일 극동군관구 사령관으로서 소련 영공을 침범한 대한항공 007편 여객기를 격추하라는 본부 명령을 하달하여 269명의 민간인 사망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82)에도 선정될 만큼 전후 소련 군사엘리트의 전형적 궤적을 밟았으나,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해임되며 시대의 종언과 함께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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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독소전쟁 참전: 제29근위소총사단 소대장·중대장·대대장·제93근위소총연대장
  • 1956–1957제26근위소총사단장
  • 1960–1964주독소련군 제3연합군 참모장·제1부사령관
  • 1964–1967자캅카스군관구 제4군 사령관
  • 1967–1976벨라루스군관구 사령관
  • 1976–1984극동군관구 사령관
  • 1984–1986극동방면군 총사령관
  • 1986–1987국방차관 겸 국방부 감찰총국장
  • 1987–1991국방차관 겸 방공군 총사령관

그리고리 바실리예비치 로마노프

Григорий Васильевич Романов
사회운동·조직 소련 공산당·볼셰비키 소련 러시아 1923–2008 ↓ 강제은퇴 1985

레닌그라드에서 모스크바로, 마지막 한 걸음에서 멈춘 후계자

«아무도 고르바초프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다음 날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모든 일을 끝내 놓았다. 정치국 규칙이 요구하는 대로 우리를 기다리지도 않고. 그토록 빨랐다! 이미 그들 모두와 비밀리에 거래를 마친 것이다.» — 1985년 3월 체르넨코 사후 승계 과정을 회고하며.

레닌그라드 조선기술자 출신으로, 1970년부터 13년간 레닌그라드 주 당 제1서기를 지내며 대규모 주택 건설, 지하철 확장, 레닌그라드 원전 및 방조제 착공 등 도시 기반을 재편했다. 군수공업을 관장하는 중앙위 서기와 정치국 위원까지 올랐고,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 모두 그를 차기 서기장 후보로 주목했다. 1985년 체르넨코 사후 고르바초프와의 승계 경쟁에서 밀려난 것은 소련 말기 역사의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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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45통신병으로 레닌그라드·발트 전선 복무, 부상
  • 1946–54조선소 설계기사 → 당위 비서·파르토르그
  • 1957–61레닌그라드 키로프 구 당 제1서기
  • 1963–70레닌그라드 주 당 제2서기
  • 1970–83레닌그라드 주 당 제1서기
  • 1973–76정치국 후보위원
  • 1976–85정치국 정위원
  • 1983–85중앙위 서기, 군수공업 담당

미하일 미트로파노비치 자이체프

Михаил Митрофанович Зайце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3–2009 ○ 자연사

동독 주둔 소련군 총사령관이자 아프가니스탄 작전을 지휘한 대장

전차군 사령관 리발코가 부상당한 자이체프 대위의 병실을 찾았다. "자네, 아직 한참 더 싸워야 하네." 그리고 자신의 권한으로 붉은기 훈장을 수여했다. 소련영웅 칭호는 40년 뒤에야 따라왔다.

위대한 조국전쟁에 자원입대해 쿠르스크에서 프라하까지 싸운 전차부대 장교로, 전후 기갑군 사령관과 벨로루시 군관구 사령관을 거쳤다. 1980년부터 1985년까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최전선인 주동독 소련군(GSFG) 총사령관을 맡아 하급 장교의 주도성을 강조하는 훈련 개혁을 단행했고, 1983년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85년 남부전략방향 총사령관으로 전임되어 아프가니스탄 내 소련군 작전을 지휘했으며, 산악전에 부적합한 BMP-1을 대체할 BMP-2의 대량생산을 중앙에 직접 요구해 관철시켰다. 2미터에 가까운 거구에 막강한 체력으로 '훈련장 장군'이라 불린 그는, 냉전 말기 소련 지상군의 작전 교리와 장비 현대화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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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자원입대, 전차여단·군단 참모 장교로 종전까지 복무, 6개 전투훈장 수훈
  • 1945–1965공수·전차사단 참모, 육군참모대학 졸업(1965)
  • 1965–1969제17근위전차사단장, 제120근위차량화소총사단장
  • 1969–1972제5근위전차군 사령관
  • 1972–1980벨로루시 군관구 제1부사령관, 이어 사령관(1976)
  • 1980–1985주동독 소련군(GSFG) 총사령관, 육군대장 진급(1980), 소련영웅(1983)
  • 1985–1989남부전략방향 총사령관, 아프가니스탄 작전 지휘
  • 1989–1992국방부 감찰총감단, 퇴역(1992)

발렌틴 이바노비치 바렌니코프

Валентин Иванович Варенник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연방 (1923–1991), 1991년 이후 러시아 러시아 1923–2009 ○ 모스크바에서 병사

승전기를 받아든 장군, 쿠데타 법정에 홀로 선 장군

1945년 6월, 근위대장이던 바렌니코프 대위는 모스크바 중앙비행장에 도착한 승전기를 직접 건네받았고, 몇 시간 뒤 그 깃발은 붉은광장 승전 퍼레이드의 선두에 섰다.

소련과 러시아의 육군 대장으로, 조국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참전자다. 1945년 근위대장으로서 승전기를 받았고, 1984년부터 1989년까지 국방부 관리단을 이끌며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했다.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는 철군이 아니라 1988년 작전 마기스트랄 지휘의 공로로 받은 것이다.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위원은 아니었으나 1991년 8월 쿠데타를 군부 대표로서 지지했고, 1994년 사면을 거부한 유일한 피고인으로서 상관의 명령에 따랐다는 이유로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대한항공 007편 격추 명령과 1991년 1월 빌뉴스 사태에 책임 있는 위치에 있었다. 1995년부터 국가두마 의원을 지냈고 이후 국방부 감찰관이 되었다. 2009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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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아르마비르 군사위원회를 통해 붉은 군대에 징집, 체르카스크 보병학교 입교 (스베르들롭스크로 이전)
  • 1942–1945제138소총사단으로 스탈린그라드 전선 참전, 이후 제35근위소총사단; 드네프르 도하·바그라티온·베를린 작전, 3회 부상, 대위로 종전
  • 1954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 1967참모본부 아카데미를 금메달로 졸업, 제26군단장 (1967–1969)
  • 1969–1971주독 소련군 제3충격군 사령관
  • 1971–1973주독 소련군 제1부총사령관
  • 1973–1979카르파티아 군관구 사령관
  • 1979–1984참모본부 작전총국장 겸 제1부참모총장, 이 직위에서 1983년 대한항공 007편 격추 명령을 내렸다
  • 1984–1989국방부 관리단을 이끌고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되어 장관 개인 대표를 맡았으며, 유엔 선의사무소와 1988–1989년 철군을 협의했다
  • 1986체르노빌 사고 수습 군사작전 지휘
  • 1989–1991국방차관 겸 지상군 총사령관, 1991년 1월 빌뉴스 사태에 참여
  • 19918월 18일 포로스의 고르바초프를 찾아가 군부 대표로서 GKChP를 지지, 8월 23일 체포
  • 1994GKChP 피고인 가운데 유일하게 사면을 거부, 8월 11일 러시아 대법원 군사합의부에서 무죄 선고, 1995년 2월 3일 대법원 상임위가 무죄를 확정
  • 1995–2003국가두마 의원 (KPRF, 1996–1999년 참전용사위원회 위원장, 2003년 로디나 블록 합류)
  • 2000s참전용사 담당 국방부 감찰관

게오르기 아르카디예비치 아르바토프

Георгий Аркадьевич Арбатов
학술·연구 소속 미확정 소련 러시아 1923–2010 ○ 자연사

데탕트를 설계한 소련 최고의 미국 전문가, 아카뎀고로도크가 아닌 아르바트 거리에 연구소를 세우다

「우리의 진정한 비밀무기는 당신들에게서 적을 빼앗는 것이다」 — 아르바토프가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냉전 종식을 설명하며, 1988년 12월

브레즈네프부터 고르바초프까지 소련 지도자들의 대미 외교정책을 설계한 최고의 미국 전문가. 1967년 미국·캐나다연구소(ISKAN)를 창설해 28년간 이끌며 SALT와 데탕트의 지적 토대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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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4근위박격포대대 정찰대장, 포대장, 연대 참모차장보 — 칼리닌·보로네시·제1·2우크라이나 전선군, 드네프르 도하
  • 1949–1960외국문학출판사 편집자, 《보프로시 필로소피》 부장, 《노보예 브레먀》 부장, 《콤무니스트》 자문역
  • 1960–1963《세계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 논설위원 (프라하)
  • 1962–1964IMEMO 분야장, 이념투쟁 연구
  • 1964–1967CPSU 중앙위 국제부 자문그룹장, 브레즈네프 외교정책 자문
  • 1967–1995소련과학원 미국·캐나다연구소(ISKAN) 창설 소장, 아카데미크(1974)
  • 1971–1991중앙감사위원 → 중앙위 후보위원 → 중앙위 위원, 최고소비에트 대의원
  • 1995–2010ISKAN 명예소장, 러시아과학원 고문, 회고록 《체제》 《나의 시대》 집필

세르게이 이오시포비치 마냐킨

Сергей Иосифович Манякин

26년간 옴스크를 통치한 소련 최장수 지역당 서기

1961년 10월 볼셰레치예에서 아침 일찍, 당위원회 앞 광장에서 파란색 운동복 차림으로 체조를 하던 남자—그가 바로 옴스크 주의 새 제1서기, 39세의 마냐킨이었다.

소련 역사상 가장 오래 지역당 제1서기를 지낸 인물로, 1961년부터 1987년까지 26년간 옴스크 주당위원회 제1서기를 역임했다. 흐루쇼프가 농업 위기에 대응해 직접 임명했으며,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옴스크는 정유·중공업·농공복합단지를 갖춘 시베리아의 주요 산업도시로 성장했다. 1987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으로 발탁되어 개혁기 국가 감독 기구를 이끌었고, 이후 당통제위원회 제1부의장을 지냈다. 1961년부터 1990년까지 29년간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재임하며 흐루쇼프·브레즈네프·고르바초프 3대를 관통한 전형적인 브레즈네프기 지역당 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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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3붉은군대 병사, 부상으로 제대
  • 1948–1957농업경제인: 농업기사 → MTS 소장 → 콜호즈 의장 (스타브로폴)
  • 1957–1960스타브로폴 지방당위 농업부장
  • 1960–1961스타브로폴 지방집행위원회 의장
  • 1961CPSU 중앙위원회 감찰관
  • 1961–1987옴스크 주당위원회 제1서기
  • 1987–1989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
  • 1989–1990CPSU 중앙위 당통제위원회 제1부의장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예피모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Ефим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인 1923–2012 ○ 심장마비

Il-2 에이스 출신 소련 공군 총사령관, 두 번의 소비에트 연방 영웅

2012년 8월 31일, 평생의 친구 세르게이 소콜로프 원수의 부고를 듣고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두 노장은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Il-2 공격기 조종사로 222회 출격하여 적기 85대를 지상에서 격파한 위대한 조국전쟁 최고의 공격기 에이스로, 스물한 살에 소비에트 연방 영웅 금성훈장을 두 번 받았다. 1969년부터 15년간 공군 제1부사령관으로 Su-25 공격기 개발을 강력히 추진했고, 1984년 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Su-25 실전 운용을 지휘하며 소련 공군을 사상 최대 규모로 이끌었다. 퇴역 후에도 러시아 재향군인위원회 위원장으로 군 원로의 영향력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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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5Il-2 공격기 조종사 → 198공격항공연대 비행대장, 222회 출격
  • 1957–1959제339전폭항공사단장 → 제6근위폭격항공사단장
  • 1964–1969제57(후 제14)공군군단장, 프리카르파티아 군관구
  • 1969–1984소련 공군 제1부총사령관
  • 1984–1990소련 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 1990–1993국가공역이용·항공교통관제위원회 위원장
  • 2006–2010러시아 연방 시민회의소 위원, 러시아 재향군인위원회 위원장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Wojciech Jaruzelski

계엄령과 원탁회의 사이의 폴란드 지도자

1989년 원탁회의는 억압적 통치의 책임과 평화적 체제 이행이 한 인물의 경력 안에서 충돌한 사례다.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군인·공산당 지도자다. 1981년 계엄령을 선포해 연대노조를 탄압했으나, 1989년에는 야권과의 원탁회의 및 부분 자유선거를 받아들여 체제 전환의 협상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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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1계엄령 선포
  • 1981–1989폴란드 통일노동당 제1서기
  • 1989원탁회의·부분 자유선거 수용
  • 1989–1990전환기 폴란드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