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MSZMP) 정치국원이자 개혁파의 이념적 후견자였다. 1989년 1월 28일 라디오에서 1956년 혁명을 '민중봉기'라 규정해 당의 정통성을 스스로 무너뜨렸고, 5월 서베를린에서는 베를린 장벽을 '치욕'이라 부르며 동독 체제를 비판했다. 오토 폰 합스부르크와 함께 범유럽 피크닉을 후원해 철의 장막에 첫 균열을 냈고, 이후 헝가리 사회당 부의장을 거쳐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레너드 H. 퍼루츠는 미국 공군 장성이자 군사정보 전문가로, 냉전 말기의 핵위기 관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3년 유럽 주둔 미 공군 정보참모차장으로서 소련군의 비정상적 핵 readiness를 관찰했지만 NATO의 경보 수준을 올리지 말도록 권고해 긴장을 더 키우지 않았다. 이후 국방정보국장을 지내며 정보 판단과 군사 의사결정의 관계를 보여 주었고, 말년에는 애이블 아처 83의 위험을 되돌아보는 보고서를 남겼다.
1988년 INF 조약 비준 청문회 직후, 베스메르트니흐는 크렘린궁 복도에서 미국 기자와 편안한 영어로 조약의 정치적 의미를 논했다. 소련 고위 관료로서는 이례적인 장면이었다.
셰바르드나제 사임 후 소련 외무장관이 된 직업외교관으로, MGIMO 졸업생 가운데 처음으로 외무부 수장에 올랐다. 워싱턴 대사관에서 13년 근무하며 미국 전문가로 성장했고, 재임 7개월 동안 START-I 조약 서명과 마드리드 중동평화회의 준비를 주도했다. 소련 외무장관 최초로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주변국과의 '우호 협력의 띠' 구상을 제시했으나, 8월 쿠데타 때 GKChP 불참과 공개 침묵으로 해임되었다. 이후 러시아 대외정책협회를 설립해 분석가로 전향했다.
그가 편집한 체르노빌 연구서는 6,000여 개 자료를 검토해 장기 피해를 추산하며 공식 사망자 수 중심의 서술에 이의를 제기했다.
알렉세이 야블로코프는 동물학과 생태학을 연구한 소련·러시아 생물학자이자 환경정책가였다. 그는 체르노빌의 장기적 건강·환경 피해를 강조하며 공공 논쟁에 참여했고, 공동 저술서의 높은 사망 추정치는 재난 피해 규모를 둘러싼 논쟁의 한 극단을 이루었다. 과학 연구와 환경운동, 의회·대통령 자문 활동을 오가며 생태 문제를 국가 의제로 끌어올렸다.
1967년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예고리체프가 브레즈네프의 국방 정책을 공개 비판한 다음 날, 파스투호프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예고리체프가 답했다. "보랴, 왜 그랬나? 네 인생을 망쳤어."
1977년부터 1982년까지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지내며 4천만 대원의 청년 조직을 이끈 소비에트 당-국가 간부이다. 재임 중 바이칼-아무르 간선철도(BAM) 건설과 북극점 스키 횡단 등 대규모 청년 동원 사업을 총괄했고, 1978년 CPSU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소련 국가출판·인쇄·서적거래위원회(고스코미즈다트) 의장으로서 검열 체계와 출판 산업을 관장했으며, 이후 덴마크(1986–1989)와 아프가니스탄(1989–1992) 주재 대사를 지냈다. 소련 해체 후에도 러시아 외무차관, CIS 담당 장관, 국가두마 의원을 역임하며 후기 소비에트 엘리트의 연속성을 대표했다.
1991년 쿠데타 패배 뒤 그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결성을 “당에 대한 범죄”라고 불렀다.
아나톨리 말로페예프는 노동자 출신으로 당 조직을 거쳐 벨로루시아의 공화국 지도부에 오른 소비에트·벨로루시아 정치가였다. 그는 페레스트로이카 말기에 지역 행정 경험과 연방 중심의 당 노선을 바탕으로 공산당을 이끌었고, 1991년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지지했다. 쿠데타 패배 뒤에도 당 조직의 재건을 모색했으며, 이후 독립 벨로루시아의 의회 정치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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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고멜 출생
1949–1952고멜·민스크 차량수리공장에서 기계공
1952–1956소비에트 해군 복무
1962–1975고멜·모지리 당 조직에서 근무, 모지리 시당 제1서기와 고멜주 당위원회 서기
테레시코바에게 「너는 콤소몰과 당이 돌이킬 수 없이 망쳐 놓았어」라고 말했다고 카마닌이 일기에 기록했다.
모스크바 항공대학을 졸업하고 320시간의 비행 경력을 가진 유일한 여성 조종사 출신 우주인 후보였다. 1962년 여성 우주비행사단에 선발되어 최종 시험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고, 의료 책임자 야즈돕스키는 그녀를 1순위로 추천했다. 그러나 카마닌은 그녀의 독립적인 태도를 '오만'으로, 담배와 음주를 '도덕적 불안정'으로 기록했고, 코롤료프는 노동계급 출신 여성이 필요하다며 테레시코바를 선택했다. 이후 보스호트 계획의 여성 우주유영 임무를 준비했으나 프로그램이 취소되면서 끝내 우주비행을 하지 못했고, 1969년 여성 그룹 해체와 함께 퇴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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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57모스크바 여자 156학교 금메달 졸업, 모스크바 항공대학(MAI) 졸업 (액체로켓엔진 전공)
"반알코올 캠페인은 100만 명 이상의 생명을 구했다." 넴초프가 25년 연구 끝에 내린 결론이다.
모스크바 의대를 졸업하고 정신과 의사로 출발해 모스크바 정신의학연구소에서 평생을 연구한 알코올 역학의 개척자다. 1985년 반알코올 캠페인을 계기로 실제 알코올 소비량과 그로 인한 사망 규모를 추계하는 방법론을 개발했으며, 캠페인이 약 100만 명의 생명을 구했다는 추정치를 제시해 국제적 논의의 기준점을 만들었다. 고르바초프 시기와 소련 붕괴 이후의 알코올 관련 초과 사망을 추적하며 알코올 정책과 공중보건의 관계를 실증한 그의 연구는 러시아 인구위기의 핵심적 설명틀로 자리 잡았다.
멩기스투 정권 시기, 망명자들의 망명·사면 청원을 도와 수십 명이 고문과 죽음을 피하도록 했고 2018년에는 성훈장 대십자 훈장을 받았다.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에티오피아 연구자로, 오클라호마주립대학 정치학교수와 명예교수를 지냈다. 평화봉사단 아디스아바바 부단장 부임 시점은 부고·왕실평의회가 1963년, 출판사·도서관 약력이 1964년으로 엇갈린다. 뉴델리 교육자료센터 상주 책임자, 오스틴대학 평생교육원장, 털사대학 선임연구원을 거쳐 1988년부터 2008년까지 오클라호마주립대학에서 가르쳤다. 멩기스투 정권 시기 망명자들의 망명·사면 청원을 도와 수십 명이 고문과 죽음을 피하도록 했고, 2018년 성훈장 대십자 훈장을 받았다. 저서로 《에티오피아: 냉전 이후의 아프리카 국가》(1999)와 《신대륙의 유다의 사자》(2011)가 있다. 미국 의회도서관의 국가연구서 《에티오피아: 국가연구》는 그의 저작이 아니다
1966년 2월 18일, 집을 나서며 아내에게 남긴 마지막 쪽지: 「지노크! 넌 언제나 최고였어. 너 같은 여자는 찾아야만 해. 용서해.」
1961년 1월 국가위원회는 첫 유인비행 탑승 순위를 가가린, 티토프, 넬류보프로 확정했다. 보스토크 1호의 두 번째 예비였고 보스토크 3·4호 백업으로도 훈련했으나, 1963년 3월 치칼롭스카야 역에서 군 순찰대와의 충돌로 우주비행사단에서 제적됐다. 극동으로 좌천된 뒤 알코올 의존과 우울증에 빠졌고, 1966년 2월 18일 기차에 뛰어들어 서른한 살에 죽었다. 그의 존재는 글라스노스트까지 은폐됐고, 집단사진에서도 지워졌다.
40~50초짜리 작업을 위해 25~30킬로그램 납 갑옷을 입혔다. '우리가 석기시대에서 온 것인가' 하는 질문을 나는 아직도 멈추지 못한다.
소련 민방위 장군이자 기술과학 박사. 체르노빌 원전 폭발 넉 달 뒤, 원격 로봇이 모두 고장 나자 정부위원회는 그에게 가장 위험한 구역의 수동 제염을 맡겼다. 그는 건물의 납 벽판을 뜯어내 급조한 방호복으로 병사들을 무장시켰고, 3,828명이 40~90초씩 교대하며 3호기 지붕에서 200톤의 고방사능 파편을 손으로 퍼냈다. 작전 후 루이셴병으로 투병하며 두 권의 책을 썼고, 소련영웅 칭호에 추천되었으나 키예프 군관구 참모장과의 갈등 끝에 명단에서 빠졌다.
2012년 인터뷰에서 당시 업계 현실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발전 프로그램은 이미 많이 채택되었다. 공작기계 분야만 30개 이상의 정부 문서가 나왔다. 그러나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니콜라이 파니체프는 소련 공작기계·공구공업의 마지막 장관(1986~1991)으로, 벨라루스 농촌 출신 선반공에서 출발해 25년간 레닌그라드 일리치 공작기계공장에서 공장장까지 오른 생산 행정가였다. 장관 시절 CNC 공작기계·유연생산모듈·로봇복합체 등 최신 기술을 도입했으나, 행정명령 체계와 시장 개혁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소련 붕괴 후에는 러시아 공작기계협회 '스탄코인스트루멘트'를 설립해 업계를 대변했고, 전직 소련·러시아 장관 원로 모임인 공공평의회 의장을 맡았다. 2004년 회고록 『균열』에서 계획경제의 성취와 개혁 실패를 증언했다.
1989년 5월 27일, 제1차 인민대표회의 연단에서 보수파 의원들을 향해: "여기 계신 분들은 공격적으로 복종하는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탈린-브레즈네프식 최고회의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1989년 제1차 소련 인민대표회의에서 보수파를 '공격적으로 복종하는 다수'라고 규정한 역사가. 프랑스 아날학파 연구자로 출발해 모스크바 역사·기록연구소 학장(1986-1991)을 거치며 소련 역사학의 탈스탈린화를 주도했고, 사하로프·옐친과 함께 지역간 의원 그룹 공동의장으로 민주개혁을 이끌었다. 1991년에는 러시아국립인문대학(RSUH)을 설립해 당 고등학교 건물에 독립적 인문학 공간을 열었고, 이후 옐친과 푸틴의 권위주의를 공개 비판하며 마지막까지 체제와 거리를 두었다.
보스토크 5호가 지구를 돌고 있던 1963년 6월 18일, 중앙위원회는 그의 입당 청원을 심의하여 후보 기간 없이 그를 당원으로 받아들였다.
소련의 5번째 우주비행사. 1963년 6월 14일 보스토크 5호로 발사되어 약 5일 동안 지구를 81바퀴 돌았고, 이 단독 우주 체류 기록은 오늘날까지 깨지지 않았다. 당초 보스토크 계획은 두 여성을 동시에 발사할 예정이었으나 한 명의 여성과 한 명의 남성으로 변경되면서 비콥스키가 테레슈코바보다 이틀 먼저 발사됐다. 이후 소유스 22호(1976)와 동독 최초 우주인 지그문트 옌과 함께한 소유스 31호(1978)까지 총 세 차례 우주 비행을 수행했으며, 보스토크·보스호트 계열 우주비행사 중 유일하게 3회 비행을 기록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55카친스크 군사항공학교 졸업, 전투기 조종사
1960제1차 우주비행사대 선발
1962.08보스토크 3호 백업 조종사
1963.06.14–19보스토크 5호 탑승, 81회 궤도, 4일 23시간 6분, 단독 우주 체류 기록
1976.09.15–23소유스 22호 사령관, 지구 관측 임무, 블라디미르 악쇼노프와 동행
1978.08.26–09.03소유스 31호 사령관, 동독 우주인 지그문트 옌과 살류트 6호 방문
벨로베즈까지 우리가 걸어온 길은 멀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1958년 입당해 30여 년간 우크라이나 공산당 선전·이념 부서를 오르내린 당료였으나, 1990년 최고소비에트 의장에 오르며 '민족공산주의'로 방향을 틀었다. 노보오가료보 협상에서는 연방이 아닌 연합(конфедерация)을 고수하며 신연방조약 서명을 9월로 미루었고,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후 8월 24일 우크라이나 독립선언을 주재했다. 그해 12월 1일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일주일 뒤 옐친·슈시케비치와 벨로베즈 협정에 서명하여 소련의 종말을 확정지었다. 대통령 재임 중 핵무기 포기와 경제 침체로 비판받았으나, 평화로운 정권 교체로 퇴진해 의원으로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마틴 매콜리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소련과 동유럽의 정치사를 연구한 역사가다. 그는 UCL 슬라브·동유럽학부에서 가르치며 스탈린주의, 흐루쇼프 시대, 냉전과 소련의 흥망을 폭넓게 다뤘다. 20차 당대회 비밀연설을 그는 당을 효율적인 기구로 되돌리려는 개혁이자, 흐루쇼프가 경쟁자들의 권위를 약화한 권력투쟁으로도 해석했다.
1990년 8월 9일 그가 이끈 헌법위원회가 헌법 초안을 채택했고, 12월 2일 국민투표를 거쳐 12월 11일 헌법이 공포됐다.
1934년 다호메이 진비에에서 태어난 베냉의 헌법학자이자 법률가다. 1990년 2월 국민회의 법·헌법 문제 위원회를 이끌며 12월 11일 헌법의 초안을 마련했고, 1990~1991년 제헌의회 의장을 지냈다. 유네스코에서 일했고 다호메이 정치·사회사를 연구했으며 유엔 인권 기구에서도 활동했다.
고르바초프가 물었다. '국제사회 반응은 생각했나?' 나는 답했다. '옐친이 지금 부시와 통화 중입니다. 부시는 찬성하는 눈치입니다!'
민스크에서 태어난 핵물리학자로, 벨라루스 국립대학 교수이자 라디오전자공학 전문가였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 조사위원회에서 소련 당국의 은폐에 맞서 진실 공개를 요구하다 해임되었고, 이 경험이 그를 정치로 이끌었다. 1991년 벨라루스 최고소비에트 의장으로서 비스쿨리 사냥 별장에서 옐친·크랍추크와 회동을 주최했으며, 원래 석유·가스 공급 논의로 시작된 자리에서 소련 해체 선언문에 처음으로 서명 의사를 밝혔고, 고르바초프에게 전화를 걸어 소련이 끝났음을 통보했다. 독립 벨라루스의 첫 국가원수였으나 1994년 루카셴코의 부패 의혹 공세로 실각했고, 말년에는 망명하지 않고 민스크에서 루카셴코 정권을 비판하는 야당 원로로 남았다.
역사적 기억이라는 표현 자체가 모순어법이다. 기억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매우 자주 오류에 빠진다.
미국을 대표하는 스페인 현대사 연구자로, 위스콘신대학에서 37년간 봉직하며 파시즘 유형론과 스페인 내전 연구의 보수적 해석을 정립했다. 그의 핵심 주장은 제2공화국 붕괴의 일차적 원인이 우파 음모가 아니라 사회당 주도의 혁명적 급진화에 있다는 것으로, 내전을 혁명과 반혁명의 충돌로 읽는다. 2000년대 이후 프랑코 정권에 온정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비냐스, 프레스턴 등 진보 진영의 주요 논쟁 상대가 되었으나, 그가 세운 수정주의적 틀은 스페인 내전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축이다.
1978년 2월 니코시아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인민연대 회의 도중 '검은 9월' 대원들이 그를 인질로 잡았지만, 40분 만에 이집트·팔레스타인 대표를 뺀 모두가 풀려났다.
알렉산드르 자소호프는 청년조직과 아시아·아프리카 연대 운동에서 경력을 쌓은 소련의 당·외교 정치가였다. 시리아 대사를 거쳐 북오세티야 당 조직을 이끌었고, 소련 말기의 민족문제와 국제정치를 함께 다루는 위치에 올랐다. 제28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원과 중앙위원회 서기로 선출되었으며, 연방의 개혁과 해체가 교차한 마지막 소비에트 권력층의 한 인물이었다. 이후 러시아 국가두마 의원을 거쳐 북오세티야 공화국 대통령이 되어 지역의 연방관계와 민족 간 긴장을 관리했다.
엘미라 카파로바는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공화국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교육·외무 행정을 거쳐 공화국 최고소비에트의 의장이 되었다. 1990년 1월 바쿠에 계엄을 선포하고 소련군을 투입한 조치에 맞서, 자신이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 결정이 내려졌다고 밝히며 공화국 주권 침해를 공개적으로 항의했다. 이 드문 제도적 반발은 소비에트 연방의 민족문제가 공화국 제도와 대중운동, 연방 권력의 충돌로 폭발한 순간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