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구스와프 즈보로프스키는 1905년 혁명기에 활동한 노동운동가로, 상세한 개인 이력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는 1905년 10월 13일 창립된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대표 소비에트의 첫 의장을 맡았고, 다음 날 게오르기 흐루스탈료프노사리에게 자리를 넘겼다. 짧은 재임이었지만 소비에트가 파업 속에서 노동자 대표를 정치적 조직으로 묶기 시작한 순간을 보여 준다.
1965년 3월 18일, 알렉세이 레오노프는 발사 때 접혀 있던 볼가 에어록이 궤도에서 부풀어 오른 뒤 그 문을 열고 우주로 나갔다.
보리스 미하일로프는 모스크바 근교 토밀리노의 제918공장(훗날 NPO 즈베즈다)에서 수석 설계자로 일하며 1964년 중반, 단 9개월 만에 팽창식 에어록 '볼가'를 설계·제작·시험한 인물이다. 보스호트 우주선에 금속제 에어록을 탑재할 공간이 없었기에, 발사 시에는 접혀 있다가 궤도에서 부풀어 오르는 그의 유연 구조물 설계가 유일한 해법이었다. 1965년 3월 18일 알렉세이 레오노프는 바로 이 에어록을 통해 인류 최초로 우주 공간으로 걸어 나갔다.
"이 길에서는 돌아올 수 없다"며 눈물로 노동자들에게 테러를 만류했으나, 스스로 겨울궁전 지하에 다이너마이트를 쌓았다 — 동료의 증언.
뱌트카 출신 목수로, 1878년 러시아 최초의 정치적 노동자 조직 '북러시아 노동자 동맹'을 빅토르 옵노르스키와 함께 창립했다. 1880년 겨울궁전에 목수로 위장 취업해 황제 식당 아래에 다이너마이트를 반입·폭파했으나 알렉산드르 2세는 지각으로 살아남았다. 1881년 3월 이후 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이 되었고, 1882년 오데사에서 스트렐니코프 검사 암살에 가담해 체포·처형당했으며, 레닌은 크렘린 사무실에 마르크스와 나란히 할투린의 고부조를 걸었다.
상세 이력 보기
1874–1875뱌트카 사범학교 입학, 성적 불량으로 퇴학; 목수 기술 습득
1875–1877페테르부르크로 이주, 공장들에서 목수로 일하며 혁명 서클 가입; 카잔 시위(1876) 참가 후 비합법 지위로 전환
1878빅토르 옵노르스키와 함께 '북러시아 노동자 동맹' 창립, 강령 작성 — 러시아 최초의 정치적 노동자 조직
1879.9스테판 바티시코프라는 가명으로 겨울궁전 목수로 취업, 다이너마이트를 매일 조금씩 반입
1880.2.5겨울궁전 지하실에서 폭탄 폭파 — 귀빈 지각으로 황제는 무사했으나 근위병 11명 사망, 56명 부상
1880–1881모스크바로 도피, 노동자 선전 활동 지속
1881.3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
1882.3.18오데사에서 니콜라이 젤바코프와 함께 스트렐니코프 검사 암살; 마부로 위장했으나 체포
1882.3.22오데사에서 가명으로 군사재판 후 교수형 — 겨울궁전 폭파범임이 밝혀지지 않은 채 처형
『기나긴 작별』 첫머리에서 "이 전쟁의 진정한 국제적 역사는… 지금으로서는 아주 먼 곳에 있다"며 스스로 한계를 밝혔다.
소련·러시아 외교정책과 중앙아시아를 연구하는 역사가. 2011년 『기나긴 작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출간하여, 소련의 철수 결정이 전장보다 국내 정치에 의해 형성된 '기나긴 작별'이었음을 기록 자료와 구술로 입증했다. 조지워싱턴대에서 학사, 런던정경대(LSE)에서 박사를 받은 뒤 암스테르담대에서 10년간 강의했고, 현재 템플대 교수로 재직하며 『사회주의 발전의 실험실』(2018)로 데이비스상과 휴잇상을 수상했다.
2007년 논문 「피의 일요일」에서 그는 1991년 1월 빌뉴스와 리가 사건을 둘러싼 고르바초프의 무죄 주장을 재검토했다. 그는 고르바초프가 무고한 시민의 죽음을 명령했을 가능성은 낮지만 그 결과를 낳은 해법을 받아들였다고 결론지었다.
아이나스 라사스는 리투아니아의 정치학자로, 발트 지역 정치와 국제관계를 연구한다. 그는 1999년 LCC 국제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빌뉴스 대학에서 저널리즘 석사 학위를 받았고 미국 워싱턴 대학에서 국제관계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방송 기자로 일한 뒤 옥스퍼드 대학 선임연구원과 배스 대학 강사를 거쳐 리투아니아로 돌아와 카우나스 공과대학 사회과학예술인문학부 학장을 맡았다. 연구 분야는 위협 인식과 역사 기억, 음모론을 다루는 정치심리학과 비공식적 기업·국가 관계를 다루는 정치문화다.
인터뷰에서: "우리는 CIA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그들은 나쁜 사람들을 지원했다."
아프가니스탄 판지시르 계곡 바자라크의 장갈라크 마을에서 타지크족 가정에 태어났다. 아버지 도스트 모함마드 칸은 왕립 아프가니스탄군 대령이었고, 카불 공과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한 뒤 부르하누딘 라바니의 이슬람회에 가담했다. 1979년 소련의 침공 이후 소련군과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였고, 1983년 소련군과의 휴전기에 12개 주 130명의 지휘관을 묶는 슈라에 나자르를 세웠다. 헤크마티아르와의 내전으로 카불이 파괴되었고, 아프가니스탄 정의 프로젝트와 휴먼라이츠워치는 1993년 아프샤르 작전 등 인권 침해의 책임을 그에게 물었다. 1996년 이후에는 북부동맹의 군사 지도자로 탈레반에 저항했고, 2001년 9월 9일 알카에다 요원들의 폭탄으로 암살되었다.
1946년 신민당·공산당 합당을 이끈 연안파 지도자이자 8월 종파사건으로 숙청된 공산주의자
1956년 8월 30일 전원회의에서 최창익은 소련파의 박창옥 등과 함께 김일성의 일인독재화를 지적하며 김일성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는 '8월 종파사건'으로 비화했고, 이후 연안파는 투옥·연금되었다.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로,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항일군정대학 교관·화북조선독립동맹 부주석을 지냈다. 해방 후 조선신민당 부주석,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겸 정치위원, 재정상·부수상을 역임했다.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을 비판한 뒤 숙청·수감되었으며 옥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896–1957, 영어 위키백과는 1896–1960, 소련 문서는 1898년생으로 기록한다. 정확한 생몰연도와 사망 경위에는 이설이 있다.
상세 이력 보기
1923귀국해 조선노동공제회·고려공산청년동맹에 참여
1928–1935'제3차 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되어 6년간 수감, 1935년 출옥
1936중국으로 망명해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
1938조선청년전위동맹 조직, 조선의용대 지도위원, 같은 해 말 옌안으로 이동해 항일군정대학 교관
1942화북조선독립동맹 창건, 중앙상무위원 겸 서기부장
1945화북조선독립동맹 부주석
1946.2조선신민당 부주석 (주석 김두봉)
1946.8신민당·조선공산당 합당으로 북조선노동당 결성, 당중앙위원회 상무위원 겸 정치위원
1961년 1월 5일, 오스발도 라미레스가 이끄는 반혁명 부대가 트리니다드의 티나히타스에서 그를 살해했다. 쿠바 자료들은 문해운동 개시 엿새째였다고 전하며, 그는 무장하지 않았다. 적어도 농민 엘리오도로 로드리게스 리나레스가 함께 살해되었다.
쿠바 마탄사스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다수 출처는 1942년 2월 19일, 에스캄브라이는 2월 18일로 적는다. 구두닦이와 제빵 일로 집안을 도왔고 1954년 6학년을 마친 뒤 야간에 공부를 이어 갔다. 1960년 자원 교사 모집에 응해 시에라 마에스트라의 미나스 데 프리오 교육학교에서 5월부터 8월까지 훈련을 받았고, 그해 8월 졸업 뒤 마갈리스 올모스 로페스와 함께 산티 시피리투스 산간의 산 암브로시오 지역에 배치되어 라 시에리타의 옛 제재소에 학교를 세우고 낮에는 어린이 44명, 밤에는 성인을 가르쳤다. 1961년 1월 5일 오스발도 라미레스가 이끄는 반혁명 부대에게 살해되었고, 쿠바 자료들은 그를 문해운동의 첫 희생자로 기록한다.
앙골라의 화학 공학자·외교관·정치인. 리스본 유학 중 1956년 MPLA 창립 문서 「1956년 선언」에 서명하고 1961년부터 PIDE의 감시를 받다가 1962년 포르투갈을 떠나 코나크리에서 MPLA 외교 실무를 맡았다. 이집트·알제리 대표, 콩고-브라자빌 대표부 총괄, MPLA 정보부 책임자를 거쳐 1976년부터 1984년까지 외무장관을 지냈고, 독립 뒤 MPLA 좌익 분파의 대표적 인물로 1998년 인터뷰에서 당·국가 요직은 민족·지역 인구 비중이 아니라 마르크스-레닌주의 전위 기준으로 채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0년 6월 26일 루안다에서 76세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56–1962리스본 대학 이학부에서 화학 공학 수학, 제국학생회관 거주, 1956년 선언 서명, 1961년부터 PIDE 감시
1988년 5월 남북이 긴장 완화와 국경 비무장화, 공동 석유 탐사구역, 신분증 통행에 합의했고, 1989년 11월 아덴에서 1981년 초안 헌법에 합의해 1990년 5월 22일 통일 예멘공화국이 선포됐다.
예멘의 군인 출신 정치가. 1958년 군에 들어가 1963년 장교로 임관했고 북예멘 내전을 겪었다. 1977년 타이즈 군사총독을 지내다 1978년 북예멘 대통령이 되어 1990년 5월 22일 남북 통일까지 재임했고, 통일 뒤에는 예멘공화국 대통령으로 2012년 사임할 때까지 재임했다. 1994년 이래 독자적으로 통치했고 2011년 예멘 혁명 뒤 후티와 손잡았다가 2017년 말 결별했으며 그해 12월 4일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58군 입대
1963장교 임관, 북예멘 내전 참전
1977타이즈 군사총독
1978.06아흐마드 알가슈미 암살 뒤 임시대통령위원회 참여
1978.07–1990.05북예멘(예멘아랍공화국) 대통령
1990–2012통일 예멘공화국 대통령, 2011년 11월 권한 이양 뒤 2012년 2월 퇴임
제니퍼 프로스트는 미국의 여성사와 정치·문화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이며 뉴질랜드 오클랜드대학교에서 가르친다. 그녀는 민권운동과 신좌파, 할리우드 정치, 역사교육을 다룬 저술을 통해 사회운동과 대중문화를 미국사의 핵심 자료로 읽어 왔다. 2019년 우주 경쟁 50주년 논평에서는 달 착륙이라는 단일 기준과 우주비행 능력 전반을 구분해, 소련의 연속된 선행 성과와 미국의 달 착륙을 함께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비교는 경쟁을 국가적 승패만이 아니라 군사적 맥락과 이후의 협력, 사회적 비용까지 포함한 역사적 과정으로 보게 한다.
1992년 모스크바에서 소매치기를 당해 경찰서에 갔더니, 서장이 차와 쿠키를 내놓으며 사건을 진행하려면 뇌물을 내야 한다고 태연히 말했다.
제임스 하인젠은 현대 러시아와 소비에트 사회의 정치·사회·문화사를 연구한 미국의 역사가다. 그의 대표작은 농업인민위원부를 중심으로 1917년 혁명 뒤 국가가 농촌을 변혁하려 한 과정을 추적한 『소비에트 농촌 만들기』다. 그는 농촌의 후진성을 극복하려는 국가 기획과 사회주의 건설의 목표가 충돌하는 지점을, 관료제와 농민의 선택 및 갈등을 통해 분석했다. 이후에는 스탈린 시대의 뇌물과 일상적 부패를 연구해 국가 정책과 사회적 실천 사이의 긴장을 넓혀 다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