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3월 18일, KGB 대장 이바슈틴은 비류조프 원수로부터 GRU 간부들에게 새 국장으로 소개되었다. 펜콥스키 사건 수습을 위해 온 KGB 요원 — 모두 잠시 머물다 떠날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는 24년을 더 있었다.
항공 조종사로 출발해 NKVD 방첩대로 옮긴 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남서부전선과 제3우크라이나전선 SMERSH 방첩국장을 맡았다. 1956년 KGB 제1부의장이 되었고 1961년 11월 KGB 의장 대행을 지냈다. 1963년 펜콥스키 배신 사건 이후 GRU 국장으로 전격 기용되어 24년간 재임하며 실시간 위협경보 지휘소, 쿠바 루르데스 기술첩보 기지, 우주정찰 부서를 구축했다. 냉전기 소련 군사첩보의 제도적 토대를 닦은 인물로 1985년 영웅소비에트연방 칭호를 받았다.
1979년, 70세의 그에게 관례대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가 올라갔지만 브레즈네프는 '정부와 당 중앙위 대립의 주요 인물'이라며 질질 끌었다. 코시긴이 폴리트뷰로에 직접 상정했고 티호노프와 셰르비츠키의 지지로 통과되었다.
1930년 스물한 살로 인민위원회의 기구에 들어가 1990년까지 60년간 크렘린에 몸담은, 소비에트 정부기구의 살아 있는 화신이었다. 미코얀의 보좌관으로서 전시 국가방위위원회(GKO)의 적군 보급을 담당했고, 1964년부터 25년간 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으로 코시긴·티호노프·리시코프를 보좌했다. 폴리트뷰로 위원이 아니면서도 유일하게 가장 비밀스러운 당 지도부 결정문을 받아보았고, 중앙위 부서장들도 주요 안건을 그와 조율하라는 지시를 받을 정도로 막후 실세였다. 그의 경험과 기억은 지도자가 바뀌어도 국가가 작동하게 만든 제도적 축이었다.
1949년 8월 29일 세미팔라틴스크 실험장에서 실시된 소련 최초의 핵실험(22킬로톤)에 참가했다.
소련의 국가보안 간부이자 중장으로, 스탈린 대숙청을 실제로 조직한 집행자 가운데 한 사람이면서 베리야 측근이었다. 코노토프의 기계공장에서 자물쇠공으로 일하다 1931년 사마라 에너지 연구소에 들어갔고, 1932년 3월 당 중앙 결정으로 국가보안 기관에 배치되어 OGPU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1941년 2월 NKVD 분리 후 우크라이나 국가보안인민위원이 되어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원과 그 가족에 대한 탄압을 조직했다. 1953년 3월 베리야에 의해 우크라이나 내무장관이 되어 강경 진압을 주장한 주 내무부장들을 해임했고, 6월 30일 키예프에서 체포되어 12월 23일 처형됐으며 2000년 재활이 거부되고 형량이 징역 25년으로 바뀌었다.
스탈린이 직접 주재한 자리에서, 측근들이 자샤트코의 음주벽을 문제 삼자 스탈린은 그를 불러 보드카 세 잔을 권했다. 자샤트코는 두 잔을 단숨에 비우고 세 번째는 정중히 사양했다. 스탈린은 파이프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자샤트코는 분수를 안다!" 임명은 결정되었다.
소련의 탄광 기술자이자 경제 관료. 돈바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광산기계공에서 시작해 38세에 소련 석탄공업장관이 되었고, 전후 돈바스 탄광 재건을 진두지휘했다. 흐루쇼프 시기에는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과학경제위원회 의장으로 발탁되어 고스플란 체계와 나란히 중앙계획을 조율하는 자리에 올랐다. 1957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고, 다섯 차례 레닌 훈장을 받은 중공업 행정의 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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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1935루간스크·고를롭카·노보샤흐틴스크에서 견습공과 기계공으로 일하며 돈바스 탄광에 입문, 도네츠크 광산대학 졸업
1935–193910bis 탄광에서 기사장·주임기사·광장으로 승진하며 현장 경영 두각
1939–1943석탄공업인민위원부에서 '스탈린우골'·'몰로토프우골'·'툴라우골' 콤비나트 장으로 전시 탄광 운영
1943–1948석탄공업 부인민위원으로 돈바스 탄광 복구 총괄, 5년 만에 전쟁 전 생산량 회복 달성
1948–1955소련 석탄공업장관 ― 전후 석탄 산업 전반을 지휘하며 거대 신규 탄광 건설과 기계화 추진
1955–1957체랴빈스크우골 콤비나트 장, 우크라이나 석탄공업장관으로 복귀해 생산 반등 주도
1957–1958국가계획위원회 연료공업 부문장(장관급) 겸 부의장
1958–1962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과학경제위원회 의장 ― 중앙계획의 최고위 조정자
1962년 5월 24일, 제네바 프레니 구릉. 쿠라쇼프는 WHO 신청사 기공식에서 흙손을 들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 세워질 건물은 모든 인류가 언젠가 질병에서 해방되리라는 희망의 상징이자 초점이 될 것입니다」
철도 전철수의 아들로 태어나 카잔 의대를 졸업한 정신과 의사. 31세에 카잔 의학원 원장을 맡았고, 러시아공화국 보건차관을 거쳐 1959년 소련 보건장관에 올랐다. 흐루쇼프 집권기 소비에트 보건의료 체계를 확장하고 의학교육 개혁을 주도했으며, 인기 과학잡지 《즈도로비예》(건강)의 초대 편집장을 지냈다. 1962년 제네바에서 제15차 세계보건총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WHO 본부 신축 기공식에서 주춧돌을 놓았다. 그의 재임기 소련은 WHO 두창 박멸 계획을 적극 후원했으며, 1959–1960년 모스크바 두창 유입 사태 당시 KGB와 협력한 신속한 봉쇄·접종 작전으로 질병 확산을 차단했다.
1962년 11월 19~23일 CPSU 중앙위 전원회의가 당 조직을 산업계열과 농업계열로 분할했고, 루다코프는 11월 23일 정식 중앙위원으로 승격되어 산업 담당 중앙위 서기로 선출되었다.
1910년 9월 11일(구력 8월 29일) 예카테리노슬라프 현 폴로히(현재 우크라이나 자포리자주)에서 태어나 1966년 7월 10일 모스크바에서 55세로 사망했다. 1925년 콤소몰에, 1931년 당에 입당했고 1927년부터 도네츠 탄광에서 광부로 일하다 1937년 레닌그라드 광산연구소를 졸업했다. 1954년 CPSU 중앙위 중공업부장이 되었고 1962년 11월 23일 정식 중앙위원으로 승격되며 산업 담당 중앙위 서기로 선출되었으며, 1964년 11월 분할 개혁이 폐기된 뒤에도 사망 시까지 서기직과 중공업부장직을 유지했다. 공식 인사록과 러시아 측 사료는 그를 러시아인으로 적는 한편, 우크라이나 위키백과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공산당 인물로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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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1936도네츠 탄광 광부
1936–1938우크라이나 콤소몰 기구에서 활동
1938–1942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기구: 지도원, 석탄공업부 차장·부장(1938년 7월부터 흐루쇼프 제1서기 보좌)
1942–1944CPSU 중앙위 기구 근무
1944–1954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보, 석탄공업부장, 중공업부장, 당·노조·콤소몰기관부장
1964년 자신의 저서 《역사적 유물론》에서 스탈린의 테제를 정면으로 논박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기간을 사회주의 전 기간으로 확장하는 독단주의자와 분파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계급투쟁 격화에 관한 스탈린의 잘못된 명제를 공유하고 있다.'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당 이데올로그. 역사적 유물론과 게르첸의 세계관을 전공했으며, 1948년 출간된 《게르첸의 세계관》으로 1951년 스탈린상을 수상했다. 1949년부터 《보프로시 필로소피》 편집장, 1952년에는 중앙위 철학·역사부장과 이론지 《꼼무니스트》 편집장을 겸하며 스탈린 말기 이념 기구의 핵심 축으로 부상했다. 1952년 10월 제19차 당대회에서 중앙위 상임위원회(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스탈린 사망 다음 날인 1953년 3월 6일 전격 해임되었다. 이후 고리키 주당 간부와 국가방송위원장을 거쳐 모스크바 대학에서 역사적 유물론 강좌를 이끌었고, 1964년 자신의 저작에서 스탈린의 계급투쟁 격화 테제를 공개적으로 논박했다.
1942년 2월, 남편 몰차노프가 아사한 직후 베르골츠는 라디오에서 이렇게 낭독했다: "나는 레닌그라드의 과부다."
레닌그라드 포위전(1941–1944) 동안 라디오 방송을 통해 매일 시와 연설을 낭독하며 아사 직전의 시민들에게 생명의 언어를 전한 소비에트 시인이다. 1938년 '문학그룹'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과 유산을 겪었으나 끝내 자백하지 않았고, 1939년 석방·복권된 후 당에 복귀했다. 대표작 『2월 일기』(1942)와 『레닌그라드 시』(1942)는 봉쇄의 참상과 시민의 존엄을 직시했으며, 피스카료프스코예 묘지에 새겨진 그녀의 글귀 '아무도 잊히지 않았다, 아무것도 잊히지 않았다'는 전쟁 기억의 상징이 되었다. 스탈린상(1951)을 수상했고 자전적 소설 『낮의 별들』(1959)로 해빙기 문학의 길을 열었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지도자이자 티토주의의 핵심 이론가로, 유고슬라비아 노동자 자주관리 체제의 주요 설계자였다. 1947년 코민포름 창설 회의에서는 질라스와 함께 프랑스·이탈리아 공산당의 '의회 환상'을 신랄히 비판했으며, 전후 혁명적 기회를 놓친 서유럽 공산당의 기회주의를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1948년 티토-스탈린 결별 이후에는 소련식 국가사회주의와 구별되는 분권적 자주관리 모델을 이론화했고, 1974년 유고슬라비아 연방헌법의 초안을 주도하며 공화국 간 자율성을 대폭 확대했다. 1979년 사망할 때까지 유고슬라비아 집단지도체제의 핵심 인물로 남았으며, 그의 헌법 사상은 연방 해체 후에도 후속 국가들의 정치 체제에 흔적을 남겼다.
덩화는 중국공산당 혁명과 국공내전을 거치며 대규모 부대를 지휘한 인민해방군 장군이었다. 1950년에는 동북변방군의 편성과 훈련을 맡아 압록강을 건널 부대를 실제로 준비했고, 조선전쟁에서 펑더화이의 제1부사령관으로 전쟁 수행을 뒷받침했다. 1952년부터는 중국인민지원군을 지휘하며 전선의 작전과 정전 국면을 이끌었다. 훗날 펑더화이와의 연좌로 실각했지만 1980년 명예를 회복했다.
1935년 7월 1일, 크리보노스의 기관차 편대가 화물열차 속도를 종전의 시속 30킬로미터에서 53킬로미터로 끌어올렸다.
표트르 크리보노스는 기관사로서 철도의 운송 능력을 끌어올린 소련의 생산성 혁신가였다. 그는 1935년 7월 화물열차의 기술 속도를 크게 높이는 운전법을 선보여 스타하노프보다 앞서 철도 부문 노동 영웅의 전형을 만들었고, 이를 따르는 ‘크리보노스파’가 확산됐다. 전쟁 때는 철도 수송과 파괴된 철도망 복구를 지휘했으며, 전후에는 교육을 보완해 장기간 철도를 운영했다.
방위산업부장 회의에서 어떤 장관이 계획 지연을 설명하려 하자, 세르빈은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고 말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변명이 아니라 미사일이다.'
소련 군산복합체 역사상 가장 오래, 가장 강력한 권한을 행사한 당 기구의 수장이었다. 1958년부터 1981년 사망까지 CPSU 중앙위원회 방위산업부장으로 재임하며 모든 미사일·항공·핵·우주 개발 프로그램의 당적 감독을 관장했고, 군수공업위원회(VPK)의 핵심 실무 책임자로서 각 방위산업 부처 간 조정과 병기 생산 계획 집행을 통제했다. 흐루쇼프 시기 전략로켓군 창설과 우주 경쟁의 제도적 기반을 다졌고, 브레즈네프 시기에는 소련이 미국과 전략적 동등성을 달성하는 대규모 군비 증강을 실무에서 떠받쳤다. 다섯 개의 레닌 훈장은 그의 영향력을 보여주며, '이반 뇌제(Грозный Иван)'라는 별명은 방위산업계 전체가 그의 결정에 절대적으로 의존했음을 말해준다.
“쿠이비셰프에서 우리는 흐름식 생산 조직화에 주력했지만, 컨베이어 원리를 바꾸었다. 고정 조립에서는 항공기가 아니라 작업대 자체를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 Il-2 공장의 컨베이어 혁신을 설명하며.
소련 항공산업의 핵심 조직자. 타간로크 출신으로 모스크바 항공연구소(MAI)를 졸업하고 제1항공공장에서 기술자로 시작해 1944년 공장장이 되었다. 전시에는 일류신 Il-2 슈투르모비크의 컨베이어 대량생산 체계를 확립했고, 종전 후 MiG-9·MiG-15 제트전투기, Tu-16 폭격기, Tu-104 여객기를 차례로 양산했다. 1950년대 후반에는 세계 최초의 대륙간탄도미사일 R-7과 보스토크 로켓 생산을 조직해 유리 가가린의 우주비행을 기술적으로 떠받쳤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소련 일반기계공업성 차관으로서 미사일·우주산업 행정을 총괄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와 두 차례 스탈린상을 받았다.
1971년, 솔제니친 추방을 논의하는 폴리트뷰로에 「솔제니친 문제에 관하여」라는 메모를 보내 『암 병동』 출판과 모스크바 아파트 제공을 제안했다. 기각됐지만 KGB도 아니고 내무장관이 반체제 작가를 위해 움직인 장면은 브레즈네프기에 둘도 없다.
브레즈네프의 드네프르파트전 동지로 소비에트 사상 최장 16년간 내무장관을 지냈다. 경찰관 봉급을 대폭 올리고 전용 주택 10% 할당, 신규 경찰학교와 소비에트 최초의 내무아카데미를 세워 밑바닥 직업이던 민병대를 국가 기관으로 끌어올렸다. 로스트로포비치·비슈넵스카야와 교류하고 솔제니친 추방을 막으려 폴리트뷰로에 탄원서를 냈으며, 니콜라이 2세 유해 수색을 처음 지시한 소비에트 고위 관료이기도 했다. 안드로포프의 후계 구도 속에서 부패 혐의로 모든 직위와 훈장을 박탈당하고 권총 자살했다.
14세에 붉은 군대에 입대해 기병·참모 장교로 성장했고, 독소전쟁에서는 254소총사단과 73·128소총군단을 지휘하며 드네프르 도하, 벨라루스 해방, 베를린·프라하 공세를 치렀다. 1953년 라브렌티 베리야의 사형 집행을 자청해 직접 방아쇠를 당겼고, 모스크바 방공군구 사령관으로서 소련 영공 방어 체계의 기초를 닦았다. 1966년 방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라 1978년까지 12년간 방공군을 전략적 우주방어 체계로 확대하고 바르샤바조약 통합방공을 총괄했으며, 임기 말 방공군 분할 결정에 반대해 스스로 사임했다.
1963년 9월 29일, 카사토노프가 승선한 원자력잠수함 K-181이 북극점 빙원을 뚫고 부상했다. 소련 해군 사상 최초로 지구 최북단에 잠수함을 띄운 순간이었다.
잠수함 장교로 출발하여 소련 4대 함대 중 3개를 차례로 지휘한 해군 원수. 북방함대 사령관 시절 소련 원자력잠수함의 첫 북극점 부상(1963년)을 직접 지휘했고, 쿠바 미사일 위기 국면에서 북방함대의 전력을 확장했다. 이후 10년간 해군 제1부총사령관으로서 고르시코프의 대양함대 건설을 실무적으로 뒷받침했으며, 아들 이고르와 손자 블라디미르로 이어지는 3대 해군 제독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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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M.V. 프룬제 해군학교 졸업, 발트함대 잠수함 '볼셰비크' 당직사관·항해사
1932–1939태평양함대 잠수함 부장 → Shch-112 함장 → L-12 함장 → 제12잠수함사단장
1941해군참모대학 졸업, 발트함대 잠수함교육대대 참모장으로 전쟁 발발, 탈린·한코·레닌그라드 방어전 참가
1941–1945해군 주참모부 작전국 근무, 태평양함대 전투훈련 지도, 얄타회담 해군 실무단 참가
1949–1954제5함대(태평양) 참모장 → 태평양함대 제1부사령관
1954–1955제8함대(북발트) 사령관
1955–1962흑해함대 사령관, 1961년 알바니아 주둔 소련 해군 철수 작전 지휘
1962–1964북방함대 사령관, 원자력잠수함 북극점 부상 작전(1963) 및 대잠항공미사일 '시크발' 훈련 지휘
1964–1974소련 해군 제1부총사령관 겸 군사평의회 위원, 대양 원자력미사일함대 건설 주도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몇 주 후, 80세의 파블로프는 모스크바 그라나트니 거리 자택 발코니에서 몸을 던졌다.
게오르기 파블로프는 1965년부터 1983년까지 18년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관리국장을 지내며 당 중앙기구의 물적·행정적 기반을 총괄한 인물이다. 드네프로제르진스크 금속공업학교에서 브레즈네프보다 한 학년 아래로 함께 수학했으며, 마리 자치공화국 당 제1서기와 당-국가통제위원회 부서장을 거쳐 브레즈네프 집권 직후 관리국장에 발탁되었다. 당의 재정·건설·출판·요양 시설을 장악하고 1980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직후 모스크바 자택 발코니에서 투신 자살했으며, 후임 니콜라이 크루치나도 한 달 앞서 같은 방식으로 사망하여 '당의 금' 의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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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s드네프로제르진스크 금속공장 부설 공장학교 교사, 금속공업학교 재학
1939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1940–1941드네프로제르진스크 시당 지도원 → 금속공업부장
1941–1943오르스크 피난, 시당 위원회 근무
1943–1947드네프로제르진스크 시당 제2서기 → 제1서기
1947–1949중앙위 간부관리국 감찰관 → 당·노조·콤소몰 기관부 지도원
1949–1950마그니토고르스크 시당 제1서기
1950–1951첼랴빈스크 주당 제2서기 (부친의 점령기 경력 문제로 해임)
1951–1957코스트로마 주 집행위 부의장 → 주당 서기 → 시당 제1서기 → 주당 제2서기
1970년 3월 4일, 소련 유대인 기자회견의 주인공으로 나서 소련의 민족 정책을 옹호하고 이스라엘을 규탄했다. 유대인으로서 브레즈네프 체제의 핵심부에서 23년간 부총리를 지낸 그에게 주어진 모순된 순간이었다.
소련 최장수 부총리 중 한 명으로, 마그니토고르스크·아조프스탈·자포로지스탈·인도 빌라이 제철소 등 전략적 공업 프로젝트의 건설을 지휘한 기술관료다. 1962년 흐루쇼프에 의해 부총리로 발탁된 후 브레즈네프 시대 내내 경제 부총리로 남아 고스플란·최고국민경제회의·고스스나프를 차례로 이끌며 소련 계획경제의 물자공급 체계를 총괄했다. 스탈린상 2회 수상자이며, 유대인 출신으로 당 중앙위원과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내며 소비에트 체제 내 기술 엘리트의 전형을 보여준 인물이다.
"마다가스카르 국민은 라치라카를 다음 7년 동안 선출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부정선거를 규탄했다.
마다가스카르 남부 안탄드로이족의 민족주의 정치가다. 1943년 비밀결사 지니를 조직하고 1947년 반란에 가담해 식민 당국에 투옥된 뒤, 1958년 MONIMA를 창당해 빈곤한 남부 농민을 대변하며 프랑스에 종속된 치라나나 체제에 맞서 1971~72년 로타카 시위를 이끌었다. 라치라카의 혁명전선에 합류했다가 1977년 지방선거를 부정으로 규탄하고 탈퇴해 제2공화국의 대표적 야당 지도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