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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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제럴드 포드

Gerald Ford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13–2006 ○ 사망

선거로 뽑히지 않은 채 데탕트의 마지막 국면을 이끈 대통령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기차에서 워싱턴의 눈 치우기가 힘들다는 포드의 말에 브레즈네프가 '우리의 첫 거래는 죽 드리죠, 소련 제설차'라고 받았다.

하원의원 25년과 부통령을 거쳐 1974년 닉슨의 사임으로 대통령이 된 공화당 정치가로, 한 번도 선거로 뽑히지 않고 백악관에 오른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다. 닉슨이 연 데탕트를 계승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브레즈네프를 만나 SALT II의 틀, 운반수단 2,400기와 MIRV 1,320기의 상한을 잡았고, 이듬해 헬싱키 최종의정서에 서명하며 잭슨-배닉 수정조항을 법으로 만들었다. 닉슨에 대한 사면이 최대 논란이 되었고, 1976년 카터에게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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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73하원의원 (미시간 5선거구)
  • 1965–1973하원 소수당 원내대표
  • 1973–1974부통령
  • 1974–1977제38대 미국 대통령
  • 1974.11블라디보스토크 회담, 브레즈네프와 SALT II 기본 틀 합의

찰스 배닉

Charles Vanik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계 체코인 1913–2007 ○ 자연사

이민의 자유를 무역법에 새긴 의원

1974년 그는 잭슨-배닉 수정조항을 하원에 제출해 이민의 자유를 무역 조건으로 만들었다.

찰스 배닉은 클리블랜드 동부의 노동자와 동유럽계 주민을 기반으로 활동한 민주당 하원의원이었다. 그는 조세 형평, 사회보장, 메디케어, 오대호 환경 문제를 다루며 국내 개혁 의제를 외교정책과 연결했다. 1974년 헨리 잭슨과 함께 잭슨-배닉 수정조항을 발의해, 이민을 제한하는 비시장경제 국가에 대한 정상 무역관계 부여를 조건부로 묶었다. 이 법은 소련계 유대인을 비롯한 종교적 소수자의 이주를 압박하는 수단이 되었지만, 데탕트와 무역을 인권 조건에 연계한 미국 의회의 개입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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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39클리블랜드 시의회 의원
  • 1940–1942오하이오주 상원의원
  • 1942–1945미 해군 예비역 장교, 대서양·태평양 전선 복무
  • 1947–1954클리블랜드 시 법원 판사
  • 1955–1969미국 하원의원, 오하이오 제21선거구
  • 1969–1981미국 하원의원, 오하이오 제22선거구
  • 1973–1981하원 세입위원회 무역소위원회 위원장
  • 1985–1995Squire Sanders & Dempsey 워싱턴 사무소 변호사, 동유럽 무역 담당
  • 2007플로리다주 주피터에서 사망

티혼 니콜라예비치 흐레니코프

Тихон Николаевич Хренников
이념·선전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13–2007 ○ 자연사

43년간 소비에트 음악의 문지기

BBC와의 인터뷰에서 외쳤다: "나는 스탈린의 인민위원이었다. 내가 '안 돼!'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작곡가 동맹 서기장(1948–1991)으로 43년간 소련 음악계를 통제한 작곡가. 1948년 지하노프의 '형식주의 반대' 캠페인에서 프로코피예프·쇼스타코비치를 비판하는 연설로 스탈린의 신임을 얻어 발탁되었다. 흐루쇼프 시기 1948년 결정을 철회시키는 한편 젊은 음악가들을 후원한 이중적 인물로, 만년에는 페레스트로이카를 '배신'으로 규탄했다. 오페라 8편·교향곡 3편·영화음악 30편과 유행가 '모스크바의 창가'를 남겼으며, 사회주의 노동 영웅·레닌상·스탈린상 3회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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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2그네신 음악전문학교 작곡·피아노 전공
  • 1932–1936모스크바 음악원 셰발린(작곡)·네이가우스(피아노) 사사
  • 1935교향곡 1번 초연, 스토코프스키·토스카니니 해외 연주
  • 1941–1967붉은군대 중앙극장 음악감독
  • 1948–1991소비에트 작곡가 동맹 서기장 (1957년까지 총서기, 이후 제1서기)
  • 1961–2007모스크바 음악원 교수 (1966년부터 정교수)
  • 1962–1989소비에트 최고회의 대의원
  • 1976–1990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솔로멘체프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Соломенце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3–2008 ○ 자연사

러시아 공화국을 12년간 이끈 브레즈네프 시대의 산업 테크노크라트

브레즈네프가 솔로멘체프를 러시아 각료회의 의장에 임명하며: "러시아에는 별도 공산당이 없으니, 내가 러시아 당 조직을 직접 이끌고 자네는 러시아 연방 담당 내 대리 역할을 해주게."

레닌그라드 공업대학 출신 기계기사로 방위공업 현장에서 시작해 1971년부터 12년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을 지내며 소련 최대 공화국의 경제를 관장했고, 브레즈네프로부터 '러시아 연방 담당 부사령탑'이라는 비공식 위임을 받은 인물이다. 1983년 정치국원 겸 당통제위원장이 되어 1930~50년대 탄압 희생자 재활 위원회를 이끌었으나, 1988년 9월 고르바초프의 정치국 숙청으로 전격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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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레닌그라드 공업대학 졸업, 방위공업 공장 배치
  • 1941–1948우랄 대피 공장에서 당 조직원으로 활동
  • 1948–1954즐라토우스트·첼랴빈스크 공장 주임기사 → 공장장
  • 1955–1959첼랴빈스크 주당위 서기 → 제2서기 → 소브나르호스 의장
  • 1959–1962카자흐스탄 카라간다 주당위 제1서기
  • 1962–1964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 1964–1966로스토프 주당위 제1서기
  • 1966–1971CPSU 중앙위 서기 겸 중공업부장
  • 1971–1983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각료회의 의장
  • 1983–1988CPSU 중앙위 당통제위원장, 정치국 정위원
  • 1987–1988정치국 1930~50년대 탄압 희생자 재활 위원회 위원장
  • 19889월 중앙위 총회에서 전격 해임, 은퇴

에메 세제르

Aimé Césaire
문학·예술 소속 미확정 프랑스 마르티니크 1913–2008 ○ 자연사

네그리튀드 공동 창시자, 식민주의 비판의 선구

「내 차례다. 하나의 등식을 제시하겠다: 식민주의 = 사물화」 『식민주의 담론』(1950)에서 유럽이 나치즘으로 규정한 방법을 이미 식민지 민족에게 써 왔으며 나치즘은 식민주의를 정당화한 문명의 자연적 귀결이라고 논했다.

마르티니크 바스푸앵트에서 세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에서 상고르·다마스와 함께 네그리튀드 운동을 열었다. 잡지 L'Étudiant noir는 1934~1935년에 창간되었고, 1935년 5~6월호에서 '네그리튀드'가 처음 현재적 의미로 쓰였다. 프란츠 파농을 가르쳤다. 1945년 공산당의 지원으로 당선돼 56년간 포르드프랑스 시장, 47년간 국민의회 의원을 지냈고 1946년 마르티니크를 프랑스 데파르트망으로 만든 법을 통과시켰다. 1956년 10월 24일 『모리스 토레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흐루쇼프 보고와 마그레브 탄압을 들어 공산당과 결별했으며, 영어권 서술은 헝가리 혁명 탄압을 탈당 사유로 든다. 1958년 마르티니크 진보당을 창당하고 2001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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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파리에서 L'Étudiant noir 창간, '네그리튀드' 개념 최초 제시
  • 1939『고향으로의 귀환 수첩』(Cahier d'un retour au pays natal) 출간
  • 1941수잔 루시와 함께 Tropiques 창간
  • 1945프랑스 공산당 소속 국민의회 의원 및 포르드프랑스 시장 당선
  • 1946마르티니크의 프랑스 데파르트망 편입 법안 주도
  • 1950『식민주의 담론』(Discours sur le colonialisme) 출간
  • 1956헝가리 봉기 탄압에 항의, 『모리스 토레즈에게 보내는 편지』로 PCF 탈퇴
  • 1958마르티니크 진보당(PPM) 창당
  • 1983–1988마르티니크 지역의회 의장
  • 199347년간의 국민의회 의원직 은퇴
  • 200156년간의 포르드프랑스 시장직 은퇴

세르게이 블라디미로비치 미할코프

Серг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Михалков
이념·선전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3–2009 ○ 자연사

스탈린부터 푸틴까지 국가를 쓴 시인

2009년 임종을 앞두고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 "이제 됐다. 안녕." 그리고 눈을 감았다.

소련 아동문학의 거장이자, 1944년판·1977년판 소련 국가와 2000년 러시아 국가 가사를 쓴 시인이다. 장편시 〈스표파 아저씨〉로 수십 년간 소련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았고, 풍자 뉴스릴 《피틸》의 창간자 겸 편집장으로도 이름을 남겼다. 1970년부터 1990년까지 러시아공화국 작가동맹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문학 행정의 정점에 서 있었으며, 사회주의노동영웅·레닌상·세 차례 스탈린상을 받았다. 파스테르나크솔제니친 배척 운동에 가담한 문학 관료로서 비판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수많은 작가의 주거·구직·의료·구금 문제를 뒤에서 해결해 준 후원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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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장편시 〈스표파 아저씨〉 발표
  • 1937소련 작가동맹 가입
  • 1941–1945군사통신원으로 복무, 오데사·세바스토폴 방어전 참전
  • 1944엘레기스탄과 공동으로 소련 국가 가사 집필 (스탈린판)
  • 1950CPSU 입당
  • 1962–2008풍자 뉴스릴 《피틸》 창간·편집장
  • 1965–1970소련 작가동맹 모스크바 지부 제1서기 · 소련 작가동맹 이사회 서기
  • 1970–1990러시아공화국(RSFSR) 작가동맹 의장
  • 1977소련 국가 가사 개정판 집필 (스탈린 언급 삭제)
  • 2000러시아 연방 국가 가사 집필 (푸틴판)

게오르기 니콜라예비치 바바킨

Георгий Николаевич Бабаки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4–1971 ○ 심장마비

루나 9호·루노호트의 수석설계자, 달과 금성에 최초로 닿은 자동탐사선을 만든 사람

1966년 2월 3일, 루나 9호가 인류 최초로 달에 연착륙하자 바바킨은 환호했다. "어떻게 착륙했는지 봤어?! 요람에 내려놓듯이!"

라보치킨 설계국(OKB-301) 수석설계자(1965–1971). 코롤료프에게서 무인 달·행성 탐사선 프로그램을 이관받아 세계 최초의 달 연착륙(루나 9호), 최초의 월면 로버(루노호트 1호), 최초의 로봇 월면 표본 귀환(루나 16호), 최초의 금성 착륙(베네라 7호)을 잇달아 성공시켰다. 라디오 기술자로 출발해 43세에야 학위를 받은 늦깎이였지만, 철저한 지상시험으로 코롤료프도 이루지 못한 탐사선 신뢰성을 이끌어냈다. 1971년 심장발작으로 급서. 달과 화성의 크레이터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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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모스크바 시 전화국 라디오 서비스 기술자
  • 1937전연방 통신기술학교 연구원
  • 1943자동화연구소(VSNITO) 레이더·유도체계 연구실장, 수석기술자
  • 1949NII-88 체르톡 부서 지대공미사일·유도체계 연구
  • 1952OKB-301(라보치킨) 순항미사일 부랴·V-300 대공미사일 개발
  • 1965OKB-301 / NPO 라보치킨 수석설계자 — 무인 달·행성 탐사선 총괄
  • 1966루나 9호 세계 최초 달 연착륙, 루나 10호 최초 달 인공위성
  • 1970루나 16호 로봇 표본 귀환, 루노호트 1호 월면 로버, 베네라 7호 금성 착륙
  • 1971마르스 2·3호 발사 — 8월 3일 심장발작으로 급서

빅토르 알렉산드로비치 다비덴코

Викто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Давиденко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계 1914–1983 ○ 자연사

열핵무기 2단계 구상의 선구자

1955년 젤도비치하리톤에게 보낸 메모는 이렇게 적었다. “원자 폭축 아이디어는 빅토르 알렉산드로비치 다비덴코의 것이다.”

빅토르 다비덴코는 소련의 핵·열핵무기 개발을 이끈 이론물리학자이자 실험 연구자였다. 그는 중성자 기폭장치 개발과 첫 소련 원자폭탄·수소폭탄 시험에 참여했으며, 1953년 말 원자폭발을 열핵 단계의 압축에 이용하는 2단계 구상의 출발점을 제시했다. 이 공로는 사하로프와 젤도비치의 후속 설계 및 소련 열핵무기 체계의 성립으로 이어졌지만, 그의 활동은 군사적 비밀과 국가 주도 과학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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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7레닌그라드 산업대학, 학생
  • 1937–1940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 연구원
  • 1943–1948소련 과학아카데미 제2연구소, 연구원
  • 1948–1952KB-11, 연구원·부서장
  • 1952–1963KB-11, 부문장·과학 부책임자
  • 1963–1983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및 합동핵연구소, 연구자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첼로메이

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Челомей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폴란드 1914–1984 ○ 자연사

흐루쇼프의 후원으로 코롤료프를 넘었으나, 후원자가 몰락하자 밀려난 미사일 설계자

1958년 3월 8일, 첼로메이는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를 OKB-52의 엔지니어로 채용했다. 이 한 건의 인사로 그는 소련 최고 권력자의 눈과 귀를 직접 확보했고, 이후 6년간 코롤료프조차 넘볼 수 없는 정치적 후원 아래 소련 우주 계획의 정점으로 치솟았다.

소련의 대표적 로켓·우주기술 설계자로, OKB-52(후일 NPO 마시노스트로예니야)를 이끌며 프로톤 발사체, UR-100 대륙간탄도미사일, 알마즈 군사우주정거장, TKS 우주선을 만들었다. 1961년 코롤료프를 대신해 수석설계자회의 의장이 되었으나,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가 첼로메이 밑에서 일했던 인연 덕에 정치적 후원이 단단했다. 흐루쇼프 실각 후 우스티노프에게 밀려났고, 1981년에는 그의 우주 사업이 전면 중단되었다. 프로톤 로켓은 지금도 운용 중이며, UR-100은 소련 역사상 가장 많이 배치된 ICB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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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키예프 항공대학 졸업, 진동 이론 논문으로 주목
  • 1941중앙항공발동기연구소(CIAM) 입소, VKP(b) 입당
  • 1944–53OKB-51 소장 겸 수석설계자: V-1 기반 순항미사일 10Х 개발
  • 1955OKB-52(현 NPO 마시노스트로예니야) 수석설계자
  • 1961–64수석설계자회의 의장으로 코롤료프 계승
  • 1965프로톤 발사체 첫 비행, UR-100 ICBM 배치 시작
  • 1970s알마즈 군사우주정거장 · TKS 수송선 개발
  • 1981–84우주 사업 중단 명령; 모교에서 강의하며 조용히 말년을 보냄

유리 블라디미로비치 안드로포프

Юр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Андропов

KGB에서 개혁가를 길러 낸 역설

1956년 부다페스트, 대사관에서 헝가리 비밀경찰이 가로등에 매달리는 것을 보았고 군사 개입을 주장했다. 그 장면은 그를 평생 사로잡았고, 프라하와 카불과 바르샤바에서 그가 본 해답은 무력뿐이었다.

1914년 6월 15일(구력 6월 2일) 출생. 공식 자료는 스타브로폴 지방 출생으로 적지만 출생지와 혈통을 둘러싼 사료는 서로 어긋난다. 리빈스크 수운기술학교(1936년 졸)를 거쳐 카렐리야에서 콤소몰 활동을 했고, 주헝가리 대사(1954~57), 중앙위 사회주의국가 관계 부장(1957~67), KGB 의장(1967~82)을 지냈다. 반체제 탄압을 지휘해 1967년 제안으로 제5국을 만들고 1980년 사하로프를 고리키로 유배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개입을 지지했고 1979년 아프간 진입의 주도자 중 한 명이었다. 1982년 11월 서기장이 되어 부패 간부를 숙청하고 개혁 구상에 착수했으며, 1984년 2월 9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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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57부다페스트 주재 대사: 1956년 개입의 현장
  • 1957–67중앙위 사회주의국가 관계 부장
  • 1967–82KGB 의장: 반체제 단속, 제5국 신설
  • 1979아프가니스탄 개입 결정의 핵심 3인
  • 1982–84서기장: 규율 캠페인, 고르바초프 등 신진 발탁

파벨 스테파노비치 쿠타호프

Павел Степанович Кутах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러시아인 1914–1984 ○ 뇌졸중

소련 공군 최장기 총사령관, 냉전기 공군력을 정점으로 이끈 에이스 출신 지휘관

겨울전쟁 중 쿠타호프의 I-15bis 전투기가 아군기에게 핀란드기로 오인되어 피격됐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기체를 소련 영토까지 끌고 와 불시착했고, 기체는 수리 불능이었지만 곧 다시 비행에 복귀했다.

파벨 쿠타호프는 1969년부터 사망한 1984년까지 15년간 소련 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최장기 재임자다. 독소전쟁에서 367회 출격, 79회 공중전을 치르며 13기 이상을 격추한 에이스로 1943년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고, 북극 호송선단 호위 공로로 영국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다. 총사령관으로서 MiG-23, MiG-25, Su-24, Tu-22M3, Tu-160 등 신형기를 도입하고 장거리 레이더 체계를 구축해 소련 공군을 전투기 13,000여 대 규모로 키웠다. 60세까지 직접 비행했고 1984년 70세 생일에 두 번째 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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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0제7전투항공연대 비행중대장 — 겨울전쟁 131회 출격
  • 1941–1944제19근위전투항공연대 비행중대장 → 연대 부지휘관 — 367회 출격, HSU 1943
  • 1944–1948제20근위전투항공연대장
  • 1954–1957제71전투항공군단장 (주독 소련군)
  • 1961–1967제48항공군 사령관
  • 1967–1969소련 공군 제1부총사령관
  • 1969–1984소련 공군 총사령관 · 국방부 차관

알렉산드르 다비도비치 나디라제

Александр Давидович Надирадзе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그루지야 1914–1987 ○ 심장마비

소련 이동식 ICBM 전력의 창시자, 그루지야 태생의 비밀 설계자

1987년 12월 8일 고르바초프레이건이 INF 조약으로 그의 RSD-10 Pioneer(SS-20) 728기를 폐기했을 때, 나디라제는 9월 3일 이미 사망해 이를 알지 못했다. 그가 설계한 Topol(SS-25)은 2023년 퇴역했다.

그루지야 고리에서 태어나 1938년부터 사망 때까지 모스크바의 방위 연구기관에서 일한 로켓 설계자. 1944년 당에 입당해 소련 시민으로 살았다.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추천으로 1958년 NII-1로 옮겨 특별설계국장을 맡았고, 1965년 MITT로 개칭된 연구소의 소장 겸 총설계자를 1987년까지 지냈다(사료에 따라 1961년부터). RT-21 Temp-2S(SS-16), RSD-10 Pioneer(SS-20), RT-2PM Topol(SS-25)을 설계해 전략로켓군에 이동식 고체연료 전력을 세웠다. 220건 이상의 발명과 100편 이상의 논문을 남겼고, 1987년 9월 3일 심장마비로 사망해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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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41TsAGI에서 항공기 착륙장치 연구, Tu-2 개발 참여
  • 1941–45대전차탄 개발, 로켓 설계로 전환
  • 1945–53OKB 수석설계자: 소련 최초 기상로켓 MR-1, 유도폭탄 '차이카'
  • 1958–61NII-1 수석설계자, 고체연료 전술미사일 Temp-S
  • 1961–87MITT 소장 겸 총설계자(사료에 따라 1965년부터로도 기록): Temp-2S(SS-16), Pioneer(SS-20) 실전 배치, Topol(SS-25) 개발
  • 1976–82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수훈(1976, 1982), Pioneer-UTTH 배치, 1981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77–87Topol(SS-25) 설계, 국가상 수상(1987), 심장마비로 사망

야코프 보리소비치 젤도비치

Яков Борисович Зельдович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벨라루스 1914–1987 ○ 자연사

스스로 배운 물리학자에서 소련 핵무기 이론가·우주론의 거인이 된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1949년 8월 29일, 첫 소련 원자폭탄 실험 후 젤도비치가 떠올린 장면: "놀란 것은 풀이었다. 놀라운 정적이 흐르다가 갑자기 풀이 눕는 것이 보였다 — 충격파가 도착한 것이다. 정적과 쓰러진 풀, 그것이 핵폭발의 가장 강렬한 인상이었다."

민스크 유대인 가정 출신의 독학형 물리학자. 1939–1941년 하리톤과 우라늄 연쇄반응을 세계 최초로 계산했고, 아르자마스-16 이론부장으로 첫 소련 핵실험과 수소폭탄 계산을 주도했다. 1963년 핵무기 연구를 떠나 천체물리학으로 전환, 효과, 우주 대규모 구조, 블랙홀 증발의 기초를 개척했다. 1955년 '300인의 편지'에 서명, 영국 왕립학회·미국 국립과학원 외국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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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34화학물리연구소 실험조수, 레닌그라드 대학 청강
  • 1936이학준박사 취득 — 흡착이론
  • 1939이학박사 취득 — 질소산화열역학(Zeldovich mechanism)
  • 1939–1941하리톤과 우라늄 연쇄반응 최초 동역학 계산
  • 1943–1946쿠르차토프 원자폭탄 팀 합류, 모스크바 비밀연구소
  • 1946–1963아르자마스-16(KB-11) 이론부장 — 핵·열핵무기 계산 주도
  • 1958–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63–1987천체물리학·우주론 전념 — 모스크바대 교수, 슈테른베르크 천문연구소

후안 푸홀 가르시아

Juan Pujol García

허구의 첩보망으로 전황을 뒤흔든 이중간첩

1944년 6월 9일, 그는 노르망디 상륙을 양동으로 보이게 하는 보고를 독일군 수뇌부에 보냈다.

후안 푸홀 가르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기에 독일 정보기관에 침투한 뒤 영국에 충성한 스페인계 이중간첩이었다. 그는 리스본에서 공개 자료만으로 영국에 존재하지 않는 요원망을 꾸며 독일 지휘부의 신뢰를 얻었다. 영국 정보기관과 협력한 뒤에는 가공의 요원들과 제한된 진짜 정보를 엮어 독일의 판단을 유도했다. 특히 포티튜드 작전에서 노르망디 상륙이 양동이고 주공이 파드칼레에 온다는 이야기를 강화해 연합군의 기만을 뒷받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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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스페인군 기병·포병 부대에서 의무복무
  • 1936–1939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와 국민파 양쪽에 복무
  • 1941–1942리스본에서 독일 아브베어의 자발적 공작원으로 활동
  • 1942영국 MI5 이중간첩으로 전환, 가르보라는 암호명 사용
  • 1943–1944토마스 해리스와 함께 가공의 요원망을 운영
  • 1944포티튜드 작전에서 파드칼레 주공설을 유포
  • 1944영국 국왕으로부터 대영제국 훈장 MBE 수훈

블라디미르 표도로비치 톨룹코

Владимир Фёдорович Толубко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14–1989 ○ 자연사

소련 전략로켓군을 대미 전략적 균형으로 이끈 사령관

1983년 3월 25일, 톨룹코는 중간 계급인 포병원수를 건너뛰고 대장에서 포병주력원수로 직접 진급했다. 소련 역사상 유일한 사례다.

독소전에서 전차장교로 단련되고 1972년부터 1985년까지 전략로켓군(RVSN)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으로 재임하며 MIRV 탑재 3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이동식 미사일 «피오네르»의 실전 배치를 주도하여 소련의 대미 전략적 균형을 완성한 군인이다. 1983년 대장에서 포병주력원수로 바로 진급한 유일한 사례로, 1962년 쿠바 미사일 배치 작전 「아나디리」 조직에도 핵심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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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독소전 참전, 전차여단 지휘 및 4근위기계화군단 작전과장
  • 1951–1960주동독 제19근위기계화사단장 → 제1근위전차군 → 제8근위군 사령관
  • 1960–1968전략로켓군 제1부사령관, 작전 「아나디리」(쿠바 미사일 배치) 조직 참여
  • 1968–1972시베리아·극동 군관구 사령관
  • 1972–1985전략로켓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3세대 미사일 배치 주도
  • 1983대장에서 포병주력원수로 직접 진급 (소련 역사상 유일)

키릴 트로피모비치 마주로프

Кирилл Трофимович Мазур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벨라루스 1914–1989 ○ 자연사

파르티잔 출신 벨라루스 지도자, 브레즈네프 정치국원 겸 연방 부총리

오늘날 내가 같은 작전을 지휘하라는 제안을 받는다면, 나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체코인들에게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부탁한다.

벨라루스 파르티잔 지도자로 1956년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 1965년부터 소련 정치국 정위원 겸 제1부총리로 13년간 경제를 총괄했으며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의 정치감독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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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36파리치 지역 도로부 기술자, 고멜 자동차도로기술학교 졸업
  • 1936–1938붉은 군대 복무, 이후 벨라루스 철도 정치부 근무
  • 1940–1941고멜 시 콤소몰 비서 → 브레스트 주 콤소몰 제1서기
  • 1942–1943중앙유격대본부 대표로 벨라루스 파르티잔 운동 지도 (중령 → 대령)
  • 1943–1947벨라루스 콤소몰 중앙위 제2서기 → 제1서기
  • 1949–1950민스크 시당위 제2서기 → 제1서기
  • 1950–1953민스크 주당위 제1서기
  • 1953–1956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56–1965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57–1965CPSU 중앙위 간부회 후보위원
  • 1965–1978CPSU 정치국 정위원 겸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진입 작전 현장 정치감독관
  • 1986–1989전연방 전쟁·노동 재향군인회 초대 의장

게오르기 알렉산드로비치 튤린

Георг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Тюли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14–1990 ○ 자연사

테레시코바, 레오노프, 루노호트의 발사에 'Go'를 내린 사람

보스토크 5호 발사 직전, 3단 'Go' 신호등이 들어오지 않자 위원회는 발사 중지 쪽으로 기울었다. 튤린은 코롤료프 편에 섰다 — 계측 오류다. 카운트다운을 재개했고, 발사는 완벽했다.

소련의 로켓우주 과학자이자 중장으로, GKOT 제1부의장(1963–1965)과 일반기계공업부 제1차관(1965–1976)을 지냈다. 국가위원회 의장으로서 테레시코바의 보스토크 6호, 레오노프의 첫 우주유영(보스호트 2호), 세계 최초 달 연착륙(루나 9호)과 루노호트(루나 17호) 등 역사적 발사마다 최종 발사 명령을 내렸다. 1974~1975년 아폴로-소유즈 계획의 소련 측 정부 책임자로서 공동 임무의 최종 책임을 맡았다. 14세 선반공으로 출발해 카추샤 로켓부대에서 복무한 포병장교 출신으로, 소련 로켓 프로그램을 제도화된 국가 역량으로 전환시킨 군사기술 관리자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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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4카추샤 로켓부대 포대장에서 근위박격포부대 작전반장까지, 서부·북서·제2발트 전선
  • 1945–1946독일서 V-2 로켓 기술 회수팀 지휘 ('튤린 경영')
  • 1948–1955NII-4 탄도연구소장 → 과학담당 부소장 → 제1부소장
  • 1959–1961NII-88 (후일 TsNIIMash) 소장
  • 1961–1965국방기술국가위원회(GKOT) 부의장 → 제1부의장
  • 1965–1976일반기계공업부 제1차관 (S. A. 아파나시예프 장관 아래)
  • 1974–1975아폴로-소유즈 시험계획(EPAS) 소련 측 조정위원회 의장
  • 1977–1990모스크바국립대학교 기계수학부 파동역학연구실 조직·지도

장칭

江青
이념·선전 중국공산당 중국 중국 1914–1991 ✕ 자살

상하이 무대에서 문화대혁명의 정점까지: 마오쩌둥의 아내이자 사인방의 수장으로 중국 혁명예술을 재편한 정치인

1980년 재판에서 장칭은 '나는 마오 주석의 개였다. 그가 물라고 하면 나는 물었다'고 외치며 모든 혐의를 부인했고, 법정 밖으로 끌려나가면서도 혁명 구호를 외쳤다.

중국 문화대혁명의 핵심 지도자이자 '사인방'의 수장으로, 마오쩌둥의 부인으로서 중국공산당 내 가장 강력한 여성 정치인이었다. 1930년대 상하이에서 좌익 연극·영화 배우로 활동하다 1937년 옌안으로 가 마오쩌둥과 결혼했고, 20년간 정치에서 배제된 후 1963년 경극 혁명을 계기로 공적 무대에 복귀했다. 1966년 중앙문화혁명소조 부조장에 임명되어 《해서파관》 비판으로 문화대혁명의 서막을 열었고, 8개의 혁명적 양판희를 제정해 전통 예술을 프롤레타리아 주제로 재편했으며, 1969년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마오 사후 1976년 10월 체포되어 '반혁명 범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감형되었고, 1991년 5월 병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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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중국 공산당 입당
  • 1935–1937상하이 좌익 영화·연극 배우 (예명: 란핑)
  • 1938마오쩌둥과 결혼, 옌안 루쉰 예술학원 연극 강사
  • 1949–1951영화지도위원회 부주임
  • 1966–1969중앙문화혁명소조 부조장
  • 1969–1976중국공산당 정치국 위원
  • 1976'사인방'과 함께 체포됨
  • 1980–1991사형 선고 → 무기징역 → 의료 가석방 → 자살

빅토르 바실리예비치 그리신

Виктор Васильевич Гришин

18년간 모스크바를 통치하고 연금 재신청 중 사망한 브레즈네프 시대의 얼굴

1964년 10월, 흐루쇼프 실각 당시 그리신은 일리초프와 함께 흐루쇼프의 사임 성명 초안을 작성했다. 흐루쇼프는 자신의 정치적 죽음이 담긴 그 서류에 서명했고, 이후 브레즈네프 시대가 열렸다.

브레즈네프 시대 보수파의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로 18년간(1967~1985) 수도를 통치했다. 1971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고, 브레즈네프와 체르넨코 사후 두 차례 서기장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1985년 고르바초프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모스크바 인근 원전 건설을 저지해 체르노빌 이후 선견지명을 인정받았고, 1980년 올림픽 인프라를 총괄했다. 1992년 연금 재등록을 위해 구청 사회보장과를 찾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후기 소비에트 체제의 안정과 정체를 동시에 체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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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38측량기사, 기관차 차량기지 부책임자
  • 1941–50세르푸호프 시당 제2서기 → 제1서기
  • 1950–52모스크바 주당 기계제조부장 → 제2서기
  • 1956–67전소비에트 중앙노동조합평의회(VTsSPS) 의장 · 세계노조연맹 부의장
  • 1967.06–1985.12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 1971.04–1986.02정치국 정위원 (1961년부터 후보위원)
  • 1980모스크바 올림픽 인프라 건설 총괄
  • 1986–87최고소비에트 상무회 국가고문, 이후 연금 생활

비탈리스 페트로비치 루벤스

Виталий Петрович Рубен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라트비아 1914–1994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기 민족소비에트를 10년간 이끈 라트비아인

1983년 12월 8일, 인권의 날 기자회견에서 루벤스는 고리키에 유배된 사하로프에 대해 "재능은 있지만 아픈 사람"이며 유배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정신적 평화를 위해 필요했다"고 말했다.

모스크바 출신의 라트비아계 소비에트 정치인으로, 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과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을 거쳐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 민족소비에트 의장(1974~1984)을 10년간 지냈다. 비러시아 공화국 출신 간부가 연방 의회 핵심직을 안정적으로 장기 수행한 보기 드문 사례로,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이후 아르비트 펠셰가 발탁한 충성파 기술관료의 전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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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41농업전문학교 졸업 후 농학자로 근무
  • 1942–1943리빈스크 지구신문 《스타하노프 노동》 편집장
  • 1947–1948라트비아 공산당 다우가프필스 군위원회 제2서기
  • 1958–1960라트비아 SSR 국가계획위 농업·조달부장
  • 1960–1961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농업부장
  • 1962–1970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
  • 1970–1974라트비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 부의장
  • 1974–1984소련 최고회의 민족소비에트 의장

제라드 스미스

Gerard C. Smith

핵시대의 협상가

스미스가 정책기획실장 시절 제안한 모스크바-워싱턴 직통 회선은 국무부와 군부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훗날 '핫라인'이 되자 케네디 대통령은 그 구상의 공을 스미스에게 돌렸다.

제라드 C. 스미스는 미국의 변호사이자 핵정책 전문가로, 군비통제와 비확산을 국가정책의 문제로 다룬 외교관이었다. 그는 SALT I에서 미국 대표단을 이끌며 경쟁하는 핵전략 속에서 제한 협상의 실무를 조직했고, 회고록 Doubletalk에 그 과정의 긴장과 판단을 기록했다. 이후에도 핵물질 전용 방지와 탄도탄요격미사일 조약의 보존을 주장하며 군비경쟁의 관리와 한계를 함께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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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예일대학교 졸업
  • 1938예일 법학대학원 졸업, 뉴욕 변호사
  • 1942–1945미 해군성 조달 담당관
  • 1950–1954원자력위원회 특별보좌관
  • 1954–1961국무부 원자력 담당 특별보좌관 및 정책기획국장
  • 1969–1973미국 군비통제·군축청장, SALT I 미국 대표단 수석협상가
  • 1977–1980대통령 특별대표, 핵확산 방지 담당
  • 1981대통령 자유훈장 수훈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지먀닌

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Зимянин

브레즈네프 시대 '2인자 당 이데올로그'

1964년 10월, 프라하의 소련 대사관. 지먀닌은 모스크바에서 막 돌아와 수화기를 들고 크렘린 쿠데타의 성공을 자랑했다. 상대는 흐루쇼프의 아내 니나였다. '친애하는 레오니트 일리치가 제1서기에 취임했습니다!' 답이 없는 수화기 너머로, 니나는 그 순간 남편의 실각을 알게 되었다.

벨라루스 출신의 당 관료로, 11년간 『프라우다』 편집장을 지내며 소련 언론의 방향을 통제했다. 1976년 중앙위 서기에 올라 수슬로프의 지휘 아래 과학·교육·문화·체육·매체 전반을 관장하는 이념 제2인자가 되었다. 브레즈네프기 후반 보수적 이념 통제의 핵심 집행자였으며, 고르바초프 집권 2년차인 1987년 퇴진할 때까지 당 선전 기구의 연속성을 체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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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6벨라루스 공산청년동맹(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전시 파르티잔 활동 지도
  • 1946–1953벨라루스 공산당 제2서기 겸 교육장관, 당내 간부로 급성장
  • 1956–1965주베트남 대사, 외교부 극동국장, 주체코슬로바키아 대사 역임
  • 1965–1976『프라우다』 편집장 겸 소련 언론인동맹 이사장 — 최장 재임
  • 1976–1987중앙위 서기, 수슬로프 아래 이념 전반 총괄
  • 1987건강 사유로 퇴진, 연금 생활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시콜니코프

Алексей Михайлович Школьников

흐루쇼프 시절 3개 주를 지배하고 인민통제로 간 실무자

보로네시 제1서기 시절, 흐루쇼프의 시찰을 앞두고 국영농장과 콜호스에 명령을 내렸다. 노동자들은 예비선로의 레일을 뜯어내 트랙터 뒤에 묶고 들판을 가로질러 끌며 수확이 끝난 것처럼 연출했다.

페름 공장에서 10년간 엔지니어로 일한 뒤 전쟁 중 당 기구에 진입했다. 흐루쇼프 시절 탐보프·보로네시·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 3개 주에서 1서기를 지내며 지역 산업과 농업을 지휘했고, 보로네시에서는 수확 과시를 위해 들판에 레일을 끌게 한 일화로 유명하다. 1964년 10월 중앙위 전체회의에서 흐루쇼프의 농업 정책과 당 기구 분할을 비판하며 그의 축출에 한몫했다. 이후 RSFSR 각료회의 제1부의장(1965~1974)을 거쳐 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1974~1987)으로 국가 감독 기구를 13년간 이끌며 브레즈네프 체제의 행정 통제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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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43페름 공장에서 교대장·직장·동력책임자로 근무
  • 1943–1945몰로토프(페름) 주당위 부서장
  • 1945–1947중앙당통제위원회 전권위원(블라디미르·보로네시 주)
  • 1947–1949칼루가 주당위 제2서기
  • 1952중앙위 지도원·부부장
  • 1952–1955탐보프 주당위 제1서기
  • 1955–1960보로네시 주당위 제1서기
  • 1960–1965스탈린그라드·볼고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
  • 1965–1974RSFSR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74–1987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

얀 노바크예지오란스키

Jan Nowak-Jeziorański
문학·예술 소속 미확정 폴란드 폴란드계 1914–2005 ○ 자연사

전쟁과 망명을 관통한 폴란드 연락장교

1944년 7월 29일 그는 국내군 지도부에 서방의 대규모 지원이 불가능하다고 전했지만, 봉기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얀 노바크예지오란스키는 폴란드 국내군과 런던 망명정부를 잇던 연락장교이자 언론인이었다. 1944년 7월 런던에서 귀환해 국내군 지도부에 서방의 지원이 제한적임을 알렸지만 봉기의 결정을 막지 못했고, 봉기 중에는 라디오 방송을 맡았다. 전후에는 라디오 자유유럽 폴란드어 방송을 이끌며 망명과 반공 정치의 목소리를 냈다. 1989년 귀국한 뒤에도 폴란드의 서방 통합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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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포즈난대학교 경제학 조교
  • 1941–1943폴란드 국내군 정보·선전망 활동
  • 1943–1944런던 망명정부와 국내군 사이의 연락장교
  • 1944.07–10바르샤바 봉기에서 라디오 비츠카비차 방송원·편집자
  • 1948–1951BBC 폴란드어 방송 편집진
  • 1951–1976라디오 자유유럽 폴란드어 방송 초대 국장
  • 1979–1996미국 폴란드계 미국인회의 전국 사무국장
  • 1989–2005귀국 후 폴란드의 대서방 통합을 옹호한 공적 논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