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록은 회고했다. "나는 로널드 레이건보다 더 나은 학생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는 자기가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을 알았고,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잭 매트록은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러시아에 매료되어 외교관이 된 미국의 대소 전문가로, 1961년 첫 모스크바 근무 시절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와 흐루쇼프 사이의 외교문을 번역했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NSC 유럽·소련 담당 선임국장으로서 CIA와 국무부 분석관들을 동원해 '소비에트 101'이라는 24편의 브리핑 문건을 편성하고 모의 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 역을 맡아 레이건을 훈련시켰다. 1987년 소련 주재 대사로 부임하여 소련의 마지막 4년을 목격했고, 은퇴 후 고르바초프가 제네바에서 SDI 공유 약속을 서면화하지 않은 것을 '전략적 실수'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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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즈버러 출생, 듀크대·컬럼비아대 수학
1956–1971외교관 임관, 빈·모스크바·서아프리카·동아프리카 근무, 쿠바 미사일 위기 시 케네디-흐루쇼프 서신 번역
1971–1974국무부 소련 담당 국장
1974–1978주소 미국대사관 공사 겸 부대사
1981–1983체코슬로바키아 주재 미국 대사
1983–1986NSC 유럽·소련 담당 선임국장, '소비에트 101' 편성, 제네바·레이캬비크 정상회담 준비
1987–1991소련 주재 미국 대사, 소련 마지막 4년 목격
1991–컬럼비아대·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 『제국의 부검』·『레이건과 고르바초프』 저술
아민이 부관에게 소련군에 경고하라 명하자 부관은 '쏘는 쪽이 소련군입니다'라고 답했다. 아민은 재떨이를 집어던지며 외쳤다. '거짓말이다, 그럴 리 없어!'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 칼크파의 실질적 2인자이자 1978년 4월 혁명의 군사적 설계자. 미국 유학 시절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 후 귀국하여 당내 군부 조직책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부수상·외무장관·국방장관을 거치며 타라키를 제치고 실권을 장악했다. 1979년 9월 타라키를 축출·처형하고 당과 국가의 최고직에 올랐으나, 가혹한 숙청과 반란 확산 속에 소련은 그를 통제 불능으로 판단했다. 12월 27일 KGB 특수부대의 타지베크 궁전 습격으로 살해되었고, 이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서막이 되었다.
1967년 오르비타가 가동되자 시베리아·극동 주민 수천만 명이 처음으로 모스크바 중앙TV를 시청했다. 탈리진은 "우리가 우주에서 신호를 보내는 첫 국가가 될 것"이라 했다.
통신 공학자 출신의 소비에트 테크노크라트로, 1967년 세계 최초의 위성 텔레비전 방송망인 오르비타 시스템의 과학적 개발을 이끌어 시베리아와 극동 주민 9천만 명에게 중앙 TV를 공급했다. 통신장관(1975~1980)을 거쳐 1985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고스플란 의장으로 발탁되어 초기 페레스트로이카 경제 개혁의 계획을 주도했으나, 개혁 속도를 둘러싼 갈등 속에 1988년 경질되었고 1989년 보수파로 분류되어 퇴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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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통신부 산하 무선연구소(NII Radio) 기술자, 수석 설계자, 선임연구원, 부소장
1989년 1월 정치국 회의에서 고르바초프에게 반박했다: "농업의 이런 조직 개편들에 지쳤습니다. 농업이 우선순위를 얻지 못하면 프로그램은 실패할 것입니다. 정말 이게 각료회의와 정치국, 그리고 당신, 미하일 세르게예비치에게 이해되지 않습니까?"
마리 자치공화국 제1서기를 12년(1967~1979) 역임한 농학자 출신 당 간부로, 1985년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오르자 농업 담당 중앙위 서기를 이어받았다. 안드로포프 시절 구상된 농업 부흥 프로그램을 구체화하고 6개 농업 부처를 통합한 국가농공위원회 창설을 지지했으나, 관료적 통합이 생산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판단한 후 정치국에서 수차례 고르바초프와 충돌했다. 1989년 9월 만 60세로 정치국과 서기국에서 동시 해임되었다.
밤중에 브레즈네프가 직접 전화를 걸었다: "들어봐, 심판이 왜 '니스트루'를 편파 판정한 거야? 조치를 취해." 또 다른 고위 인사가 전화해 말했다: "프라하에 연결돼 있나? 당장 전화해서 하키 선수들에게 골대를 향해 슛을 날리라고 해."
셸레핀의 후원 아래 30세에 콤소몰 제1서기가 되어 9년간 청년동맹을 이끌었다.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에 맞서 ≪프라우다≫를 통해 솔제니친·에렌부르크를 공개 공격하고, 1930년대를 어두운 색으로만 그리는 풍조를 비판한 강경파였다. 1968년 브레즈네프가 셸레핀 계열을 숙청할 때 체육위원회 의장으로 밀려났으나, 오히려 15년간 소련 스포츠의 황금기를 진두지휘하며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72년 슈퍼시리즈를 성사시켰다. 안드로포프 집권 후 몽골·버마 대사로 전출되어 사실상 은퇴했다.
"소련 동지들은 나를 한없이 사랑하며, 내 개인적 안전을 위해 내 명령조차 따르지 않는다": 꼭두각시 대통령이 친구에게 털어놓은 자기 유폐의 실상.
바브라크 카르말은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의 창립 멤버이자 파르참(깃발) 분파의 지도자로, 1978년 4월 혁명 후 부수상이 되었으나 곧 칼크파의 숙청으로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좌천되었다. 프라하에서 해임된 뒤 아프간 정권의 암살단을 피해 체코슬로바키아 비밀경찰의 보호 아래 숲속 오두막에서 은신했으며, 1979년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함께 대통령으로 복귀했다. 집권 기간 중 사면령, 새 국기 채택, 기본원칙 헌법 제정 등으로 정권의 기반을 넓히려 했으나, 소련의 꼭두각시라는 인식을 벗지 못했고 무자헤딘 반군과의 내전은 교착에 빠졌다.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해임된 뒤 모스크바로 망명하여 간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부란 우주왕복선 기체 개발 당시, 시스초프가 주재하던 작전회의는 '시솝니키(сысовники)'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설계국들은 그의 무뚝뚝한 현장 감각을 두려워하면서도 존중했다.
멜레케스의 교사 가정에서 태어나 타슈켄트 항공공장 모터 조립공으로 시작해 수석 엔지니어까지 오른 현장형 관료였다. 1975년 울리야놉스크 항공산업단지 초대 총책임자로 거대 제조 기지를 건설했고, 1981년 항공공업 제1차관으로 부란 우주왕복선 기체 개발을 감독했다. 1985년 장관에 올라 MiG-29·Su-27·Tu-160·An-124 등 소련 항공기술의 최전선을 총괄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기에는 항공공업부의 시장 전환을 주도했다. 공산당 중앙위원(1986~1990)과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고, 소련 해체 후 러시아 항공산업 민영화를 이어갔다.
“2년 반 동안 우리는 입장을 좁혀, 당대 가장 현대적인 무기의 완전 폐기 조약에 서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신께 감사하게도 그 과정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고,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 1987년 INF 조약에 대해
소련과 러시아의 외교관으로,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 아래서 외무부 제1차관(1986–1990)을 지내며 냉전 말기 소련 외교의 실무를 이끌었다. 소련군 철수 시기인 1988–1989년 아프가니스탄 대사를 겸임하여 무자헤딘 지도자들로부터 철수 부대에 대한 사격 금지 보장을 받아냈다. 군축 수석협상가로서 1987년 중거리핵전력(INF) 조약 체결을 이끌었으며, 아나톨리 도브리닌 아래 워싱턴 대사대리와 인도·프랑스 대사를 거쳐 소련의 마지막 유엔 상임대표와 러시아 초대 주미 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에도 유엔 사무차장으로서 쿠웨이트 실종자 및 재산 반환을 조정하는 임무를 죽을 때까지 수행했다.
고르바초프 시기 최고위 여성 정치인, 소비재 품귀를 해결하려 했던 '러시아의 마거릿 대처'
1989년 여름, 비류코바는 일주일 동안 서유럽 8개 도시를 돌며 타이츠 5,000만 켤레, 여성화 170만 켤레를 구매했다. 소비에트 부총리가 직접 생필품 쇼핑에 나선 광경이었다.
섬유공학 엔지니어 출신으로, 소련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서기를 거쳐 고르바초프 시기 CPSU 중앙위 서기(1986~1988)와 각료회의 부의장 겸 사회발전국 의장(1988~1990)을 지내며 경공업·소비재·주택·보건을 총괄한 소련 최고위 여성 정치인이었다. 1988년 정치국 후보위원에 올라 옐레나 스타소바·예카테리나 푸르체바에 이어 소련 역사상 세 번째로 정치국에 진입한 여성이 되었으며, 소비재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서유럽에서 한 주 만에 1억 6,500만 달러어치의 생필품을 구매하는 파격적 쇼핑 외교를 벌이기도 했다. 페레스트로이카 후반 소비시장 붕괴와 당내 비판 속에 1990년 28차 당대회를 기점으로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다.
그는 1962년 아버지의 개인 비서로 쿠바 협상을 기록했고, 그 문서가 훗날 공개되며 미사일 철수 뒤에도 전술핵이 쿠바에 남아 있었음이 드러났다.
세르고 미코얀은 라틴아메리카와 소련 대외정책을 연구한 소련·러시아 역사학자이자 아나스타스 미코얀의 아들이었다. 1962년 아버지를 수행해 쿠바를 방문한 경험과 개인 기록을 바탕으로, 공개된 미사일 철수 뒤에도 소련 전술핵이 쿠바에 남아 있었고 협상 과정이 쿠바 지도부와의 균열을 낳았음을 밝혔다. 그는 학술지 《라틴아메리카》를 이끌며 이 지역 연구를 조직했고, 훗날 소련과 미국 연구자들의 공동 냉전사 연구에 참여했다.
1975년 5월의 시점을 두고 사료가 갈린다. 한쪽은 5월 5일 수바나 푸마 앞에서 협력을 요구받은 때를, 다른 쪽은 5월 14일 헬리콥터로 롱티엥을 떠나며 포격이 시작된 때를 종결로 본다.
라오스 시엥쿠앙 주 농헷 출신 몽족 군인. 왕국군에서 장성까지 오른 유일한 몽족이었다. 1960~70년대 롱티엥을 근거지로 중앙정보국이 훈련·지원한 비정규 ‘비밀군대’를 지휘하며 파테트라오와 베트남인민군에 맞섰다. 1975년 5월 공산 세력의 장악 속에 태국으로 빠져나온 뒤 미국으로 건너가 몬태나를 거쳐 캘리포니아에 정착했고, 미국 몽족 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1980~90년대 태국 내 난민 강제 송환 저지에 힘을 보탰다. 1981년 라오스 국가해방통일전선(네오홈) 창립에 참여했다. 2007년 미국에서 라오스 정부 전복 모의 혐의로 기소됐으나 2009년 모든 연방 혐의가 취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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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1975라오스 왕국군 소장, 롱티엥 근거지의 중앙정보국 지원 ‘비밀군대’ 지휘
「러시아가 힘의 논리로 대화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세계에 처음으로 보여준 순간」 — 프리마코프의 대서양 회항에 대한 러시아 정치학자들의 평가
소련 최고의 아랍 전문가이자 정보·외교·정치를 가로지른 실용주의자. 《프라우다》 중동 특파원을 거쳐 IMEMO와 동양학연구소 소장을 지냈고, 1989년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었다. 1991년 KGB 제1총국장으로 소련 해체 직후 러시아 대외정보국(SVR)을 창설했으며, 외무장관 시절 '프리마코프 독트린'으로 불리는 다극 외교를 주창했다. 1999년 총리 재임 중 NATO의 유고슬라비아 폭격을 이유로 대서양 상공에서 전용기를 돌려 귀국한 사건으로 널리 기억된다.
1977년 5월 27일 분파주의 사건 당시 니투파의 「변론 13개 테제」는 라라를 '사회민주주의자'이자 MPLA의 우경화를 이끈 인물로 비난했다. 이후 대규모 숙청의 책임은 네투의 명령 아래 라라와 이쿠 카헤이라 등에게 귀속된다.
본명 루시우 호드리구 레이테 바헤투 드 라라, 별칭 치웨카. 앙골라의 혁명가·물리수학자이며 MPLA 창립 구성원이자 지도자다. 1955년 앙골라 공산당에 들어갔고 1956년 12월 MPLA 강령에 창립 서명자로 참여해 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의 주된 이데올로그가 되었다. 1962년 조직·간부 담당 서기, 1964~65년 사무총장을 지냈다. 1975년 11월 헌법을 공포하고 아고스치뉴 네투를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시켰다. 네투 사망 후 1979년 9월 10~20일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고, 2003년 건강상 이유로 정계를 떠났다. 1977년 5월 27일 분파주의 사건 이후의 대규모 숙청 책임은 역사가와 증언자들이 네투의 명령 아래 라라·이쿠 카헤이라 등에게 귀속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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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1958리스본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해 1952년 졸업하고, 1954년 코임브라 대학에 들어가 물리화학을 배우다 1958년 학업을 중단했다.
1955–1956앙골라 공산당에 입당하고 포르투갈 공산당과 함께 활동했으며, 1956년 12월 MPLA 강령에 창립 서명자로 참여했다.
1959정치경찰 PIDE의 추적을 피해 리스본을 떠나 동·서독과 이탈리아, 튀니지, 모로코를 거쳐 코나크리에 MPLA 최초의 해외 사무소를 마련했다.
1962–19651962년 12월 제1차 전국회의에서 조직·간부 담당 서기와 중앙위원에 선출되었고, 1964~65년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1964년부터 당의 실질적 2인자였다.
1974–19751974년 11월 8일 MPLA 대표단을 이끌고 루안다에 들어갔고, 1975년 11월 10일 헌법을 공포하고 아고스치뉴 네투를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시켰다.
1977–19851977년 12월 10일 MPLA 중앙위원회에 재선되어 네투에 이어 정치국 서열 2위 및 당 부총재로서 조직과 이데올로기 부문을 맡았고, 1985년 주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에 의해 정치국에서 제외되어 중앙위원으로 남았다.
1979네투 사망 후 9월 10~20일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고, 9월 11일 제2차 MPLA 대회를 소집해 9월 20일 주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의 선출을 이끌었다.
1975–2003독립 직후부터 2003년까지 앙골라 의회 의원을 지냈고, 2003년 11월 건강상 이유로 의원직을 사퇴했다. 국방부는 2004년 그를 육군 대장으로 예편시켰으나 본인은 이 계급을 쓰지 않았다.
1986년 4월 26일 새벽, 체르노빌 사고 첫 보고를 받은 마요레츠는 니콜라이 리즈코프 총리에게 이를 알린 직후 현장으로 날아갔다. 도착하자마자 정격 출력으로 가동 중인 두 원자로 블록을 즉각 정지·비상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자포리자 변압기 공장의 전기기사에서 소련 전기공업장관·에너지장관까지 오른 산업 관료로, 송배전망과 원자력 발전을 사반세기 동안 이끌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가장 먼저 보고받아 곧장 현장으로 가 가동 중인 두 원자로를 비상 정지시키고, 소련 원자력 안전 체계 재편을 촉구했다.
블라디미르 트레믈은 소련 경제에서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 소득과 소비를 간접 지표로 추정한 미국의 경제학자다. 그는 사모곤을 포함한 실제 주류 소비량과 국가 재정에서 보드카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을 분석해, 주류 판매 통계만으로는 소련 사회의 음주 규모를 파악할 수 없음을 보였다. 1982년 저서 《소련의 알코올》은 이 연구를 집약했으며, 소련에서는 도서관 제한 열람 자료로 취급되었다.
1990년 6월, 흐리스토라드노프는 러시아 정교회 지방공의회에서 소비에트 정부를 대표해 연단에 섰다. 그가 인사말을 전한 바로 그 공의회는 알렉시 2세를 새 총대주교로 선출했다.
유리 흐리스토라드노프는 브레즈네프 시대 고리키(니즈니노브고로드) 주 당위원회 제1서기로 14년간 재임하며 도시의 대규모 주택 건설과 지하철 착공을 주도한 소련의 지역 당 간부였다. 고리키 자동차 공장의 주물 공장에서 노동자로 출발하여 당 기구를 따라 승진했고, 1976년부터 1990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는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1988~1989)을 거쳐 소련 각료회의 산하 종무위원회의 마지막 의장(1989~1991)으로서 고르바초프 치하의 종교 자유화 국면에서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관장했다. 1990년 러시아 정교회 지방공의회에서 소비에트 정부를 대표하여 인사말을 전했으며, 이 공의회는 알렉시 2세 총대주교를 선출했다.
2002년 「군사역사잡지」에 실은 글에서 그는 역사가의 의무를 이렇게 적었다: "역사가는 자기 민족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해야 한다."
그리고리 크리보셰예프는 소련군에서 출발해 총참모부 부총참모장까지 오른 군인이자 군사역사가였다. 그는 1988년부터 군사역사 연구단을 이끌어 비밀 해제 자료를 바탕으로 소련과 러시아 군대의 전쟁 손실을 통계화했고, 그 결과는 1993년 저서로 출간됐다. 이 연구는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의 회복 불가능한 손실을 12만 6,875명으로 제시해 널리 인용됐지만, 후속 연구자들은 누락과 중복 가능성을 지적하며 더 높은 수치를 제시했다.
“핵전쟁은 막지 않는 한 지구상 생명의 멸종으로 이어질 것이다. 우리가 이런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가?” — 1985년 오슬로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
예브게니 차조프는 혈전용해요법을 개척해 심근경색 치료를 혁신한 소련의 심장학자로, 20년간 크렘린 의료를 총괄하며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등 역대 지도자를 진료했다. 1980년 미국 심장학자 버나드 론과 함께 핵전쟁 방지 국제의사회(IPPNW)를 공동 창설해 198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이는 냉전기 동서 진영을 가로지른 보기 드문 협력이었다.
1983년 1월 안드로포프가 급서한 키셀료프의 후임으로 그를 긴급 소환했을 때, 슬륀코프는 당 경험 부족을 들어 사양했다. 안드로포프의 답은 짧았다: '오늘날 가장 큰 정치는 경제요. 가서 그 정치를 하시오.'
민스크 트랙터 공장에서 노동자로 시작해 공장장·총감독을 거쳐 벨로루시 공산당 제1서기(1983~1987)와 고르바초프 치하 정치국원 겸 중앙위 서기(1987~1990)를 지낸 소비에트 경제 관료 출신 정치인. 벨로루시 당 책임자 시절 농업 생산량을 30% 끌어올리고 적자 농장을 완전 해소해 '당 중앙위 디렉터'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실무형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1987년 중앙위 경제부장으로 발탁되어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계획경제에서 시장 지향 개혁으로의 이행을 주도했으나, 정부 수반 니콜라이 리시코프와의 마찰과 건강 악화로 1990년 정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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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960민스크 트랙터 공장 보조기사·기사·상급기사·부책임자·책임자·노조위원장
1960–1965민스크 트랙터 예비부품공장 책임자
1965–1972민스크 트랙터 공장장·민스크 트랙터제조 생산연합 총감독
1972–1974민스크 시당위 제1서기
1974–1983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1983–1987벨로루시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1987–1990CPSU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원; 1987~1988 경제부장, 1988~1990 사회경제정책위원회 위원장
페레스트로이카가 한창이던 1988년, 그는 당대회 연단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동조합은 더 이상 국가 기구의 부속물이어서는 안 됩니다."
모르드바 출신의 임업 기술자로, 1951년 모스크바 임업기술대학을 졸업한 뒤 임업·제지·목재가공 산업 현장에서 경력을 쌓았다. 1963년 임업노조 중앙위원장으로 노동조합 활동에 들어서 1968년 전소비에트 중앙노동조합평의회(VTsSPS) 서기가 되어 국가사회보험 예산을 관장했다. 1980년 임업·제지·목재가공공업 장관을 지냈고, 1982년부터 1990년까지 VTsSPS 의장으로서 1억 3천만 조합원을 거느린 소련 노동조합 체제를 이끌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당 중앙위원이자 최고회의 간부회의 위원으로서 노동조합의 행정명령 체계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으며, 1990년 자발적 사임으로 소비에트 노조 체제의 마지막 장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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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1963임업·목재가공 산업 현장에서 기술자로 성장, 여러 레스프롬호스의 주임기사·소장 역임
다른 사람들은 자식을 대사관에 두는데, 왜 아들을 알단으로 보냈냐는 질문에 — 「7년 후에 그 현장 학교를 거친, 진짜 지질학자가 되게 하려는 겁니다.」
예브게니 코즐롭스키는 소련 지질학의 '황금기'를 이끈 최장수 지질장관(1975–1989)으로, 재임 기간 소련의 광물자원 기반을 두 배로 확장하고 서시베리아·카스피·중앙아시아에서 대규모 유전과 가스전 개발을 주도했다. 달동 출신으로 부시추조수에서 출발해 극동 솔네치노예 주석광산의 조기 탐사를 성공시켜 레닌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과학기술 혁신을 중시하는 경영자로 성장했다. 그의 지휘 아래 추진된 콜라 초심층 시추는 12,620미터로 기네스 세계기록에 올랐고, 소련은 400척 규모의 지질탐사선단을 보유하게 되었다.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 광물자원 정책의 이론가로 활동하며, 지질학을 국가안보의 기초로 재정립하려는 작업을 마지막까지 이어갔다.
1990년 5월 24일, 전국에 생중계된 최고회의에서 빵과 식료품 가격이 인상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1989~1990년 수백 개 도시에 배급제가 도입된 물자 부족 상황에서, 이 발언은 리시코프 내각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무너뜨렸다.
1929년 9월 28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도네츠크주 딜레예프카 마을의 광부 집안에서 태어나 2024년 2월 28일 모스크바에서 94세로 사망했다. 우랄마시 총지배인과 고스플란 제1부의장을 거쳐 1985년 9월 각료회의 의장이 되었고, 1990년 12월 26일 각료회의가 폐지될 때까지 재임했으나 파블로프가 취임한 1991년 1월 14일까지 형식상 정부 수반으로 남았다. 1990년 12월 심장발작으로 쓰러진 뒤 1991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약 1,336만 표를 얻어 옐친에 이어 2위를 했다. 1995년 국가두마 의원, 2003년부터 연방평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