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멤논』 — 남성을 사랑하는 우르닝의 성 본성

인물카를 하인리히 울리히스, 오토 폰 비스마르크, 요한 루트비히 카스퍼, 루돌프 피르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용어우르닝, 성적 중간 단계론, 독일 형법 제175조 사건독일 성개혁 운동과 나치의 파괴 (1897~1935)

자연과학적 서술.

몸과 영혼의 자웅동체성.

Anima muliebris virili corpore inclusa.(남성의 몸에 갇힌 여성의 영혼)

누마 누만티우스의 저작들을 잇는 것으로서:

일곱째 책.

『멤논』 제1부.

“Introite! nam et hoc templum naturae est.”(들어오라! 여기도 자연의 신전이니)

카를 하인리히 울리히스 지음. 재야 학자, 전 하노버 왕국 관구 배석 판사, 독일 법률가 대회 회원, 괴팅겐에서 학술상을 받은 현상 논문 『de foro reconventionis』(반소의 재판적에 관하여)와 베를린에서 학술상에 값한다고 인정받은 논문 『de pace Westphalica』(베스트팔렌 평화 조약에 관하여)의 저자.

학문적 권위자들의 발언을 찾는 사람은 §§ 45와 131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다. 폰 람도르,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의학 교수 피르호, 추밀 의무 고문관 카스퍼, 의학 교수 폰 밤베르거 등등.

남쪽으로 흐르는 강이 있으니, 너도 그것을 안다. 그러나 비늘이 벗겨지듯 네 눈이 뜨이고, 너는 숨겨진 것을 들여다보며 네가 알지 못하던 강 하나가 북쪽으로 흐르는 것을 보리라. 불처럼 이글거리고 수정처럼 빛나며 장미 꽃봉오리에 맺힌 이슬처럼 반짝이는 그 강은 몇몇 사람의 가슴을 꿰뚫고 흐른다. 너는 그 강을 거슬러 그것이 솟아 나오는 샘까지 따라가리라. 그런데 그 샘은 우주의 위대한 어머니의 젖가슴에 있다.

수수께끼의 남자들의 베일에 싸인 본성. Anima muliebris virili corpore inclusa.(남성의 몸에 갇힌 여성의 영혼) 우라니즘의 서술. 우라니즘이 자연의 손으로 생겨난다는 것, 그리고 우르닝의 사랑이 자연의 법칙과 일치한다는 것의 증명.

제1부.

나, 누마 누만티우스는, 『빈덱스』, 『인클루사』, 『빈딕타』, 『포르마트릭스』, 『아라 스페이』의 저자로서, 1863년에 이렇게 밝혔다. 그 소책자들을 펴낼 때 내가 스스로 매인 익명의 족쇄를 되도록 빨리 끊겠노라고. 오늘 나는 투구의 면갑을 연다.

카를 하인리히 울리히스.

머리말. 타고난 본성에 따라 성애의 끌림으로 오로지 남성인 사람에게만 끌리는 남자들을 이 책은 우르닝이라 부르고, 그들의 사랑을 우르닝의 사랑(남자와 남자의 사랑)이라 부르며, 이 현상 전체를 우라니즘이라 부른다. (「우르닝」이라는 이름은 『빈덱스』 § 2에서 설명했다.) 우르닝은 자연의 수수께끼다. 그의 사랑의 충동은 여성의 것이다. 그는 오직 몸으로만 남자다.

성인 우르닝은 다음과 같이 산다.

독일(독일 전체)약 25000명
오스트리아-헝가리약 25000–28000명
프로이센약 10000–12000명
빈약 1000명
베를린약 500–1000명

독일에서는 전체 인구 약 2000명 가운데, 또는 성인 남자 500명 가운데 평균 한 명꼴로 성인 우르닝이 산다. 그러니 주민 100000명인 도시에는 평균 50명이 사는 셈이다.

서론.

I. 1866년 런던에서 그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바이런 경의 시 한 편이 그의 유고에서 나와 출간되었다(아래 § 134, 10 참조). 그 시에서 시인은 숭배자들을 놀라게 하고, 아니 경악하게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129–314행)[1].

Then, say, was J or nature in the wrong,
If, yet a boy, one inclination, strong
In wayward fancies, domineered my soul,
And bade complete defiance to control ?.....
Among the yeomens’ sons on my estate
A gentle boy would at my mansion wait.
And now, that time has almost blanched my hair,
Full well J know, though decency forbad
The same caresses to a rustic lad:
Love, love it was, that made my eyes delight
To have his person ever in my sight .......
Of humble birth was he, patrician J,
And yet this youth was my idolatry.
Oh! how J loved to press his cheek to mine;
How fondly would my arms his waist entwine!
’t was like a philter poured into my veins.
... What lights this fire ?
Maids and not boys are wont to move desire;
Else ’t were illicit love? Oh, sad mishap!
But what prompts nature then to set the trap?
Why night and day does his sweet image float
Before my eyes? or wherefore do J doat
On that dear face with ardour so intense?
Why truckles reason to concupiscence?
Though law cries »hold«: yet passion onward draws.
But nature gave us passions, man gave laws!
Whence spring these inclinations, rank and strong
And harming no one? Wherefore call them wrong? ...
How many captains, famed for deeds of arms,
Have found their solace in a minion’s arms.
Say, why, when great Epaminondas died,
Was Cephidorus buried by his side?
Or why should Plutarch with eulogiums cite
That chieftain’s love for his young catamite:
And we be forced his doctrine to decry
Or drink the bitter cup of infamy?
(그러니 말해 보라, 잘못한 것은 나였나, 자연이었나,
아직 소년일 때 한 가지 성향이 제멋대로인 공상 속에서 강하게
내 영혼을 휘어잡고
다스리려는 모든 손길에 맞섰다면?…
내 영지의 자작농 아들들 가운데
상냥한 소년 하나가 내 저택에서 시중을 들곤 했다.
세월이 내 머리를 거의 하얗게 바래게 한 이제,
나는 잘 안다. 체면은 시골 소년에게
같은 애무를 금했지만,
그를 늘 내 눈앞에 두고 보기를 내 눈이 기뻐한 것은
사랑, 사랑 때문이었음을…
그는 미천한 태생, 나는 귀족,
그런데도 이 젊은이는 나의 우상이었다.
아! 그의 뺨을 내 뺨에 대는 것을 나는 얼마나 좋아했던가,
내 팔은 얼마나 다정하게 그의 허리를 감았던가!
그것은 내 혈관에 부어진 사랑의 묘약 같았다.
… 무엇이 이 불을 지피는가?
욕망을 일으키는 것은 으레 소년이 아니라 처녀들이니,
그렇지 않다면 부정한 사랑이란 말인가? 아, 슬픈 불운이여!
그렇다면 무엇이 자연을 부추겨 덫을 놓게 하는가?
어찌하여 밤낮으로 그의 달콤한 모습이
내 눈앞에 떠도는가? 어찌하여 나는
그 사랑스러운 얼굴에 이토록 뜨겁게 빠져드는가?
어찌하여 이성은 육욕 앞에 굽실거리는가?
법은 “멈추라” 외치지만, 정열은 앞으로 끌어당긴다.
그러나 정열은 자연이 우리에게 주었고, 법은 인간이 주었다!
무성하고 강하되
아무도 해치지 않는 이 성향들은 어디서 솟는가? 어찌하여 그것을 잘못이라 부르는가?…
무공으로 이름난 얼마나 많은 장수들이
총애하는 소년의 품에서 위안을 찾았던가.
말해 보라, 위대한 에파미논다스가 죽었을 때
어찌하여 케피도로스가 그 곁에 묻혔는가?
또 어찌하여 플루타르코스는 그 장수가
어린 미동에게 품은 사랑을 찬사와 함께 들었는가?
그런데 우리는 그의 가르침을 규탄하거나
치욕의 쓴 잔을 마셔야 하는가?)

II. 나는 다음과 같은 인정을 받았다.

내가 『멤논』 제1부를 보내 드린 뷔르츠부르크의 의학 교수 궁정 고문관 폰 밤베르거 박사는 내게 이렇게 써 보냈다.

“뷔르츠부르크, 1868년 5월 26일. …고백하건대, 당신이 이 주제를 다룬 재기 넘치는 방식은 이 주제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매우 알맞습니다. 진지한 토론을 할 만한 실마리가 여럿 있을 것입니다. … 이 변칙이 타고난 것이며 개인의 신체 조직에 근거한 본성이라는 당신의 주장을 나는, 적어도 일정한 수의 사례에 대해서는, 옳다고 봅니다.” (아래 § 131 참조.)

『글라디우스 푸렌스』에 대해 슈투트가르트의 퇴임 고등 법원 판사 포이어바흐는 1868년 5월 24일 내게 이렇게 답했다.

“… 법률가 대회의 일부가 당신에게 저지른 부당한 일에 관한 당신의 설명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 입법의 불가피한 개선에 관한 당신의 견해에도 온전히 공감합니다. 당신이 그토록 근거가 탄탄한 제안을 법률가 대회에서 관철하지 못하더라도, 입법을 바꾸려는 당신의 노력이 성과 없이 끝나지는 않으리라고 나는 굳게 확신합니다. … 그러므로 내가 그 제안에 동참하지는 않더라도, 사안 자체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당신과 같은 의견입니다. …

온갖 두려움 가운데 내가 가장 모르는 것이 사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내가 말하고 쓰는 것은 누구 앞에서든 언제나 책임질 수 있습니다.”

『글라디우스 푸렌스』에 대해 슈투트가르트의 오토 자이퍼 교수 박사는 1868년 5월 26일 내게 이렇게 답했다.

“… 당신이 그토록 많은 재기와 솔직함으로 이끌어 가는 사안에 대해 우리의 공감을 표하는 것은 정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입니다. 내가 여러 명망 있는 인사들에게 전한 당신의 저작들은 나와 내 친구들에게 이런 가장 완전한 확신을 심어 주었습니다. 형법의 이 대목에는 커다란 오류가 있으며, 사람들이 낡은 편견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당신이 이끄는 사안은 승리를 거두며 관철되리라는 것입니다. … 이 문제의 심리학적 측면은 내게 분명합니다. 당신의 논의와 더불어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당신과 같은 부류의 한 노인의 진술입니다. 그는 오래전에 죽었지만, 이 일에 대해 솔직하고 거리낌 없이 이야기했고, 그렇게 태어났다는 당신의 입장에 전적으로 섰습니다. … 그러나 어떻든 간에, 나는 거기서 처벌받아 마땅한 것이나 명예롭지 못한 것을 찾던 생각을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탈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 탈선인 것이 다른 이에게는 삶의 행로의 필연입니다.”

한 영국 우르닝은 내게 다음과 같이 써 보냈다.

“Londres, 1. Janvier 1868. ...
Vous me permettrez de vous écrire quelques lignes pour vous exprimer la sympathie profunde que j’éprouve pour la tache que vous avez entreprise: l’émancipation d’une classe nombreuse et innocente d’un joug si cruel, des lois injustes et du mépris immérité. Vous méritez, monsieur, les rémercimens de tous vos confrères sexuels, surtous de ceux qui se cachent derrière la visière. Il me semble qu’il ne faut que de la capacité et du courage tels que les vôtres pour poser nettement – devant la raison publique de tous les pays – les suites logiques de votre appel à l’argumentation, du moins avec la persévérance et l’honorable hardiesse que vous n’avez pas eu peur de montrer etc. (런던, 1868년 1월 1일. …
당신이 떠맡은 과업, 곧 수많은 죄 없는 한 부류의 사람들을 그토록 잔인한 멍에에서, 부당한 법률과 받아 마땅하지 않은 경멸에서 해방하는 일에 대해 내가 느끼는 깊은 공감을 표하고자 몇 줄 적어 보내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선생, 당신은 성(性)을 같이하는 모든 동료들, 특히 면갑 뒤에 숨어 있는 이들의 감사를 받을 만합니다. 당신의 논증에의 호소가 낳는 논리적 귀결을 – 모든 나라의 공론 앞에 – 분명히 내놓는 데는 당신과 같은 역량과 용기만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적어도 당신이 두려움 없이 보여 준 끈기와 명예로운 대담함만 있다면 말입니다 등등.)

III. 나는 우라니즘이 타고난 것이라는 데서 나와는 다른 귀결을 끌어내는 학자들, 특히 그것을 근거로 우르닝의 사랑이 온전한 도덕적 정당성을 지닌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아직 꺼리는 학자들, 도덕률과 도덕적 세계 질서 앞에서 우르닝의 사랑에 당분간 변명의 권리, 관대한 판단을 받을 권리만을 인정하려는 학자들을 위해서도 썼다. 그러나 또 당분간 거기서 아무런 귀결도 끌어내지 않는 사람들, 오히려 이 자연과학적 현상에 그 자체로서 가치가 깃들어 있다고 보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썼다. 그러므로 이 책은 무엇보다도 자연과학적인 책이다. 귀결을 끌어내는 일은 안심하고 시간에 맡겨도 좋다.

Tempus in apricis maturat collibus uvas.
(시간은 볕 바른 언덕에서 포도를 익힌다.)

법률적 측면은 여기서 거의 언급할 필요가 없다. “anima muliebris virili corpore inclusa”(남성의 몸에 갇힌 여성의 영혼)라는 명제는 세워 놓은 기둥처럼 서 있을 것이며, 세월의 이빨도 그것을 갉아먹지 못할 것이다. 자연을 그 고문자들의 손에서 해방하는 데 얼마나 큰 싸움이 필요했는지 사람들이 까맣게 잊고, 한때 자연을 박해하는 일을 법으로 높였던 민족들과 도시들을 가엾이 여기며 떠올리는 일조차 드물어진 뒤에도, 이 명제가 도덕률에 대해 갖는 귀결은 지혜의 가장 높은 문제들에 속할 것이다.

IV. 이 대상을 다루는 데에는 어려운 면이 있다. 곧 여기저기서 나는 순전히 성적인 대목들을 건너뛸 수도 없었고 건너뛰어서도 안 되었다. 학문이 명령했다. 물론 학문은 에두른 표현과 품위 있는 서술 방식을 허락했다. 그러나 자연과학적으로는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행동 방식이 도덕적으로 보면 그야말로 경박하고 비난받아 마땅한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내가 그런 행동 방식도 여기저기서 들어야 한다고 믿었다면(예컨대 앞서는 네로, 헬리오가발루스, 블랑크의 행동 방식을, 아래 제XX장에서는 살아 있는 몇몇 우르닝의 행동 방식을), 그때 나를 이끈 것은 당연히 오로지 그 자연과학적 의미뿐이었으며,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도덕 비판에서 나는 오히려 그것을 배척하는 독자의 입장에 서 있다. 나의 원칙은 내가 『아라 스페이』 § 152에서 말한 그대로다. 신분 차이와 예법의 격식은 경멸하되, 도덕과 수치심은 높이 받든다. 나는 『포르마트릭스』 주 3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설명을 했다. 자연과학은 도덕적으로 순결한 행동에서도,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에서도 이득을 거두어야 한다. 꿀벌은 벨라돈나의 독 있는 꽃에서도 꿀과 밀랍을 거두지 않는가? 내가 본래적으로 성적인 일들을, 또는 성애의 표현 가운데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것들만이라도 내 서술에서 완전히 빼 버리려 한다면, 그것은 학문에 상당한 손해를 끼치는 일이 될 것이다. 우라니즘은 어쨌든 성 과학 특유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것을 다루는 일을 아예 그만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코르넬리우스 켈수스(『의학』 제6권 18, 1)와 함께 나는 말한다. “Difficilior haec explanatio est simul et pudorem et artis praecepta servantibus. Nec tamen ea res a scribendo deterrere me debuit”(수치심과 의술의 규범을 함께 지키려는 이에게 이 설명은 더욱 어렵다. 그러나 그 때문에 내가 쓰기를 단념해서는 안 되었다).

나는 학문적 교양을 갖춘 모든 사람을 위해 썼다. 이 대상을 더 깊이 연구하려는 사람을 위해서는 작은 글자로 빽빽이 찍은 긴 부분들을 마련했다.

V. 우르닝의 시. 이 책의 모든 쪽, 모든 문장에서 독자는 우르닝의 사랑에도 봄꽃을 피우는 저 고귀한 싹이 주어졌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그 사랑에서는 디오닝의 사랑시와 참으로 대등하게 나란히 서는 사랑시가 피어났다.

이런 가치가 깃들어 있기에 너희 학자들은 그 앞을 말없이 지나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시는 학자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겼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그 견본은 아래 § 113에, 더 긴 견본은 『아라 스페이』 § 41 앞의 표어에 있다)에 대해 어느 영국 학자는 밤에 등잔 아래서 골똘히 궁리한 끝에, 플라톤은 오직 비의(秘儀)의 뜻에서 알레고리로만 “소년”이라 썼을 뿐 언제나 “소녀”를 뜻했다는 결론을 짜냈다. (피치노의 『파이드로스』 라틴어 번역의 1840년경 새 판에 붙은 영어 머리말 참조.) 베르길리우스의 알렉시스에게 바친 목가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감정에서 우러난 것과는 거리가 먼, 그저 시작(詩作)의 기교적 연습으로 통한다. (이 대목에 대한 하이네의 주석 참조.) 아나크레온의 παίς παρθένιον βλέπων(처녀처럼 바라보는 소년)(아래 § 113)은 아테나이오스의 한 옛 발췌본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소녀로 위조되었다. 운율을 아무리 망가뜨리든 βλέπων은 sans phrase(군말 없이) βλέπονοα로 바뀌었다. (아테나이오스 13, 17에 대한 슈바이크호이저의 주석 참조.) 슈톨베르크 백작은 테오크리토스를 번역했다. 제12목가(그 첫 시구는 아래 § 113)에서 백작의 세심한 손은 제2의 창조주가 되어 아이타스를 리코리스로 바꾸어 만들었다. (회슬리 제1권 261쪽. 그는 그런 경건한 속임수의 예를, 그것도 이만큼 심한 예를 더 전하는데, 예컨대 번역자 레베크가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에 저지른 같은 짓이 그렇다. 그 사기는 물론 언제나 “도덕을 위해서” 저질러진다.) 이렇게 사람들은 우라노스의 화려한 나무에 탐욕스레 손을 뻗기를 꺼리지 않았다. 그 향기로운 꽃을 빼앗아 훔친 화관으로 디오네의 머리를 꾸미려고 그 나무에 손을 댔다. 다른 이들은 더 겸손하다. 그들은 위조하지도 않고 훔치지도 않는다. 그런 대목에 대해 그들은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다. “시인이 자신의 재능을 소녀가 아니라 소년에게 그토록 하찮게 낭비한 것은 진심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고대의 이 불멸의 시들을 자물쇠를 채워 가두어 아예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하는 편을 택했다.

여기 그 시들 가운데 몇 편을 견본으로 싣는다. 《네무스 사크룸》을 위한 내 서류철에서 가져온 것이다.

핀다로스. 아테나이오스(13, 76)는 “드높이 울리는”, “ο μεγαλοδνοτατο ς” 핀다로스의 단편 하나를 우리에게 전해 준다. 거기서 핀다로스는 아게실라오스의 아들인 테네도스의 젊은이 테오크세노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랑의 꽃은 내가 아직 젊었을 때 제때 땄어야 했다. Τας δε Θ εοξ ενο υ αχτινα ς οσσω ν μαρμαρι ξ οις δραχει ς, ος μη ποδ ω χυ μαινεται, εξ αδαμαντο ς ηε σιδαρο υ χεχσλχε υ ται μελαιναν ψυ χαν ψυ χρα φ λιγι, ‘그러나 테오크세노스의 눈에서 번쩍이는 빛살을 보고도 그리움에 거품 이는 물결처럼 넘실거리지 않는 자, 그의 검은 영혼은 단단한 무쇠나 강철로 차가운 불길에 녹여 부어 만든 것이다’, 그는 사랑의 여신에게 버림받았다. …. 아니면 그는 여자의 오만을 섬긴다(곧 여자를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젊은이들( παιδω ν)의 앳된 성숙을 바라볼 때면 벌의 밀랍처럼 녹아내린다. 그런데 테네도스에도 카리스(사랑스러움의 여신, 그라티아)가 머물렀으니, 그 여신이 아게실라오스의 아들을 길렀다.”

베르길리우스가 알렉시스에게. (『목가』 제2편.)

... Huc ades, o formose puer! Tibi lilia plenis
Ecce ferunt manibus nymphae, tibi candida naia
Pallentes violas. ...
Dulce satis humor, ... mihi solus Alexis.
... Aspice, aratra jugo referunt suspensa juvenci
Et sol crescentes decedens duplicat umbras:
Me tamen urit amor; tua nam vestigia lustro!
... quis enim modus adsit amori?

알렉시스에게.

“오, 내게로 오라, 아름다운 소년이여! 보라, 님프들이 두 손 가득 너에게 백합을 바치고, 눈처럼 흰 나이아스가 너에게 흰 제비꽃을 바친다. … 씨 뿌린 밭에는 이슬이 달고, 내게는 오직 알렉시스뿐. …. 보라, 황소들이 멍에에 매단 쟁기를 끌고 집으로 돌아가고, 지는 해는 길어지는 그림자를 곱절로 늘린다. 그러나 나는 사랑에 타오른다. 나는 네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으니. 사랑이 어떤 한계를 알겠는가?” (반 행 tua…는 여기서 자리를 옮겼고, Dulce…의 행은 『목가』 제3편에서 가져왔다.) “Splendidi versus!”(찬란한 시구로다!) 하고 하이네는 고개를 저으면서도 감탄하며 외친다.

이 알렉시스의 아름다움은 100년 뒤에도 여전히 찬미된다. 마르티알리스(8, 56).

Adstabat mensis domini pulcherrimus ille,
Marmorea fundens nigra Falerna manu,
Et libata dabat roseis carchesia labris,
Quae poterant ipsum sollicitare Jovem.

“주인의 식탁 곁에 그 더없이 아름다운 소년이 서 있었다. 대리석같이 흰 손으로 그는 검붉은 팔레르노 포도주를 따랐고, 장밋빛 입술로 한 모금 맛본 잔을 건넸으니, 그 입술은 유피테르마저 불타오르게 할 만했다.”

마르티알리스. 유피테르를 그린 그림 앞에서. 그러나 그림 속 유피테르는 번개를 들고 있지 않고, 그의 독수리가 그를 업고 하늘을 난다. 유피테르가 가니메데스를 사랑하기 시작하여 아직 그를 납치하기 전의 때를 그린 것이다. 이토록 짧은 말에 이토록 큰 아름다움을 담은 빼어난 시다! (마르티알리스 5, 56.)

Ad Jovis aquilam.(유피테르의 독수리에게)

Die mihi, quem portas? volucrum regina. »Tonantem.«
Quare nulla manu fulmina gestat? »Amat.«
Quo ca!et igne Deus? »Pueri.« Cur mitis aperto
Respicis ore Jovem? »De Ganymede loquor.«

유피테르의 독수리에게.

말해 다오, 누구를 업고 가느냐? 새들의 왕이여. “천둥 치는 이를.”
그런데 어찌하여 그는 손에 번개를 들지 않았느냐? “그는 사랑하고 있다.”
어떤 불에 그 신은 타오르느냐? “한 소년을 향한 불에.” 어찌하여 그리 부드럽게
부리를 벌린 채 그를 돌아보느냐? “가니메데스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고 있다.”

마르티알리스가 텔레스포로스에게. (11, 26.)

O mihi grata quies, o blanda, Telesphore, cura,
Qualis in amplexu non fuit ante meo!
Basia da nobis vetulo, puer, uda Falerno,
Pocula da labris facta minora tuis.

“오 나의 달콤한 안식이여, 오 나의 사랑스러운 근심이여, 텔레스포로스!
너 같은 이는 일찍이 내 품에 없었다.
입맞춤을 다오, 소년이여, 오래 묵은 팔레르노 술에 젖은 입맞춤을,
잔을 건네 다오, 네 입술로 반쯤 비운 잔을.”

마르티알리스가 디아두메노스에게 (3, 65.)

De pueri sui basiis.
Vinea quod spirat, cum floret cana racemis,
Quod qui Sicanias detinet hortus apes,
Gleba quod, aestivo leviter cum spargitur imbre,
Arbore quod verna luxuriosus ager:
Hoc tua, saeve puer Diadumene, basia fragrant;
Quid, si tota dares illa sine invidia?

디아두메노스의 입맞춤.

“포도밭이 송이마다 희뿌옇게(연둣빛으로) 꽃필 때 풍기는 향기처럼, 시칠리아의 벌들을 붙들어 두는 (꽃핀) 정원처럼, 여름비에 가볍게 젖은 흙이 풍기는 향기처럼, 봄에 나무들이 무성한 기름진 들처럼(곧 나무들이 움트고 잎을 낼 때처럼), 잔인한 소년이여, 오 디아두메노스여, 네 입맞춤은 그렇게 향기롭다. 네가 그것을 아낌없이, 온전히 다 내게 준다면 어떨까!” (Quod…와 Arbore…의 두 행은 내용이 꼭 같은 경구 11, 9에서 이리로 옮겨 온 것이다.) 사랑하는 소년의 입맞춤의 느낌을, 실제로 가벼운 비가 내린 직후 촉촉한 흙에서 피어오르는 독특하고 기분 좋은 냄새에 빗댄 것이 눈길을 끈다. 마르티알리스의 ad usum delphini(왕세자용) 판(파리, 1680) 편자 빈켄티우스 콜레소는 입맞춤에 관한 이 시에 자신의 지혜를 덧붙인다. “Dixisset haec poëta de puella convenientius.”(시인이 이것을 소녀에 대해 말했더라면 더 알맞았을 것이다.)

마르티알리스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연인 에아리노스의 이름에 대해 쓴 시. (에아리노스는 ‘봄에서 태어난’이라는 뜻이다.) (9, 11.)

Nomen, cum violis rosisque natum,
Hyblam quod sapit Atticosque flores,
Nomen nectare dulcius,
Quo mallent Cybeles puer vocari
Et qui pocula temperat Tonanti:
Quod si Parrhasia sonas in aula,
Respondent Veneres Cupidinesque.

에아리노스!

“오 이름이여, 제비꽃과 장미와 함께 태어나
히블라(히블라의 꽃들)와 아티카의 꽃 내음을 풍기는 이름,
넥타르보다 달콤한 이름,
키벨레의 신동(神童)도
천둥 치는 이에게 잔을 섞어 올리는 이도 그 이름으로 불리기를 바랄 이름이여.
네가 파라시아의(황제의) 궁전에 울려 퍼지면
베누스와 모든 사랑의 신들이 응답한다.”

티불루스. (I, 9.)

Ad puerum suum perfidum.
Quid mihi, si fueras blandos laesurus amores,
Foedera per Divos, clam violanda, dabas? ...
Ipse Deus somno domitos emittere vocem
Jussit et invitos facta tegenda loqui. ...
Admonui quoties: »Auro ne pollue formam! ...
Ure meum potius flamma caput aut pete pectus Ferro!« ...
Muneribus meus est captus puer! ...
Nunc pudet ad teneros procubuisse pedes. ...
Quin etiam attonita laudes tibi mente canebam;
At me nunc nostri Pieridumque pudet.
Illa velim rapida Vulcanus carmina flamma
Torreat et liquida deleat amnis aqua. ......
Tunc mihi jurabas, nullo te divitis auri
Pondere, non gemmis, vendere velle fidem.
Quin etiam flebas. At non ego fallere doctus
Tergebam humentes, credulus usque, genas.
Illis eriperes mihi verbis, sidera coeli
Lucere et puras fulminis esse vias!

신의 없는 연인 마라투스에게.

“달콤한 사랑을 해칠 뜻이 있었다면, 어찌하여 너는 몰래 깨뜨릴 맹세를 신들께 걸고 내게 했느냐? … 신께서 몸소 잠에 빠진 이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시고, 숨기려던 짓을 그들의 뜻을 거슬러 털어놓게 하신다. … 얼마나 자주 나는 너를 타일렀던가. ‘네 아름다움을 황금으로 더럽히지 마라!’ (꼭 같은 훈계를 오늘날에도 알바니아에서 사랑에 빠진 게그인은 연인에게 거의 시시때때로 한다. 아래 §§ 31, 32 참조.) ‘차라리 불길로 내 머리를 태우거나,

내 가슴에 칼을 겨누어라!’ … 선물이 내 소년을 사로잡았구나! … 이제 나는 네 여린 발 앞에 무릎 꿇었던 것이 부끄럽다. 그래, 나는 넋을 잃은 마음으로 너를 기리는 노래까지 불렀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나 자신과 그 노래들이 부끄럽다. 불카누스가 그 노래들을 거센 불길로 태우고, 강물이 흐르는 물로 씻어 없애 주기를. (그 바람은 안타깝게도 이루어졌다. 그 노래들은 더는 남아 있지 않다.) ……. 그때 너는 내게 맹세했다. 묵직한 황금을 주어도, 보석을 주어도 신의를 팔지 않겠노라고. 그래, 너는 울기까지 했다. 그리고 나는 속이는 재주를 모르는 채, 줄곧 곧이곧대로 믿으며 네 젖은 뺨을 닦아 주었다. 그 말로 너는 하늘의 별들이 빛난다는 것도, 번개의 길이 환하다는 것도 내게서 빼앗을 수 있었으리라!” (곧, 네가 마음만 먹었다면 무엇이든, 별들이 빛난다는 확신마저 내게서 빼앗을 수 있었으리라. 별들이 빛나지 않는다고 내게 아첨하여 인정하게 만들 수도 있었으리라. 그토록 네 말은 내 귀에 달콤했다.)

여기 우리 시대의 시도 두 편 싣는다.

나는 목마르다.

나는 꿈속에서 마신다
맑고 환한 물을.
그러나 마법의 샘가에서
내 목마름은 결코 가라앉지 않는다.

나는 네 사랑에 목마르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사로잡혀
고통과 경이의 나라로 끌려간다,
잔인하게 휘두르는 손에.

너는 내 그리움의 애원을
가엾게 여겨
네 눈길을 마시게 해 주었지.
그러자 나는 더욱 목말랐다.

네게는 원기를 돋우는 물이 있고,
너는 내 고통을 식혀 주었지.
그러나 너는 마법의 샘에서 물을 주니,
그 샘은 새로이 목마름만 채울 뿐.

(하노버, 1855년 4월. 하인리히 폰 St., G. d. c.에게.)

누마 누만티우스.

돌로레스.

너를 처음 본 것은
행복한 날, 다베른의 숲에서였다.
봄이 나를 꿰뚫고 불어오는 것을 느꼈고,
봄기운이 내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네 손을 꼭 잡았고,
네 눈에 매달렸다.
너는 그리도 사랑스러웠고, 그리도 아름다웠다.
네 눈길이 내 가슴을 뒤흔들었고,
내 가슴은 네 앞에서 기쁨에 떨었으며,
환희에 겨워 그만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저녁나절 고요한 숲에서
바람이 어린 가지 사이로 살랑인다.
입술과 입술이 서로를 찾아
말없는 입맞춤을 주고받았다.
한마디 말, 한마디 말이 나를 불붙였으니,
네 장밋빛 입술이 내게 일러 준 말이었다.
어찌하여 너는 그토록 다정하고 미더웠던가?
너는, 너는 그 말을 했다,
그 소중한 말을. 그리고 너는 그 말을 깨뜨렸다!
내가 그 말에 얼마나 굳게 기댔던가!

저녁 바람이 내 뺨에 입 맞추고,
나는 너도밤나무 숲을 거닌다.
언덕 비탈에 들장미가 피어
내 눈 속으로 미소 짓는다.
그러나 나는 어디를 걷는지 모르고,
그 장밋빛도 알아보지 못한다.
나는 네가 아직 내 것이라는 꿈을 꾼다.
알 수 없는 불안이 나를 몰아대고,
거친 갈망이 다시금
쉴 줄 모르는 가슴속으로 나를 몰아넣는다.

(아힘, 1851년 6월 17일. 경기병 안드레아스 F.에게.)

뷔르츠부르크, 1868년 7월 9일.

누마 누만티우스.

카를 하인리히 울리히스.

알림.

내게 무언가를 알리거나 묻고 싶은 분은 누구든 직접 (뷔르츠부르크로) 내게 연락하거나, 표제지에 이름이 실린 서점의 중개를 이용해 주기 바란다.

§ 1. 남자와 남자의 사랑 때문에 누군가를 중금고에 처넣거나 그의 명예를 빼앗는 것은 옳은가?

이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리려면 먼저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들이 타고난 성적 본성은 대체 어떤 성질의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지 않고서 내리는 판단은 모두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 색깔에 대해 내리는 판단과 같은 값어치밖에 없을 것이다.

곧 그 남자들이 타고난 성적 소질은 뿌리부터 독자적인 것이다. 그것은 일반에게 알려진 것과 너무나 달라서, 그들은 참으로 남자라고 불릴 수조차 없으며, 우리는 그들을 위해 다른 이름을 찾지 않을 수 없다. 성애의 본성에 대해 달리 알려진 모든 것에 이 성적 소질은 너무도 철저히 낯설어서, 낯선 행성에서 기적처럼 우리 지구로 떨어진 운석 앞에 서 있다고 믿을 정도다.

그렇다고 그것을 검토하는 일이 결코 끔찍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사람들이 경멸스러운 타락이라고 여기던 곳에서 위대한 창조주 자연의 손가락을 만나고, 이 수수께끼 같은 영역에서도 아주 뚜렷하고 규칙적인 자연법칙을 발견하고서 놀랄 것이다.

그러면 이 검토에 착수하기로 하자.

I. 태아가 남자로, 여자로, 그리고 남자를 사랑하는 우르닝으로 발달하는 과정[2]. 태아기의 원초적 자웅동체.

“Divisum genus est marium. Pars una puellis, Una viris genita est.”(남자의 족속은 나뉘어 있다. 한 무리는 소녀들을 위해, 한 무리는 남자들을 위해 태어났다.)[3]

§ 2. “남자가 몸에 젖꼭지를 달고 있다고 해서 박해받아 마땅하지 않듯이, 우르닝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를 사랑한다고 해서 박해받아 마땅하지 않다.”

그러나 어떻게 이토록 전혀 다른 것들을 한 줄에 세울 수 있는가? 그것들이 어디가 서로 닮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들을 서로 견주다니, 얼마나 터무니없는가!

그렇게 터무니없지만은 않다. 너희는 묻는다.

“남성의 표지를 지닌 사람이 어떻게 여자처럼 남자를 사랑할 수 있는가?”

나는 그 물음을 되돌려 이렇게 묻는다.

남성의 표지를 지닌 사람이 어떻게 여자처럼 몸에 젖꼭지를 달고 있을 수 있는가?

그러니 우리는 갑자기 양쪽 모두 자연의 수수께끼 앞에 맞닥뜨린 셈이다.

나는 양쪽 모두에서 그것을 풀어 보려 한다. 곧 두 현상이 꼭 같은 방식으로 원초적 자웅동체에서 비롯되며, 그러므로 둘 다 꼭 같은 방식으로 자연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참되고 순수한 자연의 현상임을 보여 주겠다.

원초적 자웅동체가 무엇인지는 곧 보게 될 것이다.

§ 3.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어머니 몸속에서 생존하는 처음 3–4개월 동안 소년도 소녀도 아니고, 반은 남성이고 반은 여성인 생식기를 지닌 자웅동체의 중간 생물이다. 그는 태아기의 원초적 자웅동체다.[4]

말하자면 낯선 손이라 할 만한 것, 곧 두 번째 창조주, 변형하는 자연이 끼어들어야 비로소 원초적 자웅동체에서 소년이나 소녀가 빚어진다. 그것도 이 자연이 어린 몸의 발달에 그야말로 억제하듯, 거의 파괴하듯 개입함으로써 비로소 그렇게 된다.

나는 소년이나 소녀라고 했지 그 밖의 어떤 생물이라고 하지 않았다. 다만 이것은 두 번째 자연이 개입할 때 규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경우의 이야기다. 두 번째 자연은 모든 경우에 꼭 그렇게 하기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불규칙하게 일을 처리할 때 두 번째 자연은 실로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만들어 낸다.

변형하는 자연의 A. 규칙대로의 처리. 원초적 자웅동체가 소년과 소녀로 변형되는 과정.

§ 4. 원초적 자웅동체 안에는 성의 싹 4개가 잠들어 있다. 몸의 싹 3개와 몸 아닌 싹 1개다.

a) 뿌리부터 남성적인 생식기의 구성 부분. 남성의 음경(Membrum).

b) 뿌리부터 여성적인 구성 부분. 자궁(Uterus)을 갖춘 강(腔) 형성, 그리고 젖을 먹이는 기관, 곧 젖샘과 젖꼭지.

c) 뿌리부터 남성적이지도 여성적이지도 않고 성이 없는 구성 부분. 그러나 이것은 변형하는 자연에게서 남성적 발달이나 여성적 발달을 받는다. 교과서에서는 “볼프체(Wolf’sche Körper)”라 부르는데, 나라면 “원(原)고환”이라 부르고 싶다.

d) 사랑의 충동의 몸 아닌 싹. 이것도 뿌리부터 성이 없다.

이제 끼어든 두 번째 자연은 뿌리부터 성을 띤 두 싹 a와 b 가운데 언제나 하나는 더 발달시키고, 다른 하나는 그야말로 억누른다. 곧 그 발달을 가로막는다.

그와 달리 뿌리부터 성이 없는 두 싹 c와 d, 곧 몸의 싹 셋 가운데 셋째와 몸 아닌 싹에는 한쪽으로 치우친 발달, 곧 남성적 발달이나 여성적 발달을 준다.

§ 5. 그러므로 정상적인 처리에서 두 번째 자연은 다음과 같이 일을 처리하거나,

1) 뿌리부터 여성적인 구성 부분을 억누르는데, 그때 특히 강 형성도 닫아 버린다.

2) 뿌리부터 남성적인 구성 부분, 곧 음경은 발달시킨다.

3) 뿌리부터 성이 없는 구성 부분에는 남성적 발달을 준다. 곧 원고환을 남성의 고환으로 발달시킨다.

4) 끝으로 뿌리부터 역시 성이 없는, 몸 아닌 사랑의 충동의 싹에도 남성적 발달을 준다. 곧 여성을 향하는 방향을 준다. 더 엄밀히 말하면, 나중에 바로 이 방향으로 깨어날 소질을 준다. 곧 성숙이 진행되는 시기에, 그것도 그 시기의 맨 처음 전조 때부터 이미 그렇게 깨어날 소질이다.

이 경우 원초적 자웅동체는 소년으로 변형된다.

아니면 두 번째 자연은 네 가지 모두에서 거꾸로 처리한다. 특히 성이 없는 원고환을 여성의 난소로 발달시킨다. 그러면 원초적 자웅동체에서 소녀를 빚는다.

§ 6. 소견 1. 사랑의 충동의 싹은 물론 아직 가장 깊은 껍질 속에 잠들어 있다. 그러나 그 맨 처음 시초는 이미 태아 안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나중에 바깥에서 안으로 들여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밖의 근거는 『포르마트릭스』 § 89 참조.)

소견 2. 그와 달리 두 번째 자연이 사랑의 충동의 싹을 남성적으로 발달시킬지 여성적으로 발달시킬지 하는 결정은, 보아하니 원초적 자웅동체의 몸의 성의 싹 셋의 운명에 대한 결정보다 더 나중의 어느 시기에야 이루어지며, 이 결정과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이루어진다. 그와 달리 이 몸의 세 부분의 운명에 대한 결정들은 서로 언제나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 7. 그런데 모든 소년, 모든 남자에게는 한때의 자웅동체 모습의 흔적이 평생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게 남는다. 그가 한때 반은 소녀였다는 것을 일깨우며, 말하자면 자기보다 더 자웅동체에 가까운 본성들 위에 우쭐대지 말라는 경고로서 남는 것이다.

a) 겉으로는 앞에서 말한 여자의 분명한 한 조각, 곧 젖꼭지. 그 자연의 목적은 오로지 여성적인 것, 곧 갓난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것이며, 남자에게서는 그저 발달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뿐이다.

b) 겉으로는 또 봉선(縫線, Naphe)[5]. 곧 남성 생식기의 아랫면을 가운데 선을 따라 거의 셔츠의 솔기처럼, 좌우 두 조각을 말하자면 꿰매어 붙인 흉터 같은 줄이다. 그것은 한때의 여성적 강 형성을 닫은 자리가 바깥에서 보이게 남은 것으로, 두 번째 자연이 그 양쪽을 말하자면 꿰매거나 붙여 놓은 것이다.

c) 속으로는 똑같이 분명한 여자의 한 조각, 곧 그저 발달하지 않은 채 남았을 뿐인 진짜 자궁 [작은 자궁, utriculus masculinus(남성 소낭) 또는 vesicula prostatica(전립선 소포), sinus pocularis(잔 모양 동)라고도 부른다][6]

거꾸로 모든 소녀, 모든 여자에게는 한때 반은 남성이었던 흔적이 음핵(클리토리스)에 남는다. 그것은 바로 원초적 자웅동체의 남성 음경이 두 번째 자연의 변형하는 손에 억눌린 결과 발달이 뒤처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변형하는 자연의 B. 예외적인 처리. 우르닝과 우르닝긴으로의 변형.

§ 8. 두 번째 자연은 때때로 불규칙한 처리를 한다. 그것은 바로 원초적 자웅동체의 몸의 성의 싹 셋의 앞날의 운명과, 다른 한편 몸 아닌 싹의 운명을 결정할 때의 저 독립성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예외적인 처리에서 두 번째 자연은 다음과 같이 처리하거나,

a) 원초적 자웅동체의 몸의 성의 싹 셋은 그것을 소년으로 변형할 때와 꼭 같이 다룬다. 그러니까 특히 성이 없는 원고환을 남성의 고환으로 발달시킨다.

b) 그와 달리 몸 아닌, 뿌리부터 성이 없는 사랑의 충동의 싹은 소녀로 변형할 때처럼 다룬다. 곧 그것에 여성적 발달을, 때가 되면 남성을 향해 깨어날 소질을 준다.

이 경우 원초적 자웅동체는 우르닝으로 변형된다. 여성의 사랑의 충동을 타고난 비본래적 남자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는 testiculatus(고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내적 충동에 따라 여자가 아니라 오직 (젊은) 남자에게만 끌린다. 우르닝. 남성 우르닝.

아니면 두 번째 자연은 양쪽에서 똑같이, 그러나 거꾸로 처리한다. 그러면 원초적 자웅동체에서 우르닝긴을 빚는다. 곧 남성의 사랑의 충동을 타고난 비본래적 여자로서, 성적으로는 오직 (젊은) 여자에게만 끌린다. 여성 우르닝. 남성 우르닝의 짝.

소견. 병적인 것이나 불구인 것은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남성 우르닝에게서도 여성 우르닝에게서도 헛되이 찾게 될 것이다. 둘 다 비록 불규칙하기는 해도 철저히 건강한 자연의 발달 과정의 열매다.

변형하는 자연의 C. 실패한 처리. 태아가 자웅동체로 발달하는 과정.

§ 9. 그러므로 두 번째 자연은 언제나 원초적 자웅동체의 생식기 가운데 뿌리부터 남성적인 구성 부분이나 뿌리부터 여성적인 구성 부분을 억누르겠다는, 곧 음경을 억누르거나 아니면 자궁 등등을 갖춘 강 형성을 억누르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따금 우리는 자연의 이 계획이 완전히 실패하거나 불완전하게만 성공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태아 안에서는 서로 맞서는 이 두 부분, 곧 음경과 자궁을 갖춘 강 형성이 본래의 성질에 이렇다 할 개입을 받지 않은 채 많든 적든 방해받지 않고 계속 자란다. 그러면 태아에서 이른바 자웅동체가 생겨난다.

그와 달리 태아의 성이 없는 고환(Testikel)은 아주 규칙대로 남성의 고환이나 여성의 난소로 발달한다. 그러므로 고환이 있느냐 난소가 있느냐에 따라 남성 자웅동체와 여성 자웅동체를 구별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두 번째 자연이 마침 예외적인 처리를 하지 않은 경우에만, 곧 사랑의 충동을 생식샘과 같은 방향으로 발달시킨 경우에만 그렇다. 반대 방향으로 발달시킨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예컨대 두 번째 자연이 생식샘을 남성의 고환으로 발달시키면서 사랑의 충동에는 여성적 방향을 주었다면, 당연히 순수한 남성 자웅동체가 아니라 우르닝 자웅동체가 생겨난다.

그러므로 자웅동체는 네 부류로 나뉜다.

1) 자웅동체 남자, 2) 자웅동체 여자, 3) 자웅동체 우르닝, 4) 자웅동체 우르닝긴.

그러므로 자웅동체성은 어느 경우에나 뿌리부터 남성적인 부분과 뿌리부터 여성적인 부분에만 있다.

소견. 자웅동체들은 대개 몸에 무언가 병적이거나 불구인 데가 있지만, 그것은 국소적, 곧 생식기에만 있다. 그러나 억제의 실패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생식샘에서도 같은 것이 발견된다. 예컨대 자웅동체 남자와 자웅동체 우르닝에게서는 고환이 눈에 띄게 작은 채로 남는 것이 보통이다.[7]

II. 발달하는 우르닝의 몸과 영혼의 서로 맞서는 성의 힘. 한쪽이 다른 쪽의 영역으로 넘어 들어가는 현상.

§ 10. 우르닝에 머물러 보자. 우르닝에게서는 몸의 남성에 그와 반대되는 영혼의 성이 맞서 있다. 그것도 어느 정도는 적대적으로, 어쨌든 조화 없이 맞서 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서 성을 이루는 부수적인 특징들은 어떠한가? 이것들, 곧 성의 부차적 요소와 세부 사항들은 그들에게서 남성적인가, 여성적인가? 그것들은 몸의 성을 따르는가, 영혼의 성을 따르는가?

관찰자는 이렇게 답한다. 나머지 몸의 외양, 그 표정, 특히 얼굴의 표정은 흔히 여성적이어서 몸의 성과 어긋나고 영혼의 성을 따른다. 마찬가지로 거꾸로 영혼의 여러 부분, 곧 마음의 외양, 아니 사랑의 그리움의 방식 자체, 특히 성적 욕구의 방식은 우르닝에게서 흔히 철저히 남성적이어서, 그의 영혼의 여성적 성과 철저히 어긋나고 몸의 성과 조화를 이룬다.

§ 11. 우르닝에게서는 발달기에(어머니 몸속에서뿐 아니라 태어난 뒤에도) 언제나 몸의 성은 독자적인 생명력으로서 영혼의 영역으로 넘어 들어가려 하고, 영혼의 성 역시 똑같이 독자적인 힘으로서 몸의 영역으로 넘어 들어가려 하는 것 같다. 그때 힘과 힘이 싸움을 벌여, 그 싸움을 통해 한쪽 힘은, 그것이 몸의 성의 힘이든 영혼의 성의 힘이든, 승리한 상대에게 정복욕을 꺾여 경우에 따라서는 완전히 마비되고 억눌려 가장 깊은 핵심으로 완전히 쫓겨 들어가는 것 같다. 다른 경우에는 서로 맞서는 두 성의 힘이 벌이는 이 충돌의 결과가 서로 스며드는 것에 그치는데, 대개는 어느 한쪽이 눈에 띄게 우세하다.

§ 12. 이 충돌의 규칙적인 결말로서, 사람들은 아마도 두 맞선 힘이 그 영역들의 순수한 경계선을 따라 나뉘는 것을 상정하고 싶어질 것이다. 곧 몸의 외양, 다시 말해 얼굴 표정과 몸의 움직임, 몸짓과 거동은 순전히 남성적이고, 사랑의 그리움의 방식 등등은 순전히 여성적이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 것 같다. 충돌은 저 경계선에 털끝만큼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다. 몸과 영혼이 대체로 서로 그토록 긴밀하게 결합해 있다는 것이, 영역에 따른 분리가 촉진되기는커녕 어쩌면 오히려 가로막히는 까닭인 것 같다. 그러므로 우르닝에게서는 경계선이 언제나 뛰어넘어져 있고, 두 영역은 따라서 많든 적든 서로 일치한다. 예컨대 영혼의 영역이 여성적인 사람에게서는 몸의 영역도 여성적일 것이다.[8] [9] 영혼의 영역이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이 서로 스며든 상태이거나 나란히 있는 상태인 사람에게서는 몸의 영역도 그와 같을 것이다.

§ 13. 남자와 여자가 발달할 때에는 사태의 본성상 그러한 싸움이 일어날 수 없다. 여기서도 몸의 성의 힘과 영혼의 성의 힘은 따로 존재하지만 적대적으로 맞서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기서는 둘 다 남성적이거나 둘 다 여성적이어서, 언제나 손잡고 함께 작용하여 원초적 자웅동체의 잔재로서 아직 맞서 있는 요소를 뿌리 뽑으려 한다. 그런데도 힘을 합쳐도 이 뿌리 뽑기는 흔히 매우 불완전하게만 성공한다. 그래서 본래적 남자, 곧 영혼과 몸 모두 남성인데도 여성적인 몸의 외양(여성적인 거동 등)과 여성적인 온유함을 지니고, 젊어서는 소녀 같은 겉모습을 한 남자들이 있다. 거꾸로 남자의 외양과 기질과 남성적 용기를 지닌 여자들이 있다. 물론 이런 여성적인 남자들과 남성적인 여자들이 극단적인 정도로 나타나는 것은 지극히 드물다.[10]

III. 우르닝의 두 주요 유형: 남성형 우르닝과 여성형 우르닝. 그들의 서로 반대되는 성 본성.

§ 14. 여기서 이제 우르닝의 두 주요 부류가 나오며, 그 둘 사이에는 아주 규칙적인 중간 단계의 계열이 있다.

a) 남성형 우르닝: 몸의 외양, 곧 움직임·몸짓·거동의 전체적 표현, 기질, 사랑의 그리움과 성적 욕구의 방식이 모두 남성적이다. 그러니까 여성적인 것은 영혼의 맨 성뿐이며, 사랑의 그리움의 방향만이 여성적이다. 곧 남성을 향해 있다.

b) 여성형 우르닝: 앞에서 든 것들이 모두 여성적이다. 그러니까 남성적인 것은 오직 몸의 성 하나뿐이다.

§ 15. 여성형 우르닝에게서는 움직임, 몸짓, 거동, 자세, 걸음걸이가 아주 틀림없이 철저히 여성적이어서, 진짜 여자와 꼭 같다. 여성형 우르닝을 적대한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이 확연히 여성적인 외양을 병이라 불렀다. νουσος δηλεια(여성의 병), 곧 “여자의 병”이다. 그래서 유베날리스는 (『풍자시』 제2편) 이렇게 말한다.

Hunc ego fatis
Imputo, qui morbum vultu incessuque fatetur.

(“이 사람을 나는 운명 탓으로 돌린다[곧 그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얼굴과 걸음걸이로 이 병을 고백한다.”) 그들이 좋아하는 일도 여성적이다. 예컨대 뜨개질, 바느질, 수놓기, 화환 엮기, 심지어 요리까지. 옷차림과 이름을 고르는 것도 그렇다.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언제나 완전히 여자처럼 입고 싶어 한다. 그럴 수 없으니 그들은 가면무도회나 “entre nous”(우리끼리)의 은밀한 모임 같은 개별적인 기회를 잡는다. 『빈딕타』 § 10에서 그 자살 이야기를 한 데사우의 극단적인 여성형 우르닝 블랑크는 이스라엘 사람이었는데, 해 질 녘에 완전히 귀부인 차림을 하고 토르가우의 성벽 산책로를 거닐곤 했다. 어느 날 저녁 그는 그 차림 그대로 그곳에서 체포되기까지 했다. 빈의 한 여성형 우르닝은 내게 자기 사진을 보내왔는데, 나는 거기서 여자 옷을 입은 젊은 남자를 보았다. 그들끼리는 서로를 언제나 여자 이름으로만 부른다. 예컨대 앙투아네트, 마리헨, 헤르미네, 나탈리, 카티. 역시 극단적인 여성형 우르닝이던 안토니누스 헬리오가발루스 황제는 친밀한 모임에서 자신을 “바시아나”, “domina”(마님)라고 부르게 했다. 앞에서 말한 블랑크는 대담하게도 관청에 정식으로 여자 이름을 쓰고 여자 옷을 입게 해 달라는 허가를 청원했다. 청원은 기각되었다. (『인클루사』 § 18.) 나는 duchesse(공작 부인) 하나와 princesse(공주) 하나, 그리고 Comtesse(백작 부인)만 해도 둘을 아는데, 그 가운데 실제로 귀족인 것은 princesse 하나뿐이다. 그는 거위 아가씨들의 말로도 자기 서열을 내세워야 했던 것이다! 한낱 baronne(남작 부인)으로 만족할 사람은 그들 가운데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한 Comtesse는 내가 자기를 그 마땅한 영광의 칭호 없이 기록했다고 대놓고 언짢아했다. 진짜 여성형 우르닝은 산책로에도 살롱에도 화장하지 않고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교태를 부리는 데서는 가장 정복욕 강한 여자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파리와 런던에는 젊고 예쁜 여성형 우르닝들이 떼 지어 교태를 부리며 대로와 산책로를 돌아다닌다. 그곳 사람들도 이를 잘 안다. 런던에서는 세간에서 그들을 “Mary-Anns”(메리앤들, 마리아네나 안나마리아들)라고 부른다. 런던에서 누가 내게 신문 한 부를 보내왔는데, 거기에는 그곳에서 여성형 우르닝 두 사람을 상대로 열린 재판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 재판에서 증인 실링퍼드 경사는 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being then painted and powdered, and difficult to tell, whether they were males or females.”(그때 그들은 연지를 바르고 분을 칠해,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에 따르면 그 가운데 한 사람인 헨리 몰트래버스는 “Kate Smith”(케이트 스미스)로 불렸다. 여성형 우르닝다운 일련의 특징과 장면은 『인클루사』와 『포르마트릭스』에 묘사해 두었다. 고대 저자들 가운데서는 특히 람프리디우스, 카시우스 디오, 헤로디아노스가 저 안토니누스 헬리오가발루스를 아주 세세한 데까지 더없이 놀라운 특징들로 묘사한다. 유베날리스도 한 여성형 우르닝을 묘사하는데, 그는 로마 귀부인처럼 우아하게 방석에 몸을 늘어뜨린 채 생일 손님들을 맞으며, 그들에게서 다른 무엇보다 작은 양산, umbella(양산)를 선물로 받는다.

§ 16. 여성형 우르닝과 그에 가까운 중간 단계들은, 그 사랑의 동경이 여성적인 까닭에 – 여자와 꼭 마찬가지로 – 뚜렷이 남성적인 모습의 남자들, 수염이 나고 팔다리가 굳센 남자들에게 (그리고 – 이것을 빠뜨릴 수 없는데 – 국부가 남성적으로 크게 발달한 남자들에게) 이끌린다.[11] 여리고 부드러운 “젊은이”는 그들을 끌어당기지 못한다. 남독일 말로 하자면 그들을 자극하는 것은 오직 “다부진 사내”뿐이다. 그들 본성의 여성성을 이보다 더 결정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를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여성형 우르닝을 사로잡는 이 “다부진 사내”를 가리켜 갈리아인과 로마인은 “드라우쿠스(draucus)”라는 고유한 낱말을 가지고 있었다.

§ 17. 반면에 남성형 우르닝과 그에 가까운 단계들은, 남성적으로 느끼는 그 방식 때문에 거꾸로 여리고 부드러운 남자의 모습만을, 수염 없고[12] 매끈한[13], 더러는 아예 소녀 같은 모습만을 사랑한다. 오늘날의 남성형 우르닝이라면 누구나 그와 함께 느낄 말이다. 티불루스를 어느 정도까지 우르닝에 넣어야 할지는 아래 § 28에서 다룬다. – 튀르크의 남성형 우르닝들도 “대개 콧수염이 나기 시작하면” 애인을 떠나보낸다. 『아라 스페이』 VIII쪽.

Sit nobis actate puer, non pumice laevis,
Propter quem placeat nulla puella mihi.
(내게는 속돌로 문질러서가 아니라 나이 덕에 매끈한 소년이 있기를, 그 때문에 어떤 소녀도 내 마음에 들지 않을 그런 소년이.)

다부진 사내도 아니고 드라우쿠스들도 아니고, 오직 젊은이들, 오직 푸에리(pueri)다.[14] 로마의 남성형 우르닝들은 특히 길고 부드러운 곱슬머리를 한 젊은이, 곧 푸에리 코마티(pueri comati, 머리채 긴 소년들)를 사랑했다.[15] 자기가 애인으로 삼고 싶을 법한 젊은이를 마르티알리스는 아름답고도 생생하게 그려 낸다(4. 42).

Sit nive candidior;
Lumina sideribus certent, mollesque flagellent
Colla comae;
Paestanis rubeant aemula labra rosis.
(눈보다 더 희기를. 두 눈은 별들과 다투고, 머리채는 부드러운 목덜미를 찰랑찰랑 치기를. 입술은 파이스툼의 장미와 겨루듯 붉기를.)

한 근래의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 이 방석을 보라. 여기 나는 앉으리라,
나의 금발의 사랑하는 소년과 함께.
여기 금 술잔에 반짝이는 포도주를 보라,
이 잔으로 나는 그와 함께 마시리라,
그의 입술에서 나는 기운을 얻으리라!”

§ 18. “그것 봐라!” 하고 누군가 내게 던질지도 모른다. “너희는 소녀 같은 젊은이를 사랑하지 않느냐! 그러니 너희는 결국 남자다, 다만 타락한 남자일 뿐이다. 우라니즘 전체가 타락에 지나지 않는다. 네가 영혼의 여성적 성(性)이니 뭐니 하고 지어내는 것은 몽상이다. 그것은 바로 네 자신의 이 고백으로 분명히 반박된다. 소녀 같은 젊은이를 사랑하는 자의 성은 온전히 남성적이지 않은가?”

나는 반문하겠다. “아무리 소녀 같은 젊은이의 몸이라도, 그것은 무엇인가? 여자인가, 남자인가? 그런데 남자를 사랑하는 자의 성은 남성적인가, 여성적인가?”

그리고 너희 참된 남자들 가운데 누가, 그 젊은이가 아무리 소녀 같다 한들, 젊은이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우르닝의 사랑은 여기서 남성적인 색조를 띨 뿐이다(남성적인 기운이 살짝 서려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것은 여기서도 여성적인 사랑이다. 그러므로 남성형 우르닝의 사랑이란 남성적 색조를 띤 여성적 사랑이다. (위 § 13에서 보았듯이)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남성적 색조를 띤 여성적 사랑을 하는 여자들도 있어서, 그들 역시 소녀 같은 젊은이, 적어도 부드러운 젊은이에게 이끌린다. 그래도 그들의 사랑은 언제나 여성적인 사랑으로 남는다. 그러니 남성형 우르닝이 있고 그들이 소녀 같은 젊은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내 이론을 공격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남성의 몸 안의 여성적 영혼이라는 이론이 옳다면 여성형 우르닝만 있을 수 있을 것이요, 어떤 우르닝도 소녀 같은 남자의 모습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오류다. 가장 남성적인 남성형 우르닝도 남성의 몸 안에 여성적 영혼을 보여 준다. 그가 소녀를 사랑하지 않고 젊은 남자의 몸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적 변이들의 사슬에서 남성형 우르닝은, 그 반대편인 여성형 우르닝과 꼭 마찬가지로, 바로 없어서는 안 될 하나의 고리를 이룬다.

§ 19. 아나크레온과 티불루스의 우르닝적 연애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Ω παί, παρδένιον!
(오, 소녀 같은 소년이여!)

그리고

Virgineus teneras stat pudor ante genas(처녀 같은 수줍음이 그의 여린 뺨 앞에 서 있다). 그러므로 이 둘은 엄밀히 글자 그대로 “처녀 같은” 또는 “소녀 같은”으로 옮겨야 한다. 예전에 나 자신이 그랬듯이(『아라 스페이』, 「안티노우스」 III) “순결한”이라는 말로 도피하는 것은 전혀 허용될 수 없다. 나는 단호히 내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

자기를 끌어당긴 아름다운 암피온에 대해 마르티알리스는 대놓고 이렇게 말한다.

Amphion potuit puella nasci.
(암피온은 소녀로 태어날 수도 있었다.)

보헤미아에 사는 나의 한 우르닝 친구(아래 § 30 참조)는 자기를 사로잡은 한 학우에 대해 편지에서 거듭 이와 아주 비슷하게 말한다.

“그는 소녀 같은 아름다움을 지녔다. …. 그의 걸음걸이는 처녀 같았고, 몸매는 여렸다. ….”

§ 20. 그러므로 여성형 우르닝을 사로잡는 것은 남자의 더 굳센 한창때뿐이고, 남성형 우르닝을 사로잡는 것은 더 여린 젊은이의 나이뿐이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남성형 우르닝의 젊은이는 여성형 우르닝의 “다부진 사내”보다 어리고, 드라우쿠스는 푸에르(puer)보다 나이가 많다.

반면에 사랑하는 자의 나이가 바뀌면서 그 사랑의 대상이 더 굳센 쪽과 더 여린 쪽 사이를 오가는 일은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이는 앞으로 더 관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 21. 중간형 우르닝 – 남성형 우르닝과 여성형 우르닝을 양 끝으로 하는 사슬의 중간 고리들 – 은 내가 즐겨 “총각”이라고 부르는 젊은 남자들을 사랑한다. 젊은이와 “다부진 사내”[16] 사이, 푸에르와 드라우쿠스 사이에서 총각은 그 중간선 위에 선다. 그는 열여덟에서 스물세 살로, 굳세고도 싱싱하게 피어난 몸매에 얼굴과 뺨과 입술과 눈까지 아름답다.

“제비꽃 같은 눈길의 금발 총각아,
짙푸른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그 눈길이여,
너는 내게서 안식을 빼앗아 갔다.
내 평화를 내게 돌려다오!”

중간형 우르닝은 수염 없는 매끈함에는 대개 냉담하고, 수북한 수염에는 오히려 거부감을 느끼지만, “작은 수염”에는, 금빛이든 검은빛이든, 갓 돋아나는 작은 수염에는 아주 강하게 끌린다.

“턱과 도톰한 입술에서 검은 솜털이 피어나,
자줏빛 붉은 입가를 촘촘히 두르고 있네.”

비슷한 예는 플라텐[17]의 빼어난 우르닝적 연애시들에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남성형 우르닝의 특징과 여성형 우르닝의 특징이 아주 다양하게 섞인 모습들을 만난다.

§ 22. 그러므로 우르닝을 끌어당기는 것은 아주 여러 가지다. 거의 농담에 가까운 그의 제4 비가에서, 젊은 남자들이 우르닝에게 주는 인상에 대해 무의식적인 지혜를 가득 담아 이렇게 말할 때, 티불루스는 가장 엄밀한 자연과학적 진리를 맞힌다.

Hic placet, angustis quod equum compescit habenis;
Hic placidam niveo pectore pellit aquam;
Hic, quia fortis adest audacia, cepit; at illi
irgineus teneras stat pudor ante genas.

(이 사람은 고삐를 바짝 죄어 말을 길들이기에 마음에 든다. 저 사람은 (헤엄치며) 눈처럼 흰 가슴으로 잔잔한 물을 가르기에 마음에 든다. 이 사람은 굳센 용기가 깃들어 있기에 사로잡고, 저 사람은 여린 뺨 앞에 처녀 같은 수줍음이 서 있기에 사로잡는다.”)

진실로, 이보다 더 아름답게, 그러면서도 이보다 더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이것을 말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18]

§ 23. 남성형 우르닝과 여성형 우르닝이 성적으로 욕구하는 방식의 대립에 대해서는 이미 대략 언급했다. 중간 단계들은 여기서도 아주 다양한 혼합을 보여 준다. 예컨대 성실한 연구자 카스퍼에게는 수수께끼 중의 수수께끼처럼 보였던(『임상 단편집』 35쪽) 이중의 현상이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중간 단계들의 본성과, 앞에서 말한 서로 반대되는 성의 힘들이 서로 스며드는 일로 아주 간단히 설명된다.

§ 24. 남성형 우르닝과 여성형 우르닝은 대체로 서로 양극단으로 마주 서 있다. 그들은 남자와 여자 자신이 서로 다르고 서로 마주 서 있는 것과 비슷하게 서로 다르고 마주 서 있다. 남자와 여자 사이와 꼭 마찬가지로, 사내다운 남성형 우르닝과 소녀 같은 여성형 우르닝 사이에도, 양쪽이 저마다 알맞은 나이일 때에는, 완전한 상호 성적 끌림이 있다.[19]

§ 25.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흥미를 느낄 자연의 이 신비로운 작용의 영역 전체를, 지금까지 이론은 “자연에 반하는 것들”이라는 이름으로, 실무는 형벌로 간단히 처리해 버렸다! 이것이 우리 법 앞에 놓인, 베일에 가려진 자연이다! 마녀사냥의 전성기 이후 이른바 진보의 두 세기가 꼬박 흘렀다. 우리 세기는 자연에 대한 그 박해를 부끄러워하지 않겠는가?[20]

물론 “학문”의 사람들이 우르닝의 사랑에 대해 내놓는 것이 예컨대 로스히르트가 한 말(『형법』, 1821, § 219) 같은 것뿐인 한, 누가 법을 탓하려 하겠는가.

“인간 본성의 타락한 충동들을 알게 되는 것은 보람 없고 소름 끼치는 일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타락이라고 여겨지는 것 속에서 참되고 순수한 자연을 알아보는 것, 그리고 자연의 손가락이 여기서도 어떻게 작용했으며 어떤 아주 분명하고 규칙적인 자연법칙과 규칙을 주었는지 깨닫는 것은 매우 보람 있는 일일 것이다.

§ 26.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이 섞인 이 모든 변이, 이 모든 혼합 본성들은 오로지 한 가지 까닭으로 존재한다. 곧 자연이 모든 성적 단계들을,

남자, 여자, 우르닝, 우르닝긴, 자웅동체를, 그 모든 하위 종류와 단계와 함께, 하나의 같은 태아적 원초적 자웅동체에서 빚어내기 때문이다. 이 원초적 자웅동체는 온갖 종류의 싹의 형태로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동시에 제 안에 지니고 있다.

자연이 사람을 만들 때, 저 로스히르트 씨 같은 부류의 남자들이 자연에게 틀림없이 지시하고 싶어 할 방식대로, 곧 남자는 그 태아적 존재의 첫 맥박부터 남자로, 여자는 여자로 빚어내는 방식대로 일했다면, 이 변이들은 분명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랬다면 물론 너희 남자들은 여성적인 젖꼭지도, 한때의 여성적 공동(空洞) 형성을 떠올리게 하는 봉선(縫線)도, 그 난처한 자궁도 지니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랬다면 어떤 남성의 몸 안에도 여성적인 방향의 사랑의 동경이 살지 않을 것이다.[21]

IV. 우라노디오닝. 관능적 사랑의 충동과 몽상적 사랑의 충동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따로 나타나는 경우.

§ 27. 자연은 모든 성적 변이를 하나의 같은 원초적 자웅동체에서 만들어 내고, 그 안에는 실제로 온갖 종류의 싹의 형태로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이 동시에 들어 있으므로, 자연이 그 원초적 자웅동체에서 우라노디오닝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곧 몸으로는 남성이면서, 젊은 남자에 대한 사랑과 여자에 대한 사랑을 동시에 타고난 개인들이다(『포르마트릭스』 § 95 이하).

그리고 이들은 두 종류, 곧 결합형과 분리형으로 생각할 수 있다.

§ 28. 결합형 우라노디오닝. 이들은 여리고 몽상적인 사랑과 관능적인 사랑을 둘 다 두 방향으로(또는 말하자면 정해지지 않은 방향으로), 곧 남성 개인과 여성 개인 양쪽을 향해 느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본성에 대해서 나는 아직 이렇다 할 확실한 지식을 얻지 못했다. 이들은 언제나 남성형 우르닝인 것 같다. 이를테면 호라티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Mollibus in pueris
Aut in puellis urere.
(여린 소년들에게든
소녀들에게든 불타오르다.)

실제로 여기에 속하는 듯한 사람들은 카툴루스, 호라티우스, 티불루스, 네로,[22] 하피즈[23], 바이런 경이다. 1865년 7월 쿠프슈타인 근처의 한 티롤 마을에서, 그곳 농가 총각 하나가 술집의 흥겨운 자리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젊은 푸주한 도제를 두고 다음과 같은 “슈나다휘펠(Schnadahüpfl)”을 불렀다.

“그 푸주한 녀석은 배짱이 두 가지라네,
하나는 사내들한테, 또 하나는 아낙네들한테!”

§ 29. 분리형 우라노디오닝. 이들은 젊은 남자에게는 몽상적이고 여린 사랑만을 느낀다. 그들을 성적으로도 만진다는 생각 앞에서는, 비우르닝과 똑같이, 단호한 내적 혐오(Horror)에 밀려 뒷걸음친다. 반대로 관능적 충동은 여자에게 느끼되, 여자에게는 또 그것만을 느끼고 결코 여린 사랑은 느끼지 않는다. 이들 역시 아주 어리고 여린, 이제 막 자란 젊은이들, (호라티우스의 말로) 푸에리 몰레스(pueri molles, 여린 소년들)만을 사랑하는 것 같고, 따라서 언제나 남성형 우르닝이거나 적어도 그에 아주 가까운 것 같다. – 셰익스피어가 아마 여기에 속할 것이다.

§ 30. 이 매우 주목할 만한 변이에 속하는 두 사람이 내게 자신을 드러내 보였는데, 둘 다 나이가 스무 살에서 서른 살 사이로, 한 사람은 독일계 스위스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체코 혈통이다(위 § 19 참조). 특징적인 것은, 두 사람 모두 우르닝으로 분류되는 것을 거부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들은 순수한 우르닝이 아니다. 더구나 적어도 그중 한 사람에게는 밤의 꿈(『포르마트릭스』 주 14)이 여성의 모습만 보여 준다. (다른 한 사람에 대해서는 이 점에 관해 들은 바가 없다.) 그러나 타오르는 사랑의 동경이라는 여린 감정에서는 두 사람 모두 순수한 우르닝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 31. 알바니아의 “소년을 사랑하는 게그인”도 여기에 속하는 것 같다. 아름다운 “소년”을 향한 그들의 정결한 사랑을 한의 『알바니아 연구』(1854, 166쪽 이하)는 참으로 매혹적인 보고로 그려 낸다.[24] 그곳에서는 이 변이가 특히 흔한 것 같다. 게그인도 아주 어린 푸에리만을, 대략 열두 살에서 열일곱 살까지를 사랑한다.[25] 그러나 관능적 쾌락에 대한 생각은 모두 그에게서 멀다. 그는 자기가 열여섯에서 스물세 살쯤일 때 그들을 사랑한다. (이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섞이지 않은 우르닝이라면 누구에게서나, 여기 독일에서도, 바로 이 나이에 사랑이 가장 여리게 꽃핀다. 감정의 뜨거움에서도 우리의 순수한 우르닝들은 아래에 옮기는 묘사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묘사는 순수한 우르닝의 사랑에도 완전히 들어맞는다. 내가 따로 한 권으로 내놓을 우르닝 시의 견본들이 그것을 보여 줄 것이다. 특히 그것은 『파이드로스』에 있는 플라톤의 빼어난 묘사와 완전히 일치한다.) 스물네 살쯤 되면 게그인은 대개 아내를 맞아들이고, 그것으로 소년애의 시기는,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 끝난다.

§ 32. 한에 따르면 다음은 한 게그인 자신의 말이다.

“게그인이 자기 소년에게 품는 감정은 햇빛처럼 순수하다. 그 감정은 사랑하는 이를 성인(聖人)과 같은 자리에 둔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품을 수 있는 가장 높고 숭고한 것이다. …. 아름다운 젊은이를 보면 그의 안에 경탄이 일고, 그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데서 오는 즐거움에 그의 마음의 문이 열린다. 사랑은 그의 생각과 느낌 전부가 그 안에 녹아들 만큼 그를 사로잡는다. 사랑하는 이 곁에 있으면 그는 그를 바라보는 데 빠져든다. 멀리 있으면 오직 그만을 생각한다. 사랑하는 이가 뜻밖에 나타나면 그는 당황한다. 얼굴빛이 바뀌어, 창백해졌다가 붉어졌다가 한다. 심장이 높이 뛰어 숨이 막힌다. 그는 사랑하는 이밖에는 눈도 귀도 없다. …. 그는 손으로 그를 만지기를 피한다. 그에게는 이마에만 입 맞춘다. ….. 그는 그를 노래하고, 여자는 결코 노래하지 않는다.”

여기 이 시의 견본 하나를 번역으로 옮긴다.

“아침에 떠오르는 해는
네가 내 곁에 있을 때의 너 같구나, 오 소년아.
그 검은 눈이 나를 향하면
내 머리에서 정신을 몰아내는구나.”

(알바니아인의 우르닝적 사랑에 관해 다른 직접적인 출처에서 얻어 『아라 스페이』 머리말 X쪽에 적은 것을 참조하라.)

§ 33. 그렇지만 나는 이 게그인들에 대한 내 분류를 완전히 확신하지는 않는다. 무슨 까닭으로 “관능적 쾌락에 대한 생각은 모두” 그들에게서 “멀다”는 것인지 밝혀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까닭이 혐오라면 그들은 분명 내가 말한 그대로일 것이다. 그것이 단지 자기 절제일 뿐이라면, 그들은 남성화된 남성형 우르닝일 것이다(§ 35 이하 참조). 그러나 나는 전자가 더 그럴듯하다고 본다. 한에 따르면 그곳에서 소년애의 그 정결함은 매우 널리 퍼져 있는데, 자기 절제가 그토록 널리 퍼져 있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나이가 더 든 뒤에는 그곳에서 관능적인 소년애가 흔할 터인데, 한에 따르면 이 역시 그렇지 않은 것 같다.

§ 34. 이에 따라 인간 본성 안에는 모두 다음과 같은 성적 변이가 있게 된다.

I. 남자II. 여자III. 우르닝IV. 우르닝긴V. 우라노디오닝VI. 여성 우라노디오닝(?)VII. 자웅동체
1. 남성형 우르닝
2. 중간 단계
3. 여성형 우르닝
1. 결합형
2. 분리형

이 가운데 내게 정말로 수수께끼인 것은 결합형 우라노디오닝뿐이다. 그들의 출현은 원초적 자웅동체 이론에서 대략적으로만 설명되기 때문이다. 분리형은 내게 전혀 수수께끼가 아니다. 질서를 세우는 자연이 관능적 사랑과 몽상적 사랑을 충분히 갈라놓았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분리형 우라노디오닝의 존재가 완전히 확인된다면,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 밝혀지는 셈이다.

곧 태아 안에는, 내가 앞에서 가정했듯이, 비물질적인 성의 싹, 곧 사랑의 충동 일반의 싹이 하나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이, 그것도 서로 완전히 독립적으로 들어 있다는 것이다. 곧 관능적 충동의 싹과 동경하는 사랑의 싹이며, 자연은 이 둘에게 대개는 서로 같은 성적 방향을 부여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사랑의 충동이 완전히 분리된 두 개의 개별 충동으로 갈라진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듯한 사실이 또 있다. 단순한 우르닝에게서도 관능적 사랑과 몽상적 사랑이 서로 다른 사랑의 대상을 향해 완전히 따로 나타난다는 것, 특히 이른 나이에, 대략 스무 살 이전에, 그 어떤 관능도 모르고 아니 그런 생각 앞에서는 몸서리칠 만큼 정결하고 뜨거운 사랑이 매우 자주 피어난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에게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게다가 관능적 충동은 몽상적 사랑보다 늦게, 흔히 몇 년이나 늦게 깨어나는 것이 보통이다. (이미 『포르마트릭스』 § 24~26에서 나는 이 분리를 뒷받침하는 몇 가지를 제시했다.) 그러나 충분한 수의 관찰이 없으므로 이 문제에 대한 심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V. 남성화된 우르닝과 우르닝화된 남성. 우르닝과 여자의 자연에 반하는 결혼. 남성화의 실패.

§ 35. 그런데 개개인을 결합형 우라노디오닝이라는 변이로 분류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보였던 사람들 가운데 압도적 다수가 더 자세히 살펴보니 전혀 다른 것으로 판명되었다. 곧 자기 강제와 습관으로 인위적으로 남성화된, 남성화된 남성형 우르닝이었던 것이다. 물론 모든 우르닝이 본성상 이런 남성화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성형 우르닝은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남성형 우르닝이라고 다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우르닝에게 자연스러운, 여성의 몸을 성적으로 만지는 데 대한 혐오가 다른 사람보다 그에게서 약한지, 곧 더 극복하기 쉬운지에 따라 어떤 이는 더 그럴 수 있고 어떤 이는 덜 그럴 수 있다.

비고. 자기 쪽에서 자기가 먼저 나서서 여성의 몸을 성적으로 만지는 것에 대해 우르닝은, 사람에 따라 더 강하기도 하고 더 약해서 극복할 만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뚜렷한 혐오를 느낀다. 반면에 여성의 몸에 의해 성적으로 만져지는 것, 여성의 몸이 자기를 만지고 애무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에 대해서는, 그의 혐오가 어떤 경우에는 훨씬 약해서 쉽게 극복되고, 어떤 경우에는 아예 없다.

§ 36. 남쪽 기후에서는 능동적으로 만지는 것에 대한 혐오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경우가 북쪽 기후에서보다 훨씬 흔한 것 같다. 아니, 그곳에서는 이 혐오조차 흔히 아예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이곳보다 남성화가 훨씬 흔하고, 북쪽 지방의 우라니즘이 남쪽 지방의 우라니즘보다 분명히 더 순수하고 섞이지 않았다.[26] 동방에서는 남성화된 우르닝이 참으로 무더기로 있는 것 같은데, 이는 오직 이것으로만 설명된다. 튀르크인, 페르시아인, 아랍인, 인도인, 중국인, 일본인 사이에서 그렇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에도 순수한 우르닝이 있다.

§ 37. 이 남성화된 남성형 우르닝에, 그리고 결코 우라노디오닝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흥미로운 인물 마르티알리스도 속한다. 그의 경구시들에서 우리는 그 자신의 본성과 다른 우르닝들의 본성에 대해 참된 자연과학적 보물을 얻는다. 그는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우리에게 남겼지만, 물론 지금까지 아무도 그것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지금까지는 로스히르트의 너무나 순진한 고백대로, 이른바 “인간 본성의 타락한 충동”, 곧 우라니즘을 알게 되는 것은 “보람 없고 소름 끼치는 일”로 여겨졌으니까!

여자들을 향해서는 그에게서 더없이 음탕한 방종을 보지만, 순수하고 여린 사랑은 어디서도 결코 보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는 어느 여자든 상관없지는 않을 만큼은 남성화되어 있어서(순수한 우르닝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대개 상관없을 것이다), 오히려 남자와 마찬가지로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추하고 시든 여자보다 훨씬 더 좋아한다. (예컨대 경구시 6. 23 참조.)

그러나 여자들과의 그 모든 성적 교제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정한 사랑은 몇 번이고 거듭 젊은이들을 향해 터져 나온다. 그것도 그 두 방향 모두로, 곧 관능적인 방향으로도 몽상적이고 여린 방향으로도 그렇다.[27] 그들에게 바친 그의 시는 모든 시대의 연애시 가운데 가장 황홀한 꽃에 속한다. 적어도 나로서는, 이를테면 젊은이 케스토스에게 바친 다음 몇 마디(14. 206. 207)보다 더 달콤한 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는 다른 곳(8. 46)에서 케스토스의 아름다움과 함께 그 정결함도 기린다.

Collo necte, puer, meros amores,
Ceston, de Veneris sinu ealentem;
Sume Cytherinco medicatum nectare ceston![28]

§ 38. 우르닝과 여자의 결혼. 이 남성화된 남성형 우르닝에는 우리 세기의 불행한 우르닝도 여럿 속한다. 고립된 채 살다가, 아직 자기 자신을 깨닫기도 전에, 주위의 권유와 이른바 “사정”에 떠밀려 여자와 결혼한 이들이다.[29] – 우르닝의 사랑에 대한 지식을 이를테면 자루에 넣어 묶어 두는, 우리에게 흔한 그 불행한 처리 방식 덕분이다. 그 방식은 우르닝의 사랑에 대해 비뚤어진 생각만 퍼지게 할 뿐이며, 이미 이루 말할 수 없는 재앙을 빚어냈다! 우르닝의 사랑에 대한 이 갇힌 지식은, 일찍이 판도라의 상자에 갇혀 있던 그 모든 것보다 더 나쁜 재앙을 이미 가져왔다.

“남편”이 평생 자기를 모르는 채로 지낸다면, 이 “깨닫기 전(ehe)의 결혼(Ehe)”은 아내에게는 그런대로 행복한 결혼일 수 있다.[30] 그동안 그는 알 수 없는 사랑의 고통에 고문대 위에 묶이고, 악한 존재를 믿는다면 그 고통을 틀림없이 악마의 탓으로 돌릴 것이다. 그러나 그 숙명적인 “전” 다음에 깨달음이 뒤따른다면, 결혼 뒤 조만간 그에게 문득 자기 자신에 대한 빛이 비친다면, 신이시여, 그 아내를 위로하소서. 그런 결혼의 비참함은 어떤 펜으로도 그려 낼 수 없다. 황제였던 우르닝 하드리아누스의 아내 사비나만이 그렇게 생겨난 자기 삶의 비참에 목을 매어 끝을 낸 유일한 사람은 아니다.[31] 우리 세기에는 그런 “남편” 하나가, 파리의 이름난 프랄랭 공작[32]이 제 아내를 살해했다. 자연에 대한 죄는 이렇게 복수를 받는다![33]

§ 39.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모든 남성형 우르닝이 본성상 남성화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남쪽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마르티알리스는 또, 그와 친한 남성형 우르닝 빅토르가 한 여자와의 결혼을 앞두고 남성화되면서 흘리게 될 진땀을 그린다(XI. 79). “Heu quantos aestus, quantos patiere labores!”(아, 얼마나 큰 열기를, 얼마나 큰 수고를 너는 겪게 될 것인가!) 하고 그는 그에게 외친다. (빅토르가 정말 남성형 우르닝이었다는 것은, 그가 지금까지 푸에리를 사랑해 왔고 이제 “새 아내가 그들의 곱슬머리를 잘라 버릴 것”이라는 데서도 드러나고, 독자가 직접 찾아 읽어 보기 바라는 다른 대목에서도 드러난다.)

그리고 마르티알리스는, 마치 앞에서 말한 차이, 곧 우르닝은 여자를 능동적으로 만지는 것보다 여자에게 만져지는 것에 훨씬 덜한 혐오를 느낀다는 차이를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는 듯이, 빅토르에게 – 그것도 씁쓸할 만큼 진지하게 – 먼저 수부라의 아가씨(puella Suburana) 하나에게 스승으로 몸을 맡겨 그 여자에게 자기를 사내로 만들게 하라고 권한다. “Illa virum faciat.”(그 여자가 너를 사내로 만들어 주기를.) 가엾은 신부여! 그녀는 대체 어떤 조짐 아래 결혼을 시작했단 말인가!

근래에 있었던 아주 똑같은 시도가 완전히 실패한 일을 참조하라. 『빈딕타』 § 36의 익명인의 편지가 그것을 그려 낸다.

또 다른 익명인의 증언도 참조하라. 카스퍼가 『임상 단편집』에 실은 그의 편지에는 우르닝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다.

“어떤 도덕도, 어떤 종교도, 여자와의 교제도 소용없는 성향.”

§ 40. 남성화된 우르닝의 맞짝으로 우르닝화된 남성, 곧 우라니아스터(Uraniaster)가 맞은편에 선다. 우르닝화는 주로 여자가 없어서, 그리고 습관에 의해 일어나며,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여자가 없지 않은데도 자기 강제로 일어날 수도 있다. (『인클루사』, 『포르마트릭스』, 『아라 스페이』 참조.) 특히 감옥에서 그렇고(그런 예 하나를 캉레르[34]가 경찰 기록에서 길어 올린 『회고록』에서 묘사한다), 병영, 야영지, 요새, 특히 외딴 요새 따위에서 그렇다. 빈에서 나에게 이런 편지가 왔다(1867년 10월). “오스트리아 군대에는 우라니즘(우르닝화)이 너무 퍼져서, 사관생도와 사병들에게 이미 이를 두고 훈계가 행해졌는데, 그것도 병영에서 공개적으로 행해졌습니다.” 우르닝화가 특히 심하게 퍼져 있는 곳은 아프리카에 있는 프랑스 외인부대 병사들 사이, 사막의 보루 진지들이다. 거기서는 내가 앞서 마르티알리스에게서 언급한 것과 아주 맞아떨어지는 일이 드러났다. 우르닝화된 자들은 타고난 남성형 우르닝과 꼭 마찬가지로 나이 든 동료보다 젊은 동료를 사랑의 상대로 훨씬 더 좋아했다. 새로 들어오는 신병이 아주 젊고 잘생겼으면 그를 두고 거의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이것은 1862년 한 목격자, 한 독일인이 나에게 믿을 만하게 들려준 이야기로, 그는 그 부대의 병사였을 뿐 아니라 한 하사관의 애인이기도 했다.

달리 생각할 수도 없지만, 보다시피 우라니아스터는 여성형 우르닝이 아니라 남성형 우르닝과 어느 정도 닮았다. – 여자가 없어서 일어나는 우르닝화의 한 형태는 동물계에서도 볼 수 있다. 큰길에서 날마다 말려야 하는, 우리의 가장 충실한 가축들이 몰두하는 어떤 외설스러운 짓들을 넌지시 가리키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 여자가 없어서 우르닝화된 자에게서는 그 결핍이 끝나자마자 우르닝화도 곧바로 끝난다. – 남쪽 지대에서는 남성화와 마찬가지로 우르닝화도 우리에게서보다 쉬울 것이다. 남자가 남자에게 만져지는 것에 대한 혐오도 그곳에서는 더 약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민족들 사이에서는 여자가 전혀 모자라지 않아도 우라니아스터가 있을 것이다.

비고. 그러므로 결합형 우라노디오닝, 분리형 우라노디오닝, 남성화된 우르닝, 우르닝화된 남성, 이 넷은 모두 남성형 우르닝과만 접점을 가질 뿐 여성형 우르닝과는 접점이 없다.

VI. 우르닝이 남자에게 품는 성적 사랑은 자연에 맞고 정당하다. 개개인의 일반적인 성적 자연 규정.

§ 41. 그런데 자연은 자기가 하는 대로 한다. 곧 남자를 남성 태아에서, 여자를 여성 태아에서 빚어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하나의 같은 자웅동체 태아에서 빚어낸다. 그러므로 앞에서 묘사한 모든 변이와 혼합 본성은, 그 모든 타고난 충동과 그 모든 동경과 더불어, 이마에 신의 은총에 의한 권리, 또는 같은 말이지만 타고난 인권의 도장을 달고 있다. 다만 그들이 타고난 본성을 순수하게 지켜 온 한에서 그렇다. 그러므로 그들을 박해하는 것은 자연의 작품에 대한 모독이다. 그들에게 있는 어떤 것도, 정말 아무것도, 그 자체로 죄스럽거나 하다못해 경멸할 만한 것이 아니다.

§ 42. 감수성이 섬세한 남자가 그의 심성에 타고난 여성적 온순함 때문에, 또는 여자가 턱에 돋아나는 수염 때문에, 또는 자웅동체가 자웅동체라는 이유로 박해받을 까닭이 없는 것처럼, 아니, 남자가 가슴에 달린 수유 기관의 한 조각 때문에, 또는 태아 시절부터 아직 몸 안에 지니고 다니는 작은 자궁 때문에 박해받을 까닭이 없는 것처럼, 우르닝도 남성의 몸을 지니고 고환을 가졌으면서도(testiculatus) 자웅동체적으로 여성적 사랑의 충동을 타고났다고 해서 박해받을 까닭이 없다. 이것도 원초적 자웅동체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도 정당한 자연이다. 그런데 참으로 역설적인 것은 – 너희 스스로 이것을 느끼지 못할지 모르겠다! – 바로 너희, 너희 남자들이, 너희 자신이 온갖 자웅동체의 재료를 몸 겉과 속에 지니고 다니면서, 우르닝을 그 자웅동체적 본성 때문에 박해한다는 것이다. 자웅동체들이 한 자웅동체에게 자웅동체성을 이유로 형사 조사를 내린다! 기이하도다! 예심 판사, 체포하는 헌병들, 검사, 재판장, 판사, 배심원, 그들 모두가 – 그들 자신이 자웅동체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 자웅동체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그가 남성의 몸을 지니고서 자웅동체적으로 여성적인 사랑의 동경을 따랐다는 이유로 그를 중금고에 던져 넣는다. 내가 풍자 경구시를 쓰기가 쉽다면, 여기서 풍자 경구시를 쓰지 않기란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 43. 우르닝 자웅동체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고환을 가졌는데도(testiculatus) 왜 여자처럼 젊은 남자에게 이끌림을 느끼는가? 뮌스터의 자웅동체는 여러 해 동안 한 남자에게 아내로 시집가 있었다. 그와 자웅동체 마리 괴틀리히와 베를린의 자웅동체(『인클루사』 § 5), 이 셋은 모두 고환을 가졌는데도 왜 오직 남자만을 사랑했는가? 그들이 자연에 반역했기 때문인가? 오, 유모들의 옛날이야기여! 아니다, 자연이 그들 안에서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꼭 그렇게 섞어 놓아서, 그들은 고환을 가졌는데도 오직 남자에게만 이끌림을 느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르닝은 왜 고환을 가졌는데도 남자를 사랑하는가? 그야 정확히 같은 까닭에서다! 그의 안에서도 자연이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그렇게 섞어 놓아서, 그는 고환을 가졌는데도 여자처럼 오직 남자에게만 끌릴 수 있기 때문이다!

§ 44. 지금까지 말한 것에서 다음이 나온다. 자연은 결코 남자를 오로지 여자를 위해, 여자를 오로지 남자를 위해 정해 두지 않았다. 그것은 자연이 남자와 여자만을, 이를테면 남성의 원초 태아와 여성의 원초 태아에서 빚어낼 때에만 그럴 것이다. 오히려 자연은 개개인을 성적으로, 자연이 그들을 실제로 만들어 낸 그대로, 그리고 자연이 나누어 준 자질과 자연이 나누어 준 성적 사랑의 충동에 따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성적 끌림을 일으키는 그대로, 서로를 위해 정해 두었다.

VII. 남자와 남자의 사랑이 타고난 것임을 뒷받침하는 권위자들의 발언.

§ 45. 그런데 이렇게 외따로 서 있는, 이토록 날카롭게 새로운 내 이론을 내가 이처럼 단호하게 선포하는 것을 사람들이 나무라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논거를, 아니면 적어도 권위자를 요구하지 않겠는가?

논거는 소책자 『인클루사』와 『포르마트릭스』에 펼쳐 두었다. 권위자들의 발언은 여기에 이어서 싣는다. 나는 독자에게 묻는다. 이 발언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이것은 이쪽으로 저것은 저쪽으로, 어떤 불완전함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독자 자신도, 그것들이 일부는 서로에게서, 일부는 바로 저 이론에서 만족스러운 보완과 이를테면 그 열쇠를 찾는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겠는가? 위의 비난에 대해 나는 이 물음에 대한 독자 자신의 대답에 호소한다. 그런데 『빈덱스』에서 『아라 스페이』까지의 소책자 다섯 권은 모두 내가 이 발언들을 조금이라도 알기 전에 쓴 것이다.[35]

I. 폰 람도르, 『베누스 우라니아: 사랑의 본성에 관하여』(제2부 104쪽).

“성의 차이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성을 정하는 데 쓰는 표지들에 달려 있지 않다. …. 성적 공감은 여림과 강함의 조화로운 관계에 바탕을 둔다. 우리가 이 조화로운 관계를 느끼면 욕정과 충동이 깨어난다. 그리고 이 작용을 남자가 남자에게 일으킬 수 있다. 이에 관해 나는 젊어서도 나이 들어서도, 더 더운 하늘 아래서도 더 추운 하늘 아래서도, 풍속이 더 타락한 나라에서도 더 순수한 나라에서도 수없이 관찰했다. 어디서나 똑같은 현상이었다. 그러나 특히 내 확신은 한 사건에 근거하는데, 그 사건의 진실은 나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확신으로 보증한다. 두 젊은 남자가 운운.”

II. W. 멘첼의 《문학지》 1834년 6월 4일 자.

“랍비들의 영혼론은 … 양성의 성격에 있는 모순과 흔히 기이한 공감들을 영혼의 윤회로 설명한다. 곧 남성의 몸 안에 든 여성의 영혼은 같은 이름의 극처럼 여자들과는 서로 밀어내고, 반대로 몸의 성이 같은데도 서로 끌어당긴다는 것이다.”

III. 이미 헨케(『법의학』, 1829, § 154, 주)에게서도 우리는 다름 아닌 우르닝인 개인들이 아주 올바르게 파악되고 표시되어 있는 것을 본다. 다만 그 분류에서는 – 그들이 자웅동체 아래 분류되어 있다 – 모든 것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메켈(『…를 위한 문서고』 운운)은 자웅동체 형성에 세 단계를 둔다. 제1단계. 생식기는 정상적으로 발달했으나, 나머지 몸의 외양과 충동이 그것과”(곧 그들의 생식기와) “모순되는 개인들. 예컨대 좁은 골반”(곧 남자처럼), “납작한 가슴, 수염을 지닌 비라기네스(Viragines)”(남자 같은 여자들), “그리고 반대로 여성성이 두드러진 남성 개체들.”

그런데 헨케는 이 중요한 자연적 특성에서, 이른바 이 자웅동체 부류에게 당연히 자연에 맞는 것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아무 결론도 끌어낼 줄 모른다. 백 쪽 뒤에서 우리는 그가 여전히 낡고 편안하며 깊이 패인 바퀴 자국에 완전히 빠져 있는 것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 바퀴 자국에서는 자연에 반하는 것과 타락밖에 모르고, 물려받은 욕설만 퍼붓는다. 앞서 자기가 직접 저 자연의 진실을 들었다는 것은 그의 머리에서 까맣게 빠져나가 버렸다. 이른바 “자연에 반한다”는 것이 바로 그가 든 저 자연 현상에서 만족스럽고 온전하고 완전한 수수께끼의 해답을 찾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간단히 “자연에 맞는다”로 풀린다는 것은 그에게 어렴풋이도 떠오르지 않는다.

IV.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3판, 1859, 제2권 643쪽).

“이 일이 완전히 보편적이고 끈질기게 뿌리 뽑히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남자와 남자의 사랑이) “어떤 식으로든 인간 본성 자체에서 나온다는 것을 증명한다. 우리가 정직하게 처리하려 한다면 이 결론을 절대로 피할 수 없다. 이 사실을 건너뛰고 꾸짖는 것으로 그치기는 물론 쉬울 것이다. 그러나 나의 타고난 소명은 어디서나 진리를 탐구하고 사물의 근거에 이르는 것이다.” (그의 특수한 가설과 그에 대한 나의 견해: 『인클루사』 § 76 이하.)

V. 캉레르(위 § 40에서 언급한 『회고록』에서)는 이렇게 확신한다고 밝힌다. 그가 예를 하나 드는 저 남자들(감옥 안에서의 우르닝화)과 달리, 다른 개인들에게는 이 성향이 타고나 있다는 것이다.

VI. 이름난 법의학 권위자 카스퍼(《카스퍼 계간지》 제1권, 1852, 62쪽).

“남자가 남자에게 성적으로 기우는 것은 이 불행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에게 타고난 것이다.”

VII. 이름이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는 다름슈타트의 한 의사와, 1867년 10월 나의 한 친구가 내 부탁으로 다섯 권의 소책자에 펼친 내 이론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친구가

“그러면 선생께서는 의사로서 우라니즘이 타고난 것이라는 쪽에 찬성하신다는 말씀입니까?”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그것이 타고난 것이라는 점은 전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VIII. 이름난 생리학자 루이 뷔히너(『생리학 소묘』)는 이 이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충분한 검토와 여러 가지 수정이 필요하지만, 아예 내칠 것은 아니다.”

IX. 다름슈타트의 의학 박사 랑하인츠는 이 이론에 아예 동의한다고 밝혔다.

X. 베를린의 의학 교수 피르호는 『인클루사』를 읽은 뒤 나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1864년 8월 19일).

“남성의 몸 안의 여성적 심성에 관한 당신의 논술에 나는 아무 이의가 없습니다. 당신이 고른 남자, 당신의 애인 앞에서 당신은 자신을 여자로 느낍니다. 오히려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며, 당신의 논술은 실제로 그 문제를 성과 없이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XI. 그러나 타고난 것임을 뒷받침하는 가장 무게 있는 증언은 카스퍼가 죽기 얼마 전 마지막 저서에 남긴 것이다. 『법의학 임상 단편집』, 1863, 34쪽.

“모든 경험에 비추어, ” …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는) … “많은 경우, 아마 대부분의 경우, 신비하고 어둡고 설명할 수 없는 타고난 충동에 의해 오로지 남자에게만 이끌림을 느끼며, 그렇게 불행하게 태어나지 않은 남자가 남자에게서 돌아서는 것[36]과 똑같은 역겨움으로 여자[37]에게서 돌아선다는 것은 확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는 것은 참된 전문가라면 누구나 알며, 나는 내 직무상의 관찰에서 이를 끊임없이 확인한다. ….. 트리바디즘[38]에도 꼭 같은 것이 해당한다. …. 많은 이들이 자기 동경의 대상에게, 서로 다른 성 사이의 불길보다 더 뜨거운 불길로 이끌린다.”[39]

카스퍼는 여기서 내 이론에 얼마나 가까이 서 있는가! 그리고 특히 그가 이 현상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이 확신에 이르렀다는 사실, 그 실마리 없이는 이 현상이 그에게 미로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내 이론에 얼마나 큰 버팀목이 되어 주는가. 그 실마리란 영혼의 여성적 성, 사랑의 충동의 여성성을 말한다.

그러니 내 이론은 그 내적 근거들에 더해 바깥에서도 이러한 권위자들에게 뒷받침받고 있으므로, 나는 그 핵심과 본질에서 그것을 실로 더는 흔들릴 수 없는 것으로 여겨도 된다고 믿는다.

VIII. 필요할 때 신체의 어떤 지체를 없는 다른 지체 대신 보조로 쓰라는, 자연 스스로 준 가르침. 이 가르침을 적용하여, 우르닝의 사랑의 향유가 자연과 남성의 존엄과 도덕률을 해친다는 세 겹의 비난에 맞서 그것을 정당화한다.

§ 46. 어머니 젖과 함께 빨아들인 박해욕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끝없이 어려운지는 앞서 말한 피르호 교수가 증명한다. 그는 우라니즘이 타고난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수단은 형사 처벌이라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40]

곧 그는 저 편지(“베를린, 1864년 8월 19일”)에서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남자를 그 본성상 그에게 정해지지 않은 일에 쓸 때 남자의 존엄을 공격한다는 것을 짐작하지 못합니까?”

§ 47. 1863년 4월 베를린 최고 법원(Obertribunal)에 낸 법률 의견서에서 프로이센 왕국 검찰총장실도 아주 비슷한 방식으로 말한다. 프로이센에서 우르닝의 사랑의 향유를 처벌하는 근거 가운데에는 “인간의 품위 손상”도 있는데, 그것은 우르닝이(물론 검찰총장실은 “한 남자가”라고 말한다) 성애를 채우려고 남자를 이용한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 48. 우선, 여기서는 어디서나 젊은 남자에 대한 공격이 문제가 아니라, 오로지 사랑의 호의를 자유로이 베푸는 것,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χαριξεσδαι(호의를 베풀다), 로마인들의 dare(주다)가 문제이며, 그것도 성인이 된 젊은 남자 쪽에서 베푸는 것이 문제다. [41] 그러므로 우리는 피르호의 말에서 다음 생각만 다룰 수 있다. 곧 젊은 남자 쪽에서 우르닝에게 사랑의 호의를 베푸는 것이 그의 남성의 존엄에 어긋난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 무슨 논리인가! 피르호식 입법론에 따르면, 그에게 자유로이 호의를 베푼 젊은 남자가 남성의 존엄에 대해 피르호 교수와 다른 생각을 품었다는 이유로 우르닝이 처벌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 49. 그러나 이번에는 우리 쪽에서 이른바 인간의 품위 손상과 남성의 존엄 훼손을 검토해 보자. 우르닝이 우르닝으로서 사랑하고 우르닝으로서 갈망하며 사랑을 구한다는 것, 그리고 젊은 남자가 – 참으로 사랑받고 있다고 확신하여 – 그에게 자유로운 사랑을 베푼다는 것에 그 둘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들어 있다는 주장을 우리는 단호히 부인할 수밖에 없다. [42]

왜냐하면 젊은 남자로 하여금 먼저 우르닝에게 참된 사랑을 불어넣고 이 강한 정열의 온 불길로 그를 채우게 하며, 이어서 χαριξεσδαι로 이 그리움을 또한 달래 줄 수 있게 한 보이지 않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놀라운 힘은 또다시 다름 아닌 자연이다. 그런데 자연은 그에게 바로 이 능력을 줌으로써 새삼 다음을 알려 준다.

곧 자연은 결코 남자를 오로지 여자를 위해, 여자를 오로지 남자를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아주 일반적으로, 모두 원초적 자웅동체에서 나온 개개인을 저마다 서로에게 자연스러운 성적 끌림을 미치는 그대로, 서로를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다(앞의 § 44 참조). 이것을 나는 인간의 일반적 성적 자연 규정이라 부른다. 특수한 자연 규정과 대비해서다(후자는 물론 남자가 여자를 위해, 여자가 남자를 위해 특별히 정해져 있다는 데 있다).

칸막이를 세우고 이런저런 변종을 펜실베이니아식 독방 제도의 따로 떨어진 독방들에 가두듯 가두는 것이야말로 자연에 반한다.

그런데 젊은 남자가 이 일반적인 성적 자연 규정을 따른다면, 그는 – 그가 따르는 것이 바로 자연 규정이기 때문에 – 자신의 인간 존엄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가 우르닝의 사랑의 결합에서 사랑하는 우르닝 앞에 결코 “남자”로서 설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한다. 남자로서는 물론 여자 앞에서만 설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우르닝 앞에 아주 일반적으로 인간으로서, 사랑받는 인간으로서 서 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인간 존엄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충분해야 한다.

§ 50. 그런데 일단 자연 규정이 확인되면 – 나는 이 명제에 무게를 둔다 – 방식은 부차적인 의미로, 곧 한낱 자연의 시녀라는 의미로 내려앉아야 한다. 방식은 마땅히 찾아져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다음과 같은 교훈시의 말이 적용된다.

“Utaris totidem, finxit Natura quot artus,
Ad quod sint habiles. Amat auxiliaria saepe
Munera. Namque etiam variis accommodat illos
Partibus aut operi vario, quorum indiget ipsa.
Saepe in opem vocat ipsa sibi famularia membra,
Membra novos usus mirantia. Namque docentur
Et discunt supplere locos, parentque Magistrae
Magnae, quae docet atque jubet.”

“자연이 지체를 지어 낸 만큼 그 모든 지체를, 그것들이 알맞은 일에 쓰라. 자연은 흔히 돕는 구실을 좋아한다. 자연은 지체들을 여러 가지 기능과 여러 가지 일에도 알맞게 만들기 때문이다. [43] [44] 자연 자신이 필요로 하는 일에 말이다. 자연은 흔히 시중드는 지체들을 불러 자신을 돕게 하는데, 그 지체들은 (말하자면) 새로운 쓰임에 놀라워한다. 그것들은 가르침을 받아 자리를 메우는 법을 배우고(곧 없는 지체, 그런데도 자연이 필요로 하는 지체의 자리를), 가르치고 명령하는 위대한 스승에게 복종하기 때문이다.”

§ 51. 아니면 기이한 열대 덩굴 식물이 제 뿌리를 뿌리가 본디 자연에게서 받은 목적과 전혀 다른 목적에 쓰는 것이 자연에 반하는 일이란 말인가? 곧 완전히 드러난 채로 바깥에서 나무줄기를 휘감고, 손가락이나 발톱으로 붙잡듯 거기에 매달리며, 어느 정도는 발로 오르듯 나무껍질을 타고 기어오르기까지 하는 데에 말이다! 아니면 펭귄이라는 새가, 덜 발달했지만 깃털 달린 날개를 역시 아주 낯선 목적에, 곧 다른 새들처럼 나는 데가 아니라 물고기가 지느러미를 쓰듯 헤엄칠 때 노 젓는 데 쓰는 것이 범죄란 말인가? 그것은 혹시 펭귄의 존엄을 거스르는 일인가?

§ 52. 지체는 자연이 필요로 하는 즉시 보조 목적을 위해 대신 쓰일 수 있다. 이 명제는 그 정당성을 제 안에 품고 있다. 앞에서 든 자연사의 예들은, 거기에 수백 가지를 더 나란히 세울 수 있거니와, 이 명제를 확증한다. [45]

그런데 지체가 일반적으로 그렇게 쓰일 수 있다면, a) 그 목적이 성적인 것이냐 비성적인 것이냐, 그리고 또 b) 이 보조의 방식이 펭귄 따위처럼 순수한 본능으로 찾아지느냐, 이성을 타고난 인간처럼 본능과 고안의 혼합으로 찾아지느냐에 따라 구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바로 자연이 본능 따위를 통해 보조의 본보기와 가르침을 스스로 내놓기 때문에,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인간에게도 더 높은 스승의 이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허용될 뿐 아니라, 그것은 그에게 자연에 반하는 일일 수도, 그의 인간 존엄에 어긋나는 일일 수도 없다.

사랑받는 쪽도 호의를 베푼다고 해서 자연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렇게 하면서 적어도 자신의 일반적 자연 규정(앞의 § 49)을 따르고, 특수한 자연 규정(앞의 § 49)은 조금도 해치지 않으며, 동시에 자연 스스로 준 이 가르침에 맞게 행동하고 그 가르침을 섬기기 때문이다.

§ 53. 이성을 타고난 인간에게는 지체를 의식적으로 보조 목적에 쓰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허용되어 있지 않은가. 곧 직접적인 반자연적 행위, 지체의 훼손과 신체 훼손까지도 허용되어 있다. 그것도

한편으로는 같은 경우에, 곧 자연이 보조나 거들기를 위해 그것을 필요로 하는 즉시(여러 의료 수술, 예컨대 이른바 첨족을 없애려고 아킬레스건을 절개하는 것, 사시를 없애려고 안구 힘줄을 절개하는 것, 어떤 경우에 필요한 fissio praeputii(포피 절개). 또는 자연이 그것을 필요로 한다고 그저 생각될 뿐인 경우에도. 예컨대 유대인과 동방 사람들의 circumcisio praeputii(포피 할례)),
다른 한편으로는 심지어 순전히 미용 목적으로도 허용되어 있다(중국 여인들이 발을 쇠신에 죄어 발의 성장을 막는 것, 티에라델푸에고 여인들이 장신구를 박아 넣으려고 코 연골과 아랫입술과 뺨을 뚫는 것, 19세기 유럽 여인들이 꼭 같은 목적으로 귓불을 뚫는 것).

아니, 자연이 필요로 하는 즉시 이보다 더 많은 것도 허용된다. 더 나아갈 수도 있다. 정상적인 부부의 동침은 모두 아내가 너무 힘든 해산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안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자연은 그것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럼에도 허용된다.
따라서 우르닝의 성애를 행하는 여러 방식은 신체 부위를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 다루거나 쓰는 일의 경계에 아직 한참 미치지도 못한다. 훨씬 더 많은 것, 훨씬 더 멀리 나아가는 것도 허용된다.

§ 54. 그러므로 주로 문제가 되는 방식, 곧 이른바 그리스식 사랑의 방식인 삽입 [46] 이 나 개인에게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앞에서 든 이유들 때문에 나는 자연이 그것을, 그것도 바로 그것을 필요로 하는 경우에는, 그것이 자연에 반하지 않고, 도덕률 앞에서 분명 정당하며, 자연과 도덕률과 인간 존엄을 거스르지 않는다고 선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개별 경우에 이 필요가 있느냐 없느냐? 이것은 비우르닝이 독자적으로, 그리고 우르닝의 견해에 맞서 판단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우르닝은 남자와 여자 못지않게 자연의 참된 자식이지만, 어머니는 그들의 사랑을 그저 계모처럼 돌보았다. 어머니는 우르닝과 그의 연인을 서로에게 몸으로 아주 모자라게 갖추어 놓았다. 이것은 이미 그렇게 된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창조의 회의에서 개선안을 낸다면, 너희가 순수하게 남성적인 남자라는 생각을 들고 나오는 것(앞의 주 17)과 마찬가지로 너무 늦을 것이다. 누가 그것을 바꿀 수 있겠는가?

§ 55. 앞에서 묘사한 알바니아식 눈의 향유와 게그인의 입맞춤(앞의 § 32)에 그치는 우르닝의 사랑은, 역시 자연에 뿌리박은 사랑의 충동이 자신에게 요구되는 완전한 억압에 맞서 격렬히 들고일어나는 곳, 자연이 문을 두드리며 제 몫을 요구하는 곳에서는 요구될 수 없다. 그곳에서 그런 요구는 창조주의 계획을 완전히 벗어난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곳에서는 하느님 자신조차 그 억압을 요구할 권리가 없었다고. 그것은 직접적인 반자연, 자연에 맞선 싸움, 정신적 거세일 것이다. 충동은 모든 성애의 필수 구성 요소다. 게그인도 그 충동을 느낀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채우기도 한다. 그는 여자와 결혼한다. 어떤 혐오도 그를 거기서 물러나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혐오에 지배되는 순수한 우르닝에게는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충동을 강제로 억누르는 것과 똑같이 자연에 반하는 일이다. 결혼하라는 것을, 앞의 내용(§ 38)에 따르면, 너희 스스로도 더는 우리에게 해결책으로(하물며 “치료제”로!) 제안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본성을 너희의 본성으로 바꾸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것은 뿌리 뽑을 수 없는 것처럼 바꿀 수 없는 것이다.

§ 56. 그러므로 너희가 너희의 사랑에서 저 자연에 맞선 싸움을 정당하게 물리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너희의 사랑에서 충동을 절대적으로 억압하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채워 주는 것이 (도덕적 절제의 한계 안에서)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채워 주는 것은 우르닝의 사랑에서도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우르닝의 사랑은 너희의 사랑이 죄와 악덕과 범죄가 되는 것과 같은 전제 아래서만 그런 것이 된다. 그것은 그 본성 전체에서 너희의 사랑과 똑같이 순수하고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 57. 성적 본성의 눈짓을 따르는 것은 너희 자신에게는 다툼 없이, 또 다툴 수도 없이, 타고난 인권이요 자연의 목적이다. 그런데 너희 자신에게 인권인 것을 우리에게는 “도덕의 이름으로” 평생 죄와 악덕이라는 낙인을 찍겠다는 것인가? 그것은 두 가지 잣대로 재는 일이다! 이 가르침은 사이비 도덕률이요, 불의와 오만의 선고다. [47] 저 눈짓을 따르는 것은 우리에게도 타고난 인권이요 실제의 참된 자연 목적이다. 비록 번식에 이바지하는 너희의 사랑에 견주면 변형된 목적이기는 하지만 말이다(『인클루사』 제100절 참조).

우르닝의 사랑에서 충동을 채워 주는 것의 도덕적 정당성은 간단히 말해 이렇다.

자연은 우르닝의 사랑에서도 충동을 채워 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 58. 있을 법한 반론에 대한 답변.

a) 이렇게 채워 주는 것, 이렇게 따르는 것을 위해 너희는 저마다 그것을 재가하는 바깥 형식, 곧 혼인을 갖추고 있다. 우리의 사랑을 위해 재가하는 형식이 아직 찾아지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우리 탓인가? 우리 자신의 마음이야말로 그것이 없음을 참으로 뼈아프게 느낀다! 그러나 이 빈틈이 우리 본성의 권리를 깎아 내릴 수는 없다. [48]

b) 우르닝의 사랑은 물론 번식에 이바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이 책임질 일이지 우르닝이 책임질 일이 아니다. 그가 이 사랑을 고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의지를 갖지 못한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또 하나, 사랑은 그 자체로 목적이기도 하고, 그 자체로 자연의 목적이기도 하다(바로 앞의 § 57 참조).

c) 그리스도교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그토록 즐겨 들이미는 로마서에서 자연을 떠나는 것만을 금한다. 우리는 자연을 떠나지 않았다(『아라 스페이』 제28~40절).

이 모든 것을 따져 보면, 타고난 우르닝의 사랑을 박해하는 사람은 내 생각에 꼭 저 영리한 사람만큼 슬기롭게 행동하는 셈이다. 그 사람은 암탉이 알을 낳았다고 “자연에 반한다”며 벌을 주었는데, 그는 암탉에게 새끼를 살아 있는 채로 낳는 것만 허락해도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IX. 현행법의 가장 인정할 만한 목적과 잔인한 결과.

§ 59. 현행법은 우리에게 아직 일반적인 성 본성, 곧 우르닝적이지 않은 본성이 억눌린 채로 남아 있다고 전제한다. 그러고 나서 다음 목적을 추구한다.

우리가 등을 돌렸다는 그 자연으로 형벌로 위협하여 우리를 강제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 목적은 어쨌든 수긍할 만할 것이다(이 수단도 그러한지는 따지지 않고 두자). 다만 그 전제가 옳기만 하다면!

그런데 그 전제는 들어맞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자연의 자리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으로 더는 되돌려질 수 없다.

§ 60. 그러므로 사실상 법은 터무니없고, 게다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목적을 추구한다.

곧 한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더 높은 손이 심어 놓은 참된 본성을 강제로 뿌리 뽑거나, 또는 그것과 영원히 낯선 다른 본성으로 강제로 밀어 넣으려는 것이다.

그런데 우르닝의 체질 또한 바로 참되고 바꿀 수 없는 자연이기 때문에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제 권리를 가지므로, 현행법이 사실상 추구하는 저 목적이 터무니없고 이룰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법 자체가 (아무리 가장 정직한 의도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실은 명백히 잔인하고 권리를 침해한다.

법이 그 선의의 의도와는 전혀 달리 사실상 추구하는 목적은 인권의 직접적 침해다.

§ 61. 입법자에게는 모든 사람에게 타고난 인권, 곧 지상이 베푸는 가장 큰 행복, 사랑과 사랑의 행복을 누릴 권리를 하필 우르닝에게서만 평생 잘라 낼 권리가 전혀 없다. 인생은 이토록 짧다. 그런데 인생이 맺는 가장 향기로운 열매를 너희가 가득 차린 식탁에서 맛보는 동안, 입법자는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는 하되 우리에게는 평생 맛보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인가? 우리를 탄탈로스의 고통에 넘기겠다는 것인가? 누가 그에게 그럴 권리를 주었는가?

말했듯이, 이것은 결코 입법자의 의도도 아니다! 그렇다면 좋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법이 자신의 정당한 의도와 실제로도 일치하게 하라! 그는 우리에게 우리의 인권을 돌려주라! 그리고 우르닝의 사랑 때문에 중금고에서 시들어 가는 이들에게 자유를!

X. 프랑스와 바이에른에서의 남자와 남자의 사랑에 대한 불처벌

§ 62. 우르닝의 사랑을 처음으로 처벌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공은 프랑스에 돌아간다. 1810년 형법전(code pénal)은 이전의 관련 처벌 규정을 모두 그냥 빼 버렸다. 쇼보와 엘리가 전하듯 [49],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피하려 했다.

“그토록 자주 가정생활을 들쑤시고 오히려 더 큰 추문을 낳는 더럽고 추잡한 수사.”

프랑스의 모든 실무가가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이 해금으로 인한 불이익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50]

§ 63. 1813년에는 바이에른이 뒤따랐다. 그곳에서도 남자와 남자의 사랑에 대한 처벌 규정은 그냥 삭제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 [51]

“사람이 음란한 행위로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도덕의 계율만을 넘는 한, 현행법은 그런 행위에 대해 아무것도 규정하지 않았다.”(곧 그것을 처벌 대상으로 선언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 “그런 행위는 그것으로 다른 사람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는 한 입법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하물며 남자와 남자의 사랑이 순수한 자연의 눈짓에 응할 뿐이라면, 인간 존엄이나 도덕률을 해치지 않고 자연의 권리에 부합한다면, 그것은 처벌받아야 할 까닭이 얼마나 더 적겠는가?

바이에른은 1861년 11월 10일 새 형법전을 공포했다. 정부는 이를 위한 1855년 초안 제217조에서 우르닝의 사랑에 대한 옛 처벌을 되살리려 했다. 그러나 1856년과 1857년 제2원 위원회가 이에 단호히 맞섰고, 그 결과 1861년에도 처벌은 다시 도입되지 않았다.

우르닝의 사랑을 해금한 형법전은 오늘날 특히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에서 시행되고 있다.

§ 64. 프랑스 형법전과 바이에른 법에 따르면 우르닝의 사랑의 행위는 여자와의 사랑의 행위가 처벌되는 것과 같은 전제 아래서만 처벌된다. 곧 (가해졌거나 위협된 강제로, 아동 남용 따위로) 권리가 침해되었거나, 성적 행위가 공중의 눈앞에서, 그러니까 파렴치한 방식으로 행해졌을 때다. 그 밖의 모든 경우에는 이 사랑이나 저 사랑이나 완전히 처벌받지 않는다.

§ 65. 그러므로 프랑스와 룩셈부르크와 바이에른에서는 우르닝이 자신의 자유와 동료 시민의 존중을 평온하게 누린다. 반면 이를테면 브레멘에서는 그가 징역에 갇히고, 교양 없는 무리뿐 아니라 교양 있는 무리까지 거친 군중이 그를 명예를 잃고 앞으로는 인간의 행복을 요구할 자격도 없는 파렴치한으로 여긴다. 머리털이 곤두서는 일이 아닌가?

북독일은 언제까지 망설이다가 순화된 입법의 본보기를 뒤따르고, 물려받은 처벌 규정을 지움으로써 물려받은 죄를 씻을 것인가?

§ 66. De lege lata(현행법상). 그러나 법원이 현행법에 관한 그롤만의 근거 탄탄한 법리를 적용한다면 명시적인 삭제는 거의 필요 없을 것이다. [52]

“그것이 다루는 대상에 대한, 그릇된 것으로 인정된 생각에 바탕을 둔 법은 우리에게 더는 법의 효력이 없다.”

우르닝의 사랑이 타고난 것임이 인정되기만 하면, 이 한 가지 법리만으로도 물려받은 박해 체제는 땅에 쓰러질 것이다. 일찍이 마녀 박해 체제가, 사람들이 전에는 마녀의 술법에 대해 그릇된 생각을 품었다는 것을 인정하자마자, 바로 이 법리로 사멸했듯이 말이다. 저기서는 마녀의 술법이라고 생각된 것이, 여기서는 자연에서 벗어났다고 생각된 것, 곧 자연에 대한 반역이라고 생각된 것, 반자연이라고 생각된 것이 문제다.

XI. 브레멘의 슬픈 명성. 1866년의 자살. 오스트리아에서 밝아 오는 더 나은 날의 여명.

§ 67. 오늘날 자유시 브레멘은, 비록 옳게 행동한다는 확신에서이긴 하지만, 자연을 박해하는 데서 유달리 두각을 나타냄으로써 슬픈 명성을 얻고 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도시, 성벽을 두르고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 세워진 도시도 일찍이, 역시 옳게 행동한다는 확신에서, 마녀를 불태우는 일에 두각을 나타냄으로써 침울하게 빛나는 명성을 얻었다.

뷔르츠부르크 연대기에 1634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면,

“첫 번째 화형에서 마녀 3명을 불태움, 두 번째 화형에서 마찬가지로 5명.”

나는 묻는다. 어느 도시가 스스로에게 더 깊은 낙인을 찍었는가? 암흑의 시대에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을 한다는 망상 속에서 마녀를 3명, 5명, 100명 불태운 뷔르츠부르크인가, 아니면 계몽과 진보와 법치 국가의 시대에, 한마디로 19세기에, 1864년 12월부터 1867년 12월까지의 기간에만 정당한 국민 4명, 사람 4명 – 자연의 요구와 자연의 권리를 따랐을 뿐 참으로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이들 – 의 명예와 삶의 행복을 형사 수사로 짓밟은 브레멘인가?

§ 68. 오 치욕이여, 오 피의 죄여! 1864년 12월 19일 판사 포케, 미고, 폰 그뢰닝은 루트비히 알렉사를 남자와 남자의 사랑의 행위를 이유로 징역 9개월에 처했다.

1866년에는 같은 사안으로 우르닝 2명에게 형사 수사를 개시하고 그들을 중금고에 던져 넣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이 치욕을 견디고 살아남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1866년 9월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53] 예전에 마술을 부렸다는 혐의로 미결 구금 속에 시들게 한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보라! 악마가 그들을 데려갔다!” 그렇다면 해 질 녘 그 독방에서 일그러진 시신을 실어 내야 했던 이 사람은 대체 누가 데려갔는가? 이 독방 바닥의 핏자국을 어떻게 씻어 내려는가? 누가 내게 말한다. “하지만 그는 밧줄을 썼소. 그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생을 마쳤소.” 아, 그렇군! 내가 잘못 알았다. 그리고 맥베스 부인도 잘못 알았다. 어떻게 그렇게 어리석은 공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손은 참으로 희고 깨끗했으며, 남은 피 한 점 없이, 붉은 얼룩의 흔적 하나 없이 말끔했다. 마치 – 그래, 마치 브레멘 형사 미결 구치소의 독방처럼! – – 그런데 내게는 이렇게 여겨진다. 다른 손들과 다른 독방들에는 묻어 있지 않은 무언가가 거기에는 묻어 있었다고!

오, 이 독방이여! 19세기 형사 사법에 대해 소리 높여 증언하는 이 증인이여! 제네바에서는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 아직도 – 진기한 구경거리로 – 16세기 형사 사법이 세르베투스를 가두었던 감옥을 보여 준다. 그의 삼위일체 개념이 개혁파의 개념과 달랐기 때문에 가두었다가, 마침내 법의 가장 좋은 형식을 갖추어, 가장 엄격한 의무감으로 “이단을 이유로” 그를 처형대로 끌고 갔던 것이다. [54] 브레멘도 이제 진기한 구경거리를 하나 갖게 되었다. 브레멘에서도 앞으로 독방 하나를 보여 줄 것이다. 19세기의 사법이 법의 가장 좋은 형식을 갖추어, 그리고 마찬가지로 가장 엄격한 의무감으로 개시한 형사 수사로 자연이 고문당해 죽은 독방을!

§ 69. 그리고 한 해가 채 지나지 않아, 피 흘림 없던 그 독방이 한 해 동안 비어 있으면서 시체 냄새를 겨우 떨쳐 냈을 즈음, 그들은 1867년 10월 3일 다시 한 사람을 그 안에 들여보낸다 – 가장 훌륭한 국민, 가장 신의 있는 친구, 가장 정직한 성품을 – 반자연이라고 생각된 것을 이유로. [55] 그리고 오늘, 12월 7일에도 그는 아직 그 안에서 시들어 가야 한다. 그에게는 어떤 속죄를 해 줄 것인가? 알렉사에게는 어떤 속죄를? 자살로 내몰린 이의 창백한 그림자에게는 어떤 속죄를?

§ 70. 그러나 이 사람은 밧줄을 잡지 않을 것이다. 보라! 벌써 저 멀리서 더 나은 날의 여명이 밝아 오고, 그 한 줄기 빛이 그의 어두운 독방의 중금고 고독 속에까지 스며들었으니. 그는 우리 사랑이 자연에 반한다는 망상에 바쳐지는 제물 가운데 마지막 제물이 될 것이다. 아니,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빛은 오스트리아에서 나온다.

1867년 6월 26일 오스트리아 법무 장관은 새 형법 초안을 제국 의회에 제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황제 정부는 학문의 연구를 주의 깊게 지켜보았습니다. 정부는 이 연구의 성과를 이 법안에 반영했습니다.”

이 법안은 지금 위원회에서 심의되고 있다. 누가 빈에서 내게 그것을 보내 주었다. 이 정부안은, 학문이 이미 물리치고 야만으로 인정된 이 사랑에 대한 박해를 완전히 거두기로 결단했다. 이 법안도 프랑스와 바이에른의 법처럼 우르닝의 사랑의 행위를 범죄 목록에서 완전히 지웠다.

브레멘은 언제까지, 프로이센은 언제까지, 북독일은 언제까지 이런 삭제로 이끄는 학문의 연구를 차갑게 지나칠 것인가? 이 땅에서 박해는 언제나 마침내 배가 부를 것인가?

그러나 너는 내게 찬미받을지어다, 오 오스트리아여!

XII. 독일 입법자들에게 보내는 촉구.

§ 71. 물론 나는, 관련된 부류의 사람들 스스로가 비겁하여 소심하게 목소리를 삼키고 있는 한,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이 박해를 두고 입법 자체에 큰 비난을 퍼부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다른 한편 사람들도 기꺼이 인정할 것이다. 누군가가 입법자에게 두려움 없이 솔직하게 들어 달라고 청하는 첫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려 한다면, 그런 시도의 밑바탕에는 적어도 정직한 노력이 있고, 그 시도에는 도덕적 정당성도 깃들어 있다는 것을.

그런데 나는 이 문제에서 박해받는 이들을 위해 정의를 청하는 것을 내 평생의 과제로 삼았다.

나는 홀로 서 있지 않다. 수백, 아니 수천 명이 내 뒤에 서 있다. 그들 모두가 나와 함께 정의를 간청한다!

§ 72. 이에 따라 독일의 다른 모든 입법자에게, 그들의 책임을 일깨우고 그들의 정의감에 호소하며, 다음과 같이 촉구한다.

1) 오스트리아, 바이에른, 룩셈부르크를 본보기로 삼고, 이미 너무 오래 무시당하고 형사 사법에 침해당한 자연의 권리를 숙고하여, 남자와 남자의 사랑에 여자에 대한 사랑과 법 앞의 평등을 보장하고, 따라서 특별히 남자와 남자의 사랑의 행위를 처벌 대상으로 선언하는 모든 규정을 조속히 폐지할 것.

2) 그리고 남자와 남자의 사랑의 행위로 기소되어 미결 구금이나 형 집행 구금 중에 있는 이들을 모두 – 수사를 중지하거나 유죄 판결을 파기하고, 또 그들에게서 박탈되었을지 모르는 명예권을 되돌려 주면서 – 조속히 석방할 것.

망설이는 자는 누구나 부당하게 박해받는 이 앞에서 망설인 매 순간에 대해 책임이 있다!

뷔르츠부르크, 1867년 12월 7일.

카를 하인리히 울리히스.

“『멤논』.”

남자를 사랑하는 우르닝의 성 본성.

자연과학적 서술.

몸과 마음의 자웅동체성.

Anima muliebris virili corpore inclusa(남성의 몸에 갇힌 여성의 영혼).

누마 누만티우스 저작의 속편으로서:

일곱째 책.

『멤논』 제2부.

“Introite! nam et hoc templum naturae est.”(들어오라! 여기도 자연의 신전이니.)

지은이

카를 하인리히 울리히스,

재야 학자, 전 하노버 왕국 관구 배석 판사, 독일 법률가 대회 회원. 괴팅겐에서 학술상을 받은 논문 『de foro reconventionis』(반소의 재판적에 관하여)와 베를린에서 학술상에 값한다고 인정받은 논문 『de pace Westphalica』(베스트팔렌 평화 조약에 관하여)의 저자.

머리말. 타고난 본성 때문에 성애의 끌림으로 오로지 남성에게만 이끌리는 남자들을 이 책은 우르닝이라 부르고, 그들의 사랑을 우르닝의 사랑(남자와 남자의 사랑), 그 현상 전체를 우라니즘이라 부른다(“우르닝”이라는 이름은 『빈덱스』 제2절에서 설명한다). 우르닝은 자연의 수수께끼다. 그의 사랑의 충동은 여성의 것이다. 그는 몸으로만 남자다.

성인 우르닝의 수:

독일(독일 전체)약 25,000명
오스트리아-헝가리약 25,000~28,000명
프로이센약 10,000~12,000명
빈약 1,000명
베를린약 500~1,000명

독일에서는 전체 인구 약 2,000명당, 또는 성인 남자 500명당 평균 한 명의 성인 우르닝이 산다. 따라서 주민 10만 명의 도시에는 평균 50명이 산다.

알림. 법률가 대회 대표단이 또다시 거부했다(!). 1868년 6월 2일 결의이며, 1867년 8월 29일 전체 회의의 동의를 근거로 들었다(이에 대해서는 『글라디우스 푸렌스』 참조). 같은 달 15일 의장인 뮌헨의 칼프 박사가 내게 통지했다. 6월 2일 표결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아직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