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 혁명과 데르그의 권력투쟁
제정에 맞선 다양한 개혁 요구는 어떻게 데르그 군정과 멩기스투의 권력으로 귀결됐는가?
1974년 군부 위원회 데르그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폐위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사회적 불만과 군대의 동요에서 출발한 혁명은 군사 통치와 급진적 사회개혁으로 이어졌다.
기근·물가·군대 불만이 겹친 위기
1974년 혁명은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에 반대하는 하나의 조직이 계획대로 집권한 사건이 아니었다. 기근에 대한 정부 대응과 은폐, 지주제의 불평등, 물가 상승, 병사들의 열악한 급식·급료, 학생과 노동자의 정치적 요구가 겹쳤다. 군부대의 반란과 도시 시위는 정부 개편이나 제한적 헌법개정만으로 해소되지 않았고, 제정의 정통성과 통치 능력을 함께 흔들었다. 근거 1 · 근거 2
데르그의 등장과 황제 폐위
6월 군·경찰·영토군의 대표들이 구성한 조정위원회가 데르그로 알려지게 됐다. 처음부터 단일 지도자가 모든 권한을 장악한 것은 아니었으며, 군부 안에도 출신·계급·정치적 구상의 차이가 있었다. 데르그는 체포와 인사 개입을 통해 기존 국가기구를 단계적으로 무력화했고 9월 12일 황제를 폐위했다. 병력을 실제로 동원할 수 있다는 점이 민간 개혁세력과 구별되는 결정적 자원이었다. 근거 2
아만·테페리·멩기스투의 권력투쟁
초기 국가원수 아만 미카엘 안돔은 에리트레아 분쟁의 협상 해결과 구금된 옛 지도자들의 처우 등을 놓고 데르그 다수와 충돌했다. 1974년 11월 아만이 사망하고 옛 정부 인사들이 집단 처형된 뒤 테페리 벤티가 의장이 됐다. 그러나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과 아트나푸 아바테를 포함한 군 내부 경쟁은 계속됐다. 1977년 2월 테페리가 살해되고 11월 아트나푸도 제거되면서 멩기스투의 우위가 확립됐다. 근거 3
토지개혁: 소유권과 경작권의 변화
1975년 3월 농촌 토지 국유화는 소작제와 지주의 지대 수취를 폐지하고 농민협회를 통해 토지 이용을 재편했다. 농민에게 경작할 토지가 배분됐지만 토지 자체를 자유롭게 매매하는 사유재산으로 준 것은 아니었다. 지역마다 기존 토지제도가 달랐으므로 개혁의 효과와 저항도 달랐다. 토지 국유화와 이후의 집단농장·국영농장 확대를 동일한 조치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근거 4 · 근거 5
은행·보험·주요 기업의 국유화와 도시 토지·임대주택의 국유화도 이어졌다. 도시 주민조직인 케벨레와 농민협회는 개혁을 집행하고 생활 서비스를 조직하는 통로였지만 주민 감시와 정치적 통제의 수단이기도 했다. 학생·교사의 농촌 파견은 교육과 개혁을 확산하려 했으나 강제 동원과 군사적 규율은 혁명을 지지했던 집단과 군정 사이의 갈등을 키웠다. 근거 4
민간 좌파와의 충돌, 적색테러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당(EPRP)은 민간인이 주도하는 정부를 요구했고, 전에티오피아 사회주의운동(MEISON)은 한동안 군정과 협력하며 내부에서 혁명을 이끌려 했다. 두 조직 모두 사회주의를 내세웠으므로 갈등을 단순한 사회주의 대 반사회주의로 정리할 수 없다. 노동조합의 자율성, 학생의 정치 활동, 군부가 권력을 언제 누구에게 넘길지가 핵심 쟁점이었다. 근거 3 · 근거 4
EPRP의 암살·공격과 정부의 탄압이 격화되는 가운데, 1977~1978년 적색테러는 실제 또는 의심받는 반대자들을 대규모로 구금·살해했다. 학생과 청년, 민간인도 광범위한 피해를 입었고, 군정과 협력했던 MEISON 역시 제거 대상이 됐다. 상대 진영의 폭력은 국가에 의한 무차별 처벌의 책임을 없애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데르그는 혁명의 경쟁적 정치 공간을 닫고 당·대중조직을 위에서 통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근거 6
포고령이 내려오기까지: 누가, 왜 그토록 빨리 결정했나
1975년 3월 4일부터 효력을 갖도록 한 <농촌 토지 공유화 포고령>(제31호, 관보 4월 29일 자)은 데르그 정권이 내린 결정 중 가장 급진적인 것이었지만, 그 내용은 군부가 스스로 고안한 것이 아니었다. 이 포고령은 황제 폐위 직후부터 대학생들과 도시 시위대가 요구해 온 ‘토지를 경작자에게’라는 구호에 대한 응답이었다. 데르그는 12명의 장관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꾸려 토지 소유 제도와 지주·소작농의 관계를 조사하게 했고, 불과 몇 달 만에 결론이 나왔다. 이렇듯 빠른 처리에는 두 가지 계산이 있었다. 하나는 군부가 아직 자신의 지지 기반이 없었기에, 가장 큰 불만의 뿌리를 뽑아 남부의 소작농을 편으로 만들려 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권 내부의 권력투쟁 속에서 누가 더 과감한 개혁의 주도권을 쥐는가가 지도부 서열을 가르던 시기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포고령은 근거 조항이 채 마련되기도 전에 먼저 선포되고, 세칙은 뒤에 잇달아 발표되는 순서가 됐다.
포고령은 모든 농촌 토지를 에티오피아 인민의 공동 재산으로 정하고, 지주에게 아무런 보상 없이 소유권을 몰수했으며, 소작제를 폐지하고 한 농가에 배정하는 토지를 10헥타르 이하로 묶었다. 기계화 농장과 근대적 축산 농장 같은 대규모 농장은 국가 관리로 넘겼다. 수백 년간 토지의 10~20퍼센트를 보유해 온 정교회도 토지를 잃고 데르그가 지급하는 생계비에 의존하게 됐다. 그러나 종이 위의 몰수만으로 땅이 경작자에게 갈 리 없었다. 데르그는 시행의 힘을 확보하기 위해 포고령 제8조와 제10조에 따라 농민들을 최소 800헥타르 구역의 농민협회로 조직하도록 했고, 이를 위해 6만 명이 넘는 대학생들을 ‘협동을 통한 발전 운동’(제메차)이라는 이름으로 농촌에 파견했다. 학생들의 임무는 농민에게 혁명의 목표를 가르치고 토지 재분배를 집행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생겼다. 남부의 소작농(일부 지역에서는 지주의 수취분이 수확의 절반에 달했다)은 몰수된 땅을 받아간 뒤에도 바로 안심하지 못했다. 옛 지주들은 자신의 재산을 되찾으려 했고, 일부 몰수받은 소작농은 몰래 예전 주인에게 예물을 바치며 지위를 유지하려 했다. 북부 고원에서는 사정이 반대였다. 리스트(rist)라는 씨족 공유지 제도가 오래 지배해 온 북부에서 토지 개혁은 대지주 축출을 뜻하지 않았고, 오히려 씨족의 유전적 권리에 대한 공격으로 읽혔다. 포고령 제19조가 공유지 경작자에게 기존 경작권을 인정했음에도 북부 농민들은 이 조치를 의심했고, 제메차 파견대가 토지와 소의 집단화를 선동하기 시작하자 저항은 더 거세졌다. 학생들은 정부 관료보다 더 급진적이고 정치적으로 세련된 경우가 많아, ‘혁명을 농촌에 심는다’는 명분으로 온 이들이 도리어 국가 행정과 충돌하는 일이 잦아졌다. 결국 1976년 데르그는 농민협회와 도시 케벨레의 권한을 법으로 옥죄며 중앙 통제를 강화했다. 토지 개혁이 지주 계급을 무너뜨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집행한 세력, 곧 학생과 농민협회를 정권이 끝내 믿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그 불신이 개혁 발표 몇 달 만에 드러났다는 것이 이 포고령이 남긴 가장 중요한 정치적 결과다.
1977년 2월 3일과 11월 12일: 두 번의 제거가 남긴 것
멩기스투의 우위는 한 번의 쿠데타가 아니라 열 달 간격의 두 번의 제거로 완성됐다. 1976년 12월 29일 테페리 벤티 의장은 데르그 개편을 발표하며 멩기스투의 권한을 줄이고 그의 지지자들을 지방으로 내보냈고, 모구스·알레마예후 등 개편 주도 인물들을 요직에 앉혔다. 멩기스투를 ‘날개 꺾인’ 인물로 본 이들의 계산은 한 달여 만에 무너졌다. 1977년 2월 3일 정례회의 도중 다니엘 아스파우 중령 휘하 병사들이 테페리와 의심받는 간부들을 체포해 궁궐 구내 차고에서 총살했다. 라디오 에티오피아는 멩기스투가 테페리 일행을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당(EPRP)의 비밀 지지자로 규정하고, ‘과학적 사회주의’를 EPRP 정부로 대체하는 47쪽 계획문서를 테페리에게서 발견했다고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같은 방송이 멩기스투와 부의장 아트나푸 아바테가 무사하다고 강조한 점은, 이 사건이 데르그 전체에 대한 쿠데타가 아니라 데르그 내부의 권력투쟁이었음을 드러낸다. 타임지는 황제 폐위 당시 120명이던 평의회가 이번 처형으로 약 60명으로 줄었다고 셌다. 아트나푸는 2월 3일 회의에 불참해 살아남았다. 민병대 훈련 부대에 깃발을 수여하러 수도를 떠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데르그에 남은 마지막 독립적 인물이 됐고, 나아가 ‘혁명가 한 명이 죽으면 반혁명가 천 명을 처형하겠다’고 공언하며 적색테러의 얼굴이 됐다. 그러나 11월 12일 그 역시 멩기스투의 명령으로 총살형에 처해졌고, 다음 날 국영 방송은 6쪽짜리 이념적 기소문과 함께 사형을 보도했다. 사학자 바루 제우데는 데르그의 초기부터 그 정체성을 가장 잘 상징했던 아트나푸의 처형이 곧 데르그 자체의 종언을 사실상 표시했다고 평가한다. 이로써 1974년 집단 지도부로 출발한 위원회는 일인 지배로 귀결됐고, 이 두 번의 제거가 남긴 것은 더 이상 견제할 동료가 없는 멩기스투와, 민간 좌파를 향해 곧바로 격화될 국가폭력이었다.
적색테러의 세 물결: 통치자가 무기를 쥐여 준 거리
적색테러는 이름 그대로 공포가 아니라 반(反)봉기 작전이었다. 데르그 스스로 ‘적색테러(케예 시비르)’라는 말을 당의 명칭으로 썼고, 러시아 내전의 그것을 본떴다. 출발은 1976년 중반이었다. 정권이 학생 반대파를 단속하자 EPRP는 데르그 간부와 그 산하기관인 케벨레(도시주민회) 지도자들을 암살하기 시작했고, 9월 23일에는 멩기스투에 대한 아홉 차례 공식 집계된 암살 시도 중 첫 번째가 있었다. 10월 2일 EPRP는 정부 간부이자 메이슨 소속인 피크레 메리드를 죽였고, 두 달 사이 고위 공직자 열 명과 비밀경찰 열다섯 명이 살해됐다. 멩기스투는 EPRP의 산발적 암살전을 ‘백색테러’라 불렀고, 아트나푸 아바테는 ‘혁명가 한 명이 죽을 때마다 반혁명분자 천 명을 처형하겠다’고 공언했다.
공포가 대량 살육으로 바뀐 것은 1977년 2월 멩기스투가 데르그 의장 테페리 벤티를 제거하고 막후 권력을 넘겨받으면서다. 4월 17일 연설에서 멩기스투는 피(처럼 보이는 액체)가 든 병 세 개를 광장 바닥에 내리쳐 깨뜨리며 ‘반혁명분자에게 죽음을, EPRP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쳤다. 핵심 장치는 무기였다. 아트나푸가 충성파로 판단되는 케벨레 조합원에게 무기를 나눠주며 ‘혁명수호대’를 조직했고, 한 달 만에 이 분대들이 무장했다. 그러나 마리나 오타웨이와 데이비드 오타웨이가 기록하듯 이 분대들이 모두 데르그 편을 든 것은 아니었다. 케벨레별로 장악한 정치 파벌이 달랐고, 상당수는 EPRP나 메이슨의 손에 있었다. 국가가 들려준 무기가 곧 파벌 내전의 무기가 됐다.
첫 물결은 1977년 4~6월이었다. 3월 23~27일 아디스아바바 전역을 수색해 천여 명을 구금했다. 4월 29일 밤부터는 메이데이 시위를 막기 위해 농촌에서 불러올린 방위대가 병사·케벨레 간부와 함께 EPRP 지지 의심자들을 학살했다. 정부는 사흘간 사망자를 732명으로 집계했지만 실제로는 2천 명 이상이라는 관측도 있다. 6월 4~5일 밤에는 학생 약 400명이 살해됐다. 첫 물결에서 최소 2,500명이 죽었다. 시신은 전날 밤의 살육을 광고하듯 길가에 남겨졌고, 시신을 확인하려던 친지들마저 처형·구금 대상이 됐다.
두 번째·세 번째 물결은 표적이 바뀌었다는 점에서 더 의미심장하다. EPRP가 수도에서 사실상 분쇄되어 티그라이 농촌으로 후퇴한 뒤에도 살육은 멈추지 않았다. 1977년 8월 멩기스투의 측근이자 메이슨 지도자인 하일레 피다가 구금됐고, 그 뒤 몇 달간 수많은 메이슨 간부가 잡혀갔다. 10월의 두 번째 물결에서는 3천~4천 명이 죽었는데, 상당수는 국가가 아니라 메이슨과 EPRP 잔여 세력 간의 파벌전 과정에서 살해됐다. 두 조직 모두 비밀경찰 요원이 깊숙이 침투해 상대 진영 간부를 죽이고 정권은 책임을 부인했다. 12월 16일 밤 300명이 죽었고, 12월 21일에는 방위대가 회교사원에서 기도하던 사람들에게 기관총을 쐈다. 1977년 말까지 국제앰네스티는 수도 중앙교도소와 291개 케벨레 구치소에 3만 명의 정치범이 수감된 것으로 집계했는데, 이는 매우 보수적인 추산이었다. 사망자 총수는 최소 3만 명, 많게는 수십만 명으로 추정되며 1980년까지 처형은 이어졌다. 적색테러가 보여준 것은 권력의 탈정치화가 아니라, 정권이 민간 좌파 전체를 삼키는 과정이었다. 처음에는 EPRP, 다음에는 정권과 협력했던 메이슨이었다.
무엇이 끝났고 무엇이 남았나: 50년 뒤에도 갈리는 세 가지 판정
1977년 말의 에티오피아에서 확실히 끝난 것은 무엇이었나. 첫째, 제정이다. 1975년 3월 공화국 선포로 수천 년의 군주제가 법적으로 소멸했고, 같은 달 4일의 농촌 토지 국유화는 남부의 소작제를 해체했다. 둘째, 지주계급의 물적 기반이다. 남부 오로모 지역에서 소작농들은 네프테냐 지주를 몰아내고 스스로 토지를 점유했다. 1978년까지 공식 집계로 농민협회 2만8583개가 730만 호를 포괄했고, 50만 명 규모의 농민 방위대가 그 뒤를 받쳤다. 셋째, 도시의 소유관계다. 1975년 1월 1일 전 은행과 보험사 13곳이 국유화됐고, 그해 7월 26일에는 도시 토지와 임대주택이 국유화됐다. 1976년 말 제조업의 3분의 2가 산업부 관할 아래 들어갔다. 이 세 가지는 되돌려지지 않았다.
확실히 끝나지 않은 것은 훨씬 많았다. 정치적 참여는 군부 독점으로 끝났다. 1975년 5월 1일 민간 정부 복귀를 요구한 시위에 군인들이 발포했고, 1976년 4월의 민족민주혁명 강령은 EPRP 강령의 사회적 요구 대부분을 흡수하면서 정작 핵심이던 민간 정부 복귀 조항만 빼놓았다. 노동의 자율 조직도 끝났다. 1974년 이래 불법이던 파업은 1975년 노동법으로 금지됐고, 1976년 말 CELU는 해산되고 국가가 세운 전에티오피아노동조합(AETU)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결정적으로, 민족문제는 손대지 않은 채 남았다. 에리트레아 전쟁은 계속됐고, 북부 티그라이·고잠·베겜디르에서는 토지개혁이 ‘오로모-무슬림의 위협’으로 규정되면서 저항이 일어나 1977년 무렵 이 지역 상당부가 정부 통제를 벗어났다. 계급적 지배관계는 재편됐지만 국가와 민족들 사이의 관계는 그대로였다.
역사학자들의 판정은 여전히 갈린다. 첫째 쟁점은 이것이 혁명이었는가, 쿠데타였는가이다. 막스네 멀리뉴와 프레드 핼리데이는 1982년 논문 「위로부터의 혁명」에서 이 과정을 ‘급진화와 혁명 후 공고화’로 규정했다. 그들에 따르면 1974년 9월 이후의 장교단은 비밀 당원도 좌익 군사 음모집단도 아니었고, 농민과 도시 빈민의 압력, 좌익 정당들의 압력, 데르그 내부의 파벌투쟁, 그리고 생존을 위한 구질서 사회경제적 기반 파괴라는 조건이 이들을 급진화했다. 즉 의도가 아니라 조건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반면 일부 연구자는 1974년 1월 12일 네겔레 보레나의 반란을 출발점으로 보는 통설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며, 이 사건을 민중 봉기가 아니라 군부의 점진적 장악으로 읽는다.
둘째 쟁점은 좌익의 책임이다. 멀리뉴와 핼리데이는 EPRP가 1976년 9월부터 도시 암살전으로 전환한 것을 ‘심각한 오류’로 평가한다. AETU 지도부와 옐카티 66 사상학교 교관, 선출된 케벨레 간부를 암살한 것은, 어떤 정치적 입장이든 에티오피아 혁명을 밀어붙이려던 사람들을 공격한 것이었고, 상대의 반격 능력을 치명적으로 과소평가한 판단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글에서 EPRP의 오류가 데르그와 그 민간 동맹의 행위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고 못박는다. 1974년 11월의 처형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주민에게 공포를 심으려는 것이었고, 1976년 말부터는 국가 정책의 중심이 됐다는 것이다.
셋째 쟁점은 이것이 사회주의였는가다. 이언 스콧 호스트는 2019년 글에서 데르그 시대 에티오피아를 실제 사회주의로 읽는 해석을 ‘완전히 부끄러운 일’이라 부르며, 국제 좌파가 좌파 어휘를 쓰는 군사 강자를 또 한 번 받아들이고 아프리카 최대 규모의 민간 공산주의 운동 중 하나였던 EPRP에 등을 돌렸다고 비판한다. 이 비판은 노선상 그대로 수용할 성질은 아니지만, 최소한 두 가지는 확인시켜 준다. 개혁의 이행 주체가 자발적 사회운동이 아니라 명령과 강제였다는 점, 그리고 그 결과를 좌파 진영 내부에서 가장 먼저 문제 제기한 이들이 희생자였다는 점이다.
이 세 쟁점은 하나로 수렴한다. 1974~1977년의 혁명은 소유관계와 계급관계를 바꾸는 데 성공했으나, 그 변화를 누가 통제할 것인가라는 문제에서는 군부가 이겼다. 사회개혁의 확대가 정치적 자유의 확대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결과의 문제가 아니라 과정의 문제였고, 그래서 50년이 지난 지금도 문서와 기록으로 계속 따져야 하는 대상이다.
결과
혁명은 황제와 지주층의 제도적 권위를 무너뜨리고 토지·주요 기업의 소유관계를 바꾸었다. 그러나 민간 좌파와 노동·학생운동이 요구한 정치적 참여는 군부의 독점 아래 좌절됐다. 1977년 멩기스투의 우위와 적색테러는 사회개혁의 확대가 정치적 자유의 확대로 이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