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아브라모비치 이오페

Адольф Абрамович Иоффе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출신 배경: 심페로폴의 유대계 상인 가문으로 기록하는 사료가 다수이며, 카라임계 혈통 표기는 일부 사료에 한정된다) 1883–1927 ✕ 자살

브레스트-리톱스크 소비에트 대표단장, 트로츠키의 가장 오랜 동지

유서에서 자신의 죽음을 '싸우는 자의 항의'로, 트로츠키·지노비예프 제명을 '테르미도르의 시작'으로 규정했다. 유서 본문은 11월 15일 밤에서 16일 사이에 쓰고 16일자로 남겼으며, 사망일은 사료에 따라 16일과 17일로 갈린다.

트로츠키의 가장 오랜 동지이자 볼셰비키 외교관. 심페로폴의 유대계 상인 가문에서 태어나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1912년 오데사에서 체포되어 10개월 수감 뒤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가 1917년 2월혁명으로 풀려났다. 10월 봉기를 군사혁명위원회에서 준비했고 트로츠키의 증언에 따르면 그 의장으로 봉기를 이끌었다. 브레스트-리톱스크 소비에트 대표단을 이끌었고, 주독 전권대표로 베를린에 대사관을 세웠다가 1918년 11월 추방되었다(독일 혁명 준비 혐의와 실제 준비 활동이 함께 기록된다). 1922–23년 주중 대표로서 1923년 쑨원과 공동선언을 발표했고 이후 좌익반대파에 섰다. 1927년 해외 치료가 거부되자 자살로 항의했고, 사후 가족도 탄압받았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쑨원-이오페 선언: 국민당-소비에트 협력의 출발점

1922년 이오페는 중국과 일본의 특명대사로 임명되었고, 그해 7월 26일부터 베이징 주재 소비에트 정부 대표로 활동했다. 1922년 9월 23일 장춘 회의에서 그는 일본군의 북사할린 철수를 요구했고, 같은 해 9월 26일 일본 대표단이 철수를 거부하며 회의가 중단되었다. 1923년 1월 26일 이오페는 쑨원과 함께 《쑨원-이오페 선언》(孫文越飛宣言)을 발표했다.

선언은 소비에트 제도가 중국에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명시하고, 중국 통일을 위한 국민당의 투쟁에 소비에트가 협력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외몽골 문제와 중동철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았으나, 이 선언은 쑨원과의 정치적 관계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고 국민당-소비에트 협력의 기초가 되었다. 소련 측 사료는 이 문서를 대소비에트 정책을 규정한 중요 문서로,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의 협력 개시를 촉진한 계기로 평가한다. 1923년 7월 쑨원은 장제스를 러시아로 보내 소비에트의 군사·정치 상황을 시찰하게 했다. 1923년의 이 선언은 1924년 제1차 국공합작에 앞서는 시기에 놓인다.

이 선언에 이르는 상하이 교섭에서 공산당원이 국민당에 개별 입당해 당 안에 하나의 블록을 이루는 방안이 합의되었다. 개별 입당 방안은 선언 이후가 아니라 선언에 이르는 교섭 과정에 속한다.

중국에 근거를 두던 이오페는 선언 뒤인 1923년 일본으로 건너가 소비에트-일본 관계를 다루었으나, 그 시점은 사료에 따라 갈린다. 영어 사료는 1923년 1월로 적으나, 선언 이후의 일본행으로 보는 사료도 있다. 이 협상은 그가 중병에 걸려 모스크바로 돌아가야 하면서 끝났다. 병의 원인에 대해서도 사료가 갈린다. 한 전기에 따르면 일본에서 열대성 말라리아에 걸려 다리에 힘이 빠지고 두 차례 심장발작을 겪었으며, 러시아어 사료는 1923년의 중병을 다발성 신경염으로 기록한다. 어느 쪽도 확정된 것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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