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안토노프-옵세옌코

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Антонов-Овсеенко

겨울궁전을 접수한 10월 봉기 지휘관, 21년 뒤 스탈린에게 총살되다

사형장으로 향하며 동료들에게 외투와 구두를 벗어 건넸다. 유리 톰스키의 전언에 따르면 그는 「안토노프-옵세옌코는 볼셰비키였고 끝까지 볼셰비키로 남았다고 전해 달라」고 말했다. 21년 전 그는 겨울궁전에서 임시정부를 체포했던 사나이였다.

체르니고프 귀족 가문 출신으로 1901년 혁명운동에 투신했다. 1917년 10월 군사혁명위원회 비서로서 포드보이스키·추드노프스키와 함께 겨울궁전 접수 작전을 준비하고 임시정부 체포를 집행했다. 내전기 남부·우크라이나 전선을 지휘했고, 1921년 탐보프 농민봉기 진압 전권위원회 의장으로서 유독가스 사용 결정에 서명했다. 1922년 적군 정치총국장을 지내다 트로츠키를 옹호한 끝에 1924년 1월 해임되었고, 외교관으로 전환해 체코슬로바키아·리투아니아·폴란드 전권대표를 지냈다. 1937년 러시아 SFSR 사법인민위원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체포되어 1938년 2월 10일 총살되었다. 1956년 2월 25일 복권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17년 11월 8일 새벽, 임시정부를 체포하다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옵세옌코는 차르 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나 사관학교를 나왔으나, 자신을 위해 준비된 장교의 길 대신 혁명을 택했다. 1905–1906년 군대 반란을 조직하다 사형을 선고받고 탈출한 그는 오랜 망명 끝에 1917년 귀국해 볼셰비키에 합류했고,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의 서기가 되었다.

1917년 11월 7일 밤(구력 10월 25일) 그는 포드보이스키와 함께 겨울궁전에 대한 최종 작전을 지휘했고, 이튿날 새벽 2시가 지나 궁전 안 소회의실로 들어서서 「군사혁명위원회의 이름으로 임시정부 각료 전원을 체포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격앙한 병사들로부터 각료들을 보호하며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로 호송했다.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 기록한 이 장면과 함께 그의 이름은 10월의 역사에 새겨졌다.

우크라이나·남부 전선 사령관, 1917–1919

겨울궁전 접수 직후, 볼셰비키 지도부 안에서 군사 교육을 받은 드문 인물이던 안토노프-옵세옌코는 남부로 파견되었다. 1917년 12월 그는 칼레딘의 카자크 부대와 우크라이나 중앙라다를 지지하는 우크라이나화 부대에 맞선 작전을 지휘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12월 6일(19일) 인민위원회는 반혁명과의 투쟁을 위한 남부 혁명전선을 창설하고 그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혁명 야전참모부가 그에게 직접 예속되었다. 남부 집단군을 이끌고 하르키우에 들어간 그는 소비에트 대회가 우크라이나의 소비에트 권력을 선포하는 자리에 섰고, 우크라이나 부대 지휘를 참모장 무라비요프에게 넘긴 뒤 돈 카자크와의 전투를 직접 맡았다. 1918년 3월부터 5월까지 그는 우크라이나·오데사·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타브리다 소비에트 공화국 군사조직을 아우른 남러시아 소비에트군 총사령관이었다.

중간 시기의 지위를 두고 사료는 갈린다. 영어 위키백과는 그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반대했고, 1918년 5월 독일군에 맞선 게릴라전을 부추긴 이유로 적군에서 해임되었다가 9월 우크라이나 군사인민위원으로 복직되었다고 서술한다. 러시아어 자료는 같은 시기 그를 남러시아 소비에트군 총사령관으로 두고 1918년 8월 말에서 9월 초 베를린 소련 대표단을 이끌어, 북부 지역에 상륙한 협상국 부대에 맞선 무장투쟁에 독일군이 참여할 가능성을 독일 사령부와 협상하게 한다. 두 서술 가운데 어느 쪽도 확정된 사실로 제시할 수 없다.

1918년 9월에서 10월 그는 이젭스크-보트킨스크 반란을 진압하는 동부 전선 집단군을 지휘하며 제2·제3군과 볼가 군사소함대를 통합 지휘했고, 11월 17일에서 30일에는 쿠르스크 방면 특별군단 혁명군사위원회 위원이었다. 1918년 11월 30일부터 1919년 1월 4일까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군을, 1919년 1월 4일부터 6월 15일까지 우크라이나 전선을 지휘했고 1919년 5월에서 6월에는 우크라이나 SSR의 모든 무장력를 지휘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거의 전역에서 소비에트 권력이 수립되는 과정과 우크라이나 SSR 군대의 창설, 디렉토리아 군대와의 작전, 흐리호리우 반란 진압에 참여했다. 우크라이나 사학자들에 따르면 그가 사령관으로 있던 시기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영역에서 계급 적과 민족주의자에 대한 대규모 탄압이 광범위하게 시행되었다. 이는 우크라이나 사학자들의 주장으로 전해지는 것이며 확정된 판결이 아니다.

여기에는 출처가 갈리는 사건들이 겹쳐 있다. 데니킨 시기 볼셰비키 만행 조사 특별위원회 문서에 따르면 1918년 4월 1일 렌넨캄프 장군은 학대와 고문 끝에 타간로크에서 안토노프-옵세옌코의 개인적 지시로 총살되었다. 러시아어 자료는 이를 위원회의 주장으로 제시하며 확정된 사실로 규정하지 않고, 영어 자료는 그가 볼셰비키에 복무하기를 거부한 뒤 명령이 내려졌다고 배치한다. 1919년 4월 말에는 전선 최대 병력을 가진 자칭 아타만 흐리호리우와 협정을 시도하며 그를 루마니아군에 맞선 베사라비아 원정으로 돌리려 했고, 흐리호리우는 4월 23일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의 부대는 유대인 주민과 공산당 관리들을 습격하고 약탈하며 대규모 농민 폭동을 촉발했고, 반란은 보로실로프 휘하 적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흐리호리우는 마흐노에게 살해되었다. 베사라비아 진군과 헝가리 개입 계획은 대체로 좌초되었다. 러시아어 자료는 이 국면에서 그가 흐리호리우 반란 진압에 참여했다는 사실만 기록하는데, 두 서술은 서로 다른 것으로 병기되어야 한다. 하르키우의 공장주들이 8시간 노동제 도입에 항의해 임금 지급을 거부하자 그가 산업가 열다섯 명을 열차 칸에 태우고 현금 백만 루블을 요구하며 그렇지 않으면 광산에 보내겠다고 위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이는 전설로 기록된 것이며 레닌이 「백만장자 사보타주범 체포를 특히 승인하고 환영한다」는 전보를 보냈다고 전한다. 키이우 공격 당시 화학 무기를 처음 사용했다는 주장은 우크라이나어 자료에만 나타나고 1918년 키이우 전투를 다룬 러시아어 항목에는 언급이 없어, 논쟁적인 것으로 남긴다.

1921년에는 탐보프 농민 봉기 진압을 지휘하는 전권위원회 의장으로서 1921년 6월 11일 「숲에 숨으면 유독가스로 몰아내겠다」는 내용의 호소문에 서명했다. 연구자 다비드 펠드만은 1989년 문서를 공개하며 독가스 사용 제안이 그가 이끈 전권위원회에서 나왔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학자의 논증이다. 1922년 그는 적군 정치총국장에 임명되어 스탈린의 권력 강화에 반대하고 트로츠키를 지지하며 좌익 반대파에 합류했고, 1924년 1월 17일 해임되었다. 이후 외교관으로 전환해 체코슬로바키아·리투아니아·폴란드 주재 대표를 지내고 1934년 검사로 일했으며, 1937년 10월 체포되어 1938년 2월 10일 총살되었다.

바르셀로나의 소련 총영사, 1936–1937

내전기에 안토노프-옵세옌코는 남부 전선과 우크라이나에서 소비에트 군대를 지휘했고, 1921년에는 탐보프 농민 봉기 진압을 총괄하는 전권위원회를 이끌었다. 이는 내전기 혁명 권력이 마주한 가장 어두운 과제에 속했다. 1920년대에 그는 적군 정치국의 수장을 지내다 1923년 트로츠키의 좌익 반대파를 지지해 해임되었고,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주재 외교관으로 일했다.

1936년 8월 스페인 내전이 격화되자 그는 바르셀로나 주재 소련 총영사로 부임했다. 카탈루냐 정부와 소련의 군사 원조를 조율하고 전선으로 가는 물자를 챙기던 그는 카탈루냐에서 가장 눈에 띄는 소련인이었다. 1937년 소환된 그는 러시아공화국 사법인민위원에 임명되었으나 몇 주 뒤인 10월 체포되었고, 1938년 2월 10일 총살되었다. 아들 안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안토노프-옵세옌코는 볼셰비키였고 마지막 날까지 볼셰비키로 남았다고 전해 달라」는 말을 남겼다. 1956년 명예 회복되었다.

← 카드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