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성심리학 연구회를 세운 시인·형벌 개혁가
1914년 카펜터·히르슈펠트·하우스먼 등과 영국 성심리학 연구회를 세워 성에 관한 과학적 연구와 피임·낙태·성매매 문제를 다루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영국 육군 장교의 사생아로 태어나 할머니 손에 자란 영국의 시인·작가·형벌 개혁가. 케임브리지 모들린 칼리지에서 공부했고, 동성애자 억압을 끝내려는 「대의」를 위해 일하며 1892년 오스카 와일드를 끌어들이려 했다. 1897년 카펜터와 우정을 맺었고, 1914년 영국 성심리학 연구회를 함께 세워 기록 담당을 맡았다. 유럽 감옥을 돌며 형벌 제도를 연구했다. 1886~1949년 일기 122권을 남겼고 1950년 런던에서 숨졌다.
다른 이름: 조지 세실 아이브스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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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1950
독립 활동대표
사회운동·조직 -
1914–
사회운동·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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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조직
관련 역사 사건
「대의」와 성심리학 연구회
그는 생모를 평생 두 번밖에 만나지 못했고 아버지와도 사이가 나빴다. 케임브리지 시절부터 1949년까지 살인, 형벌, 범죄 이론, 복장 전환, 성별 심리, 동성애, 크리켓 점수 등을 다룬 신문 스크랩 45권을 모았다. 1902년 메릴본 크리켓 클럽 경기에 한 번 출전했고 작가 클럽 팀의 주장을 맡았지만, 1899년 회원들이 「동성애자들」에 대해 폭력적이고 편견에 찬 말을 하는 것을 듣고 클럽을 탈퇴했다. 1891~1919년 활동한 급진 단체 인도주의 연맹의 회원이었다.
1892년 작가 클럽에서 오스카 와일드를 만나 자신이 「대의」라 부른 동성애자 해방 운동에 끌어들이려 했으나 실망했고, 1893년 짧은 관계를 가진 앨프리드 더글러스가 소개한 옥스퍼드 시인들에게도 같은 시도를 했다. 1897년 밀소프로 에드워드 카펜터를 찾아가 평생의 우정과 정치적 동반 관계를 맺었다. 1914년 카펜터, 마그누스 히르슈펠트, 로런스 하우스먼 등과 영국 성심리학 연구회를 세웠고, 해블록 엘리스와 체사레 롬브로소와도 교류했다. 연구회는 성의 과학적 연구와 성행동에 대한 합리적 태도를 내세우며 피임, 낙태, 불임 시술, 성병, 성매매를 다루었고, 1931년 영국 성과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는 연구회의 기록 담당이었다.
그는 유럽 곳곳의 감옥을 찾아 특히 영국의 형벌 방식을 연구하고 강연과 책을 냈다. 1950년 여든두 살에 런던에서 숨져 골더스그린에서 화장되었고, 유언으로 무덤에 유대교나 기독교의 글귀와 상징을 두지 말라고 했다. 그가 남긴 편지와 원고, 1886년 12월부터 1949년 11월까지 거의 매일 쓴 일기 122권은 1977년 텍사스 대학 해리 랜섬 센터가 사들였다. 편지 상대에는 아돌프 브란트, 해블록 엘리스, 에드바르 베스테르마르크 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