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비도

Georges Bidault

레지스탕스 의장에서 마셜 플랜의 설계자까지, 몰로토프에게 유럽 분열이 소련 탓이라고 응수한 외무장관

1947년 7월 2일 파리 3국 회담 마지막 세션, 몰로토프가 마셜 플랜을 '유럽을 둘로 가르는 음모'라고 비난하자 비도는 '유럽을 분열시키는 것은 바로 소련의 행동'이라고 조용히 응수했고, 이튿날 베빈과 함께 16개국 초청장을 발송했다.

1943년 장 물랭 체포 후 국민저항위원회(CNR) 의장직을 이어받아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이끌었고, 해방 후 기독교민주주의 정당 인민공화운동(MRP)을 창당했다. 외무장관으로서 1947년 파리 3국 회담에서 몰로토프의 '유럽 분열' 비난에 맞서 소련의 행동이야말로 유럽을 가르고 있다고 정면 반박했고, 소련 이탈 후 영국과 함께 서유럽 16개국을 규합해 마셜 플랜 수용을 주도했다. 1946년과 1949년 두 차례 총리를 지냈으며 디엔비엔푸 포위 당시 미국에 원자폭탄 지원을 요청할 만큼 식민지 전쟁에 매달렸다. 알제리 독립에 반대하며 1962년 비밀리에 '제2의 CNR'을 조직했다가 면책특권을 박탈당하고 브라질로 망명, 1968년 사면으로 귀국했으나 영향력은 회복하지 못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국민저항위원회 의장과 저항 헌장(1943~1944)

비도는 1943년 5월 27일 국민저항위원회(CNR) 첫 회의에 인민민주당(PDP) 대표로 참석했고, 장 물랭과 함께 그날 채택된 창립 결의문을 작성했다. 이 결의문은 드골에게 임시정부 지도를 맡기고 지로를 군사령관직에 한정한다는 내용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지로를 배려해 준비한 안을 밀어냈다. 1943년 6월 21일 게슈타포가 물랭을 체포하면서 CNR 의장직이 공석이 되었고, 런던의 지시가 없는 가운데 위원회는 9월 첫 주에 비도를 거의 만장일치로 후임 의장에 선출했다. 무브망(콩바 등)과 프랑스 자유 대표단(Délégation)에서 동시에 일했고 물랭과의 관계가 좋았던 그를, 사료는 '연속성의 인물'로 평가한다.

의장으로서 비도의 핵심 임무는 레지스탕스의 통일을 유지·강화하는 것이었다. 16인 전원 회의는 너무 위험했기에 비도, 막시므 블로크마스카르, 파스칼 코포, 루이 사이앙, 피에르 비용 5인으로 구성된 집행부(Bureau)가 결성되었고, 비도는 주 1~2회 이 회의를 주재했다. 이때 비도는 위원회 대표 자격인 PDP가 아니라 급진당과 민주동맹을 집행부에서 대표했다. 드골이 회고록에서 시사한 것과 달리 집행부가 프랑스공산당에 장악된 것은 아니었으며, 해방 무렵까지 비용이 공산당의 유일한 대변인이었다. 사료는 결정이 계속 만장일치로 유지된 점을 강조하는데, CNR 프로그램 채택 협상은 1943년 7월부터 1944년 3월까지 9개월이 걸렸다.

위원회가 만장일치로 채택한 CNR 프로그램은 원래 《즐거운 나날》이라는 표제로 불렸다. 이 문건은 해방 직후의 조치와 장기 개혁을 담았는데, 보통선거 회복, 언론 자유, 독점적 생산수단·에너지원·지하자원·보험회사·대형 은행의 국유화, 노동조합 활동과 노동자 경영 참여 회복,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보장 계획 등을 규정했다. 사료는 이 강령이 레지스탕스 내부의 온갖 정치 조류가 함께 채택한 점을 특별한 특징으로 꼽으며, 1944년 해방에서 1946년 초까지 프랑스의 개혁 논쟁과 정책을 형성했다고 본다. 다만 채택 시점은 인용 출처 자체가 서로 다른 두 날짜를 병기하는데, 도입부에서는 1944년 3월 9일 만장일치 채택이라고 적고, 본문의 상세 서술에서는 최종 채택을 3월 15일 집행부 회의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적는다. 전원회의는 1943년 11월부터 1944년 8월까지 열리지 않았으므로, 최종 문건을 승인한 것은 만장일치 전원회의가 아니라 집행부였다. 헌장 작성 과정에서 비도의 역할은 집행부를 주재한 의장으로서의 중재·통합 기능이었고, 서술을 주도한 것은 비용이었다는 점에서, 그를 단독 저자로 세우는 서술은 사료가 지지하지 않는다. 비도는 1944년 9월 9일 CNR을 떠나 드골의 임시정부 외무장관으로 들어갔다.

← 카드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