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동맹을 선택한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 지도자
1948년 코민포름 결별로 티토의 유고슬라비아는 소련 진영에서 축출되었으나, 이는 소련의 지도력에 도전한 사회주의 국가가 독자 노선을 걸을 수 있음을 보여 주었고, 그 충돌은 이데올로기 분쟁인 동시에 발칸을 둘러싼 지정학적 투쟁이기도 했다.
크로아티아계 아버지 프라뇨 브로즈와 슬로베니아계 어머니 마리야 사이에서 쿠므로베츠에서 태어났고, 스스로는 아버지와 이웃들처럼 크로아티아인으로 정체화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병사로 복무하다 부상당해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었고, 1920년 옴스크에서 공산당에 입당한 뒤 1939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다. 1941년 파르티잔 총사령관이 되어 제2차 세계대전 내내 민족해방투쟁을 지도했고, 전후에는 1980년 사망할 때까지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이끌었다. 1948년 코민포름 결별 이후 스탈린주의자로 지목된 수만 명이 골리 오토크 같은 강제노동수용소에 수용되어 수백 명이 죽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39–1944 정치·당 지도 ·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 1945–1980 정치·당 지도 · 유고슬라비아
경력 연표
- 1941–1945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 민족해방투쟁 지도
- 1945–1980유고슬라비아 연방 지도자
- 1948스탈린·코민포름과 결별
관련 역사 사건
- 1914–19181차 세계대전오스트리아-헝가리군 병사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복무하다 부상당하고 포로가 되었다.
- 1941–1945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전쟁공산당 지도자침공 직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총서기로서 불법 조직과 저항 준비를 이끌었고, 뒤에 파르티잔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 1944–1949불가리아: 조국전선에서 코스토프 재판까지블레드 협정의 상대1947년 8월 1일 디미트로프와 블레드 협정을, 11월 27일 에브크시노그라드 우호조약을 맺었다. 1948년 6월 코민포름 제명 뒤 불가리아는 그에게 등을 돌렸고, 코스토프 재판의 기소장은 그와의 결탁을 혐의로 들었다.
- 1947–1948마셜 플랜과 냉전의 시작1948년 스탈린·코민포름과 결별, 냉전 진영 균열의 상징
- 1948–1955티토-스탈린 결별제명된 유고슬라비아 지도자굴복 요구를 거부하고 독자 노선을 걸었다
파르티잔 민족해방투쟁, 1941~1945
1941년 4월 6일 독일을 중심으로 이탈리아·헝가리·불가리아 부대가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했고, 루프트바페의 베오그라드 폭격으로 5천에서 1만 7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 침공은 열흘 남짓 만에 왕국군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나 국가가 분할되었다. 티토는 그때 자그레브에 '토마네크'라는 가명으로 머물고 있었는데, 중앙위원회 안에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베오그라드로 이동했으며, 5월 1일에는 점령에 맞서 민중이 단결할 것을 촉구하는 팜플렛을 발표했다. 6월 27일 중앙위원회는 그를 전국적 민족해방 군사력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고, 7월 1일 코민테른의 즉각 행동 지령이 뒤따랐으며 7월에는 대규모 봉기가 시작되었다.
파르티잔은 티토의 발의로 조직되어 게릴라전으로 시작했으나, 1944년 말에는 4개 야전군과 52개 사단으로 편성된 약 65만 명의 정규군으로 성장했다. 점령지에서 영토를 해방하고 공산주의가 통치하는 유고슬라비아 국가를 세우는 것이 그들의 명시된 목표였다. 1941년 9월의 우지체 공화국은 그 해 최대 성과였고, 티토는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와 9월 19일과 10월 27일 회담했으며 두 차례 회담에서 대독 공동투쟁을 제안하고 파르티잔 참모장 자리를 주겠다고 했으나 미하일로비치는 이를 거부했다. 그달 말 미하일로비치는 공산주의자들이 진정한 적이라고 결론지었고, 몇 달 안에 체트니크는 파르티잔을 상대로 추축국과 협력하기 시작했다. 국가해방반파시스트평의회(AVNOJ)는 1942년 11월 26~27일 비하치에서, 1943년 11월 29일 자이체에서 열렸다. 자이체에서는 67명의 상임부가 선출되고 9명으로 구성된 국가해방위원회(NKOJ, 공산주의자 5명)가 사실상의 임시정부로 세워졌으며 티토가 그 의장으로 지명되었다.
노동자 자주관리의 도입
1948년 코민포름 결별은 티토에게 단순한 외교적 파열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정당화의 과제였다. 소련식 중앙집권 계획경제를 대신할 대안으로 유고슬라비아 지도부가 내세운 것이 노동자 자주관리였다. 그 출발점은 1949년 11월 크로아티아 솔린 공장에서 첫 노동자평의회가 결성된 일이었고, 1950년 6월 27일 '국가경제기업의 노동자집단 경영에 관한 기본법'이 제정되면서 기업 경영이 국가 행정기관이 아니라 노동자평의회의 손에 넘어갔다. 에드바르드 카르델리와 보리스 키드리치 등이 이론을 다듬었고, 티토는 이 법안 통과를 '공장을 노동자들에게'라는 구호로 선언했다. 자주관리제 아래 기업은 원자재 구매, 생산량과 가격 결정, 임금 기금 조성, 이윤 분배에 이르기까지 노동자집단이 직접 결정했고, 국가의 경제 관리 기능은 점차 축소되었다. 1950년대 유고슬라비아는 연평균 13%를 웃도는 공업 성장을 기록했고, 강제 집단화도 폐기되었다. 그러나 이 실험은 근본적인 모순을 안고 있었다. 기업 차원의 참여적 경제가 일당 독점이라는 권위주의 정치체계와 공존했기 때문이다. 노동자평의회는 종종 경영진과 전문가들이 내놓은 안을 추인하는 데 그쳤고, 자주관리는 위로부터 부여된 제도로 아래로부터의 직접민주주의 운동과 결합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주관리는 소련 모델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 대안으로서 1961년 비동맹운동과 더불어 티토 유고슬라비아를 규정한 양대 실험이었다.
비동맹운동의 창설
비동맹운동(NAM)의 뿌리는 1956년 7월 19일 브리유니 섬에서 티토,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가 서명한 '공동 반블록 정책에 관한 브리유니 선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티토는 아프리카·아시아 신생 독립국들을 광범위하게 접촉하며 탈식민지 연대를 구축했다. 1961년 9월 1일부터 6일까지 베오그라드에서 제1차 비동맹 정상회의가 개최되었고, 티토는 초대 사무총장(1961~1964)으로 선출되었다. 회의에는 25개국 정상이 참석했으며, 티토·네루·나세르 외에도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가나의 콰메 은크루마 등이 공동 창설자로 참여했다. 베오그라드 회의는 냉전 양극 체제에 대한 직접적 대응으로, 강대국 군사동맹에 속하지 않은 국가들이 집단적 자결권과 평화공존을 내세우며 국제 정치의 '제3의 길'을 제도화한 계기였다. 티토는 비동맹운동을 단순한 중립이 아니라 적극적 평화공존의 장으로 이끌며 1970년대까지 운동의 중심축으로 활동했고, 그가 사망한 1980년까지 유고슬라비아는 비동맹 외교의 구심점 역할을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