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6월 17일, 최고소비에트 비공개 회의에서 크류치코프는 개혁파 진영에 서방의 '영향력 공작'이 침투했다고 경고하며 내각에 비상대권을 부여하라는 요구에 동참했다. 두 달 뒤 그가 조직한 쿠데타는 사흘 만에 무너졌다.
1924년 2월 29일 차리친(훗날 스탈린그라드, 오늘날 볼고그라드)에서 태어났다. 1941~43년 스탈린그라드 포병 공장에서 일했고, 1949년 법학을 전공으로 졸업해 1946~51년 스탈린그라드 지역 검사로 일했다. 1955~59년 부다페스트 소련대사관 3등서기관으로 1956년 헝가리 사건을 겪었고, 1967년 안드로포프를 따라 KGB로 옮겨 1974~88년 제1총국장을 지냈다. 1988년 10월 1일 KGB 의장에 임명되어 1991년까지 재임했다.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를 주도했으며, 8월 22일 체포되어 1994년 국가두마 사면으로 재판 없이 종결되었다. 2007년 11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67 보안·정보·치안 · 소련 · 국가보안 기관
경력 연표
- 1956부다페스트 대사관 3등서기관(안드로포프 휘하)
- 1967–74KGB 의장 비서실
- 1974–88제1총국장: 해외정보 총괄
- 1988–91KGB 의장
- 1991.8국가비상사태위원회 주도
- 1991–94수감, 사면
소련 정치국
- 정위원 1989.09–1990.07
1990.07 미재선 · 1991년 8월 쿠데타 주모
관련 역사 사건
- 1956헝가리 혁명대사관 직원 (현장 참여)
- 1979–1989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KGB 의장, 병력 잔류 주장1989년 1월 셰바르드나제와 함께 카불을 방문해 나지불라 가족의 모스크바 대피를 제안했으며, 1월 23일 소련 사단 잔류를 포함한 다섯 가지 선택지를 정치국 메모에 공동 서명했다.
- 1985–1991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KGB 의장, 쿠데타 설계
- 1988–1991민족위기와 중앙권력의 붕괴KGB 의장 · 특수부대빌뉴스 작전에 투입된 특수부대를 관할했고, 이듬해 8월 쿠데타의 주동자가 됐다.
- 1987–1991발트 독립운동과 「발트의 길」빌뉴스에 투입된 KGB 특수부대를 관할했다.
- 1987–1991경제 개혁 논쟁과 500일 계획KGB 의장고스방크 부의장 보일루코프의 증언에 따르면, 해외 유통 '위조 루블' 정보를 근거로 화폐개혁을 처음 제안한 것은 KGB와 크류치코프였다.
- 1991노보오가료보 협상과 신연방조약협상장을 도청했고, 조약이 서명되기 전에 쿠데타를 조직했다.
- 19918월 쿠데타와 소련의 해체쿠데타 설계KGB 의장으로 8월 쿠데타를 설계했다.
부다페스트의 그림자, 해외정보국의 14년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는 1924년 차리친(훗날의 볼고그라드)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검찰과 외교관 양성 과정을 거친 그는 1955년 부다페스트의 소련대사관에 부임했고, 그곳에서 1956년 헝가리 봉기를 대사 안드로포프의 곁에서 겪었다. 사회주의 정권이 며칠 만에 무너져 내리는 광경은 두 사람 모두에게 평생의 상흔이 되었다. 위기의 순간에 머뭇거리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이른바 「헝가리 콤플렉스」였다.
이후 그의 경력은 안드로포프의 궤적을 그대로 따랐다. 중앙위원회에서 안드로포프를 보좌했고, 1967년 안드로포프가 KGB 의장이 되자 함께 옮겨 갔다. 1974년부터 그는 해외 정보를 총괄하는 제1총국장이 되어 14년간 야세네보의 정보 제국을 다스렸다. 냉정하고 근면하며 서류에 파묻혀 사는 그는 음모가라기보다 관료의 전형처럼 보였다.
1988년 고르바초프는 그를 KGB 의장으로 발탁했다. 개혁에 협조할 정보 전문가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것이 오판이었음은 3년 뒤에 드러난다. 부다페스트에서 새겨진 교훈을 가진 남자에게, 무너져 가는 연방은 1956년의 재연으로 보였다.
카불, 그리고 1993년 이후의 크류치코프
카불: 아프가니스탄 시기
1978~88년 크류치코프는 KGB 부의장이었고, 1971년 제1부총국장을 거쳐 1974~88년 해외정보를 총괄하는 제1총국장을 지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그는 소련군 진입, 카불의 KGB 대표부 구성, 그리고 KGB 특수부대 「그롬」과 「제니트」에 의한 아민 궁전 강습 준비를 조직하는 데 참여했다. 그는 또한 아프가니스탄 지도자 바브라크 카르말을 교체하라는 정치국 결정을 집행하는 임무를 맡아 카불 방문 중 그를 사임하도록 설득했다.
한 영어권 서술은 시기를 달리 잡는다. 1971년 여름 안드로포프의 명령으로 제1총국장에 임명되었고, 1978년 부의장이 되었으며, 1978년 6월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하고 7월 카불 KGB 주재관이 되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초기 정부 전복에 매우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것이다. 첫 제1총국장 임명 시기를 1977년으로 적는 백과 항목도 있어, 1971년설과 1974년설, 1977년설이 함께 전한다. 카불 상주 시점에 대해서도 서술이 갈리므로, 이 글은 어느 연표도 확정하지 않고 해당 서술을 밝혀 둔다.
그의 지휘 아래 제1총국은 해외 공산주의·반식민지 운동을 지원하고 서방 정보기관에 침투했으며 과학기술 정보를 수집하고 허위정보와 적극적 공작 기법을 발전시켰다. 동시에 그의 재임기에 망명자가 잇따랐고,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부추긴 책임도 함께 지고 있다.
정보사 연구자 스티븐 콜에 따르면, 1987년 12월 크류치코프는 CIA 부국장 로버트 게이츠와 아프가니스탄 위기의 정치적 출구를 모색하기 위한 양 기관 협력에 합의했다. 해외정보를 총괄하면서 워싱턴과 접촉한 이른 사례로 기록된다.
재활과 퇴장: 1993년 이후의 크류치코프
회고록 절이 다루지 않은 사후의 공적 활동도 길었다. 1992년 7월 3일 그는 옐친에게 보낸 호소문에서 소련 붕괴의 책임을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위원들에게 전가한다고 비판했다. 1993년 1월에는 야나예프, 파블로프, 티자코프, 바클라노프, 야조프와 함께 여행 금지 서약을 조건으로 석방되었고, 1994년 2월 국가두마의 사면을 받았다. 이후 세르게이 쿠르기냔의 실험창조센터에서 일했고, 경찰과 충돌로 끝난 1993년 5월 1일 시위에 참가했으며, 같은 해 10월 1일에는 러시아 최고소비에트 강습이 임박했음을 전 내무장관 안드레이 두나예프에게 알렸다.
2000년대에는 제도권으로 복귀한다. AFK 시스테마 계열사인 AO 「레기온」 이사회 의장을 지냈고 FSB 국장 V. V. 푸틴의 고문을 맡았으며, 군대 지원 운동 조직위원회와 국가보안 노동자 재향군인 협의회에서 활동했다. 2000년 5월 7일 푸틴의 첫 취임식에도 참석했다.
죽기까지의 공적 위상은 양가적이었다. 2007년 쿠데타 15주년을 맞아 레바다 센터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그의 위원회에 적극적으로 저항했겠다고 답한 사람은 12퍼센트, 권력 장악을 지지했겠다는 사람은 13퍼센트였고, 대다수는 어느 편도 들지 않거나 모른다고 답했다. 같은 해 10월 말 그는 다른 은퇴 KGB 수장들과 함께 러시아 특수기관 내부의 분쟁을 즉각 중단하라는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회고록으로 「개인 파일」(1996), 「절벽 끝에서」(2003), 「인격과 권력」(2004), 「시효 없음」(2006)을 냈고, NTV 「프로그램 막시мум」과 TV 첸트르 「포스트스크립툼」에 전문가로 출연했다.
2007년 11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향년 84세였다. 작별식은 FSB 문화센터에서 열렸고 FSB 국장 니콜라이 파트루셰프와 SVR 국장 미하일 프라드코프가 참석했으며, 트로예쿠롭스코예 묘지(10구역)에 안장되었다. 영어권 서술들은 같은 날짜와 83세라는 나이를 전하지만 사망 원인은 밝히지 않고 짧은 투병만 언급한다. 그는 구금 상태가 아니라 자유로운 신분으로 사망했으며, 처형이나 옥사했다는 주장은 어떤 사료로도 뒷받침되지 않는다.
1988년 10월, 안드로포프의 사람이 KGB를 맡다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의 경력은 유리 안드로포프의 그림자 속에서 자랐다. 1956년 헝가리 봉기 당시 그는 부다페스트 주재 소련대사관의 젊은 외교관으로, 안드로포프 대사의 곁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 경험은 두 사람 모두에게 평생의 각인을 남겼다. 안드로포프가 KGB 의장이 되자 크류치코프도 그를 따라갔고, 1974년부터 14년간 해외정보를 총괄하는 제1총국장을 지냈다.
1988년 10월 고르바초프는 그를 KGB 의장으로 임명했다. 개혁에 우호적인 정보기관장을 얻었다는 기대였으나, 크류치코프의 눈에 비친 페레스트로이카의 말년은 국가 해체의 가속이었다. 동유럽이 떨어져 나가고, 발트 공화국들이 독립을 선언하고, 당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을 그는 서방 정보기관의 「영향력 공작」이 거둔 결실로 읽었다. 1991년 6월 그는 최고소비에트 비공개 회의에서 나라가 파국을 향해 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1990년 말부터 그는 비상사태 도입을 촉구하는 강경파의 중심이 되었다. KGB는 그의 지시로 비상통치 계획 문서들을 준비했고, 그 문서들은 이듬해 8월에 쓰이게 된다.
1991년 8월 19일, 사흘 만에 무너진 국가비상사태위원회
1991년 8월 20일로 예정된 신연방조약 서명은 크류치코프에게 연방 해체의 법적 확정으로 보였다. 8월 18일 그가 조직한 대표단이 크림 포로스의 대통령 별장으로 날아가 고르바초프에게 비상사태 동의를 요구했고, 거부당하자 그의 통신을 끊고 그를 별장에 연금했다. 8월 19일 아침,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는 대통령의 유고를 선언하고 모스크바에 탱크를 들여보냈다.
그러나 위원회에는 3월 국민투표에서 연방 유지에 찬성한 76퍼센트를 결집할 어떤 정치적 기획도 없었다.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대행 야나예프의 손은 떨렸고, 옐친 체포 명령은 끝내 내려지지 않았으며, 백악관 강습 계획은 유혈을 꺼린 군과 알파부대가 물러서면서 무산되었다. 8월 20일에서 21일로 넘어가는 밤, 지하차도에서 청년 세 명이 장갑차에 깔려 숨진 것이 이 쿠데타의 거의 유일한 유혈이었다. 위원회는 사흘 만에 무너졌고 크류치코프는 체포되었다.
연방을 구하려던 시도는 연방의 숨통을 끊는 결과가 되었다. 쿠데타 실패 나흘 만에 당의 활동이 정지되었고, 넉 달 뒤 연방 자체가 해체되었다. 마트로스카야 티시나 감옥에 수감된 크류치코프는 1994년 국가두마의 사면으로 풀려났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행동이 국가를 지키려는 의무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2007년 11월 23일 사망했다. 역사는 이 사건을, 지키려던 것을 지킬 능력도 계획도 갖추지 못했던 비극적 실패로 기록한다.
마트로스카야 티시나 이후, 뉘우치지 않은 음모가
쿠데타 실패 후 크류치코프는 마트로스카야 티시나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재판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1994년 두마의 사면으로 그는 다른 주모자들과 함께 풀려났고, 이후 회고록 「개인 파일」에서 자신의 행동을 국가를 구하려는 시도로 정당화했다. 그의 서사에서 페레스트로이카는 서방 정보기관과 「영향력 공작원」들이 이끈 해체 공작이었고, 그 표적의 정점에 그는 야코블레프를 놓았다. 증거를 요구받았을 때 내놓은 것은 없었다.
역사가들의 평가는 대체로 그를 8월 쿠데타의 조직자이자 발안자로 지목한다. 도청과 사찰로 지도부의 동향을 손에 쥔 것도, 포로스행 대표단을 꾸린 것도, 비상사태위원회의 명단을 짠 것도 KGB 의장이었다. 동시에 그 쿠데타는 유혈 진압 명령을 끝내 내리지 못한 채 사흘 만에 주저앉았다. 국가보안기구의 정점에서 평생을 보낸 남자가 정작 결정적 순간에 국가를 움직이지 못했다는 사실은, 1991년의 소련에서 강압 기구조차 이미 확신을 잃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로 읽힌다.
그는 2007년 83세로 죽었다. 마지막까지 소련 해체를 20세기 최대의 비극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