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에서는 미사일 위협 제거를, 미주기구에서는 리우 조약에 따른 공동행동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딘 러스크는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 국무부를 거쳐 미국 외교의 중심에 선 국제주의자였다.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군사적 충돌을 통제하면서도 봉쇄를 선택했고, 미주기구와 유엔을 통해 그 조치를 국제적으로 방어하려 했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서는 점차 개입을 강하게 옹호해, 국제법과 동맹 외교를 중시한 인물이 전쟁의 정당화에도 관여한 긴장을 남겼다. 퇴임 뒤에는 그루지야대학교에서 국제법과 외교를 가르쳤다.
기습으로 쿠바를 치는 건 진주만과 똑같은 짓이다. 그게 어디로 갈지 생각하면 정말 소름이 끼친다... 미사일을 다 제거해도 그게 끝이 아니야. 그게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국무차관(1961–1966)으로 존 F. 케네디와 린든 B. 존슨 두 행정부에서 복무하며, 쿠바 미사일 위기와 베트남전이라는 냉전의 두 결정적 순간에 확전을 반대한 예외적 인물이었다. 1962년 10월 EXCOMM에서 기습 공습을 '또 하나의 진주만'이라 규정하며 로버트 케네디를 비롯한 다수를 봉쇄 쪽으로 돌리는 결정적 역할을 했고, 이후 1965년까지 베트남 파병 확대에 홀로 반대하는 각료 내 유일한 반대자가 되었다. 퇴임 후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편향된 중동 정책을 비판했고, 유럽 통합의 초기 설계자 중 한 명으로 장 모네와 함께 슈만 계획과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조약의 초안을 작성했다.
비보 이슈트반은 법학과 정치이론을 바탕으로 헝가리 민주주의와 중동부 유럽의 국가 위기를 분석한 정치사상가였다. 그는 전후 민주적 재편을 위해 행정과 선거 제도 구축에 참여했지만,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는 학문적 자율성과 발언권을 잃었다. 1956년 11월 4일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를 공격하자 국회의사당에 남은 나지 임레 정부의 마지막 각료로서 「자유와 진실을 위하여」를 썼다. 이후 종신형을 선고받고 1963년 사면으로 석방되었으며, 말년에는 침묵 속에서도 민주주의의 윤리와 책임을 탐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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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1935세게드대학교에서 정치학·법학 학위 취득, 빈과 제네바에서 수학
1938–1945법무부 관료, 전시에는 박해받는 사람들을 위한 문서를 발급
1945–1946내무부 행정국장, 전후 행정과 1945년 선거 준비를 담당
1946–1950세게드대학교 정치학 교수, 헝가리과학원 통신회원
1951–1957외트뵈시 로란드대학교 도서관 연구원
1956-11-03–1956-11-12나지 임레 제3차 정부 국무장관, 11월 4일 국회의사당에 남아 성명 작성
1986년 10월 12일 오후,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모든 핵무기를 2000년까지 폐기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리고 40분 뒤, SDI 연구를 실험실에 가두라는 고르바초프의 조건을 레이건이 거부하면서 협상은 무너졌다.
로널드 레이건은 배우에서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거쳐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이 된 인물로, 레이거노믹스와 대규모 군비 증강으로 1980년대를 열었다. 취임 초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르며 대결을 고조시켰으나, 핵무기 없는 세상을 진심으로 염원하여 고르바초프와 네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 1986년 레이캬비크에서 전면 핵폐기 합의 직전까지 갔지만, 전략방위구상(SDI)을 양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협상은 막판에 결렬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중거리핵전력조약(INF)에 서명하여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을 통째로 폐기했고, 냉전은 그가 퇴임한 지 몇 달 만에 막을 내렸다.
미국민은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데탕트', 곧 사람과 사상의 자유로운 이동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노르웨이 이민자의 아들로 워싱턴주에서 태어나 40년 넘게 의회에서 활동한 냉전 자유주의자였다. 민권과 환경 정책에는 앞장섰지만 데탕트에는 회의적이어서, 소련의 유대인 이민을 통상 지위와 연결한 잭슨-배닉 수정안을 주도했다. 1974년 키신저·도브리닌과의 비공식 협상이 소련의 거부로 무산되며 잭슨은 1972년 통상협정을 사실상 좌초시킨 인물로 남았다. 그의 매파 보좌관들은 훗날 신보수주의의 핵심을 이루었다.
1944년 바르샤바 공수작전을 앞두고 그는 군사적으로 성공 가능성이 없고 손실이 클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작전은 계속되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 장교 제임스 톰 듀랜트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아프리카와 지중해 전선의 폭격·정찰 부대를 지휘한 조종사였다. 그는 1944년 이탈리아의 영국 공군 제205그룹을 맡아 바르샤바 봉기 지원 공수작전을 지휘했으며, 전투적 필요와 정치적 의무가 충돌하는 임무의 한계를 드러냈다. 전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 최고 책임자로 복무했지만, 국민당 정부의 탈영국화 정책과 국방장관과의 갈등 속에서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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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1934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 상비군 사관후보생 과정을 수료하고 조종사 자격을 취득
장벽이 세워진 뒤 그는 말했다. “장벽은 무너져야 하지만, 무너지기 전까지 도시는 살아가야 합니다.”
빌리 브란트는 나치 독재에 맞서 망명과 저항을 거친 독일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였다. 서베를린 시장으로서 장벽 건설 뒤 흔들린 도시의 사기를 지키고 서방의 책임을 촉구했으며, 장벽을 ‘수치의 장벽’이라 부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방총리로서는 동방정책과 ‘접근을 통한 변화’를 추진해 냉전의 대립을 완화했고 197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59년 모스크바 미국 박람회의 모형 주방 앞에서, 닉슨은 흐루쇼프를 향해 "우리도 색채 텔레비전에서는 앞서 있다"고 응수하며 즉흥적인 체제 논쟁을 벌였다.
반공 조사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하원의원에서 부통령을 거쳐, 두 차례의 낙선을 딛고 1968년 대통령에 오른 집요한 정치인이었다. 냉전의 대표적 반공 인사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소련 및 중국과의 데탕트를 주도하여, 1972년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브레즈네프와 ABM 조약 및 SALT I 잠정협정에 서명했다. 초강대국 간 핵무기 제한의 첫 국제법적 틀이었다. 베트남전을 '명예로운 평화'로 종결시키고 중국 방문으로 미중 관계의 문을 열었으나,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1974년 8월 9일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사임한 대통령이 되었다. 퇴임 후 외교 원로로서 이미지를 회복했으나, 그의 유산은 데탕트의 성취와 대통령직을 무너뜨린 불법 사이에 영원히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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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950캘리포니아 12구 연방 하원의원; 반미활동위원회에서 앨저 히스 사건으로 전국적 명성
1950–1953캘리포니아주 연방 상원의원
1953–1961미국 부통령 (아이젠하워 행정부), 1959년 모스크바 '주방 논쟁'
1961–1968변호사 개업, 저술, 1962년 주지사 선거 낙선 후 정치적 재기
1969–1974제37대 미국 대통령; 1972년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SALT I·ABM 조약 서명, 베트남전 종결, 중국 방문; 1974년 워터게이트로 사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기차에서 워싱턴의 눈 치우기가 힘들다는 포드의 말에 브레즈네프가 '우리의 첫 거래는 죽 드리죠, 소련 제설차'라고 받았다.
하원의원 25년과 부통령을 거쳐 1974년 닉슨의 사임으로 대통령이 된 공화당 정치가로, 한 번도 선거로 뽑히지 않고 백악관에 오른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다. 닉슨이 연 데탕트를 계승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브레즈네프를 만나 SALT II의 틀, 운반수단 2,400기와 MIRV 1,320기의 상한을 잡았고, 이듬해 헬싱키 최종의정서에 서명하며 잭슨-배닉 수정조항을 법으로 만들었다. 닉슨에 대한 사면이 최대 논란이 되었고, 1976년 카터에게 패배했다.
1974년 그는 잭슨-배닉 수정조항을 하원에 제출해 이민의 자유를 무역 조건으로 만들었다.
찰스 배닉은 클리블랜드 동부의 노동자와 동유럽계 주민을 기반으로 활동한 민주당 하원의원이었다. 그는 조세 형평, 사회보장, 메디케어, 오대호 환경 문제를 다루며 국내 개혁 의제를 외교정책과 연결했다. 1974년 헨리 잭슨과 함께 잭슨-배닉 수정조항을 발의해, 이민을 제한하는 비시장경제 국가에 대한 정상 무역관계 부여를 조건부로 묶었다. 이 법은 소련계 유대인을 비롯한 종교적 소수자의 이주를 압박하는 수단이 되었지만, 데탕트와 무역을 인권 조건에 연계한 미국 의회의 개입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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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939클리블랜드 시의회 의원
1940–1942오하이오주 상원의원
1942–1945미 해군 예비역 장교, 대서양·태평양 전선 복무
1947–1954클리블랜드 시 법원 판사
1955–1969미국 하원의원, 오하이오 제21선거구
1969–1981미국 하원의원, 오하이오 제22선거구
1973–1981하원 세입위원회 무역소위원회 위원장
1985–1995Squire Sanders & Dempsey 워싱턴 사무소 변호사, 동유럽 무역 담당
1944년 6월 9일, 그는 노르망디 상륙을 양동으로 보이게 하는 보고를 독일군 수뇌부에 보냈다.
후안 푸홀 가르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기에 독일 정보기관에 침투한 뒤 영국에 충성한 스페인계 이중간첩이었다. 그는 리스본에서 공개 자료만으로 영국에 존재하지 않는 요원망을 꾸며 독일 지휘부의 신뢰를 얻었다. 영국 정보기관과 협력한 뒤에는 가공의 요원들과 제한된 진짜 정보를 엮어 독일의 판단을 유도했다. 특히 포티튜드 작전에서 노르망디 상륙이 양동이고 주공이 파드칼레에 온다는 이야기를 강화해 연합군의 기만을 뒷받침했다.
스미스가 정책기획실장 시절 제안한 모스크바-워싱턴 직통 회선은 국무부와 군부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훗날 '핫라인'이 되자 케네디 대통령은 그 구상의 공을 스미스에게 돌렸다.
제라드 C. 스미스는 미국의 변호사이자 핵정책 전문가로, 군비통제와 비확산을 국가정책의 문제로 다룬 외교관이었다. 그는 SALT I에서 미국 대표단을 이끌며 경쟁하는 핵전략 속에서 제한 협상의 실무를 조직했고, 회고록 Doubletalk에 그 과정의 긴장과 판단을 기록했다. 이후에도 핵물질 전용 방지와 탄도탄요격미사일 조약의 보존을 주장하며 군비경쟁의 관리와 한계를 함께 보여 주었다.
1944년 7월 29일 그는 국내군 지도부에 서방의 대규모 지원이 불가능하다고 전했지만, 봉기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얀 노바크예지오란스키는 폴란드 국내군과 런던 망명정부를 잇던 연락장교이자 언론인이었다. 1944년 7월 런던에서 귀환해 국내군 지도부에 서방의 지원이 제한적임을 알렸지만 봉기의 결정을 막지 못했고, 봉기 중에는 라디오 방송을 맡았다. 전후에는 라디오 자유유럽 폴란드어 방송을 이끌며 망명과 반공 정치의 목소리를 냈다. 1989년 귀국한 뒤에도 폴란드의 서방 통합을 주장했다.
"내 생애 이보다 옳았으면 싶었던 적은 없다": 1962년 10월 15일, 쿠바 상공 U-2 사진에서 소련 미사일을 확인하며
시카고 출신의 지질학자로 제2차 세계대전 중 해군 사진판독 장교로 경력을 시작했다. 1953년 CIA에 합류해 사진판독부를 이끌었고, 1961년 국가사진판독센터(NPIC)의 초대 소장이 되어 U-2 정찰기와 초기 정찰위성의 영상 분석을 총괄했다. 1962년 10월 15일, NPIC 분석관들이 쿠바 상공 U-2 사진에서 소련 SS-4 중거리탄도미사일 기지를 식별했을 때 룬달이 직접 확인하고 '내 생애 이보다 옳았으면 싶었던 적은 없다'는 말과 함께 CIA 본부에 보고했으며, 다음 날 백악관에서 케네디 대통령에게 이를 브리핑했다. 1973년 퇴임까지 NPIC를 이끌며 냉전기 미국의 영상정보 역량을 구축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토머스 브리멜로는 영국 외교관이자 소련 문제 전문가로, 냉전의 동맹정치와 군비외교 사이에서 활동했다. 그는 1973년 핵전쟁 방지 협정 협상에서 헨리 키신저와 초안을 함께 다듬어, 소련의 무조건적 핵무기 선제사용 포기 구상을 동맹 의무와 제3국을 포함한 보다 제한적인 문안으로 바꾸는 데 기여했다. 이 역할은 영국 외무부 전문성이 미국의 대소 전략에 직접 결합한 사례였지만, 동시에 긴장 완화의 언어가 핵억지와 세력정치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작동했음을 보여 준다.
쿠바 미사일 위기의 가장 큰 교훈: 인간의 오류 가능성과 핵무기의 무기한 결합은 국가들을 파괴할 것이다.
미국 제8대 국방장관(1961–1968)으로, 케네디와 존슨 두 행정부에서 7년 이상 국방을 이끈 최장수 재임자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EXCOMM 내 공습 대신 해상 '격리' 봉쇄를 처음 제시하고 강력히 밀어붙여, 흐루쇼프에게 결의를 보여주면서도 군사 충돌로 번지지 않을 통제된 선택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서는 계량적 분석과 병력 증강을 주도하다 점차 회의에 빠졌고, 퇴임 27년 뒤 회고록에서 그 전쟁이 '잘못됐다'고 고백했다. 이후 세계은행 총재(1968–1981)로 빈곤 퇴치로 은행의 방향을 전환했다.
조국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으라.
미국 제35대 대통령(1961–1963)으로, 43세의 최연소 당선자이자 최초의 가톨릭 대통령이었다. 1961년 피그만 침공을 승인했으나 실패로 끝났고, 같은 해 흐루쇼프와의 빈 정상회담에서 위협을 느낀 소련은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했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해상 '격리' 봉쇄를 선택하고, 로버트 케네디를 통해 튀르키예의 주피터 미사일 철수라는 비밀 양보로 핵전쟁을 막았다. 1963년 11월 22일 댈러스에서 암살당했으며, 그의 죽음 이후 민권법과 세제 개혁 등 의제가 의회를 통과했다.
1942년 고르고포타모스 작전 뒤 그는 철수하지 않고 그리스에 남아 저항세력과 카이로를 잇는 사절단을 세웠다.
크리스토퍼 몬터규 우드하우스는 영국 육군 장교이자 SOE·MI6 요원, 그리스 정치사 연구자였다. 그는 점령기 그리스에서 ELAS와 EDES를 잇는 영국 군사사절단을 조직하고 지휘하며 저항운동과 전후 국가질서 사이의 접점을 만들었다. 동시에 그의 활동은 군사 협력이 영국의 왕정 복귀와 영향권 정책으로 기울 수 있었던 긴장을 보여준다. 훗날 의원과 저술가로서 그리스 현대사를 해석했다.
레이 클라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가 걱정해온 그것들, 정말 있는 것 같습니다.' 번디가 물었다. '확실한가?'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1961–1966)으로,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에서 베트남전 확전의 핵심 설계자였다. 1962년 10월 15일 저녁 CIA로부터 소련의 쿠바 미사일 배치 증거를 보고받았으나, 비밀 유지와 준비 부족을 이유로 다음 날 아침까지 대통령에게 알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1966년 퇴임 후 포드재단 회장을 지냈고, 말년에는 핵무기 선제사용 포기를 주창하며 핵군축 논의에 기여했다.
발터 슈텔레는 냉전기 미국 외교관으로, 소련과 유럽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룬 직업 외교관이었다. 그는 1974년부터 1976년까지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로서 데탕트 국면의 미소 협상을 현장에서 지켜봤고, 헬싱키 협정으로 이어진 외교 과정과도 맞닿아 있었다. 이후 서독 대사와 국무부 부장관을 지냈다.
카롤 요제프 보이티와는 폴란드의 사제이자 철학자였으며, 1978년 요한 바오로 2세로 선출되어 가톨릭교회를 이끌었다. 나치 점령과 국가사회주의 체제를 겪은 경험은 인간의 존엄, 종교의 자유, 민족적 기억을 강조하는 그의 목회와 정치적 언어를 형성했다. 1979년 폴란드 방문에서 약 1,100만 명이 그를 만났고, 그의 존재는 정권 아래 흩어져 있던 사회가 자신을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하도록 도왔다. 그는 연대가 결성될 조건을 만든 여러 요인 가운데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그 운동의 노동자 조직과 정치적 행위자들을 대신한 사람은 아니었다.
슐츠는 레이건 부부와의 저녁 식사에서 소련 지도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듣고 깨달았다. '이 사람은 공산당 지도자와 대화를 해본 적이 없고, 몹시 하고 싶어 하는구나.'
조지 슐츠는 노동·예산·재무·국무의 4개 부처 장관을 모두 지낸 두 미국인 중 하나로, 레이건 행정부에서 6년 반 동안 국무장관을 맡아 대소 외교의 방향을 다시 썼다. 국방장관 와인버거와 CIA 국장 케이시가 협상을 반대하는 가운데서도 슐츠는 레이건이 고르바초프와 직접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제네바(1985)와 레이캬비크(1986) 정상회담의 외교적 토대를 놓았다. 그 결과 1987년 INF 조약으로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 전체가 폐기되었고, 슐츠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 동유럽에 대한 지배를 포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냉전의 종식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의 회고록 『격랑과 승리』는 1980년대 외교사의 핵심 사료로 남아 있다.
게일 할보르센은 미국 공군 조종사로, 1948년 베를린 공수작전에 참여해 서베를린의 생존을 뒷받침한 수송 임무를 수행했다. 템펠호프 공항 철책가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껌을 건넨 뒤 손수건 낙하산으로 사탕을 떨어뜨린 일은 Operation Little Vittles로 확대되어 공수작전의 물자 수송에 인간적 얼굴을 더했다. 이 자발적 행동은 미군의 규정과 냉전 선전의 경계에 놓였지만, 베를린 주민과 미국 어린이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며 서방의 정치적 호소력을 키웠다. 그는 이후에도 공군의 항공·우주 개발과 베를린 템펠호프 지휘를 맡았고 1974년 대령으로 퇴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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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미 육군항공대 입대, 조종사 훈련
1948–1949베를린 공수작전 C-54 조종사, Operation Little Vittles 창시
1941년 3월 27일, 두산 시모비치가 그에게 말한 순간이었다. "폐하, 이제부터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십니다."
페타르 2세는 아버지 알렉산다르 1세의 암살 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다. 1941년 3월 27일 쿠데타로 섭정 체제가 무너지고 즉시 성년으로 선포되었지만, 곧 추축국 침공으로 런던의 망명정부를 이끌어야 했다. 그의 왕권은 점령에 맞선 국가적 연속성을 상징했으나, 망명정부의 분열과 파르티잔의 군사적·정치적 승리 속에서 실제 통치 기반을 잃었다. 1945년 왕정이 폐지된 뒤에도 귀환하지 못한 그는 전후 유고슬라비아의 정통성을 둘러싼 미해결 긴장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