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조직하고 볼셰비키와 펜자 협정을 맺은 독립운동의 철학자-대통령
1918년 3월 7일, 68번째 생일을 맞은 마사리크는 시베리아 횡단이 가능하다는 것을 군단에 직접 보여주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는 열차에 올랐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의회 의원이었던 마사리크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망명하여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운동의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1917년 러시아로 건너가 체코·슬로바키아 포로병들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편성하고 볼셰비키와 펜자 협정을 체결, 군단의 블라디보스토크 경유 프랑스 이송을 확보했다. 1918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17년간 중부 유럽에서 가장 안정된 민주국가를 이끌었고, 그의 성공은 러시아 내전에 군단이 휘말리는 모순 위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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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2–1914프라하 카렐 대학 철학 교수
- 1891–1893오스트리아 제국의회(라이히스라트) 의원 (청년체코당)
- 1907–1914오스트리아 제국의회 의원 (체코 진보당)
- 1915–1918체코슬로바키아 민족평의회 의장 (망명)
- 1917–1918러시아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편성 지휘
- 1918–1935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
베르됭의 영웅에서 비시의 협력자로 전락한 원수
1940년 6월 17일, 페탱은 프랑스에 전투를 중지하겠다고 방송했다.
필리프 페탱은 제1차 세계대전의 장군으로, 베르됭 전투의 승리와 병사들의 사기를 회복한 지휘로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1940년 독일의 침공 앞에서 전쟁 지속을 반대하고 휴전을 요청했으며, 의회가 헌법 제정 권한을 넘긴 뒤 비시 프랑스의 국가수반으로 공화국을 권위주의 체제로 대체했다. 그의 정부는 독일과 협력하고 반유대주의 법령을 시행해 점령 질서에 프랑스 국가기구를 결합시켰다. 해방 뒤 고등법원은 그를 적과의 내통과 반역으로 사형 선고했으며, 드골은 이를 종신형으로 감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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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6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입학
- 1916베르됭 전투 프랑스군 지휘
- 1917–1918프랑스군 총사령관
- 1934전쟁장관
- 1939–1940주스페인 프랑스 대사
- 1940.06프랑스 각료회의 의장
- 1940–1944비시 프랑스 국가수반
- 1945–1951반역죄 유죄 판결과 종신 구금
세계 최대 댐 기술을 사회주의 건설 현장에 옮긴 미국인 공병 대령
1932년 드네프로스트로이 준공식에서: "이렇게 얻은 미국식 기술 경험이 이 나라의 생활 수준을 높이는 지렛대가 될 것입니다."
무학으로 댐 공학을 익힌 휴 링컨 쿠퍼는 나이아가라 급류(1907)와 미시시피 키오콕 댐(1913)을 성공시키며 자력으로 미국 최고의 수력 기술자가 되었다. 1926년 소련의 초청으로 드네프로스트로이 건설 수석 컨설턴트를 맡아 GE 터빈을 공급하고 공정을 총지휘, 1932년 유럽 최대 발전소를 예정보다 8개월 앞당겨 완공했다. 같은 해 소련은 쿠퍼와 미국인 기술자 5명에게 노동적기훈장을 수여했는데,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이었다. 평생 반공주의자로 남았으나, 그의 댐이 없었다면 1차 5개년 계획의 상징적 성취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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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7토론토 발전소(나이아가라 호스슈 급류) 완공
- 1913미시시피강 키오콕 댐 및 발전소 완공
- 1914아스완 댐 전력화 사업 컨설턴트(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단)
- 1917–1918미 육군 공병대 감독 공병 장교, 대령
- 1919레이크 줌브로 수력발전소(미네소타) 완공
- 1924윌슨 댐(앨라배마, 후일 TVA 편입) 완공
- 1927–1932드네프로스트로이(드네프로게스) 수석 컨설턴트, 소련
- 1932노동적기훈장 수훈(외국인 최초)
항복 결정을 조율한 해군 출신 총리
1945년 8월 10일, 그는 교착한 회의에서 “이제 제가 어전에 나아가 성의를 여쭙고, 그 뜻으로 회의의 결정을 삼고자 합니다”라고 제안했다.
스즈키 간타로는 일본 해군 대장 출신 정치가로, 천황의 시종장과 추밀원 의장을 거쳐 전쟁 말기의 총리가 되었다. 그는 공개적으로는 군부의 전쟁 수행 노선을 받들었지만, 1945년 내각과 최고전쟁지도회의의 대립을 관리하며 전쟁을 끝낼 통로를 열었다. 원폭 투하와 소련의 대일 참전 뒤에도 이른바 ‘Big Six’의 교착은 계속되었고, 스즈키는 천황 주재 회의에서 결정을 천황의 재가에 맡기는 절차를 밀어붙였다. 그 결과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했지만, 그 과정은 침략전쟁의 책임과 군부의 저항을 지운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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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4–1887해군병학교 입교 및 졸업
- 1904–1905제4구축대 사령, 일본해 해전 참전
- 1914–1917해군차관
- 1924–1925연합함대 사령장관, 해군군령부장
- 1929–1936천황 시종장 겸 추밀고문관
- 1944–1945추밀원 의장
- 1945-04–1945-08일본 내각총리대신, 항복 결정 주도
- 1945-12–1946-06추밀원 의장, 공직 추방으로 사임
전쟁을 피하려다 전쟁의 문을 연 유화정책의 설계자
1938년 뮌헨에서 돌아온 그는 협정을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선언했다.
네빌 체임벌린은 전간기 영국의 보수 정치가로, 국내 행정 개혁과 재무 정책을 거쳐 총리가 되었다. 그는 독일과의 전쟁을 피하고 재무장을 위한 시간을 벌려 했지만, 그 전략은 나치 독일의 팽창을 억제하지 못했다. 1938년 뮌헨 협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 양도를 받아들인 그의 정부는 소련이 제안한 집단안보 구상에도 충분히 호응하지 않았고, 이 선택은 1939년 외교 위기와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이어진 국제적 조건의 일부가 되었다. 폴란드 침공 뒤 전쟁을 선포했으나 1940년 노르웨이 전투 논쟁 속에서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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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1–1915버밍엄 시의원, 도시계획위원회 의장
- 1915버밍엄 시장
- 1916–1917국가복무국장
- 1923–1924보건부 장관, 재무장관
- 1924–1929보건부 장관
- 1931–1937재무장관
- 1937–1940영국 총리
- 1938–1939뮌헨 협정과 대독 유화정책 주도
역사학과 사회민주주의를 잇다
1940년 모스크바에서 그는 겨울전쟁의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배이뇌 보이온마는 핀란드의 역사학자이자 교수, 사회민주당 정치가로 독립 초기 공화국의 형성에 관여했다. 그는 노동자 교육기관을 세우고 의회에서 외교와 사회정책을 다루며 학문을 대중적 정치 활동과 결합했다. 1940년 겨울전쟁을 끝낸 모스크바 강화조약 협상에서 핀란드 대표단의 사회민주당계 인사로 서명에 참여했으며, 전쟁과 강대국 사이에서 타협해야 하는 핀란드의 조건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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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헬싱키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 취득
- 1903–1918헬싱키대학교 북유럽사 도슨트
- 1917토코이 원로원 경제부문 의원, 교통위원회 수장
- 1919–1947핀란드 의회 사회민주당 의원
- 1920타르투 평화협상 핀란드 대표단원
- 1926–1927외무장관
- 1937–1939상공장관, 1938년 외무장관 직무대행
- 1940모스크바 강화조약 핀란드 대표단원 및 서명자
파시즘과 왕정의 책임 사이에 선 군주
1943년 7월 25일, 그는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체포하게 한 뒤 바돌리오를 새 정부 수반으로 임명했다.
이탈리아 국왕으로서 자유주의 헌정의 쇠퇴, 파시스트 국가의 성립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그는 무솔리니의 권력 장악과 식민 전쟁, 인종법, 참전을 승인해 왕정의 책임을 키웠지만, 1943년 7월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피에트로 바돌리오를 임명해 체제 전환의 헌정 통로를 열었다. 그러나 9월 휴전 뒤 로마를 떠난 그의 선택은 군과 국가를 혼란에 빠뜨렸고, 전후 왕정의 정당성을 회복하지 못한 채 1946년 퇴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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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9이탈리아 육군 장교로 복무 시작
- 1900이탈리아 국왕 즉위
- 1915제1차 세계대전 참전 국왕
- 1922무솔리니에게 정부 구성을 위임
- 1936에티오피아 황제 선포
- 1940추축국 편으로 제2차 세계대전 참전
- 1943무솔리니 해임, 바돌리오 정부 임명
- 1946퇴위하고 이집트로 망명
겨울전쟁 직전 모스크바 협상에서 스탈린과 마주 앉은 핀란드의 현실주의 외교관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모든 지혜의 시작이다: 스탈린에게서 빌려와 평생의 외교 원칙으로 삼은 말.
러시아 제국의 대공국 시절부터 시작해 핀란드 독립·내전·겨울전쟁·계속전쟁·냉전을 모두 통과한 정치가다. 독립 직후인 1918년 첫 총리를 지내며 친독일·군주제 노선을 밀었고, 1920년 타르투 조약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와 국경을 확정했다. 1939년 가을 스톡홀름 주재 공사에서 소환되어 모스크바에서 스탈린·몰로토프와 직접 협상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전쟁이 터지자 무임소장관으로 평화조약 체결을 이끌었다. 1946년 대통령에 오른 뒤로는 '현실 인정이 지혜의 시작'이라며 소련과의 지정학적 공존을 추구했고, 이 파시키비 독트린은 냉전기 핀란드 외교의 근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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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7–1913핀란드 의회 의원 (핀란드당)
- 1908–1909원로원 재무분과장
- 1918.5–11핀란드 총리
- 1914–1934KOP 은행 총재
- 1936–1939주스웨덴 공사
- 1940–1941주모스크바 공사
- 1944–1946핀란드 총리
- 1946–1956핀란드 대통령
왕정과 반공을 앞세운 8월 4일 독재자
“그렇다면 전쟁이다.”
그리스의 군인 출신 정치가로, 왕정과 반의회주의를 결합한 권위주의적 국가 질서를 추구했다. 1936년 국왕 게오르기오스 2세의 지지로 의회를 정지하고 8월 4일 체제를 세워 정당과 파업을 금지하고 좌파를 탄압했다. 동시에 국가 개입과 청년 조직을 통해 사회를 동원하려 했으며, 그의 체제는 파시즘과 권위주의적 보수 독재의 성격을 함께 지닌 것으로 논쟁되어 왔다. 1940년 이탈리아의 최후통첩을 거부해 전쟁을 이끌었지만, 1941년 독일 침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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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0그리스 육군 공병 소위
- 1899–1903베를린 전쟁대학 유학
- 1910–1912육군장관 겸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의 부관
- 1912–1913발칸 전쟁 작전참모 및 런던 회의 군사고문
- 1922–1936자유사상당 창당 및 국회의원
- 1926–1928알렉산드로스 자이미스 내각 교통장관
- 1932–1933파나기스 찰다리스 내무장관
- 1936–1941그리스 총리, 8월 4일 체제 지도자
민족국가 구상을 밀어붙인 엔데치아 이론가
리가 협상에서 민스크를 포기한 선택은 폴란드의 동방정책을 연방국가 구상에서 민족국가 구상으로 돌렸다.
스타니스와프 그랍스키는 경제학자이자 정치가로, 젊은 시절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나 국가민주주의 진영의 핵심 이론가가 되었다. 그는 폴란드의 독립과 국가 통합을 민족적 동질성에 강하게 결부했고, 우크라이나인·벨라루스인 등 소수민족을 포괄하는 연방 구상에 비판적이었다. 1920년 민스크와 리가 협상에서 그는 민스크를 요구하지 않는 노선을 지지해 피우수트스키의 동방 연방 구상을 약화시키고 리가 국경의 민족국가적 틀을 굳혔다. 이후 교육장관과 망명 정부·전후 국가기구의 지도자로 활동했지만, 1926년 이후 엔데치아와 거리를 두며 정치적 입장을 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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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0–1893사회주의 운동가, 노동자 교육·비합법 노동조직 활동
- 1906–1914국가민주당 지도자, 러시아 제국 두마 폴란드 문제 자문
- 1919–1923폴란드 하원 의원, 국민민주 진영 원내·당 지도자
- 1920–1921민스크·리가 평화협상 폴란드 대표, 민족국가 노선 주도
- 1923–1925종교·공교육 장관
- 1942–1944폴란드 망명정부 국가평의회 의장
- 1945–1947국가민족평의회 부의장
공화국의 권한이 무너지는 순간 서명한 대통령
1940년 7월 10일, 그는 사임하지 않은 채 헌법법을 공포했고 다음 날 대통령직은 페탱에게 넘어갔다.
알베르 르브룅은 광산공학 교육을 받은 프랑스의 중도우파 공화주의 정치가로, 오랜 의회·각료 경력을 거쳐 제3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으로서 제3공화국의 제한된 국가원수 관행 속에서 내각 불안정과 좌우 세력의 충돌을 조정했지만, 행정부를 직접 이끌 권한은 좁았다. 1940년 패전 국면에서 그는 북아프리카에서 항전을 계속하려 했으나 필리프 페탱을 정부 수반으로 지명했고, 7월 10일 헌법법에 서명했다. 그는 사임하지 않았지만 그 서명과 권력 이양은 비시 체제로 이어진 헌정적 단절의 핵심 장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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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6–1901광산공병, 베술·낭시
- 1900–1920하원의원, 브리에
- 1911–1914식민지 장관, 1913년 전쟁 장관
- 1917–1919봉쇄·해방 지역 장관
- 1920–1931상원의원, 상원 부의장·의장
- 1932–1940프랑스 대통령, 제3공화국 마지막 대통령
- 19407월 10일 헌법법 공포, 사임 없이 권력 이양
자유무역과 국제기구를 밀어붙인 미국 외교가
1941년 11월 26일, 그는 일본 대사에게 「미일 간 합의의 기초로 제안된 개요」를 전달했다.
코델 헐은 미국의 자유무역과 다자적 국제질서를 설계한 민주당 정치가이자 외교가였다. 그는 1930년대 무역장벽 완화와 선린정책을 추진했지만, 외교정책의 최종 결정권을 쥔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자주 긴장했다. 1941년 일본과의 협상에서 미국의 요구를 정리한 11월 26일 합의안 개요를 전달했으며, 이는 전쟁 직전 외교의 마지막 문서가 되었다. 전후에는 국제연합 창설을 이끈 공로로 1945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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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3–1897테네시주 하원의원
- 1907–1921미국 연방 하원의원
- 1921–1924민주당 전국위원회 의장
- 1923–1931미국 연방 하원의원
- 1931–1933테네시주 연방 상원의원
- 1933–1944미국 국무장관
- 1945국제연합 샌프란시스코 회의 대표
유급휴가와 주 40시간제를 남긴 프랑스 최초의 사회주의자 총리
「집권하는 동안 나는 집무실을 거의 떠나지 못했다. 그러나 밖에 나가 파리 교외를 지나며 고물 자동차와 오토바이와 2인승 자전거의 행렬을, 맞춰 입은 스웨터 차림의 노동자 부부들을 보았을 때, 그래도 내가 어렵고 어두운 삶들에 일종의 갠 하늘을, 한 줄기 트임을 들여놓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리옴 재판 진술, 1942년 3월
드레퓌스 사건으로 정치에 들어와 1920년 투르 대회에서 다수파의 코민테른 가입에 맞서 사회당(SFIO)의 「낡은 집」을 지킨 지도자. 1936년 인민전선 정부의 총리로 마티뇽 협정을 중재하고 2주 유급휴가와 주 40시간제를 입법했으며, 프랑스 최초의 사회주의자 총리이자 최초의 유대인 총리로서 극우의 표적이 되었다. 1940년 페탱 전권 위임에 반대한 80인 중 한 명으로 비시 정권의 리옴 재판에서 피고석을 인민전선 변호의 연단으로 바꾸었고, 부헨발트 억류에서 살아 돌아와 1946년 말 과도정부 총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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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1906국사원 법관이자 문예비평가,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조레스를 따라 사회주의 운동에 입문
- 1914–1919전시 사회당 각료 비서실장, 종전 후 하원의원 당선
- 1920.12투르 대회에서 다수파의 코민테른 가입에 맞서 「낡은 집」 사수 연설
- 1921–1936SFIO 재건, 『르 포퓔레르』 주필, 원내 지도자
- 1936.02왕당파 행동대 카믈로 뒤 루아에게 폭행당해 중상
- 1936.06–1937.06인민전선 정부 총리, 마티뇽 협정·유급휴가·주 40시간제
- 1938.03–04제2차 블룸 내각, 상원의 벽에 다시 막혀 한 달 만에 붕괴
- 1940.07비시에서 페탱 전권 위임에 반대표를 던진 80인 중 한 명
- 1942–1945리옴 재판에서 인민전선을 변호, 이후 부헨발트 인근 특별수용소 억류
- 1946.12–1947.01과도정부 총리, 전후 재건과 미국 차관 교섭(블룸-번스 협정)
- 1950.03주이앙조자스에서 사망
방어선과 전진 사이에서 결단을 잃은 총사령관
1940년 5월 16일 파리에서 처칠이 '전략 예비대는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자 가믈랭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모리스 가믈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모 경험과 공화국 군부의 조정자로서의 명성을 바탕으로 프랑스군 최고지휘부에 오른 장군이었다. 그는 독일과의 장기전을 예상하며 마지노선에 기대는 방어 구상을 세웠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사르 공세를 제한하고 독일의 벨기에 침공에 대비해 주력을 딜강과 벨기에 국경으로 전진시키는 선택을 했다. 1940년 5월 독일군의 아르덴 돌파와 세당의 붕괴 뒤 해임되었고, 프랑스 패전의 책임을 둘러싼 재판과 독일 억류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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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3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수석 졸업
- 1906–1914조프르 장군 참모 및 전쟁계획 보좌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제9보병사단 지휘
- 1919–1924브라질 프랑스군사사절단 단장
- 1924–1929레반트 프랑스군 사령관
- 1931–1939육군 참모총장, 육·해·공군 최고 조정
- 1939–1940프랑스군 총사령관, 사르 공세와 딜 계획 지휘
- 1940해임 및 비시 정권의 구금
농민 개혁과 전시 타협의 대통령
“이 괴물 같은 조약에 서명하는 손이여, 썩어라.”
퀴외스티 칼리오는 핀란드 농민정당의 지도자로서 토지개혁과 의회정치를 추진한 정치가였다. 그는 네 차례 총리와 여러 차례 의회 의장을 지냈고, 1922년 토지 없는 농민의 정착을 지원한 이른바 칼리오 법을 이끌었다. 대통령으로서 겨울전쟁을 이끌며 영토 양보에 저항했지만, 1940년 3월 모스크바 평화조약을 받아들여야 했다. 조약 서명을 두고 남긴 저주는 그해 여름 오른팔 마비로 현실의 아이러니가 되었고, 건강 악화로 사임한 뒤 같은 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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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4–1906핀란드 의회 신분제 의회 농민계급 대표
- 1907–1937핀란드 의회 의원, 농민연합 지도자
- 1917–1922농업 담당 장관, 독립 상원과 정부에서 재임
- 1922칼리오 법으로 불린 토지 정착 개혁 추진
- 1922–1924, 1925–1926, 1929–1930, 1936–1937핀란드 총리 네 차례
- 1920–1936핀란드 의회 의장, 여러 회기 재임
- 1937–1940핀란드 대통령, 겨울전쟁과 모스크바 평화조약 시기
파시즘과 왕정 사이에서 타협을 조직한 개혁 정치가
1943년 6월 그는 국왕에게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바돌리오를 임명하며 독일과의 동맹을 끊으라고 비밀리에 요구했다.
이반오에 보노미는 사회주의 개혁파에서 출발해 이탈리아 자유주의 의회정치의 핵심 인물로 이동한 정치가였다. 파시즘의 부상기에 충분히 단호하게 저항하지 못했고 무솔리니 정부를 지지한 전력이 있었지만, 1942년부터 반파시스트 세력을 다시 연결하며 정권 교체를 모색했다. 그는 1943년 국왕에게 무솔리니 해임과 피에트로 바돌리오 기용을 비밀리에 요구했고, 9월에는 6개 정당으로 구성된 민족해방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이후 왕정과 저항운동, 연합국 사이의 타협을 이끌며 전후 이탈리아의 제도적 이행을 관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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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3이탈리아 사회주의 노동자당에 가입
- 1909사회주의자로 하원의원에 당선
- 1912이탈리아 개혁사회당 창당에 참여
- 1916–1919보셀리·올란도 내각 공공사업장관
- 1921–1922이탈리아 왕국 총리
- 1942–1943지하 반파시스트 신문과 야권 연락망 조직
- 1943–1944민족해방위원회 의장
- 1944–1945해방기 이탈리아 정부 총리
- 1948–1951공화국 초대 상원의장
기근 구제의 거장이자 대공황으로 무너진 미국의 제31대 대통령
「이천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 그들이 어떤 정치를 하든, 먹여야 한다!」 볼셰비키 구제를 두고 공격받자 후버가 남긴 응답이었다.
후버는 광산기사로 막대한 부를 이룬 뒤 두 차례 세계대전의 구호활동으로 명성을 쌓은 인물로, 1929년 미국 제31대 대통령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벨기에 구제위원회와 미국 식량청을 이끌며 수백만 명을 먹여 살렸고, 전후 미국구제청(ARA)을 사적 조직으로 개편해 동유럽과 러시아 구제를 주도했다. 1921년 볼가 기근에 맞서 고리키의 호소에 즉각 응답하고 리가 협정을 직접 주도해 식량 분배의 자율성과 소련의 금 보유분 지출을 관철, 하루 천만 명 이상을 먹였다. 대공황 속 대통령직에서는 고전했으나 은퇴 후에도 트루먼·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개혁위원회를 이끌며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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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4아이오와주 웨스트브랜치의 퀘이커 가정에서 출생
- 1895스탠퍼드대 졸업, 광산기사로 중국·호주 등에서 부 축적
- 1914–1919벨기에 구제위원회(CRB) 위원장, 점령지 벨기에에 식량 지원
- 1917–1919미국 식량청장, '식량 독재자'로 전시 식량 통제
- 1919–1923미국구제청(ARA) 국장, 동유럽·러시아 구제 주도
- 1921.08.20리가 협정 조인, 볼가 기근 구제의 자율성·비용 조건 확정
- 1921–1928상무장관
- 1929–1933제31대 대통령, 대공황 속 재선 실패
백분율 합의로 유럽을 스탈린과 나눈 영국의 전시 총리
나는 반쪽짜리 종이에 백분율을 적었다—루마니아는 러시아 90%, 그리스는 영국 90%, 유고슬라비아는 50대 50… 스탈린은 푸른 연필로 체크 표시를 하고 종이를 다시 밀어 보냈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전시 총리로서 나치 독일에 맞선 연합국의 승리를 이끌었고, 1951년부터 1955년까지 재집권했다. 1944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발칸반도 영향권을 백분율로 나눈 비밀 합의를 주고받았으며, 얄타회담에서는 폴란드의 자유선거를 확보하려 애썼으나 소련의 동유럽 지배를 막지 못했다. 제국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로서, 1946년 퓰턴 연설에서 '철의 장막'을 경고하며 냉전의 수사학을 제공했다. 전쟁 지도력으로 20세기 가장 위대한 영국인으로 평가받지만, 식민지 정책과 벵골 기근 대응에는 비판이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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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1945연합내각 총리 (제1차)
- 1951–1955총리 (제2차)
- 1945–1951야당 당수
- 1939–1940해군장관
- 1924–1929재무장관
- 1911–1915해군장관
- 1910–1911내무장관
- 1908–1910통상장관
만주를 지배한 군벌 정치가
1928년 6월 4일, 베이징에서 돌아오던 그의 열차가 황고둔에서 폭발했다.
장쭤린은 청 말의 군인에서 출발해 중국 군벌시대 동북 지역의 독자적 권력자로 성장한 중국 정치가였다. 그는 봉천군벌을 이끌며 만주를 사실상 자치적으로 통치했고, 군사력과 산업·재정 정비를 결합해 자신의 기반을 강화했다. 일본의 지원과 만주 이권을 둘러싼 협력은 그의 권력을 키웠지만, 동시에 일본군과 충돌할 여지도 남겼다. 국민당의 북벌로 베이징에서 철수하던 중 관동군 장교들이 설치한 폭탄에 중상을 입고 사망했으며, 이 황고둔 사건은 일본군의 독단적 만주 개입이 심화되는 전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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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1895청군 기병으로 청일전쟁 참전
- 1905봉천성 정규군 연대 지휘관
- 1916봉천성 군무독판
- 1918동삼성 순열사, 만주 군정 장악
- 1924베이징 장악, 중화민국 군사독재자
- 1927–1928중화민국 육해군 대원수
- 1928황고둔 사건으로 관동군에 암살됨
얄타 합의의 치명적 모호함을 루스벨트에게 직고한 원수급 비서실장
리히가 루스벨트에게 말했다. '이 합의는 소련이 얄타에서 워싱턴까지 늘여도 기술적으로 위반이 아닙니다.' 루스벨트가 답했다. '나도 아네, 빌.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윌리엄 리히는 미 해군 원수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루스벨트와 트루먼 두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사실상의 첫 합동참모의장이었다. 해군작전부장과 푸에르토리코 총독, 비시 프랑스 대사를 지낸 뒤 1942년 현역으로 복귀해 전쟁 내내 연합국 전략을 조율했다. 1945년 얄타 회담에서 그는 폴란드 합의문을 읽고 루스벨트에게 '소련이 얄타에서 워싱턴까지 늘여도 기술적으로 위반이 아닙니다'라고 말했고, 루스벨트는 '나도 아네, 빌.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라고 답했다. 원자폭탄 투하를 훗날 비판했지만 당시 공개 반대는 하지 않았고, 전후에는 핵 선제사용 전쟁계획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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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5아이오와주 햄프턴에서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아들로 출생
- 1897해군사관학교 졸업, USS 오리건에서 스페인-미국 전쟁 참전
- 1927–1931해군 병기국장, 동기생 중 첫 제독 진급
- 1937–1939해군작전부장, 함대 확장과 전쟁 준비 주도
- 1939–1940푸에르토리코 총독, 기지 건설과 뉴딜 공공사업 집행
- 1940–1942비시 프랑스 주재 대사, 페탱 정권의 대독 협력 억제 실패
- 1942–1949대통령 비서실장 겸 합동참모의장, 얄타·포츠담 회담 배석
- 1950회고록 『나는 거기에 있었다』 출간
잠정 국가를 지속 질서로 만든 정치가
의회평의회 의장 아데나워는 분단된 독일의 기본법을 최종 헌법이 아닌 잠정적 합의로 제시하는 데 앞장섰다.
콘라트 아데나워는 나치즘의 붕괴와 독일 분단 뒤 연방공화국의 틀을 세운 가톨릭 보수 정치가였다. 의회평의회 의장으로서 영구 헌법 대신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 둔 잠정적 기본법을 지지하면서 서부 점령지에 민주 제도를 마련했다. 초대 연방총리로는 서방 결속과 유럽 통합, 사회적 시장경제를 추진했지만 반공 노선으로 냉전의 분단도 굳혔다. 그의 정치적 유산은 잠정성을 내세운 국가 건설이 장기적 질서로 정착한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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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6–1909쾰른 부시장
- 1917–1933쾰른 시장
- 1921–1933프로이센 국가평의회 의장
- 1948–1949의회평의회 의장
- 1949–1963독일연방공화국 초대 연방총리
- 1951–1955연방 외무장관
- 1950–1966기독교민주연합 의장
황도파의 군국주의 지도자
1932년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총리가 해군 청년 장교들에게 암살되자, 육군대신 아라키는 이들을 '억누를 수 없는 애국자'라고 부르며 칭송했다.
아라키 사다오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군이자 황도파의 대표적 지도자로, 천황 중심의 국가 개조와 대외 팽창을 결합한 군국주의를 주장했다. 1931년 만주사변 뒤 육군대신이 되어 관동군의 기정사실을 정부의 정책으로 굳히는 데 기여했고, 소련 극동을 겨냥한 북진론도 지지했다. 그러나 그가 후원한 청년 장교 세력은 통제에서 벗어나 2·26 사건으로 폭발했고, 사건 뒤 현역에서 물러났다.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55년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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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7육군사관학교 졸업, 임관
- 1907육군대학 수석 졸업
- 1915–1918러시아군 종군무관, 시베리아 출병 참가
- 1924–1925헌병사령관
- 1928–1930육군대학 교장
- 1931–1934육군대신, 관동군의 만주 점령과 만주국 승인을 추진
- 1938–1939문부대신, 황도교육과 전시 동원 추진
- 1946–1955극동국제군사재판 유죄 판결, 복역 후 석방
산업과 전쟁을 잇댄 군사 조직가
만네르헤임은 그를 산업가의 경험과 군대 조직 능력을 함께 지닌 동료로 기억했다.
루돌프 발덴은 핀란드의 제지산업을 키운 기업가이자 군사·국가 조직가였다. 1918년 내전에서 백군의 후방과 보급을 정비한 경험은 만네르헤임과의 긴 협력으로 이어졌고, 겨울전쟁에는 본부 대표로 내각에 참여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 국방장관이 되어 모스크바 강화조약에 핀란드 측 서명자로 이름을 올렸으며, 영토를 잃고 독립을 지켜야 했던 국가의 전환을 맡았다. 노동운동에 보수적이었던 그의 태도는 겨울전쟁의 공동방위 속에서 노동조합을 협상 상대로 인정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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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하미나 사관학교 졸업, 핀란드 근위대 소위
- 1918백군 후방지구·본부 후방 참모 책임자
- 1918–1919핀란드 전쟁장관
- 1920타르투 평화조약 핀란드 대표
- 1939–1940겨울전쟁 전시내각 본부 대표
- 1940–1944핀란드 국방장관, 모스크바 강화조약 서명자
- 1942보병대장 진급
- 1944모스크바 휴전협정 핀란드 대표단장
- 1946사망
군부의 압력 속에서 외교와 책임 사이에 선 정치가
1945년 6월, 그는 말리크에게 다가갔지만 소련은 회담을 늦추며 대일전 준비 시간을 벌었다.
히로타 고키는 일본 제국의 외교관 출신 정치가로, 국제협조를 표방하면서도 중국 침략과 군부의 대외정책에 제동을 걸지 못한 인물이다. 외무상과 총리를 거치며 군부대신 현역무관제를 되살리고 방공협정을 추진해 민간정부의 자율성을 약화시키는 데 관여했다. 1945년 6월에는 소련의 야코프 말리크 대사와 접촉해 전쟁 종결을 위한 중재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소련은 이미 대일 참전을 준비하며 회담을 지연시켰다. 도쿄 재판에서 전쟁범죄 유죄 판결을 받아 1948년 문관으로는 유일하게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그 책임과 형량은 지금도 논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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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6외무성 입성, 외교관 시험 수석 합격
- 1923–1926외무성 유럽미주국장
- 1927–1930주네덜란드 공사
- 1930–1932주 소련 대사
- 1933–1936외무상, 사이토·오카다 내각
- 1936–1937내각총리대신, 외무상 겸임
- 1937–1938제1차 고노에 내각 외무상
- 1945말리크 대사와 접촉, 소련 중재 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