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파판치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인들은 마차 대열을 홀로 앞서 달리는 카우보이를 좋아합니다. 이 낭만적인 캐릭터는 제게 꼭 맞습니다"라고 말해 닉슨을 격노시켰다.
나치 독일을 피해 15세에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 난민 출신으로, 하버드대에서 현실주의 외교 이론을 정립하고 닉슨·포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냈다. 소련과의 데탕트를 주도하며 '연계' 전략을 고안, 도브리닌 주미 소련대사와의 비밀 배후채널을 통해 1972년 SALT I과 ABM 조약을 성사시키는 결정적 외교를 펼쳤다. 중국 비밀 방문으로 미중 화해의 문을 열고 파리 평화협정을 중재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나, 캄보디아 폭격과 제3세계 개입으로 전쟁범죄 논란 역시 끌어안은 복합적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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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943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 시티칼리지에서 회계학 수학 후 미군 입대
1943–194984보병사단 정보장교로 유럽 전선 참전, 방첩대 요원으로 게슈타포 색출 및 탈나치화 임무
1950–1969하버드대 정치학 교수, 국방연구프로그램 소장; 록펠러·닉슨 캠페인 외교 고문
1969–1975국가안보보좌관: 데탕트·대중국 개방·SALT I 협상 주도, 도브리닌과의 배후채널 운영
1971–1972중국 비밀 방문으로 마오쩌둥·저우언라이와 회담, 닉슨 방중 길을 열다
1973–1977국무장관: 파리 평화협정, 노벨 평화상(1973), 중동 셔틀 외교; 칠레 쿠데타 연루
몰타에서 고르바초프와 냉전 종식을 선언했지만, 신중함이 거의 역사를 놓칠 뻔했던 미국 대통령
몰타 공동 기자회견에서 부시는 말했다. '우리는 항구적 평화를 실현할 수 있으며 동서 관계를 지속적 협력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고르바초프 의장과 제가 바로 이곳 몰타에서 시작한 미래입니다.'
조지 H. W. 부시는 제2차 세계대전의 해군 조종사에서 석유 사업가를 거쳐 미국 제41대 대통령이 된 인물로, CIA 국장·유엔 대사·중국 주재 대표를 두루 지낸 외교 경험을 바탕으로 냉전의 마지막 4년을 이끌었다. 1989년 취임 직후 대소 정책 재검토라는 '부시 휴지기'로 고르바초프를 조바심나게 했으나, 그해 12월 몰타 회담에서 두 정상은 냉전의 종식을 공동으로 확인했고, 이듬해 독일 통일을 지지하며 유럽의 새 질서를 다졌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는 다국적군을 조직해 걸프전으로 응수했으나, 불황 속에 '새로운 세금은 없다'는 공약을 깨면서 1992년 재선에 실패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후, 카터는 1980년 1월 국정연설에서 '페르시아만 지역에 대한 외부 세력의 지배 시도는 미합중국의 중대한 이익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루지야 땅콩 농장에서 자란 침례교도로, 해군 핵잠수함 장교를 거쳐 남부의 인종차별 철폐를 공약한 '뉴사우스' 주지사가 되었다. 1976년 워싱턴 아웃사이더를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파나마 운하 반환,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성사시켰다. 1979년 6월 빈에서 브레즈네프와 SALT II에 서명하며 데탕트를 정점으로 이끌었으나, 같은 해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조약 비준을 철회하고 카터 독트린을 선언하며 데탕트의 종막을 알렸다. 퇴임 후 카터 센터를 설립해 인권과 공중보건, 분쟁 중재에 헌신했으며,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훗날 이렇게 적었다. 〈전면 기습 공격에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는, 그것이 역(逆)진주만이 되어 전 세계의 눈에 미국의 이름을 더럽히리라는 점이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남동생이자 가장 신임받는 정치 고문으로, 35세에 법무장관이 되어 조직범죄 소탕과 시민권 보호에 앞장섰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초기에는 침공을 선호했으나, 해상 봉쇄 측으로 전환한 뒤 위기 후반 도브리닌 소련 대사와의 비밀 회담에서 튀르키예 미사일 철수 약속을 전하며 타결의 열쇠가 되었다. 형의 암살 후 상원의원으로 베트남 전쟁 반대와 빈곤 퇴치에 나섰고, 1968년 대선 경선 중 암살당했다.
브렌트 스코크로프트는 미국 공군 장교 출신의 국가안보 관료로, 대통령과 외교·군사 관료 사이의 정책 조정을 중시한 현실주의적 전략가였다. 그는 제럴드 포드와 조지 H. W. 부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내며 냉전 말기의 군비·유럽 외교를 조율했다. 1989년 몰타 회담에는 성급한 정상회담이 기대만 키울 수 있다며 처음에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지만, 회담이 열리자 미소 관계의 전환을 관리하는 핵심 참모로 참여했다. 이후에도 동맹과 국제기구를 중시하며 이라크 침공과 일방주의를 비판했다.
「나는 내가 이 모든 일을 시작한 사람으로 기억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평판을 원하지 않았다.」, 2005년 AP 통신 인터뷰에서
플로리다주 아팔라치콜라 출신으로 17세에 육군항공대에 입대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전투 임무를 수행한 미 공군 조종사였다. 1962년 10월 14일 일요일 아침 쿠바 상공을 6분 동안 비행하며 촬영한 928장의 사진에서 소련의 SS-4 중거리탄도미사일이 확인되었고, 이 사진이 케네디 대통령의 책상에 올라가며 13일간의 핵전쟁 위기가 시작되었다.
1981년 10월, 당 중앙위원회는 카니아를 물러나게 하고 야루젤스키를 제1서기로 선출했다.
스타니스와프 카니아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지도자로서 당의 통제와 사회적 요구 사이의 균열을 관리하려 했다. 1980년 8월 파업과 연대자유노조의 등장 뒤 그는 노조 및 가톨릭 세력과 대화를 모색했지만, 당 내부의 불신과 경제 위기는 타협의 공간을 좁혔다. 소련 지도부의 압박 속에서 1981년 10월 제1서기직에서 물러났고, 곧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가 뒤를 이었다. 1981년 계엄령 도입 책임으로 기소됐으나 2012년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 유명한 구절을 당신이 썼습니까?'라는 질문에 소렌슨의 평생 대답은 '묻지 마시라(Ask not)'였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수석 연설문 작성자이자 측근 보좌관으로, 케네디는 그를 '나의 지적 혈액은행'이라 불렀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합동참모본부의 공습 주장에 맞서 해상 봉쇄를 지지했고, 10월 22일 대국민 TV 연설을 초안하며 '봉쇄(blockade)' 대신 '격리(quarantine)'라는 용어를 선택해 전쟁 선포의 법적 함정을 피했다. 후일 이 연설을 '지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케네디의 연설'이라고 평했으며, 흐루쇼프와의 비밀 서한 초안도 작성했다. 케네디 암살 후 린든 존슨의 '계속 나아갑시다' 연설을 기초하고 1964년 사임, 이후 변호사와 저술가로 활동하며 2008년 버락 오바마를 지지했다.
그 비밀 작전은 탁월한 발상이었다. 그것은 러시아인들을 아프간 덫으로 끌어들였다… 소련이 국경을 넘던 날 나는 카터 대통령에게 썼다: 우리는 지금 소련에게 베트남 전쟁을 선사할 기회를 가졌다.
폴란드 출신의 미국 정치학자이자 외교 전략가로, 카터 행정부(1977–1981)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다. 소련 견제를 위한 인권 외교와 대중국 관계 정규화,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주도했으며, 카터 독트린으로 페르시아만 군사 개입 의지를 천명했다. 1979년 7월 3일, 소련 개입을 유발할 위험을 알리는 메모를 대통령에게 보내면서도 무자헤딘 비밀 원조 지시에 서명했으며, 훗날 "소련에게 베트남 전쟁을 선사할 기회"라 평했다. 냉전 후에는 《거대한 체스판》(1997)으로 유라시아 지정학과 NATO 확장을 주창하며 미국 외교에 지속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1989년 11월 28일, 콜은 동맹국은 물론 자신의 외무장관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연방의회 연단에 섰다. 부시가 그의 10개항 계획 요약 편지를 받은 것은 콜이 이미 연설을 시작한 직후였다.
16년간 서독과 통일 독일의 총리를 지내며 유럽 통합과 독일 재통일을 이끈 기독교민주연합(CDU) 정치인. 1989년 11월 28일, 동맹국과도 협의 없이 독일 통일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연방의회에서 발표해 불과 며칠 후 열린 몰타 회담에서 독일 문제의 틀을 결정지었다. 이듬해 10월 3일 독일을 재통일시켰고,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마스트리흐트 조약과 유로화 도입을 주도했다. 서독 체제의 동독 확장이라는 방식으로 통일을 완수했으며, 16년 장기 집권 끝에 1998년 선거에서 패배한 뒤 CDU 비자금 스캔들로 당 명예의장직에서 물러났다.
1989년 6월 27일, 모크와 줄러 호른이 쇼프론 인근 철조망을 절단하며 국경 개방을 세계에 알렸다.
알로이스 모크는 오스트리아 국민당의 정치가로, 유럽 통합을 오스트리아 외교의 중심 과제로 삼았다. 외무장관으로서 헝가리의 국경 개방과 오스트리아의 유럽공동체 가입을 추진하며 냉전 종식기의 중부 유럽 재편에 관여했다. 1989년 6월 27일 줄러 호른과 국경 철조망을 상징적으로 절단한 장면은 동독 주민들의 탈출과 동구권 붕괴로 이어진 국경 개방의 국제적 상징이 되었다.
고르바초프가 철수 의사를 굳힌 것은 스팅어 미사일이 아니라 '페레스트로이카와 외교 덕분'이라고 그는 훗날 회고록에서 단언했다.
코르도베스는 에콰도르의 외교관이자 유엔 사무차장으로, 1982년부터 6년간 데 쿠엘랴르 사무총장의 개인대표로서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간 제네바 협상을 중재했다. 라울 프레비시와 함께 UNCTAD 창설에 참여했고, 유엔 내에서 특별정무담당 사무차장까지 오르며 이란 인질 위기, 이란-이라크 전쟁, 키프로스 분쟁 등 굵직한 현안을 두루 다뤘다. 1988년 4월 제네바 합의 서명을 이끌어내 소련군 철수의 외교적 틀을 완성했으며, 이후 에콰도르 외무장관과 유엔 대사를 지냈다.
1969년 2월, 하벨은 잡지 『트바르시』에 실은 「체코의 운명?」에서 쿤데라의 낙관적 민족 서사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우리 운명의 주인은 무엇보다 바로 우리 자신이며, 지리적 위치나 수백 년의 숙명 뒤에 숨는다고 우리가 해방되지는 않는다."
체코의 극작가이자 반체제 운동가, 정치가. 부조리극 『가든 파티』(1963)와 『비망록』(1965)으로 체제를 풍자하며 명성을 얻었고, 1968년 프라하의 봄 진압 후 밀란 쿤데라의 「체코의 운명」에 「체코의 운명?」으로 응답하며 반체제로 전환했다. 1977년 헌장 77을 공동 창립하고 투옥을 거듭했으며, 1989년 벨벳 혁명을 이끌어 체코슬로바키아 마지막 대통령과 체코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1991년 9+1 회의에서 연방의 재편을 논의하면서도 투르크메니스탄의 독자성을 끝까지 저울질했다.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는 소련 말기 투르멘 공화국의 당·정부 지도자에서 독립 투르크메니스탄의 초대 대통령으로 전환한 정치가였다. 그는 1991년 신연방조약을 둘러싼 9+1 회의에 투르크메니스탄 대표단을 이끌고 참여했지만, 공화국의 독자 노선을 지키려는 계산 속에서 협상 자체에는 제한적으로 관여했다. 독립 뒤에는 중립과 국가 주권을 내세우면서 권력을 대통령 개인에게 집중하고, 루흐나마와 광범한 개인숭배를 통해 사회를 통제했다. 그의 통치는 탈소비에트 국가 건설과 권위주의적 고착이 결합한 사례로 남았다.
1981년 3월 19일 비드고슈치에서 농민 연대의 합법화를 요구하던 그는 진압대에 의해 구타당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로만 바르토슈체는 폴란드의 농민이자 반체제 정치인으로, 독립 농민노조의 조직화와 민주화 이후 농민정치의 재편을 잇는 인물이었다. 1981년 비드고슈치 점거를 이끌며 농민 연대의 합법화를 요구했고, 3월 19일 공권력의 진압으로 구타당했다. 계엄 시기에는 구금되었으며, 이후 의회와 폴란드 농민당을 통해 농촌 기반의 반공 야권을 제도정치로 옮겼다.
절젠스키 게저는 1956년 혁명을 경험한 역사학자이자 헝가리의 체제전환기 외교를 이끈 정치가다. 그는 혁명 뒤 처형된 사람을 약 350명으로 추산해 진압의 규모를 기억하는 데 기여했다. 학자로서 국제관계사와 헝가리의 대외 이미지를 연구했고, 민주 헝가리 포럼 창립 세대로서 서방과의 새로운 관계를 추진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주소 대사에서 『아프간츠이』의 저자까지, 소련을 가장 깊이 이해한 영국 외교관
「우리가 여전히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쓰고 민스 파이를 먹고 있을 때, 고르바초프가 텔레비전에 나와 자신이 소련 대통령직을 사임했다고 세계에 알렸다」, 1991년 크리스마스 모스크바에서.
영국 외교관이자 작가로, 페레스트로이카와 소련 붕괴의 결정적 시기인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주소 영국 대사를 지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개인적 신뢰를 쌓으며 1991년 8월 쿠데타와 옐친의 부상, 소련 해체를 현장에서 목격했고, 이후 존 메이저 총리의 외교정책 보좌관과 합동정보위원회 의장을 역임했다. 2011년 출간한 『아프간츠이』(Afgantsy)는 소련군이 전장에서 패배하지 않고 질서 있게 철수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군사적 실패가 아니라 정치적·정보적 실패였다고 주장해 '소련판 베트남'이라는 서방의 통념을 근본적으로 뒤흔든 대표적 수정주의 저작이다.
바츨라프 클라우스는 체코의 경제학자이자 정치가로, 1989년 이후 국가사회주의 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급진적 경로를 대표했다. 그는 시민민주당을 세우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분리를 이끈 뒤 체코 총리와 대통령을 지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 내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정치적 자유에는 공감했지만 경제적 제3의 길은 거부했으며, 이 입장은 전환기의 ‘수식어 없는 시장경제’와 이후 체코 보수주의의 핵심 구호가 되었다. 대통령으로서는 유럽 통합과 기후변화 정책을 비판하며 주권과 시장의 우위를 강조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소련 국가보안기관 출신의 러시아 정치가로, 1990년대 국가 위기 속에서 권력의 중심에 올라섰다. 그는 대통령과 총리를 번갈아 맡으며 연방 권력과 대통령 행정부를 강화했고, 러시아의 국제적 영향력 회복을 통치의 핵심 서사로 삼았다. 2005년 소련 해체를 ‘20세기의 가장 큰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말한 발언은 해체를 러시아 사회의 상실과 혼란으로 기억하는 그의 역사 인식을 압축한다. 동시에 그의 집권은 정치적 경쟁과 독립 언론의 공간을 좁히고, 대외 군사행동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국가를 재편했다.
우리가 충분히 단호하다면, 집권당이 자유선거에 복종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56년의 정신을 놓지 않는다면, 러시아 군대의 철수 협상을 즉시 시작할 정부를 선출할 수 있다.
빅토르 오르반은 1989년 너지 임레 재매장식에서 소련군 철수와 자유선거를 요구한 연설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반공청년 지도자였다. 1998년 총선 승리로 헝가리 최연소 총리가 되어 NATO 가입을 이끌었고, 2010년 재집권 후 개헌·사법·언론을 장악하며 스스로 '비자유민주주의'라 부르는 체제를 구축했다. 2014년 바일레 투슈나드 연설에서 자유민주주의와의 결별을 공개 선언했으며, 2020년 헝가리 역사상 최장기 총리가 되었다. 반공 저항으로 출발한 그의 정치 여정은 21세기 권위주의 포퓰리즘의 대표적 모델이 되었다.
1980년 8월 16일, 엘모르 파업을 시작한 그는 그단스크 조선소로 향해 기업간파업위원회에 합류했다.
안제이 그비아즈다는 전자공학자이자 노동조합 활동가로, 1970년대 후반 그단스크의 독립 노동운동을 조직한 인물이다. 그는 해안 자유노조를 공동 창립하고 지하 출판을 이끌며 국가 통제 밖의 노동자 조직을 준비했다. 1980년 8월 16일 엘모르 파업에서 그단스크 조선소로 온 그는 기업간파업위원회 지도부에 합류해 21개 요구안을 공동 작성하고 연대의 초기 지도자가 되었다. 계엄령 뒤 투옥과 탄압을 겪은 그는 레흐 바웬사의 협상 노선과 결별하고 원탁회의 타협에 반대한 경쟁적 야당 흐름을 대표했다.
매트록은 회고했다. "나는 로널드 레이건보다 더 나은 학생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는 자기가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을 알았고,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잭 매트록은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러시아에 매료되어 외교관이 된 미국의 대소 전문가로, 1961년 첫 모스크바 근무 시절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와 흐루쇼프 사이의 외교문을 번역했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NSC 유럽·소련 담당 선임국장으로서 CIA와 국무부 분석관들을 동원해 '소비에트 101'이라는 24편의 브리핑 문건을 편성하고 모의 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 역을 맡아 레이건을 훈련시켰다. 1987년 소련 주재 대사로 부임하여 소련의 마지막 4년을 목격했고, 은퇴 후 고르바초프가 제네바에서 SDI 공유 약속을 서면화하지 않은 것을 '전략적 실수'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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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즈버러 출생, 듀크대·컬럼비아대 수학
1956–1971외교관 임관, 빈·모스크바·서아프리카·동아프리카 근무, 쿠바 미사일 위기 시 케네디-흐루쇼프 서신 번역
1971–1974국무부 소련 담당 국장
1974–1978주소 미국대사관 공사 겸 부대사
1981–1983체코슬로바키아 주재 미국 대사
1983–1986NSC 유럽·소련 담당 선임국장, '소비에트 101' 편성, 제네바·레이캬비크 정상회담 준비
1987–1991소련 주재 미국 대사, 소련 마지막 4년 목격
1991–컬럼비아대·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 『제국의 부검』·『레이건과 고르바초프』 저술
1989년 11월 29일 몰타 회담 메모에서 베이커는 부시가 고르바초프보다도 "새로운 속도와 목적"을 이끌어야 한다고 썼다.
제임스 베이커는 변호사 출신의 공화당 정치가로, 조지 H. W. 부시와의 오랜 동맹을 바탕으로 미국 보수정치의 핵심 실무자가 되었다. 재무장관으로 환율과 국제 금융을 다룬 뒤 국무장관이 되어 냉전 말기의 외교, 독일 통일, 걸프 위기를 조정했다. 그는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무조건 신뢰하기보다 미국의 이익과 동맹의 안정을 계산했지만, 부시가 페레스트로이카에 손을 내밀도록 설득하고 1989년 몰타 회담의 의제와 운영을 구체화했다. 그 신중한 현실주의는 대결의 관성을 늦추면서도 변화의 방향을 미국 외교가 관리할 수 있는 협상으로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