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호 케코넨은 전후 핀란드의 국가 운영과 대외관계를 규정한 정치가로, 1956년부터 1981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그는 소련과의 긴장을 관리하면서도 핀란드의 서방 경제·정치적 연결을 유지하는 중립 외교를 발전시켰다. 1972년 11월 디폴리 예비협의를 핀란드에 유치하고 미국과 캐나다를 포함한 유럽안보협력회의의 틀을 다듬은 일은 그 외교의 절정이었다. 그의 통치는 안정과 국제적 중개의 성과를 남겼지만, 대통령 권한과 동방관계에 의존한 정치가 민주적 경쟁을 좁혔다는 논쟁도 낳았다.
스타니스와프 미코와이치크는 폴란드 농민운동에서 성장한 정치가로, 전쟁과 망명 속에서 농민의 대표성과 폴란드 국가의 주권을 함께 지키려 했다. 1943년부터 1944년까지 런던 망명정부를 이끌며 카틴 학살과 동부 국경, 전후 정부 구성을 둘러싸고 소련과 연합국에 맞섰다. 바르샤바 봉기 때 그는 국내 지하운동의 행동과 망명정부의 외교를 연결하려 했지만, 군사적 현실과 스탈린 및 서방의 협상력 앞에서 선택지는 좁아졌다. 전후 귀국해 폴란드 농민당을 이끌었으나 1947년 부정선거와 탄압 뒤 다시 망명했다.
스테판 비신스키는 폴란드 가톨릭교회의 수장이자 사회적 권위를 지닌 종교 지도자로,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 교회와 민족 정체성의 자율성을 지켰다. 그는 국가와의 공개 대립만이 아니라 1950년 협정과 이후의 협상을 통해 신자 공동체와 교회 제도의 활동 공간을 보존하려 했다. 1953년 체포되어 1956년까지 억류되었지만, 석방 뒤에는 교회의 장기적 조직력과 도덕적 권위를 재건했고, 기에레크 시기에는 국가와 공존하면서도 독립된 사회 세력으로 남았다. 1980년 연대노조가 출범하자 정부와 파업 노동자 모두에게 책임 있는 행동을 촉구했다.
맥스웰 테일러는 제2차 세계대전의 공수부대 지휘관에서 냉전기의 미국 군사·외교 정책가로 변모한 장교였다. 그는 핵무기에 과도하게 의존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뉴 룩’을 비판하고 재래식 전력과 유연한 대응을 강조했다. 케네디의 신임을 얻어 합동참모본부 의장과 대통령 군사대표를 지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EXCOMM에 참여해 군사 선택지를 제시하는 동시에 대통령의 봉쇄 결정을 군에 전달했다. 이후 베트남 개입 확대를 지지하며 냉전 군사주의의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드러냈다.
히로히토는 1926년부터 1989년까지 재위한 일본의 제124대 천황으로, 제국 헌법의 군주와 전후 헌법의 상징천황을 모두 경험했다. 그는 일본의 대외 침략과 태평양전쟁을 승인한 국가 체제의 정점에 있었으며, 전쟁 수행과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의 범위는 지금도 논쟁적이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소련의 대일 참전 뒤 교착된 최고전쟁지도회의에 개입해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하고 항복 방송을 했다. 전후에는 천황의 신격화를 부정하고 상징적 국가원수로 남았으며, 해양생물학 연구도 계속했다.
1941년 쿠프라에서 그는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 프랑스 국기가 휘날릴 때까지 무기를 내려놓지 않겠다고 서약하게 했다.
필리프 르클레르 드 오트클로크는 1940년 패전 뒤 드골의 자유 프랑스에 합류해 식민지 군대와 망명군을 하나의 전투력으로 묶은 프랑스 장군이다. 그는 쿠프라에서 스트라스부르까지 이어지는 목표를 제시했고, 아프리카 전역에서 단련한 기동전을 제2기갑사단에 이식했다. 1944년 8월에는 연합군의 파리 우회 구상에 맞서 수도로 진격해 프랑스군과 레지스탕스가 주도하는 해방을 실현했다. 전후 인도차이나에서는 군사적 승리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인식했지만, 194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해 그 판단을 끝까지 펼치지 못했다.
뱅상 바디는 변호사 출신의 프랑스 급진사회주의 정치인으로, 지방 행정과 의회에서 활동하며 참전군인과 공화국의 권리를 옹호했다. 1940년 7월 그는 헌법 개정 자체에는 열려 있었지만 페탱에게 권력을 넘겨 공화국을 없애는 데는 반대했고, 이를 밝힌 27인 동의안의 발의를 시도한 뒤 전권 부여에 반대표를 던졌다. 비시 당국의 시장직 정지 뒤 레지스탕스에 참여했으며 체포되어 다하우로 deport되었다. 전후에는 다시 의원과 참전군인 담당 장관을 지냈지만 식민 지배와 프랑스의 해외 주둔을 옹호하는 한계도 보였다.
기습 공격은 미국에 '진주만 오명'을 남길 것이라고 경고하며, 공습 전 카스트로와 흐루쇼프에게 24시간의 사전 경고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사업가이자 공화당원으로, 피그만 침공 실패 후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CIA 국장에 임명되었다. 1962년 여름과 가을,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반입할 것이라고 거듭 경고했으나 정보기관 내부에서 기각당했고, 9월 20일 신혼여행 중 보낸 전문에서 '상상력 있는 분석'을 촉구한 끝에 10월 14일 U-2 정찰기를 명령해 미사일 기지를 발견했다. 케네디 암살 후 존슨 행정부에서도 재임했으나 베트남 확전을 둘러싼 불화로 1965년 사임했다.
1943년 7월 25일, 치아노는 장인 무솔리니의 축출을 뜻하는 그란디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갈레아초 치아노는 무솔리니의 사위이자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핵심 외교관으로, 정권의 팽창과 독일 의존을 추진하면서도 전쟁의 파국이 다가오자 그 노선에서 이탈했다. 그는 에티오피아 전쟁과 알바니아 침공, 그리스 공격을 지지했으며 외무장관 재임 중 외교 기록과 일기를 남겼다. 1943년 7월 파시스트 대평의회에서 디노 그란디 결의안에 찬성해 무솔리니 축출에 가담했지만, 자신의 특권적 지위가 보존될 것이라는 계산은 빗나갔다. 독일로 달아났다가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에 넘겨진 그는 베로나 재판 뒤 처형되었고, 그의 일기는 파시즘 내부의 책임과 붕괴를 보여 주는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흐루쇼프의 마음을 읽고 해법을 제시한 인물
「흐루쇼프에게 중요한 것은 '나는 쿠바를 구했다, 나는 침공을 막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 ExComm 회의에서.
미국 외교관으로, 1957년부터 1962년까지 모스크바 주재 대사를 역임하며 흐루쇼프와 독자적인 신뢰 관계를 구축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의 국가안전보장회의 집행위원회(ExComm)에서, 10월 27일 도착한 두 통의 흐루쇼프 서한 중 강경한 두 번째 서한을 무시하고 26일의 첫 번째 서한에 응답하라고 권고했으며, 이 전략이 위기 해소의 핵심이 되었다. 이후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다시 모스크바 대사를 지내며 SALT 협상과 핵비확산 정책 수립에도 기여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28미국 외교관으로 임용
1941주소 미국대사관 2등서기관, 독소전 발발 후 모스크바 잔류
1952–1957주오스트리아 고등판무관·대사, 오스트리아 국가조약 및 트리에스테 협상
1957–1962주소 미국 대사 (1차), 캠프 데이비드·빈 정상회담, U-2 사건, 부엌 논쟁
「포츠담 이후, 소련이 세계 공동체의 합리적이고 협력적인 구성원이 되도록 유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회고록 『역사의 증인』에서.
미국 외교관이자 소련 전문가로, 1934년 주소 미국대사관 개설부터 냉전기까지 미소관계의 거의 모든 중대한 장면에 입회했다. 루스벨트와 트루먼의 통역으로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에 배석했으며, 1947년 마셜 국무장관의 요청으로 케넌과 클레이턴의 정책 메모를 하버드 졸업식 연설문으로 작성해 마셜 플랜의 공개적 출발을 이끌었다. 1953년 주소 대사로 임명되었으나 매카시의 공격을 받으며 인준 청문회를 겪었고, 이후 프랑스 대사까지 지내며 '현자들'로 불린 초당파 외교 고문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시칠리아 철도 폭격 분석에서 그는 기관차와 수리시설을 끊어야 철도망 전체가 멈춘다는 결론을 끌어냈다.
솔리 주커먼은 영국의 동물학자이자 공무원으로, 과학적 관찰과 실험을 정부 정책에 결합한 운용연구의 선구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폭격 효과를 조사하고 지중해 전선의 경험을 분석해, 노르망디 상륙을 앞두고 프랑스 철도망을 마비시키는 교통계획을 설계했다. 이 계획은 독일군 증원을 늦추는 데 기여했지만 프랑스 민간인 피해와 폭격의 효과를 둘러싼 논쟁도 남겼다. 전후에는 영국 최초의 정부 수석과학고문으로 과학과 국가정책의 관계를 제도화했다.
「소련에 대한 미국 정책의 주요 요소는 러시아의 팽창 경향에 대한 장기적이고 인내심 있으면서도 단호하고 경계하는 봉쇄여야 한다」, 1947년 X 논문에서.
미국 외교관이자 역사가로, 1946년 모스크바에서 국무부에 보낸 '장전문'과 1947년 《포린 어페어스》에 발표한 X 논문에서 소련의 팽창을 장기적·인내심 있게 봉쇄해야 한다는 전략을 제시했다. 국무부 정책기획실 초대 실장으로서 마셜 플랜의 설계에 핵심적 역할을 했으며, 이후 트루먼 독트린과 NATO로 이어지는 냉전 초기 미국 대외정책의 지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자신이 설계한 봉쇄가 군사적 대결로 변질되자 평생 비판자로 돌아섰고, 베트남 전쟁과 NATO 확장에 공개 반대하며 현실주의적 외교를 주장했다.
앙리 프르네는 프랑스 육군 장교 출신으로, 1940년 패전 뒤 군사적 규율과 애국주의를 지하 저항의 조직 원리로 바꾼 인물이다. 그는 처음에는 페탱과 국민혁명이 프랑스를 구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지만, 비시의 협력과 억압을 겪으며 입장을 바꾸었다. 베르티 알브레히트와 함께 국민해방운동을 세우고 지하 신문을 확장해 콩바를 주요 저항운동으로 발전시켰으며, 전후에는 포로·강제이송자·난민의 귀환을 맡았다.
윌리엄 H. 터너는 제2차 세계대전의 히말라야 공수와 베를린 공수에서 대규모 항공수송을 정교한 체계로 바꾼 미국 공군 지휘관이었다. 그는 베를린 봉쇄 때 연합 공수임무부대를 이끌며 항공기를 일방통행 회랑과 엄격한 시간표에 배치해 임시 작전을 지속 가능한 공급망으로 전환했다. 블랙 프라이데이의 사고 뒤에는 악천후에도 계기비행을 의무화하고 착륙 실패 항공기를 되돌리는 규칙을 세워 안전과 처리량을 함께 높였다. 이후 한국전쟁 공수와 군사항공수송 근무를 지휘하며 현대 전략공수의 조직 원리를 남겼다.
아폴로 1호 화재 뒤 그는 NASA가 조사와 수습을 맡아야 한다고 존슨 대통령에게 요구했다.
제임스 웨브는 과학자나 기술자가 아니라 대규모 공공사업을 조직한 미국의 행정가였다. NASA 국장으로서 아폴로 계획에 안정적인 예산과 정치적 지지를 결합하고, 연구센터와 산업·대학을 조정하는 중앙집중적 운영 체계를 세웠다. 그는 유인 달 착륙을 추진하면서도 마리너와 파이어니어 같은 행성과학 및 우주망원경 연구를 지지했다. 아폴로 1호 화재 뒤에는 조사를 이끌고 NASA의 책임을 의회에 설명하며 계획의 연속성을 지켰다.
1942년 11월 25일, 마이어스의 일행은 그리스 파르티잔 약 150명의 지원을 받아 고르고포타모스 철교를 폭파했다.
에드먼드 마이어스는 영국 왕립공병대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 중 특수작전집행부의 그리스 군사사절단을 이끌었다. 그는 1942년 고르고포타모스 철교 파괴 작전을 설계하고 지휘하며 ELAS와 EDES의 협력을 조정했다. 군사 목표를 수행한 그의 임무는 전후 그리스의 정치 질서와 영국의 개입 문제에 얽혔고, 그는 회고록에서 그 경험을 기록했다.
1950년 6월 25일, 그는 한국의 상황을 보고하고 결의안 표결을 위한 안전보장이사회 절차를 이끌었다.
어니스트 그로스는 국제법률가이자 미국 외교관으로, 법률 자문과 전후 점령지 행정을 거쳐 유엔에서 미국의 정책을 대표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미국 대표단을 이끌며 안전보장이사회가 결의 82를 채택하도록 절차와 표결을 조율했다. 이 과정은 소련 대표의 불참이라는 조건을 활용한 미국 외교의 성과였지만, 유엔의 집단안보가 강대국 경쟁 속에서 작동한 방식이라는 긴장도 남겼다. 이후 그는 국제변호사로서 티베트 문제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다뤘다.
폴 니츠는 미국의 냉전 전략과 핵무기 정책을 형성한 외교·안보 관료였다. 그는 NSC-68에서 소련과의 장기 대결을 군사력 증강의 문제로 정식화했지만, 핵무기의 위험을 관리하려면 정교한 협상도 필요하다고 보았다. SALT에 참여하고 레이건 행정부의 INF 협상을 이끌면서, 강한 억지력과 군비 감축을 서로 배타적인 선택으로 보지 않는 실무 노선을 추구했다. 이 때문에 그는 군비경쟁의 설계자이자 협상 가능한 질서를 찾은 인물이라는 상반된 유산을 남겼다.
린든 B. 존슨은 의회에서 다져진 협상력으로 미국의 국내 개혁과 냉전 전략을 함께 밀어붙인 대통령이었다. 그는 민권법과 투표권법, 메디케어를 포함한 ‘위대한 사회’를 확장했지만, 베트남전의 확대는 그 성과를 압도하는 역사적 책임이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경쟁을 지속하면서도 소련과 전략무기 제한을 모색해 1967년 글래스버러 정상회담과 1968년 전략무기 협상 합의로 훗날 SALT로 이어질 길을 열었다. 선거에서 물러난 마지막 해에도 베트남 평화협상과 군비통제를 병행하려 했으나, 합의의 결실은 후임 정부가 거두었다.
보충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자유도시' 형성이 곧 브란덴부르크 문에 국경이 세워진다는 뜻입니까?
함부르크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학위를 마치지 못하고 언론에 들어간 독일 기자다. 전후에는 소련이 통제하는 베를린 방송에서 일하다 1949년 서베를린으로 옮겨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 특파원이 되었고, 1961년 6월 15일 기자회견에서 '국경이 브란덴부르크 문에 세워지는가'를 물어 울브리히트로부터 '아무도 장벽을 세울 의도가 없다'는 유명한 답을 끌어냈다.
“어떤 역사라도 살아남는다면, 인류 문명의 종말을 함께 초래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 딴은 버마의 교사와 관료 출신 외교관으로, 탈식민화와 국제 협상이 중심이 된 냉전기의 유엔을 이끈 제3대 사무총장이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그는 존 F. 케네디와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호소와 제안을 보내 소련 선박의 항로 전환과 쿠바 미사일 철수를 연결하는 출구를 제시했고, 이후 쿠바를 방문해 피델 카스트로와 검증 문제를 논의했다. 그의 중재는 핵전쟁의 위험을 낮췄지만, 유엔의 조용한 외교는 초강대국 중심의 위기 서술에서 오래도록 과소평가되었다. 그는 콩고 평화유지 작전과 베트남전 종식을 위한 협상도 추진하며 국제기구의 도덕적 책임과 강대국 정치 사이의 긴장을 드러냈다.
사촌 왕을 몰아내고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5년 뒤 같은 궁정에서 공산 쿠데타에 살해된 아프가니스탄 초대 대통령
1977년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브레즈네프에게 '우리는 당신들이 아프가니스탄을 어떻게 운영할지 지시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바락자이 왕조 출신의 아프간 왕족으로, 1953년 사촌 자히르 샤에 의해 총리로 임명되어 10년간 소련 편향의 근대화를 추진하며 '붉은 왕자'로 불렸고, 파슈투니스탄 문제로 파키스탄과 국경 분쟁을 벌였다. 1973년 좌파 장교들의 지원을 받아 무혈 쿠데타로 왕정을 전복하고 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올랐으나, 집권 후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고 일당제를 도입했으며 대외정책을 이란·사우디·서방으로 급선회했다. 1978년 4월 혁명 당시 대통령궁에서 PDPA 칼크파 장교들에게 가족 18명과 함께 사살되었고, 이는 소련-아프간 전쟁의 직접적 전사가 되었다.
1942년 7월 2일, 그는 독일 점령 당국의 유대인 체포에 프랑스 경찰을 투입하겠다고 동의했다.
르네 부스케는 프랑스의 고위 관료로, 비시 정권의 경찰 협력을 국가 주권의 외형과 결합해 추진했다. 그는 독일 보안기관과 협상해 프랑스 경찰을 동원할 자율성을 확보하는 한편, 유대인 박해와 추방을 실행하는 체계에 경찰력을 제공했다. 1942년 7월 벨디브 검거에서 그의 행정적 결정은 대규모 체포와 강제 이송을 가능하게 했으며, 해방 뒤에는 숙청을 피하고 금융·정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로 복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