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10월 모스크바의 해스켈은 후버에게, 굶주림이 겨울에 절정에 이르러 1,600만 명을 덮칠 것이라고 타전했다.
윌리엄 N. 해스켈은 미 육군 장교로서 전후 국제 구호 행정과 군사 지휘를 결합한 인물이었다. 허버트 후버의 임명으로 1921년부터 1923년까지 소련 러시아에서 미국구호행정의 작전을 이끌며, 기근 속 식량·의료품의 대규모 배급을 조직했다. 그의 임무는 볼셰비키 관료의 통제와 협조를 동시에 상대하면서 구호의 속도와 행정적 책임을 조정하는 일이었다. 이후 뉴욕 주방위군과 미국 민방위 조직을 지휘하며 군과 국가 행정에서 긴 경력을 이어 갔다.
로베르 투숑은 산악전과 보병 교육으로 명성을 쌓은 프랑스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 경험과 알프스 부대 지휘를 바탕으로 승진했다. 1940년 5월 독일군의 돌파 뒤 제6군을 지휘하며 마지노선에서 이동한 부대들을 엔강 방어선에 급히 배치했고, 샤를 드골의 제4기갑사단도 몽코르네 반격에 투입했다. 그러나 전차부대는 충분히 통합되거나 지원되지 못했고, 그의 군은 전선의 틈을 막은 뒤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휴전 뒤 퇴역한 그는 비시의 국가평의회와 리옹 국가재판소에 참여해 군인으로서의 경력과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협력이 겹치는 유산을 남겼다.
폴 레노는 변호사 출신의 프랑스 공화국 정치가로, 경제·식민지·국방 문제에서 독자적인 노선을 보였다. 그는 나치 독일의 위협에 맞서 재무를 전시 체제로 돌리고 기갑·공군 중심의 현대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0년 프랑스가 붕괴하자 영국과의 동맹을 유지하고 북아프리카에서 전쟁을 계속하려 했지만, 정전파에 밀려 총리직을 사임했고 이후 비시 정권과 독일에 억류되었다. 해방 뒤에도 의원과 헌법 논의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며 강한 의회주의를 지켰다.
“모델 카얀데르”라는 이름은 겨울전쟁 당시 예비병이 개인 외투와 소총, 허리띠에 의존해야 했던 현실을 가리켰다.
아이모 카얀데르는 산림 유형론을 발전시킨 식물학자이자 산림행정가였으며, 학문과 국가 산림정책을 연결했다. 그는 세 차례 총리를 지낸 자유주의 정치가로서 사회민주당과 농민당의 연립을 중재했다. 1939년 소련의 요구와 전쟁 위협을 과소평가하고 국방 투자를 늦춘 내각의 책임은 그의 정치적 유산을 규정했으며, 겨울전쟁 발발 뒤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비토리오 암브로시오는 이탈리아 왕국의 기병 장교 출신 장군으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이탈리아의 유고슬라비아 침공에서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1943년 이탈리아군 최고사령관이 된 그는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의 패배 뒤 독일과의 동맹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왕과 군부를 중심으로 무솔리니의 실각과 연합국과의 휴전을 추진했다. 그의 선택은 파시즘을 넘어선 민주적 단절이라기보다 왕정과 군 지휘부가 국가의 전쟁 이탈을 관리하려 한 것이었으며, 9월 휴전은 독일군의 이탈리아 점령과 이탈리아군의 혼란을 막지 못했다.
얀 돔프스키는 폴란드 농민운동에서 성장한 정치가이자 언론인으로, 독립 이후 의회 정치와 외교를 연결했다. 폴란드-소련 전쟁의 종결 국면에서 그는 폴란드 대표단을 이끌며 전쟁 수행의 성과와 동부 국경의 현실 사이에서 타협을 모색했다. 리가에서 아돌프 이오페와 비공개 교섭을 벌여 1920년 10월 12일 예비조약을 성사시켰고, 이듬해 최종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이후에도 농민정당과 의회 민주주의를 지켰지만, 리가 체제가 남긴 우크라이나·벨라루스 분할의 문제는 그의 외교가 감당해야 할 역사적 유산으로 남았다.
「평화, 자비, 용서입니다.」 1938년 7월 18일, 내전 2주년에 바르셀로나 시청에서 아사냐는 74분 동안 유혈 중단과 화해를 호소했으나, 프랑코도 공화국 강경파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스페인 제2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이자 내전기 공화파의 상징적 구심점. 1931년 전쟁장관·총리로 군 개혁과 반교권 정책·농지개혁을 주도했고, 1934년 인민전선을 조직해 1936년 대통령에 올랐으나 내전 내내 실권은 총리들에게 넘어갔다. 1938년 바르셀로나에서 「평화, 자비, 용서」를 외쳤지만 프랑코 진영은 무조건 항복만을 요구했고, 1939년 카탈루냐 함락 뒤 아내와 함께 피레네 산길을 걸어 프랑스로 건너가 사임했다. 공화파 안에서조차 '도주'라는 비난을 받은 이 결정은 공화국의 잔존 정통성을 무너뜨렸고, 그는 망명 1년 만에 점령된 프랑스에서 숨졌다.
샤를 욍치제르는 프랑스 식민보병 출신의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발칸 전선과 전간기 해외 지휘·협상에서 경력을 쌓았다. 1940년 세당 방면 제2군을 지휘하며 독일군의 돌파를 막지 못했고, 그 판단은 프랑스 패전의 책임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비판받았다. 그는 전투를 계속할 수 있는 한계가 임박했다고 보았으며, 페탱 정부의 전권대표단 의장으로 6월 22일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이후 비시의 국방장관이 되어 협력국가의 군사 재편을 맡았고, 1941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마쓰오카 요스케는 일본 제국의 외교관이자 정치가로,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대륙 진출과 국제적 고립을 함께 상징한 인물이다. 그는 국제연맹에서 만주국을 옹호하며 일본의 탈퇴를 이끌었고, 만철 총재를 거쳐 외무상이 되었다. 1941년에는 독일·이탈리아와의 동맹을 추진하는 한편 몰로토프와 일소중립조약을 체결했지만, 독소전쟁 뒤 대소전쟁을 주장하다 실각했다. 전후 전범으로 구금되었으나 재판 중 병사해 판결을 받지 못했다.
1939년 8월 모스크바에서 그는 소련과의 군사협력을 협상했지만, 대표단의 권한과 서방의 결단은 이미 제한돼 있었다.
프랑스 육군 장성 에메 두멩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자동차 수송과 전간기의 기계화 구상을 통해 현대적 제병협동을 밀어붙인 군인이다. 1939년 8월 모스크바에서 프랑스 군사대표단을 이끌며 소련과의 군사협력을 모색했지만, 영국의 소극적 협상과 서방의 상충한 계산 속에서 회담은 독일과 소련의 협정으로 끝났다. 1940년 프랑스군 최고사령부에서 아르덴 방어와 제9군 붕괴를 마주한 뒤에도 재건과 군사사 저술에 관여했다.
월터 라이먼 브라운은 제1차 세계대전 뒤 미국 구호 행정을 이끈 실무 외교가로, 허버트 후버의 미국구호행정에서 유럽 업무를 맡았다. 1921년 러시아 기근이 심화되자 그는 리가에서 막심 리트비노프와 협상해 미국구호행정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닌 당시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기아 지역에 들어갈 조건을 마련했다. 이 합의는 인도주의적 구호를 표방했지만 미국의 반볼셰비즘과 소비에트 정부의 통제·주권이 맞물린 절충이기도 했다.
유럽 부흥을 설계하고 미군을 40배로 키운, 육군·국무·국방 3직을 모두 지낸 유일한 미국인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마셜은 1947년 6월 5일, 준비된 원고도 없이 1,200단어의 연설을 통해 '굶주림, 빈곤, 절망, 혼란에 반대하는' 유럽 원조의 청사진을 내놓았다.
마셜은 육군참모총장(1939~45)·국무장관(1947~49)·국방장관(1950~51)을 두루 지낸 유일한 미국인으로, 처칠이 '승리의 조직자'라 부른 연합군 팽창의 총설계자였다. 1947년 6월 5일 하버드대 연설에서 전후 유럽의 경제 붕괴와 소련 팽창에 맞선 대규모 원조 구상을 제안했고, 이 '마셜 플랜'은 4년간 130억 달러로 서유럽 산업 기반과 통화를 안정시키며 냉전기 미국 대외정책의 틀을 재편했다. 국무장관 시절 이스라엘 승인을 두고 트루먼과 정면 충돌했으며, 국방장관으로 복귀해 한국전쟁 중 맥아더 해임을 승인함으로써 민간의 군대 통제 원칙을 재확인했다. 195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군인 출신 수상자는 그가 유일하다.
상세 이력 보기
1880펜실베이니아주 유니언타운에서 석탄·코크스 사업가의 막내로 출생
1902버지니아 군사학교 졸업, 육군 소위 임관 후 필리핀 배치
1917–1918제1차 세계대전, 제1사단 작전참모로 칸티니·뫼즈-아르곤 공세 기획
1939–1945육군참모총장, 미군을 18만9천에서 800만으로 팽창시키고 연합군 전략 총괄
헨리 뵈우커스는 미국의 의사이자 공중보건 행정가로, 국제 구호를 임상과 위생의 조직 문제로 다룬 인물이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 미국구호행정의 러시아 의료국장으로 일하며 식량 배급과 병행되는 병원 지원, 의약품 공급, 예방접종과 전염병 대응을 조정했다. 그는 이 경험을 1926년 저서에 정리해 기근 구호가 급식소를 넘어 의료·위생 체계의 복구였음을 기록했다. 이후 황열병 연구와 군 의료 행정에도 참여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고, 일본 점령을 사실상 통치한 미국의 5성 원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합동참모본부의 만장일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을 밀어붙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러나 중공군 개입 이후 만주 폭격과 확전을 주장하며 트루먼 행정부와 충돌했고, 1951년 4월 해임되었다. 그의 해임은 민간 통제와 군부의 관계를 둘러싼 냉전기 가장 첨예한 헌정적 논쟁으로 남았다.
세계 최대 면화상을 일군 자유무역론자, 유럽 붕괴를 경고한 메모로 마셜 플랜을 촉발한 국무차관
1947년 5월 27일 마셜 국무장관에게 보낸 메모에서 클레이턴은 이렇게 썼다: '즉각적이고 대규모인 미국의 원조 없이는 경제·사회·정치적 붕괴가 유럽을 뒤덮을 것입니다.'
클레이턴은 13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속기사로 출발해 앤더슨·클레이턴 사를 세계 최대 면화 무역회사로 키운 사업가였다. 자유무역을 신봉한 민주당원으로서 1944년 국무부 경제담당 차관보, 1946년 경제담당 차관에 임명되었고, 1947년 5월 전후 유럽의 참상을 목격한 후 조지 마셜에게 보낸 「유럽의 위기」 메모에서 '즉각적이고 대규모인 미국의 원조 없이는 경제·사회·정치적 붕괴가 유럽을 뒤덮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메모는 마셜 플랜 발표의 직접적 촉매가 되었고, 찰스 볼런은 연설문 초안을 쓸 때 클레이턴의 문장을 대거 인용했다. 퇴임 후에도 자유무역과 대서양 동맹을 옹호하며 1961년 크리스천 허터와 애틀랜틱 카운슬을 공동 설립했다.
소련 측이 협상 권한을 묻자, 드랙스의 사절단은 정부 승인 없이는 아무 결정도 할 수 없었다.
레지널드 드랙스는 영국 해군의 전술과 지휘 개혁을 주장한 제독으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에 주요 지휘직과 참모직을 맡았다. 1939년 8월 그는 프랑스 대표단과 함께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소련과의 군사협력을 논의했지만, 영국 정부의 서면 협상 권한을 받지 못했다. 낡은 상선으로 늦게 도착한 대표단의 무력함은 독일과의 전쟁을 막기 위한 영국·프랑스 외교의 제한과 불신을 드러냈고,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는 폴란드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전간기 민주주의와 군부 권위주의의 충돌 속에서 독자적 노선을 모색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런던 망명정부의 수상 겸 폴란드군 총사령관으로서 서방 연합국에 폴란드의 국가적 요구를 제기했다. 그는 1941년 시코르스키-마이스키 협정을 통해 소련과 외교관계를 복원하고 폴란드 포로 석방과 군대 창설의 길을 열었지만, 카틴 학살 조사 요구 뒤 관계가 다시 단절되었다. 1943년 지브롤터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면서 망명정부의 외교적 영향력도 큰 타격을 입었다.
1946년 모스크바 회담에서 몰로토프의 공세가 이어지자 그는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니스트 베빈은 가난한 노동자에서 영국 최대 노동조합의 지도자로 성장한 노동운동가이자 노동당 정치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노동력 동원을 조직한 경험은 전후 영국의 외교와 유럽 재건을 노동과 국가 역량의 문제로 보게 했다. 외무장관으로서 그는 조르주 비도와 함께 마셜의 하버드 연설에 대한 유럽의 대응을 조직하고, 영국의 안보와 서유럽 협력을 미국의 원조 및 대서양 동맹과 결합했다. 동시에 그의 강한 반공주의와 제국적 이해관계는 전후 질서의 국제주의가 해방과 지배를 함께 품었음을 보여 준다.
협동조합 운동에서 시작해 겨울전쟁 외무장관으로 스탈린과 마주한 핀란드 사민당의 현실주의 지도자
1939년 11월 9일, 핀란드가 축소된 요구를 거부하자 '맞은편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탈린이 물었다: '이노마저도 내주지 않겠다는 말인가?'
핀란드 사회민주당을 1918년 내전의 잿더미에서 의회 민주주의 정당으로 재건한 정치가다. 1926년 핀란드 최초의 좌파 정부 수반이 되었고, 겨울전쟁 직전 모스크바 협상에서는 파시키비와 함께 실무 대표로 나서 영토 교환에 응하라고 헬싱키를 설득했다. 1939년 11월 9일 마지막 회담에서 핀란드가 축소된 요구마저 거부하자 스탈린과 몰로토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고 훗날 기록한 이도 탄네르였다. 전후 소련의 압력으로 5년 6개월의 실형을 살았으나, 출옥 뒤 의회로 돌아와 1960년대 초까지 당을 이끌었다.
얄타에서 돌아온 루스벨트는 1945년 3월 1일 의회 연설에 앉아서 임했다. 걸을 수 없는 대통령이 평생 숨겨온 장애를 처음으로 공개한 순간이었다.
루스벨트는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관통한 미국의 32대 대통령으로, 4선에 오른 유일한 대통령이다. 뉴딜로 연방정부의 역할을 재정의했고 진주만 공격 이후 연합국을 이끌며 독일 우선 전략을 관철했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그는 소련의 대일 참전과 유엔 창설이라는 두 가지 목표에 외교력을 집중했고 스탈린과의 개인적 관계에 신뢰를 걸었으나, 이미 심부전과 고혈압으로 쇠약해져 있었다. 회담 두 달 뒤 뇌출혈로 사망했으며, 얄타 합의는 유엔을 낳고도 동유럽을 넘겨주었다는 비판 속에 냉전기 내내 논쟁의 중심에 섰다.
요시지로 우메즈는 일본 제국 육군의 고위 지휘관으로, 중국과 만주 점령지에서 군사 통치와 일본의 대륙 정책을 수행했다. 그는 1944년 육군참모총장이 되어 전쟁 지속을 주장했지만, 군부 내 쿠데타 시도에는 가담하지 않고 천황의 항복 명령을 관철했다. 1945년 9월 2일에는 일본 제국 대본영을 대표해 항복문서에 서명했으며,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침략전쟁 수행 책임으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사망했다.
1945년 7월, 그는 포츠담 선언을 평화의 기초로 삼되 소련과 먼저 교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고 시게노리는 일본 제국의 직업 외교관으로, 태평양전쟁의 개전과 종결 때 외상을 맡았다. 그는 전쟁을 피하려는 대미 협상에 참여했지만 개전을 막지 못했고, 전쟁 뒤에는 그 외교적 책임을 두고 재판을 받았다. 1945년에는 소련을 중재자로 삼아 조건부 종전을 모색하는 한편 포츠담 선언 수락을 주장했으며, 이 선택은 종전을 앞당기려는 현실 감각과 소련의 의도를 오판한 한계를 함께 드러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은 그에게 금고 20년을 선고했다.
페트레 두미트레스쿠는 루마니아 왕국의 직업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동부전선에서 루마니아 제3군을 지휘했다. 그는 독일군과 함께 소련을 상대로 부코비나와 우크라이나, 크림, 캅카스 작전에 참여하며 루마니아군의 전쟁 수행을 이끌었다. 1942년 스탈린그라드 북서쪽에서 제3군의 취약한 측면이 소련군의 천왕성 작전에 노출되자 지원을 요청했지만, 군대는 큰 손실을 입고 후퇴했다. 전후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1946년 증거 부족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18년 11월 자그레브에서 시모비치는 '압도적 다수가 유고슬라비아 연대의 사상에 사로잡혔다'고 보고했고, 이탈리아의 류블랴나 점거 시도를 세르비아군이 먼저 입성하게 함으로써 저지했다.
두샨 시모비치는 왕국 유고슬라비아의 공군 장군 출신으로, 1941년 3월 27일 쿠데타를 이끌어 삼국동맹 가입에 반대하는 군중의 환호 속에 총리가 된 군인 정치가였다. 그러나 집권 뒤에도 독일의 침공을 막으려 삼국동맹을 공식 폐기하지 못했고, 침공으로 런던 망명정부를 이끌다 1942년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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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베오그라드 육군사관학교 졸업, 포병 소위
1912–1918발칸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살로니카 전선 제7보병연대 지휘
1918자그레브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 국민평의회 주재 세르비아 정부·최고사령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