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2021

소련을 상대한 정치가들 191명

소련과 협상하고 대치한 각국의 정치가와 외교관들.

사토 나오타케

佐藤尚武
외국 정치가 일본 일본 1882–1971 ○ 자연사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를 통보받은 마지막 주소 대사

과거의 타성으로 저항을 이어가고 있는 현실을 속히 끝내고, 국가 멸망의 한 걸음 앞에서 그것을 멈추게 해야 한다.

일본의 외교관이자 정치가. 벨기에·프랑스·이탈리아 대사를 거쳐 1937년 외무대신이 되었으나 평화협조 노선을 고수하여 군부와 충돌, 석 달 만에 사임했다. 1942년 주소 대사로 부임해 종전 시까지 모스크바에 주재하며, 소련의 중재는 불가능하고 조속한 무조건 항복만이 나라를 구할 길이라고 도쿄에 거듭 경고했다. 1945년 8월 8일 크렘린에서 몰로토프로부터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를 통보받았다. 전후 참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1949년부터 1953년까지 참의원 의장을 지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5외무성 입성
  • 1917–1919하얼빈 총영사
  • 1927–1930국제연맹 일본 대표
  • 1930–1937주벨기에·프랑스 대사
  • 1937.03–06외무대신
  • 1942–1945주소련 대사
  • 1945–1946소련에 억류
  • 1949–1953참의원 의장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882–1972 ○ 자연사

루스벨트의 '보조 대통령'이자 포츠담 배상안을 설계한 국무장관

번스의 국무장관 취임 선서 직후, 트루먼이 말했다. "지미, 성경에 입 맞춰." 번스가 그러고 나서 성경을 트루먼에게 건네며 말했다. "대통령님도 입 맞추시죠." 트루먼이 그렇게 하자 자리 전체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제임스 F. 번스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민주당 정치인으로, 뉴딜 입법을 주도한 상원의원, 전시 동원을 총괄하며 '보조 대통령'으로 불린 루스벨트의 오른팔, 그리고 트루먼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포츠담 회담에서 독일 배상의 틀을 설계한 인물이다. 포츠담에서 번스는 각 점령국이 자국 점령지역에서 배상을 취하되 소련에는 서방 지역 산업설비의 15%를 식량·원자재와 교환하고 10%를 무상 제공하는 절충안을 몰로토프와 협상해 타결시켰다. 루스벨트의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뒤 트루먼과의 관계도 점차 냉각되었으나,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로 당선되어 인종 분리 교육 체제를 고수하며 '분리하되 평등하게' 노선을 추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1–1925사우스캐롤라이나주 하원의원
  • 1931–1941사우스캐롤라이나주 상원의원
  • 1941–1942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 1942–1943경제안정국 국장
  • 1943–1945전시동원국 국장
  • 1945–1947미국 국무장관
  • 1951–1955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윌리엄 시즈

William Seeds
외국 정치가 영국 아일랜드계 1882–1973 ○ 자연사

협상의 한복판에서 소련을 오판한 영국 외교관

시즈는 몰로토프를 두고 “농민 유형의 어리석은 교활함”이 있다고 평가했다.

윌리엄 시즈는 영국 외교관으로, 여러 유럽·아메리카 공관을 거쳐 1939년 모스크바 대사로 부임했다. 그는 영불소 상호원조 조약을 만들려는 협상에서 영국을 대표했지만, 서방의 지연과 소련의 안보 요구가 충돌하는 과정을 냉정하게 읽어 내지는 못했다. 리트비노프의 교체 뒤 몰로토프를 경멸적으로 평가한 그의 보고는 협상 실패를 바라본 당대 영국 외교의 시야와 한계를 함께 보여 준다.

상세 이력 보기
  • 1904–1907워싱턴 주재 영국 외교공관
  • 1908–1910베이징 주재 영국 공사관
  • 1913–1919리스본 총영사관 대리공사·총영사
  • 1928–1930라인란트 영국 고등판무관
  • 1930–1935브라질 주재 영국 대사
  • 1939–1940소련 주재 영국 대사, 모스크바 삼국동맹 협상 대표
  • 1973런던에서 사망

베르트람 램지

Bertram Home Ramsay
반혁명 세력 영국 영국계 1883–1945 ✕ 비행기 추락사

됭케르크 철수를 조직한 해군 지휘관

도버성 아래 지휘부에서 램지와 참모들은 됭케르크 철수를 9일 밤낮으로 조정했다.

베르트람 램지는 영국 해군 장교로, 전시 해상작전을 조직하고 지휘하는 능력으로 두각을 보였다. 1940년 됭케르크에서 그는 군함과 민간 선박을 동원해 포위된 영국·연합군 병력의 철수를 지휘했다. 이후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 상륙작전을 거쳐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연합군 해군 총지휘를 맡았다. 그는 1945년 프랑스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8영국 해군에 입대
  • 1915–1919모니터함 M25 및 구축함 HMS 브로크 지휘, 도버 순찰대 복무
  • 1933–1935전함 HMS 로열 소버린 함장
  • 1939–1942도버 지휘관, 해협 방어와 됭케르크 철수 담당
  • 1942북아프리카 침공 부해군 총사령관
  • 1943시칠리아 침공 동부 기동부대 해군 지휘관
  • 1944노르망디 상륙작전 연합군 해군 총사령관

피에르 라발

Pierre Laval
외국 정치가 프랑스 프랑스 1883–1945 ✕ 반역죄로 총살

공화정 정치가에서 비시 협력의 설계자로 변한 인물

1942년 노동력 동원을 호소하며 그는 독일의 승리를 바란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피에르 라발은 변호사와 사회주의 정치인으로 출발했지만 전후 우파로 이동해 제3공화국의 핵심 각료와 총리를 지냈다. 1940년 패전 뒤 그는 페탱이 국민의회에서 전권을 얻고 헌정 질서를 폐기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비시 체제의 중심에 섰다. 라발은 독일과의 협력이 프랑스의 지위를 보전할 수 있다고 믿었고, 1942년 복귀한 뒤 노동력 제공과 경찰 협력을 확대했다. 해방 후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1945년 처형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3–1922사회주의 운동가·변호사
  • 1914–1919하원의원
  • 1923–1944오베르빌리에 시장
  • 1931–1932각료회의 의장
  • 1934–1936외무장관·각료회의 의장
  • 1940.06–1940.12비시 부각료회의 의장
  • 1942.04–1944.08비시 정부 수반
  • 1945고등법원 재판·처형

게오르기오스 파파고스

Γεώργιος Παπάγος
외국 정치가 그리스 그리스인 1883–1955 ○ 재임 중 자연사

알바니아 전선에 승부를 건 그리스 육군 원수

독일군이 북부 국경을 침공했을 때도 그리스군 주력은 알바니아 전선에 묶여 있었다.

게오르기오스 파파고스는 그리스 왕정과 메탁사스 독재체제에 충성한 직업군인이자 제2차 세계대전기 그리스 육군 지휘관이었다. 그는 1940년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방면 침공을 저지하고 반격을 조정했지만, 독일의 개입이 임박한 뒤에도 주력을 알바니아 전선에 남겨 메탁사스 방어선의 방어를 어렵게 했다. 점령기에 저항조직을 만들었다가 체포되어 강제수용되었고, 전후에는 내전에서 정부군을 지휘한 뒤 총리가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6그리스 육군 기병 소위로 임관
  • 1935–1936군사장관, 육군 총감
  • 1936–1940육군 총참모장, 메탁사스 체제의 군사 기반 강화
  • 1940–1941그리스 육군 총사령관, 알바니아 전선과 메탁사스 방어선 작전 지휘
  • 1943–1945점령기 저항조직 군사계층 결성, 독일군에 체포되어 수감
  • 1949–1951내전기 정부군 총사령관, 공산군에 대한 최종 공세 지휘
  • 1952–1955그리스 총리

앨런 브룩

Alan Brooke
외국 정치가 영국 영국계 아일랜드인 1883–1963 ○ 자연사

상륙보다 준비를 앞세운 연합군 전략가

그는 1943년 프랑스 상륙이 병력과 상륙정, 공중우세 없이는 안전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앨런 브룩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 육군의 전문적 지휘와 연합국의 대전략을 조율한 야전원수였다. 그는 1943년 병력·상륙정·공중우세가 부족한 상태의 해협 횡단 침공을 위험하다고 보았고,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작전으로 이탈리아를 전쟁에서 이탈시키는 노선을 지지했다. 이 신중함은 노르망디 상륙을 반대한 단순한 지연이 아니라, 더 큰 병참과 제공권을 갖춘 뒤 작전을 수행하려는 판단이었다. 전후 공개된 전쟁일기는 윈스턴 처칠과 연합국 지휘관들에 대한 날카로운 평가를 남겼다.

상세 이력 보기
  • 1902왕립포병대 소위 임관
  • 1914–1918서부전선 포병 참모장교
  • 1938–1940대공군단 및 남부사령부 지휘관
  • 1940–1941영국 본토군 총사령관
  • 1941–1946제국참모총장
  • 1942–1946참모총장위원회 의장
  • 1953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영국 최고 치안관

클레멘트 애틀리

Clement Attlee
외국 정치가 영국 영국 1883–1967 ○ 폐렴으로 사망

포츠담 회담 도중에 처칠을 대체해 등장한, 말수 적은 전후 개혁의 설계자

1945년 선거 승리 후 버킹엄궁에서 조지 6세를 만난 애틀리는 침묵을 깨며 "제가 선거에서 이겼습니다"라고 말했고, 왕은 "압니다. 6시 뉴스에서 들었습니다"라고 답했다.

클레멘트 애틀리는 1945년 포츠담 회담 도중 노동당의 압승으로 윈스턴 처칠을 대신해 영국 총리가 된 인물이다. 전시 연립내각에서 부총리로 처칠을 보좌했으나, 유권자들은 전쟁 영웅 대신 복지국가를 약속한 무채색의 그를 선택했다. 그의 정부는 국민보건서비스(NHS)를 창설하고 주요 산업을 국유화했으며 인도와 파키스탄의 독립을 단행해 대영제국의 해체를 시작했다. 대외적으로는 마셜 플랜과 나토 창설을 주도하며 미국 편에 서서 냉전의 초기 윤곽을 그렸다.

상세 이력 보기
  • 1935–1955노동당 당수
  • 1940–1942국새상서 (전시 연립내각)
  • 1942–1945부총리 (전시 연립내각)
  • 1945–1951영국 총리
  • 1951–1955야당 당수
외국 정치가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884–1948 ○ 사임, 9월 자연사

사직서 한 장으로 정부를 무너뜨리려 했으나 고트발트의 손을 들어준 마지막 민주 대통령

1948년 2월 25일, 베네시는 공산당 민병대가 프라하 거리를 장악하고 내전이 임박한 가운데 비공산당 장관 12명의 사직서를 수리했다.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로, 1차 대전 중 마사리크·슈테파니크와 함께 민족평의회를 창설했다. 1918년부터 17년간 외무장관으로서 국제연맹과 소협상을 주도하며 프랑스·소련과의 동맹 체계를 구축했다. 뮌헨 협정으로 사임 후 런던 망명정부를 이끌었고, 전후 귀환해 대통령에 복귀했다. 1948년 2월 쿠데타에서 비공산당 장관들의 사직서를 수리하고 고트발트의 공산당 정부를 승인함으로써 체코슬로바키아의 소비에트 블록 편입을 결정지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5–1918체코슬로바키아 민족평의회 서기
  • 1918–1935체코슬로바키아 외무장관
  • 1921–1922체코슬로바키아 총리
  • 1935–1938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 1940–1945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 대통령
  • 1945–1948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에두아르 달라디에

Édouard Daladier
외국 정치가 프랑스 프랑스 1884–1970 ○ 병사

인민전선을 함께 세우고 제 손으로 청산한 급진당의 「보클뤼즈의 황소」

「바보들 같으니. 저들이 무엇에 환호하는지 안다면」, 뮌헨 협정에서 돌아와 부르제 공항의 환호 인파를 보고 측근에게 (동승자들의 증언으로 전하는 말), 1938년 9월 30일

빵집 아들 출신의 역사 교사로 급진당을 이끈 정치인. 1934년 2월 6일 폭동 이튿날 총리에서 물러났고, 급진당을 이끌고 인민전선에 참여해 블룸 내각의 국방장관을 지냈다. 1938년 4월 총리로 돌아와 9월 뮌헨 협정에 서명했고, 11월 법령으로 주 40시간제를 해체하고 항의 총파업을 꺾어 인민전선을 끝냈다. 1939년 9월 대독 선전포고를 했고 독소 불가침조약 뒤 공산당을 불법화했으며, 1940년 3월 핀란드 지원 실기의 책임을 지고 실각했다. 비시 정권의 리옴 재판에서 블룸과 나란히 피고석에 섰다가 부헨발트에 억류되었고, 전후 하원에 복귀해 1958년까지 활동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4–1914카르팡트라 빵집 아들, 역사 교사
  • 1914–19181차 대전 참전, 사병에서 중위까지
  • 1919–1933급진당 하원의원, 당의 지도자로 부상
  • 1934.01–02총리, 2월 6일 폭동 이튿날 사임
  • 1936–1937블룸 인민전선 내각의 국방장관
  • 1938.04–09총리 복귀, 뮌헨 협정 서명
  • 1938.11법령으로 40시간제 해체, 총파업 진압으로 인민전선 청산
  • 1939.09대독 선전포고, 독소 불가침조약 뒤 공산당 불법화
  • 1940.03핀란드 지원 실기의 책임으로 실각
  • 1942–1945리옴 재판 피고, 부헨발트 인근 억류
  • 1946–1958하원 복귀, 급진당 원로
  • 1970.10파리에서 사망

해리 S. 트루먼

Harry S. Truman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 1884–1972 ○ 자연사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으로 냉전의 미국 틀을 세운 33대 대통령

트루먼의 집무실 책상에는 '책임은 여기서 끝난다(The buck stops here)'라는 문구가 놓여 있었고, 원자폭탄에서 맥아더 해임까지 그는 그대로 살았다.

트루먼은 루스벨트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명령한 미국의 33대 대통령이다. 1947년 3월 '무장 소수파나 외부 압력에 저항하는 자유민을 지원한다'는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했고, 1948년 4월 마셜 플랜에 서명해 서유럽 재건과 소련 봉쇄의 제도적 기반을 구축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 파병을 주도했고 중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해 맥아더를 해임함으로써 민간 통제 원칙을 재확인했다. 퇴임 당시 역대 최저 지지율로 떠났으나 냉전 승리와 함께 '위대에 가까운' 대통령으로 사후 재평가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4미주리주 라마에서 농부의 아들로 출생
  • 1917–1918제1차 세계대전, 프랑스 전선 포병대 대위로 참전
  • 1935–1945미주리주 상원의원, 트루먼 위원회로 전시 계약 부패 조사
  • 1945.01–04부통령, 루스벨트 사망으로 4월 12일 대통령 승계
  • 1945–1953제33대 대통령, 원자폭탄 투하·트루먼 독트린·마셜 플랜·NATO 창설·한국전쟁
  • 1947.03.12트루먼 독트린 선언, 그리스·터키 군사원조 요청
  • 1948.04.03마셜 플랜(경제협력법) 서명
  • 1951.04.11맥아더 극동사령관 해임

알렉산드로스 코리지스

Αλέξανδρος Κορυζής
외국 정치가 그리스 그리스인 1885–1941 ✕ 침공 중 자살

침공 속에서 영국 원조를 받아들인 그리스 총리

1941년 4월 6일 독일의 침공이 시작되자 그는 영국군 철수를 요구한 독일의 통첩을 거부했다.

알렉산드로스 코리지스는 법률가·경제학자이자 은행가로, 국가 재정과 농업 신용 제도의 조직에 관여했다. 그는 이오아니스 메탁사스의 권위주의 정권에서 관료와 장관을 지냈지만, 정당 정치인이라기보다 행정가로 총리가 되었다. 1941년 1월 메탁사스 사망 뒤 영국군 지원을 받아들이며 독일의 침공에 맞선 정부를 이끌었고, 그 선택은 그리스의 전쟁 수행을 연합국과 결부시켰다. 독일군이 진격하던 4월 18일 자살로 생을 마쳤다.

상세 이력 보기
  • 1903그리스국립은행 입행
  • 1915은행 농업신용 부문 조직에 참여
  • 1919–1920스미르나 그리스 고등판무관부 경제고문, 국립은행 지점 설립
  • 1925–1928자치 건포도 기구 초대 의장
  • 1928–1933그리스국립은행 부총재
  • 1936–1939국가위생·구호부 장관
  • 1939–1941그리스국립은행 총재
  • 1941그리스 총리, 외무·국방 관련 장관 겸임

조지 S. 패튼

George Smith Patton Jr.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계 1885–1945 ○ 교통사고 후 자연사

기동전과 기만작전의 공격적 지휘관

1944년 포티튜드 사우스에서 패튼은 실재하지 않는 제1미군집단의 얼굴이 되어 칼레를 향한 위협을 연출했다.

조지 S. 패튼은 기갑부대의 기동성과 공격적 작전 운용을 중시한 미국 육군 장군이었다. 그는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에서 전투 지휘 능력을 보였지만, 병사 폭행과 거친 발언으로 지휘권과 명성에 반복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1944년 포티튜드 사우스에서는 허구의 제1미군집단을 지휘하는 인물로 내세워 독일군이 칼레 방면의 상륙을 믿도록 만들었고, 실제 노르망디 상륙 뒤에도 독일 예비전력을 묶어 두는 데 기여했다. 이후 제3군을 이끌고 프랑스를 가로질러 독일로 진격했으나, 전후에는 반소련 발언과 탈나치화 비판으로 바이에른 군정에서 해임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9미국 육군 기병 소위
  • 1916판초 비야 원정 참전, 퍼싱 장군 부관
  • 1917–1918프랑스 전차학교 창설·지휘, 제304전차여단 지휘
  • 1942횃불 작전 서부기동부대 지휘, 북아프리카 상륙
  • 1943미 제7군 사령관, 시칠리아 전역 지휘
  • 1944포티튜드 사우스 허구 제1미군집단 사령관
  • 1944–1945미 제3군 사령관, 프랑스·독일 진격
  • 1945바이에른 군정관, 제15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

板垣征四郎
반혁명 세력 일본 일본인 1885–1948 ✕ 전범 재판 후 교수형

만주 점령을 현실로 만든 군부 책략가

1948년 옥중 일기에 그는 만주사변의 성공을 되돌아보며, 중국에 손댄 것이 잘못이었다고 썼다.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이자 정치가로, 만주사변과 중국 침략 확대를 이끈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이시와라 간지와 함께 1931년 철도 폭파를 계획하고 관동군의 독단적 군사행동을 점령과 괴뢰국 수립으로 연결했다. 이후 육군대신과 여러 전선의 지휘관을 지냈으며,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침략전쟁의 책임을 물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4육군사관학교 졸업, 육군 보병 소위
  • 1916육군대학교 졸업, 참모 경력 시작
  • 1924–1926중국 주재 일본 공사관 무관보좌관
  • 1929–1932관동군 고급참모, 만주사변과 점령 작전 주도
  • 1934–1937만주국 군정 최고고문, 관동군 참모차장·참모장
  • 1937–1939제5사단장, 육군대신
  • 1939–1941지나파견군 총참모장
  • 1941–1945조선군·제7방면군 사령관, 싱가포르에서 항복 서명
  • 1948극동국제군사재판 사형 집행

아르노 사카리 아르마스 위리외코스키넨

Aarno Armas Sakari Yrjö-Koskinen
외국 정치가 핀란드 핀란드인 1885–1951 ○ 자연사

전쟁 직전 모스크바의 핀란드 외교관

1939년 11월 26일 저녁, 그는 몰로토프의 마이닐라 포격 항의각서를 받고 즉시 헬싱키에 사실 확인을 요청했다.

아르노 위리외코스키넨은 독립 핀란드의 법률가이자 외교관으로, 외무부의 정치 업무와 대외 협상을 맡았다. 모스크바 공사로서 그는 1939년 11월 마이닐라 포격을 둘러싼 몰로토프의 항의와 핀란드의 회답을 전달하며 전쟁 직전 외교의 최전선에 섰다. 그는 소련과의 불가침조약 체결에도 참여했지만, 협상으로 안보 갈등을 봉합하려던 외교는 겨울전쟁을 막지 못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8철학 칸디다트 학위
  • 1913법학 칸디다트 학위
  • 1920파리 핀란드 공사관 서기관
  • 1924외무부 정치국장
  • 1931외무장관, 모스크바 공사
  • 1932소련·핀란드 불가침조약 서명
  • 1939마이닐라 외교 교환을 담당
  • 1940앙카라 공사관장

체스터 니미츠

Chester William Nimitz
외국 정치가 미국 미국계 1885–1966 ○ 자연사

정보와 기동으로 태평양 함대를 재편한 제독

미드웨이에서 일본군의 공격 목표를 확신한 뒤 가용 전력을 방어에 집중했다.

체스터 W. 니미츠는 미국 해군의 잠수함·군수 전문가에서 태평양 전쟁의 연합군 해상 지휘관으로 올라선 제독이다. 1941년 진주만 공습 직후 태평양함대 사령관이 된 그는 일본군 통신정보를 작전 판단에 결합해 미드웨이에 가용 전력을 집중했고, 과달카날 공세를 승인하며 반격의 지휘 체계를 세웠다. 그의 지휘는 압도적 물자와 정보 우위를 작전 기동으로 전환했지만, 섬 전투와 봉쇄가 낳은 막대한 희생이라는 전쟁의 대가를 지우지는 못했다. 전후에는 해군참모총장으로 감군과 핵추진 잠수함 건설을 함께 추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5미 해군사관학교 졸업, 해군 장교로 임관
  • 1917–1918대서양 잠수함군 참모장
  • 1939–1941해군 항해국장
  • 1941–1945미 태평양함대 및 태평양 전구 연합군 총사령관
  • 1942미드웨이 방어 전력 배치와 과달카날 반격 지휘 체계 승인
  • 1944미 해군 최고 계급인 함대원수에 임명
  • 1945–1947미 해군참모총장
  • 1947–1966함대원수로 현역 신분 유지, 해군 자문과 전후 미일 화해 활동

카지미에시 손코프스키

Kazimierz Sosnkowski
외국 정치가 폴란드 폴란드인 1885–1969 ○ 자연사

독립 투쟁과 망명군을 이끈 군사 지도자

바르샤바 봉기 지원이 좌절되자 연합국 지도자들의 폴란드 포기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카지미에시 손코프스키는 폴란드 독립운동가이자 장군으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와 함께 비밀 군사조직과 폴란드 군대를 건설했다. 그는 폴란드-소련 전쟁에서 군 조직과 전투를 지휘하고 전간기 군 현대화를 추진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국내 저항운동과 런던 망명정부의 군사 지도자로서 소련과 서방 연합국의 정책이 폴란드를 종속시킬 위험을 경고했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지원을 요구하며 연합국을 공개 비판한 뒤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고, 전후 캐나다에서 망명 폴란드 사회의 원로로 활동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4–1907폴란드 사회당 전투조직 간부, 러시아 제국에 맞선 비밀 활동
  • 1908–1914능동투쟁연맹 창립 참여, 소총수연맹 참모장
  • 1914–1917폴란드 군단 제1여단 부사령관 겸 참모장
  • 1919–1920폴란드 군무부 차관, 군대 통합과 확장 담당
  • 1920–1924군무부 장관, 폴란드-소련 전쟁에서 예비군 지휘
  • 1939–1941무장투쟁연맹 총사령관, 망명정부 국내문제위원회 의장
  • 1943–1944폴란드군 서방 총사령관, 바르샤바 봉기 지원 촉구
  • 1944연합국 비판 뒤 총사령관직 해임, 캐나다로 이주

프랭크 잭 플레처

Frank Jack Fletcher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계 1885–1973 ○ 자연사

항공모함 시대의 작전 지휘관

그는 산호해에서 포트모르즈비 침공 함대를 물러나게 했다.

프랭크 잭 플레처는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쟁에서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한 미국 해군 제독이다. 그는 산호해에서 일본의 포트모르즈비 진격을 저지하고, 미드웨이에서는 전술 지휘관으로 일본 항공모함 네 척의 격침에 관여했다. 그의 신중한 항공모함 운용은 전력을 보존했지만, 과달카날에서 함대 철수를 둘러싼 논쟁도 남겼다.

상세 이력 보기
  • 1902–1906미 해군사관학교 생도
  • 1914베라크루스 작전 참가, 명예훈장 수훈
  • 1918–1919구축함 벤험·그리들리 함장
  • 1933–1936해군장관 보좌관
  • 1939–1941순양함 사단 지휘관, 소장
  • 1942.01–05제17기동부대 지휘관, 산호해 해전
  • 1942.06미드웨이 해전 전술 지휘관
  • 1942–1945알래스카 해역 미 해군 지휘관

라울 판 오버스트라텐

Raoul Van Overstraeten
외국 정치가 벨기에 벨기에인 1885–1977 ○ 자연사

전쟁 경보를 냉정하게 검토한 왕실 군사고문

메헬렌 문서를 검토한 뒤, 독일의 공격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경보를 방어 준비로 전환했다.

라울 판 오버스트라텐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 복무한 벨기에 장군으로, 군사사와 작전 분석에도 힘을 쏟았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레오폴드 3세의 군사고문으로서 메헬렌에서 확보한 독일 공격계획을 검토하고 경보를 현실적인 방어 조치로 바꾸는 데 관여했다. 그의 신중함은 정보의 진위를 따지면서도 독일의 공격 가능성을 과소평가하지 않는 실무적 판단으로 나타났다. 전후에는 왕실과 군의 기록을 바탕으로 벨기에의 전쟁정책을 저술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7벨기에 육군 장교로 임관
  • 1914리에주 전투, 할렌 전투, 앤트워프 포위전 및 해안 경주에 참전
  • 1916벨기에령 콩고 의용군으로 타보라 전투에 참전
  • 1933–1934기마포병 지휘관
  • 1934–1938국방장관 부관
  • 1938–1940육군대학장, 국왕의 군사고문
  • 1940–1945독일군의 전쟁포로
  • 1946–1977전후 군사사 저술가

존 고트

John Vereker
외국 정치가 영국 영국계 아일랜드인 1886–1946 ○ 자연사

됭케르크에서 철수를 택한 야전 원수

“여기 다시 간다, 전쟁을 향해 행진한다.”

존 고트는 제1차 세계대전의 용맹성과 제2차 세계대전의 지휘 판단이 함께 기억되는 영국 육군 원수였다. 1918년 됭노르 운하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도 공격을 이끈 공로로 빅토리아 십자장을 받았다. 프랑스 주둔 영국 원정군 사령관으로서 1940년 독일군의 포위와 대륙 방어선의 붕괴를 판단해 됭케르크 철수를 명령했고, 이 선택은 병력을 보존했지만 그의 야전 지휘 능력에 대한 논쟁을 남겼다. 이후 몰타 총독으로 포위된 섬의 방어를 지휘하며 명성을 회복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5척탄병 근위대 소위로 임관
  • 1914–1918서부전선 참전, 참모 및 대대 지휘
  • 1936–1937참모대학장
  • 1937–1939제국참모총장
  • 1939–1940프랑스 주둔 영국 원정군 총사령관
  • 1941–1942지브롤터 총독
  • 1942–1944몰타 총독 겸 총사령관
  • 1944–1945팔레스타인·트란스요르단 고등판무관

얀 가리그 마사리크

Jan Garrigue Masaryk
외국 정치가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886–1948 ✕ 체르닌 궁전에서 추락사

고트발트 정부에 남아 '합법성'을 부여하고 쿠데타 2주 만에 체르닌 궁전 아래에서 죽은 비공산당 외무장관

1947년 7월 모스크바에서 마셜 플랜 거부를 강요받고 돌아온 마사리크는 '나는 주권국의 장관으로 떠났다가 스탈린의 하인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 토마시 마사리크의 아들로, 1925년부터 13년간 주영 공사를 지내고 2차 대전 중 런던 망명정부 외무장관으로 BBC 방송을 통해 점령지 조국과 매주 연결된 상징이 되었다. 1947년 7월 스탈린에게 마셜 플랜 참여 거부를 강요받은 뒤 '나는 스탈린의 하인으로 돌아왔다'고 토로했으며, 1948년 2월 공산당 쿠데타 때 사임하지 않고 고트발트 정부의 유일한 비공산당 장관으로 남아 체제 이행에 형식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쿠데타 2주 후 체르닌 궁전에서 투신 또는 피살된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자살인지 타살인지 반세기 넘게 결론이 나지 않은 그의 죽음은 서방에 충격을 주어 마셜 플랜 의회 통과를 촉발시켰다.

상세 이력 보기
  • 1919–1922주미 체코슬로바키아 대리공사
  • 1922–1925외무장관 보좌관
  • 1925–1938주영 체코슬로바키아 전권공사
  • 1940–1945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 외무장관
  • 1945–1948체코슬로바키아 외무장관

프레더릭 린데만

Frederick Lindemann
외국 정치가 영국 영국계 1886–1957 ○ 자연사

전쟁 과학을 국가전략으로 밀어붙인 물리학자

그는 1942년 처칠에게 도시 폭격으로 노동계급 주거지를 무너뜨리자는 ‘Dehousing’ 논리를 제출했다.

프레더릭 린데만은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윈스턴 처칠의 핵심 과학 자문자로, 과학 연구를 국가의 전쟁 수행과 정책 결정에 직접 결합했다. 그는 옥스퍼드 클라렌던 연구소를 이끌며 항공기 스핀 회복과 물리화학을 연구했고, 전시에는 통계 부서를 조직해 전쟁 내각이 보급과 생산을 수치로 판단하도록 했다. 폭격의 효과와 민간 사기를 둘러싼 논쟁에서 그는 도시 지역 폭격을 강하게 지지했으며, 코번트리 이후에도 폭격 지속을 뒷받침하는 정책 논리를 제공했다. 그의 전문성은 처칠에게 신속한 판단의 도구를 주었지만, 계급주의적 인간관과 폭격 정책은 과학 지식이 국가 폭력에 편입될 때 생기는 책임의 문제를 드러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5왕립 항공기 공장 연구원, 항공기 스핀 회복 연구
  • 1919옥스퍼드대학교 실험철학 교수 및 클라렌던 연구소장
  • 1920왕립학회 회원 선출
  • 1940처칠 정부의 수석 과학 자문자, 통계 부서 S-Branch 조직
  • 1942페이마스터 제너럴, 도시 지역 폭격 정책 자문
  • 1951처칠 제2차 정부의 페이마스터 제너럴 및 과학 자문자

레이먼드 A. 스프루언스

Raymond Ames Spruance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인 1886–1969 ○ 자연사

미드웨이의 냉정한 항공전 지휘관

깊은 위기에서도 침착하고 결단력 있었으며, 모든 기회를 과감히 붙잡았다.

레이먼드 스프루언스는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선에서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 작전을 지휘한 제독이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을 거느린 제16기동부대를 지휘해 일본의 항공모함 네 척을 격침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신중한 판단과 침착한 지휘로 명성을 얻었으며, 전후에는 해군대학 총장과 필리핀 주재 대사를 지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7미국 해군사관학교 졸업
  • 1913–1922구축함 지휘 및 태평양 함대 복무
  • 1935–1938해군대학 교관
  • 1938–1939전함 미시시피 함장
  • 1942제16기동부대 지휘, 미드웨이 해전
  • 1943–1945중부 태평양군 및 제5함대 사령관
  • 1946–1948해군대학 총장
  • 1952–1955필리핀 주재 미국 대사
외국 정치가 일본 일본인 1887–1957 ○ 자연사 · 전후 정치 복귀

제국의 외교관에서 패전국의 서명자로

1945년 9월 2일, 그는 미주리호 갑판에서 천황과 일본 정부를 대표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마모루 시게미쓰는 일본 제국의 외교관이자 정치가로, 군부의 팽창을 경계하면서도 제국 국가의 외교를 수행했다. 그는 1932년 상하이에서 폭탄 공격으로 오른쪽 다리를 잃었고, 1945년에는 외무대신으로서 천황과 일본 정부를 대표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도쿄재판에서 침략전쟁과 포로 보호 의무와 관련해 금고 7년을 선고받았지만 1950년 가석방되었고, 전후 외무대신과 부총리로 복귀해 일본의 국제사회 재편입을 추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1외무성 입성
  • 1928–1930상하이 총영사
  • 1930–1933주중화민국 공사
  • 1936–1938주 소련 대사
  • 1938–1941주영 대사
  • 1943–1945외무대신 · 대동아대신
  • 1945항복 문서 일본 측 서명자
  • 1954–1956부총리 겸 외무대신